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의 기원으로 소개된 켈트족 사윈 축제
설교자는 10월 31일이 오늘날 할로윈으로 알려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할로윈이라는 말의 어원부터 짚습니다. '할로윈'은 '모든 성인의 날(All Hallow's Day)'의 전날을 가리키는 말로, 'Hallow'에 거룩함과 성인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할로윈의 뿌리는 고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 켈트족의 '사윈 축제'에 있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11월 1일을 정월 초하루로 여겼고, 10월 31일에 1년 동안 땅을 떠돌던 죽은 자의 혼이 머물 몸을 찾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이 자기 몸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귀신 분장을 하고 방을 춥게 하는 풍습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후 로마 가톨릭이 이 지역에 선교하면서 기존 날짜를 옮겨 11월 1일을 만성절로 지켰다는 기록이 있지만, 설교자는 이것이 여러 설이 얽힌 가장 유력한 설명이라고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죽은 자의 영혼이 떠돈다고 믿은 켈트족의 미신과 성인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로마 가톨릭의 행태가 모두 죽은 자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같은 사고방식에서 나왔다고 적용합니다.
설교 내 1–2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아 이렇게 남서울교회에 오게 되어 여러분과 함께 복음에 대해, 그리고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해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고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남서울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교회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을 때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신학의 충실한 목회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화종부 목사님은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시지만, 저희 또래에서 늘 존경받고 또 본받고 싶었던 목회자 가운데 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저와 함께 공부했던 많은 동료들이 실제로 남서울교회에 와서 사역을 배우고 오랫동안 섬기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저를 처음 보셨겠지만, 저는 남서울교회를 한 번도 낯선 교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도 제 주변에서 좋은 교회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는 분이 계시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남서울교회를 추천해 왔습니다. 제 친한 동료 교수님도 따님에게 추천하셔서 등록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비록 이 교회의 성도는 아니지만, 남서울교회는 오래 전부터 제가 마음으로 친숙하게 여기고 늘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아 온 교회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시원선 목사님과 남서울교회 성도 여러분들을 이렇게 함께 만나뵙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한 교회가 오랜 시간 건강한 복음 위에 세워지고, 새로운 목회적 섬김 가운데 그 복음을 계속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특별히 오늘 종교개혁의 신앙을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뜻깊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2024년 7월부터 2년을 넘게 화종부 목사님께서는 로마서 말씀을 강해하셨습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 그 설교를 들어왔고, 그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종교개혁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돌아가야 할 성경이 바로 이 로마서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죄와 구원의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씨름하다가 마침내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7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지난 시간 동안 강단을 통해 계속 들어오셨던 그 복음이 약 500년 전, 정확히는 509년 전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시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게 고백하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진리가 얼마나 놀랍고 귀한 복음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특강의 제목은 보시는 것처럼 ‘왜 하필 10월 31일이었을까’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면제부를 반박하는 95계조 논문을 발표한 사건을 우리는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출발점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필 10월 31일이었을까요? 왜 마르틴 루터는 다른 날짜가 아닌 10월 31일을 택했을까요? 그 날짜에는 당시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과 구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고, 마지막에 다시 로마서 말씀으로 돌아와서 종교개혁이 다시 발견했던 복음의 본질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그림처럼, 오늘날 10월 31일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네, 할로윈이죠. 많은 사람들이 할로윈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할로윈이 원래 무슨 용어인지 아십니까? 이 말을 오늘날의 용어로 바꾸면 ‘만성절 전야’가 됩니다. ‘만성절 전야’. 영어로 ‘All Saints’ Day’를 ‘All Hallow’s Day’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들 주기도문을 영어로 외워 보시는 기억이 있는 분이라면 ‘Hallow’ 단어가 익숙하실 거예요.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그죠? ‘Hallow’란 말에는 ‘Holy’라는 어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하다’는 말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성인’이라는 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All Hallow’s Day’가 되면 ‘모든 성인의 날’이고요. ‘모든 성일의 날’의 전날은 바로 우리가 아는 식으로 말하면 ‘할로우 이브’가 되겠죠. ‘Hallow’란 말이 스코틀랜드식으로 발음되다가 조금 변형되면서 ‘할로윈’이 되는 것입니다. 그니까 ‘모든 성인의 날’ 전날이 ‘할로윈’을 가르키는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는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닝’의 줄임말이거든요. 그런데 왜 ‘크리스마스 이브닝’을 우리가 ‘크리스마스 전날’이라고 부를까요? 우리가 ‘크리스마스 2부’라는 용어를 쓰게 된 그 배경에는 독특한 유대-기독교적인 시간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우리가 근대 표준체를 쓰기 때문에 자정에서부터 하루가 시작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정했을까요? 여러분들은 언제부터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추측을 해 보세요? 성경 창세기 1장 5절을 보면 힌트가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유대-기독교 문화에서 하루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해가지고 나서, 일몰 후부터 그 다음 일몰 때까지를 기준으로 하루로 삼았던 것이죠.