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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5개 · 1 / 1쪽 · 한 쪽 20개

밤에 예수를 찾아간 니고데모

설교자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장면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본문을 함께 읽습니다. 설교자는 오늘 본문의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씀과 이 대목이 비슷한 구조라고 연결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뜻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스스로 거듭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고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를 낮출 수도, 교만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며, 성령의 역사로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이 예화는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낮아질 수 없고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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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는 이미 죄악이 가득하고, 실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놓여 있는데, 화를 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실족시키는 일을 내가 멈출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은 가능할까요?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서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니구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죠.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의 본문, "그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비슷한 문장이죠.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또 남을 없신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자기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 낮출 수도 없고, 교만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작은 자가 중요합니다. 왜냐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자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그다음 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10절을 제가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자 중에 하나도 없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옵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돌보시고 있는지 지금 말씀하고 계시죠. 그들의 천사가 하나님을 항상 보고 있고, 그리고 보고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는 작은 자 개개인의 수천사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의 천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천사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니까 그들의 천사, 그들에게 속한 천사, 이것을 설명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혼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네. 이 말씀을 보니까, 그들을 위해 섬기는 천사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보고를 합니다. 누군가 그 작은 자들을 보고, 그들을 돕고, 그리고 하나님께 보고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보고가 된다는 거죠. 특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없신 여기면 보고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그다음 9절에 나옵니다. 이른 양의 비유.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비유죠. 100마리의 양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을 때, 그 목자는 아홉 아홉 마리를 그냥 산에 놔두고,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그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찾았을 때, 길을 잃지 아니한 아홉 마리의 양보다 그 찾은 길 잃었던 그 양을 찾은 것을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작은 자, 단 한 명이라도 실족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거죠.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같은 양이며, 쥐가 높거나 낮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소중한 한 마리 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자가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을 잃은 그 양이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선을 좀 바꿔서 제자들에게로 한번 관심을 가져 보겠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과 34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가보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니라." 네.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이렇게 다투었다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죠. 근데 왜 이런 다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사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을 통해서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 고백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겠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죄송합니다.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17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있죠. 이때도 예수님은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이 세 제자만 목도하게 됩니다. 이 또한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죠. 다른 아홉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예수님에게 소중하게 되어지는가라는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 시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제자들이 질문하기 전에 두 번 정도 예수님이 고난받을 것과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을 거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는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누가 크냐? 나는 어떤 위치에, 누가 어디에 서열에, 누가 클 것인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죠.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이 조금 다르다는 거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과 선지자의 그 선지서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성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그 개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죠? 제자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왕이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는 지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명기 17장 20절을 보면, 왕이 마음을 높여서 자기 형제를 위해 교만하게 굴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 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 18장의 그 말씀과 매우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조차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이미 모세의 오경을 알고 있는 이 제자들은 천국에서 더 누가 높은 것인가 여기에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제자들의 마음속에 교만이 지금 예수님에게 질문하도록 이끌었단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그 사회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이들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가 오시고,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실 거다.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부활 이후에도 남아 있던 기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을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죽음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이들은 고난 당하는 메시아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순한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신들이 익숙했던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의 방향 자체를 사실 바꾸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생각에서 돌이켜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그 태도는 남을 낮추려는 것이고, 남을 무시하거나 없신 여기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반대되는 행동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더 큰가 관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오히려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천국의 개념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바로 나의 삶에서 그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이 공동체에서 낮은 자가 돼야 됩니다. 그리고 남을 없신 여기면 안 됩니다.

