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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3개 · 1 / 1쪽 · 한 쪽 20개

밤에 예수를 찾아간 니고데모

설교자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장면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본문을 함께 읽습니다. 설교자는 오늘 본문의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씀과 이 대목이 비슷한 구조라고 연결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뜻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스스로 거듭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고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를 낮출 수도, 교만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며, 성령의 역사로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이 예화는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낮아질 수 없고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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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는 이미 죄악이 가득하고, 실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놓여 있는데, 화를 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실족시키는 일을 내가 멈출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은 가능할까요?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서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니구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죠.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의 본문, "그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비슷한 문장이죠.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또 남을 없신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자기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 낮출 수도 없고, 교만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작은 자가 중요합니다. 왜냐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자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그다음 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10절을 제가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자 중에 하나도 없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옵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돌보시고 있는지 지금 말씀하고 계시죠. 그들의 천사가 하나님을 항상 보고 있고, 그리고 보고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는 작은 자 개개인의 수천사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의 천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천사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니까 그들의 천사, 그들에게 속한 천사, 이것을 설명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혼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네. 이 말씀을 보니까, 그들을 위해 섬기는 천사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보고를 합니다. 누군가 그 작은 자들을 보고, 그들을 돕고, 그리고 하나님께 보고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보고가 된다는 거죠. 특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없신 여기면 보고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그다음 9절에 나옵니다. 이른 양의 비유.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비유죠. 100마리의 양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을 때, 그 목자는 아홉 아홉 마리를 그냥 산에 놔두고,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그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찾았을 때, 길을 잃지 아니한 아홉 마리의 양보다 그 찾은 길 잃었던 그 양을 찾은 것을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작은 자, 단 한 명이라도 실족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거죠.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같은 양이며, 쥐가 높거나 낮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소중한 한 마리 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자가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을 잃은 그 양이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선을 좀 바꿔서 제자들에게로 한번 관심을 가져 보겠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과 34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가보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니라." 네.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이렇게 다투었다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죠. 근데 왜 이런 다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사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을 통해서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 고백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겠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죄송합니다.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17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있죠. 이때도 예수님은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이 세 제자만 목도하게 됩니다. 이 또한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죠. 다른 아홉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예수님에게 소중하게 되어지는가라는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 시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제자들이 질문하기 전에 두 번 정도 예수님이 고난받을 것과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을 거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는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누가 크냐? 나는 어떤 위치에, 누가 어디에 서열에, 누가 클 것인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죠.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이 조금 다르다는 거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과 선지자의 그 선지서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성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그 개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죠? 제자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왕이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는 지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명기 17장 20절을 보면, 왕이 마음을 높여서 자기 형제를 위해 교만하게 굴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 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 18장의 그 말씀과 매우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조차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이미 모세의 오경을 알고 있는 이 제자들은 천국에서 더 누가 높은 것인가 여기에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제자들의 마음속에 교만이 지금 예수님에게 질문하도록 이끌었단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그 사회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이들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가 오시고,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실 거다.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부활 이후에도 남아 있던 기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을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죽음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이들은 고난 당하는 메시아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순한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신들이 익숙했던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의 방향 자체를 사실 바꾸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생각에서 돌이켜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그 태도는 남을 낮추려는 것이고, 남을 무시하거나 없신 여기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반대되는 행동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더 큰가 관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오히려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천국의 개념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바로 나의 삶에서 그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이 공동체에서 낮은 자가 돼야 됩니다. 그리고 남을 없신 여기면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바울의 고백

설교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바울 고백을 인용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 안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백이 나를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서는 자존심이나 자의식, 자기 주장이나 자기 철학을 찾을 수 없고, 그의 생각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였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없애는 것이 곧 나를 잃는 것은 아니며, 거듭나고 변화된 새로운 내가 생긴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서 부부 싸움에서 드러나는 자존심, 즉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결국 자기 문제라고 짚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런 썩은 자존심과 옛사람의 자아를 붙들지 말고, 그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못 박히기를 축원하며 권면을 마무리했습니다.

