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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1개 · 1 / 1쪽 · 한 쪽 20개

인터넷 댓글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평가

설교자는 기독교 관련 글이 인터넷에 올라왔을 때 달리는 댓글을 유심히 살펴본다고 말합니다. 그 댓글들에는 '선한 영향력, 용서 말이 좋아서 선한 영향력이지'라는 반응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가장 용서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평가가 한결같이 담겨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이런 댓글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이 평가를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목사로서 어쩔 수 없이 격려의 말을 하지만, 그 말에 진심이 담기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성도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무거운 마음이 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이 댓글을 말과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습니다.

임만세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본문 발췌 보기

오늘 야고보서 본문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주제입니다. 믿음에 대해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믿음이 무엇일까요? 강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일까요? 여기 계신 분들은 참 신앙생활 오래 해 오신 분들인데, 얼마나 중요하면 성경은 곳곳에서 믿음의 이야기를 하고, 오늘 본문 역시 우리가 믿음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야고보서 2장의 본문의 믿음에 관한 내용은 특별히 이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군가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삶에서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말하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을 봤을 때, 구체적인 행동이 없을 때 우리는 헷갈리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결책인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14절을 먼저 한번 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는 것. 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많은 약속들과 은혜들을 믿는 그 사람. 저 믿음 있는 사람 맞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질문하겠죠. "어, 예수 믿는 사람 맞아? 그리스도인 맞아?" 무엇이 문제일까요? 야고보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거예요. 진정성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은 우리의 진정성을 담아내기에 너무나 부족합니다. 말보다 조금 나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행동이죠. 어떤 진심을 진정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래서 증명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울면서 호소할 수도 있죠.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는 일기장에 적어 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그 진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보다 나은 방법은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쭉 보는 것일 겁니다.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했는가.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의 진정성을 알 수 있겠죠.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 사람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이 아닐까? 야고보는 15절 16절에 이러한 예를 하나 듭니다. 우리 한번 읽어 볼까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덮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형제나 자매가 있습니다. 너무 추운데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굶어서 배를 움켜쥐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참 딱하고 불쌍해요. 그래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이 그 형제 자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 너무 춥죠? 너무 배고프죠? 빨리 평안히 돌아가세요. 가서 따뜻하게 하시고, 먹을 것도 좀 드시고."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따뜻하게 할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인데 말은 좋죠. 말만 놓고 보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이었죠? 내 외투를 벗어주는 일. 나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형제를 사랑해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얻고 함께 다스리는 상속자인데, 말만 하는 그 사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 사람에게도 유익하지 않고, 이 형제 자매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점은 뭐냐면, 이 대상이 형제 자매라는 거예요. 한 분도 안 본 외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형제라고 부르고 자매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이런 방식으로 대한 것이죠. 이런 믿음 쓸모 있습니까? 야고보는 그것이 너의 구원에 유익이 있겠는가? 그것을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겠는가라는 매우 심각한 질문까지 던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마음은 참 불편하더라고요. 왜 그러냐면 제가 이런 말 참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어떤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아, 너무 힘든 일 당하셨습니다. 기도할게요." 어떤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아, 그 문제 너무 어려우시죠? 잘 해결될 겁니다." 그렇게 말로만 말로만 할 때가 참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말은 유익합니다. 진심을 담아 말할 때 위로를 받게 되죠. 그것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우리는 말로만 진실함은 없는 채로, 진정성은 없는 채로 말로만 습관처럼 기도하겠습니다. "잘 될 겁니다." 분명히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무언가를 희생하고 나의 무언가를 주면서 그 사람을 돌보고 세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진짜 믿음이고 정체성인데, 우리는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서 이율배반적으로 말로는 참 잘하지만, 말로는 너무너무 청산유주처럼 이야기하지만, 정말 우리의 진심이 행동으로 결려진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굉장히 하나님께 모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 어떨 때 그렇죠?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지 않은 일을 해놓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방식으로 죄가 섞여 있는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해놓고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진정성이 담보가 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 누가 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많이 겪지 않습니까? 우리의 말에, 우리의 행동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믿음을 뭐라고 이야기하죠? 우리 17절 한번 읽어 볼까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까? 한 설문에 따르면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났는지 설문 조사했을 때, 늘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답이 뭐냐면, 목회자 혹은 성도들이 그 삶과 믿음이 그 삶과 입술의 고백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라고 꼽습니다. 말은 너무 그럴 듯한데, 설교는 너무 그럴 듯한데, 고백은 너무 그럴 듯한데, 실제로 만나고 교제했을 때 그 말과 너무나 반대되는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죠. 그 말이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청년들은 상처받습니다. 말이 멋있으면 멋있을수록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간디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죠. "저는 예수님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님을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국 교회의 비극, 우리는 많은 수많은 예배와 참 좋은 설교와 너무나 멋진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터넷을 보면 기독교 관련 글이 올라왔을 때 그 댓글들을 유심히 봐요. 그런데 한결같이 그런 이야기 합니다. "선한 영향력, 용서 말이 좋아서 선한 영향력이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가장 용서할 용서하지 않는 집단이다. 가장 이기적인 집단이다. 이런 댓글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동시에 그것이 너무나 현실이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얘기입니다. 제 얘기. 제가 목회를 하면서 목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좋은 말들, 격려의 말들을 하지만, 제 진심이 묻어나지 않고, 제 말이 믿음이 되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제가 목양하고 담당하는 우리 성도들이 받을 상처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무거운 말씀이에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 다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붙들고 고민하길 원하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동과 삶의 내용들이 나와야 그것이 좋은 믿음이죠. 우리 18절 19절 한번 읽어 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내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 하리라.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러분,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이 믿음을 이렇게 꺼내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의심하고 기독교를 의심하는 이 세대에서 우리가 정말 해야 될 일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일이죠.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말은 너무나 귀하지만, 그 말이 진짜인 것을, 진정성이 담겨 있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말만 하면, 우리의 신앙의 수준은 귀신과 같은 수준이라는 거예요. 귀신들도 압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떠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행위의 불일치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원인을 알아야겠죠. 우리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탄식합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여기서 허탄하다라는 말은 우리 전도서에서 많이 본 단어, 헛되다, 헛되다 있죠. 예. 공허하다, 비어 있다. 헛되다, 쓸모 없다. 이런 뜻입니다. 허탄한 사람아. 그런데 그다음 절이 중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할 때, 이 헛것은요. 앞에 있는 비어 있다. 케노스랑은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아르게라는 단어인데, 행함이라는 단어가 에르곤. 그리고 복수는 에르가이거든요. 행함이라는 단어에 부정을 붙어 있는 단어예요. 그래서 아르게라는 단어입니다. 아르게.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일하지 않는, 그래서 게으른, 활동하지 않는 이런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