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킬 때 금요일 저녁 해 지는 다음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를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표현은 사실은 ‘크리스마스 저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기독교 문화권에서 축일을 지킬 때는 그 전날 저녁부터 하루 시작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기념해서 미사와 예배를 드려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올 홀로스데이’ 이전 ‘할로윈’이 중요한 날이 되었을까요? 오늘날의 ‘할로윈’이라고 하는 풍습은 사실은 매우 미신적인 풍습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귀신 복장을 하고 ‘트릭 오어 트리트’를 외치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축제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할로윈’이라고 하는 축제는 ‘사윈 축제’라고 하는 고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의 켈트족에서 지키던 하나의 풍습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11월 1일을 정월 초하루라고 생각했고, 10월 30일을 그 해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 사람들이 생각했던 여러 미신적 생각 중 하나는 죽은 사람의 혼이 곧바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1년 동안 땅을 떠돌다가 가게 되는데, 한 해의 마지막 해인 10월 31일에 그들이 머물 몸을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신이 내 몸에는 들어오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도 너희와 똑같은 귀신이야’라고 하면서 귀신 분장을 하고, 방을 춥게 하면서 지냈던 풍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로마 가톨릭이 선교를 하고 들어가면서, 그 당시에 로마 가톨릭의 만성절이 원래 5월 13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5월 13일이었던 만성절을 선교적 목적으로 동화시키고, 모든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날이나 모든 성일을 기념한 날의 접점을 가지고 11월 1일을 만성절로 정해서 지켰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역사적으로 모든 것이 정확하게 고정된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설이 얽히면서 가장 유력한 설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할로윈 데이’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떠돈다는 미신을 믿었던 고대 켈트족 사람들이나, 소위 ‘성인’이라고 부르는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고 그들을 공경하고 그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로마 가톨릭의 행태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똑같이 죽은 자들이 자신들의 현재적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성인을 중요시 여겼을까요? 사실 루터가 있었던 비텐베르크의 그 성개조 논쟁이 붙었던 그 성의 교회 이름은 ‘오센치’였습니다. ‘모든 성인의 교회’, ‘만성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이 날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을 수호해 주는 수호성인에게 기도하고 기념하고 그들을 공경하기 위해 모든 마을의 사람들이 나아와서 축제에 참여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날을 ‘만성절 전야’ 때 95계조 반박문을 붙인 것이라고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들에게 성인은 중요했을까요? 여러분들 주변에 가톨릭 신자들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례명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죠. 처음 들어보는 성인들도 있고, 다양한 성인들, 머리 뒤에 둥근 헤일로가 있는 사람들을 성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요. 이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가톨릭의 독특한 죄용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제가 가톨릭 신문에서 가지고 온 건데요. 이건 그 당시 정진석 주교(이제 돌아가셨음)가 교회법 전공자로서 교회법을 해설하면서 ‘고해성사를 받으려면 다섯 가지 요소를 채워야 한다’는 주제로 기사를 쓴 것입니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심령을 통해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흘리신 피와 대신 당하신 고통,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고,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 개인이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죄용서 요건을 보면, 첫 번째는 성찰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살피는 것이죠. 두 번째는 자신의 양심을 살펴보니 죄를 지은 것이 있어서 ‘내가 정말 죄를 지었구나’ 하는 진정한 통회와 뉘우침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이제 내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 생길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고해 신부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고해 신부에게 자신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고백을 듣고 고해 신부는 "너가 너의 죄가 이러하니,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고 바로 마무리가 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속입니다. 보속이란 보상하는 속죄 같은 개념입니다. 뒤에 PPT가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범죄로 인한 보상하는 선행과 죄책에 따른 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독특한 가톨릭의 죄와 벌에 대한 개념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이 주장하기로는, 용서는 죄는 없애 주지만 그 결과는 바꿔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운전을 하다가 앞차를 박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런데 앞차 주인이 인자하게 내려와서 "괜찮아요, 내가 다 용서해 줄게요"라고 한다면, 사실 그걸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보험사에 전화해서 차량 피해를 보상해 줘야 하고, 병원비도 해결해야 합니다. 바로 이 개념을 빌리는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피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갚기 위해 추가적인 실행이 필요하고, 이를 보속이라고 합니다.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고해 신부가 정해 줍니다. 가벼운 죄라면 교회 청소를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거나 성경 구절을 외우는 식의 보속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심각할수록 보속도 더 무거워집니다. 문제는 보속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순결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오히려 더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이 오히려 작은 흠집들을 더 큰 죄로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니라"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이전에는 큰 죄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양심을 짓누르게 됩니다. 보속을 행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모든 보속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동시에 보속을 이행하는 중에 또 새로운 죄가 마음속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정도 죄를 저지르고 보속을 받았는데, 저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더한 삶을 살면서도 고해 신부를 찾아가지도 않고 보속도 하지 않네"라고 생각하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게 되면, 다시 누군가를 미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