하용조 · 2026-10-19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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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중보 기도를 하셨는데, 제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중보 기도의 하나의 특징입니다. 사실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병든 사람을 도울 수 없고, 내가 은혜를 받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어떻게 끼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먼저 여러분들이 은혜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차고 넘쳐야 남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다른 사람한테 신세지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십자가가 내 앞에 있는데,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이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영화롭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중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1절과 5절에 두 번 나타나는데, "하나님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주시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5절에서 좀 더 발전된 기도를 하십니다.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누렸던 그 영화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 하늘의 권세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셨는데, 그 권세로 자기 이익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데 사용하게 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믿음이 생겨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고 편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좁은 길입니다. 욕 먹는 길이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길입니다. 선교사로 사람들이 떠날 때, "왜 그 좋은 직장을 놔두고, 왜 그 편한 생활을 놔두고 그렇게 고생스러운 길을 스스로 가느냐?"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부모님들은 그렇습니다. 자기 자식이 고생하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못 가게 합니다. 저희 교회 선교사님 한 분이 10년 전에 의사 선생님이 모처 선교지로 갔을 때, 주변에서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왜 하필 당신이 가야 되냐? 당신이 의사로서 돈 많이 벌어서 교회 장로로 섬기면 됐지, 왜 당신이 거길 가야 하느냐?"라고 말하며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꼭 이렇게 예수를 믿어야 되느냐?" "편하고 쉬운 길도 얼마 있지 않느냐?" "예수 믿지 말자는 게 아니다. 좀 폼나게 믿으면 안 좋겠는가?" "명생을 내고 믿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이런 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에서 보면 알 거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꾸 십자가를 피해 가려고 합니다. 십자가를 내려놓고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이런 마음이 있으셨어요. "이 십자가를 내가 꼭 져야 합니까?" 다 지기로 해 놓고 기도까지 다 끝나놓고도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피할 방법은 없습니까?" 얼마나 그 기도가 힘이 들었든지, 땀이 피가 될 정도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해 주십시오." "이 길을 계속 가게 해 주십시오." 고통스러운 길, 어려운 길, 힘든 길이지만, 이 길을 계속 가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는 것은, 유혹과 시험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을 피하지 않고 계속 이 길을 가도록 요청하는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이런 시험이 있는 걸 압니다. 이런 유혹이 있어요. 좀 쉬운 길을 가고, 편한 길을 가고, 어 좀 예수를 믿어도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꼭 찬물 산물에 내 손을 담궈야 되느냐, 시공창에 내 발을 넣어야 되느냐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셨어요. 그리고 그 기도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두 번째,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또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아주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준을 따라오지를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깨달음이 없는 미숙한 사람들이었고, 실수 투성이었고, 허점 투성이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할 때까지도 철이 안 났습니다. 참 어려운 건, 철 안난 사람하고 사는 게 참 어렵습니다. 부부도요. 철 안난 남편, 또 철 안난 아내하고 사는 게 참 어렵고요. 철 안난 자녀들하고 사는 거 참 쉽지 않습니다. 버릴 수도 없고, 그만둘 수도 없고,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열심히 따라다니고, 죽기까지 하겠다고 하지만은, 보면 아직도 미숙하고, 뭘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제자들을 끼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철 안난 사람하고 끼고 사는 사람은 용기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들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그들이 변하고 새로워지고 알아듣기를 원했습니다. 설명을 또 하고 설명을 또 하고,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또 하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6절에 보면, 신통치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대체 어떤 존재냐,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 먼저 예수님이 이 내용을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6절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내가 아버지와 아들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소위 말하면 철라지 않은, 신통치 않은, 항상 이상한 짓들만 하는 그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6절에 보면, 첫째, 제자란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제자들이에요. 여기 보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안 들지만, 이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내 사람이다. 이 자식이 마음에 안 들지만, 내 자식이라는 걸 알 때, 우리는 자식을 위해서 눈물도 흘리고 고통을 겪지만, 이 자식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의 첫 번째 생각은,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라고 했던 것이죠. 두 번째,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람이지만, 내게 속하기 전에 하나님이 택해서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었다라고 예수님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 온데 내게 주셨으며" 이렇게 됐습니다. 이 내게 주셨는데, 나하고 같이 사는데, 근데 사실은 이 사람이 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사람을 선택해서 나한테 보내 준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이게 결혼입니다, 여러분. 남편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에요. 현재는 나하고 같이 사는데, 사실은 이 사람이 하나님이 택해서 나한테 보내 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게 결혼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에 속해 있지만, 이 자녀는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불러서 나한테 맡겨 주셨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게 예수님의 사고 방식이에요. 이 제자들은 내 것인데, 나한테 보내 주었는데,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고,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었는데, 나한테 이 사람을 맡겨 주신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정체성이 정의를 먼저 확실하게 하면, 시험 안 받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 제자들이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 주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깨우쳤다는 것입니다. 여기 제자 훈련의 요체입니다. 제자 훈련이란 뭐냐면,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사람을 양육시키는 것을 제자 훈련이라고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7절 시작.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신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사복음서를 다 보시고, 신약을 다 보시고,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분이 연구를 다 해 보세요. 자기를 위해서 말하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능력은 전부 하나님에게로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뭐냐면, 예수 믿으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하느냐? 우리들의 문제는 모든 초점이 나에게로 집중돼 있어요. 내 생각, 내 주장, 내 의견, 내 비전, 내 문제예요. 이게 내니까 갈등이 많은 겁니다. 예수 믿고 거듭났다고 하는 뜻은 뭐냐? 옛사람인 나는 죽고, 새 사람인 내가 다시 태어난 것을 거듭났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게 어떤 사람이 죽긴 죽었는데, 아직 덜 죽었으면 문제예요. 예. 죽지 않고 기절했어요. 애들. 그래서 깨어나면 또 내가 있는 거예요. 또 내가 옛 사람이 또 있는 거예요. 이게 죽으면 간단한 문제를, 이게 살아 있어서 내가 자꾸 살아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가 느낀 건 뭐냐면, 내 안에 있는 옛사람 내가 빠졌다는 거예요. 죽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하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 비유한 성령의 역사

