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번 먹자'는 인사에 빗댄 말뿐인 기도
설교자는 한국 사람들이 대화를 마무리할 때 습관처럼 '밥 한번 먹자'고 인사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본문을 풀어 갑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대화를 끝낼 때 건네는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서로의 삶과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 공동체에서 이 말은 늘 마무리 인사처럼 오갑니다. 설교자는 야고보서 2장 15절과 16절을 읽으며,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 앞에서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 건네고 손에 있는 빵과 옷은 내어 주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 인사는 축복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궁핍한 이웃을 외면하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자신에게도 질문이 떠올랐다고 고백합니다. 정말 기도하겠다고 말한 뒤에 기도하고 있는지, 나아가 그 형편에 꼭 필요한 것을 최선으로 돕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공동체를 위한 간구임을 짚고,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는 고린도서 8장 9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기도에서 멈추지 않고 기꺼이 나누는 실천의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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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성경의 순서에 따라서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을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매일 새벽을 깨워서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 나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매일의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 분주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믿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를 나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아닙니까?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다는 그 역사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며, 그 믿음이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이 믿음에 더하여 한 가지 사실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고백이, 이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우리의 믿음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가? 야고보는 십자가를 믿는 믿음 자체가 부족하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믿음의 고백이 진짜라면, 그 믿음의 고백은 살아서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은 짧은 단락입니다만, 이 단락 안에서 야고보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절에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절도 볼까요?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6절도요.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다라고 야고보서에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이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몸이 숨을 쉬듯이, 살아 있는 믿음은 살아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이 믿음의 숨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우리의 믿음의 숨은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인가? 이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살펴보고 우리의 삶의 자리로 함께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말뿐인 믿음입니다. 우리 15절의 말씀을 함께 볼까요? 15절의 말씀을 보니까요. 이러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형제와 자매가 등장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입을 옷이 없습니다. 또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이것을 채울 수 없는 변치 않은 형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이 형편이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는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말씀에서는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여서 이렇게 행동을 합니다. 16절에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여기서 이 평안히 가라라는 말은 헤어질 때에 건네는 인사입니다. 구약의 샬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 표현이죠. 그런데 오늘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궁핍한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떠날 때에 샬롬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사실 축복보다는 모욕에 가깝습니다. 이어서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축복의 말이죠. 오늘 이 사람은 이 형편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배를 채우시기를 원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축복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축복입니까? 그런데 오늘 이 말뿐인 자는 정작 자신의 손에 있는 빵은, 자신의 손에 있는 옷은 이 사람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저 경건한 말로, 그럴듯한 말로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고 자신을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그저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나라의 한 표현이 떠올랐는데요. 밥 한번 먹자라는 표현입니다. 한국의 전형적인 인사죠. 우리가 이렇게 전화를 하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질쯤에 혹은 전화를 끊을 조금 어색하니까 그 대화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래요. 우리 밥 한번 먹읍시다. 나중에 밥 한번 먹읍시다. 이렇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항상 대화의 마무리쯤에는 서로의 기도 제목을 묻곤 하죠. 그리고 마무리에는 항상 우리가 어떻게 얘기합니까? 그래요.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이 제가 질문으로 떠오르더라고요. 정말로 나는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형편에 정말 필요한 것을 내가 최선으로 돕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과 겹치는 기도를 하나님께 고백을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그 기도를 나에게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니까요. 늘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향한 간구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향하여서 필요한 간구를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샬롬, 평안을 빌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의 평안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고린도서 8장 9절의 말씀, 우리 함께 다 같이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유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함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의 갈급함 그 갈망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을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은혜를 받은 것이 우리가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 아닙니까? 이 믿음이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제도 그렇고 많은 공동체와 지체를 만날 때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다면, 오늘 이 시간 이 자리 박차고 떠나기 전 그 영혼과 공동체를 위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심으로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우리의 삶을 기꺼이 주는 그 실천의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아는 것뿐인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할 텐데요. 이어서 18절의 말씀을 보면요. 이 18절의 말씀은 신약을 통틀어서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시작을 하는데요. 여기서 이 어떤 사람이 한 말이 어디까지를 나타내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인용 부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혁 계정에서 번역한 번역을 살려서 번역을 해 보았는데요.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번역 의역본을 가지고 왔는데요. 요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행함 없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이 있다. 너는 행함이 없으니 내 믿음을 보일 수 없지만 나는 행함이 있어서 내 믿음을 볼 수 있다. 요점은 이겁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믿음은 앞서 말했듯 삶으로 드러난다라는 것을 야고보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19절은 충격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절의 말씀 보면요.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의 고백은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이 날마다 고백했던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이 항상 고백했던 정통적인 신앙의 방식이었죠. 그런데 야고보서는 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는도다. 근데 여기서 말하는 잘하는도다는 정말로 칭찬의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겁니다. 잘한다. 야고보가 이렇게 어떻게 보면 빈정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귀신들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도 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믿고 몸을 던다. 여기서 던은 털이 곤두 정도로 몸설이 친다라는 뜻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과 그리스도인의 극명한 차이는 무엇일까요? 귀신은 하나님을 알기만 할 뿐, 하나님 앞에서 떨기만 할 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안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울 수도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자 하는 열망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교리를 알고 있고요. 성경의 말씀을 매일마다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식만이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이어진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