설교자는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예로 들어 성령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아기가 나올 때 엄마가 힘을 주어 낳는 것처럼, 성령께서 힘을 주어 영적인 존재를 태어나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사람의 노력보다 성령께서 한 사람을 그 세계로 밀어 넣으셔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설교자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이 아기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던 법과 전통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의 역사를 믿고 기대하며 어린아이처럼 배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새 출발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적용도 덧붙였습니다.

이바울 · 2026-10-19

설교 내 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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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고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사람의 나라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나라죠. 그런 나라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리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주는 물은 여기서 여기서 이 물이라. 물리적 물이지만 비유한다면, 야곱이 주는 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주는 물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사람이 주는 칭찬, 인정, 사랑 속에서 결국 사람들은 서로를 요구하죠. 서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이해받기를 바라지만, 사람의 것을 받으면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사람의 칭찬을 받기 시작하면, 칭찬은 좋긴 하지만 그것에 매여 버립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정을 먹으면 그 하나로 충분합니다. 다른 걸 필요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의 칭찬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예수님의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 사람의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어떤 사회가 있을까요? 사람에게 매여 있으면 결국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정 속에 살아가면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각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가 큽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요한복음 5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 되었음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가 고치겠느냐? 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때에 나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먼저 내려가라. 베데스다 못가에서는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나옵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경쟁이 필수입니다. 예전에 한때 포요가 있었는데,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고치셨나요? 제일 꼴찌에 있는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꼴찌가 1등이 되게 한 것입니다. 꼴찌의 반란이라는 말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가장 뒤쳐진 사람을 오히려 가장 앞세울 수 있는 세계입니다. 준비는 많이 했지만 다다라지 못한 사람도, 내놓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는 다릅니다. 사람이 사람의 나라에서만 살면, 밀리기 시작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자기 존재와 가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무가치한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38년 된 병자처럼 가장 낮게 보이는 자라도 가장 먼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각자가 자기 삶을 살도록 해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성령이 주체가 되어 성령의 존재를 낳는 것입니다. 아기가 나올 때 누가 나옵니까? 엄마가 나와야 합니다. 엄마가 힘을 주고 아기를 낳습니다. 성령이 힘을 주어 영적인 존재를 태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이 노력하기보다는, 성령이 한 사람을 하나님의 세계로 밀어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믿고 기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니고데모에게는 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법과 전통을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살아온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태어나면 그것들은 모두 없어지고, 완전히 새로 출발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로 완전히 새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세계를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림을 받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항상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새롭게 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그대로 고집하거나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항상 아기처럼, 모르는 것을 알고 배우는 태도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출발점입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모험 소설이나 영화처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가던 길로 가는지, 모험을 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복음 3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나라와 땅의 나라가 있지만, 결국 사람의 나라는 경쟁 사회이고, 1등만 기억하는 세계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뒤쳐지는 그런 세계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가장 뒤쳐진 자가 가장 먼저 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세계와 땅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 영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시 찾아오시고, 성령이 주체가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역사를 이루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풍성하며 생명을 얻으며 사랑을 알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은혜가 풍성하도록 축복하여 주소서. 각 사람에게 항상 말씀이 임하시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