간디의 그리스도 사랑과 기독교 거부

설교자는 간디를 예로 들며, 간디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도 기독교인은 싫어했다고 말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간디는 예수님처럼 살고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성령의 영향 아래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그런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삶의 원칙이나 규율을 지키는 일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영적으로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돌 같은 마음을 떼어내고 살 같은 마음을 심는 변화가 영적 형성의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그는 찰스 셰일론의 '예수라면 무엇을 할까?'와 비슷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경적 주제와 연결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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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생활 원칙'에 대해 다루는 글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 원칙들을 세울 때 종종 세속적인 인물들, 예를 들어 건강 트레이너나 유사 인물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세속적인 건강 트레이너들이 좋은 조언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1만 걸음을 걷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주에 누군가가 저에게 154kg의 데드리프트를 성공했다고 문자로 알려왔습니다. 네, 정말 인상 깊습니다. 정말 힘이 세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때때로 이러한 원칙들이 종합적이라는 이유로 혼동될 수 있습니다. 매튜, 당신은 삶 속에 분명히 규율이 있을 텐데요. 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문제는 '원칙'이라는 단어 자체에 있습니까? 저는 삶의 원칙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가치들을 동등한 수준으로 놓고 다루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종종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제 삶의 규칙 중 하나가 성경을 읽는 것이고, 또 하나가 하루에 1만 걸음을 걷는 것이며, 이 모든 지침이 목사나 기독교 저자 같은 영적 지도자로부터 나온다면, 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고,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믿는 자로서 1만 걸음을 걷지 못하는 시기도 있을 수 있고,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는 자로서 성경 말씀을 받지 않는 시기, 묵상하지 않는 시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시기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벤, 마크, 아니면 다른 누구와도 이런 상황을 마주치십니까? 사람들이 강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저는 자주 이 책과 존 마크 코머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은 이런 영적 접근법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벤, 아니요? 코머처럼 말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코머는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네, 저는 이 사고방식이 분명히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받는 것 같은 사례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만난 20대나 30대의 젊은이들 중 상담을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마치 영적 형성의 일부분이 심리상담사 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듯이 말이죠. 저는 그가 말하는 방식이 특정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저는 그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 있고 그들의 귀를 얻고 있으며, 그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지혜를 제공한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이 기독교적인 삶을 살도록 도울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는 제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단지 서부 버전의 율법주의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전 방식을 싫어하고, 새로운 규칙과 원칙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죠. 만약 이 규칙을 따르면 반드시 번영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번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벤, 우리가 조언과 예시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밝은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시로부터 영적 성장과 도전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반드시 모방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코머와 대화하거나 그의 책을 읽을 때, 그가 말하는 원칙이 '성경 말씀이 당신 삶의 전반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그의 규칙이 아닙니다. 빙엄 박사가 말했듯이, 여러 가지가 동등한 수준으로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동등하지 않으며, 성경만큼 중요하게 다뤄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 세대에 대한 가정을 드리자면, 저는 여전히 복음에 대한 지지자입니다. 저는 건강한 삶의 원칙이 여러 면에서 좋은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복음에 뿌리를 두고 싶습니다. 제 지식과 신분이 복음에 기반하고, 제 모든 행위가 복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입니다. 네, 이 점에서, '도'의 실천에서 분명히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다시 태어남과 새 생명의 교리입니다. 저는 아마도... 뭔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이 지속적인 변화의 주요한 주체라고 언급한 예는 찾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그것이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그를 압박한다면 그가 이를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영적 발전이나 영적 형성은 돌 같은 마음을 떼어내고 살 같은 마음을 심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강한 인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 점이 결여되었다면, 당신의 모든 노력, 당신의 삶의 규칙, 1만 걸음, 규율은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간디 같은 인물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유명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기독교인을 싫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고 제자 되고 싶어 했지만, 성령의 영향하에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요? 이건 찰스 셰일론의 '예수라면 무엇을 할까?'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경적 주제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 비유한 성령의 역사

설교자는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예로 들어 성령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아기가 나올 때 엄마가 힘을 주어 낳는 것처럼, 성령께서 힘을 주어 영적인 존재를 태어나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사람의 노력보다 성령께서 한 사람을 그 세계로 밀어 넣으셔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설교자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이 아기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던 법과 전통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의 역사를 믿고 기대하며 어린아이처럼 배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새 출발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적용도 덧붙였습니다.

이바울 · 2026-10-19

설교 내 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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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고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사람의 나라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나라죠. 그런 나라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리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주는 물은 여기서 여기서 이 물이라. 물리적 물이지만 비유한다면, 야곱이 주는 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주는 물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사람이 주는 칭찬, 인정, 사랑 속에서 결국 사람들은 서로를 요구하죠. 서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이해받기를 바라지만, 사람의 것을 받으면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사람의 칭찬을 받기 시작하면, 칭찬은 좋긴 하지만 그것에 매여 버립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정을 먹으면 그 하나로 충분합니다. 다른 걸 필요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의 칭찬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예수님의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 사람의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어떤 사회가 있을까요? 사람에게 매여 있으면 결국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정 속에 살아가면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각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가 큽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요한복음 5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 되었음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가 고치겠느냐? 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때에 나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먼저 내려가라. 베데스다 못가에서는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나옵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경쟁이 필수입니다. 예전에 한때 포요가 있었는데,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고치셨나요? 제일 꼴찌에 있는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꼴찌가 1등이 되게 한 것입니다. 꼴찌의 반란이라는 말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가장 뒤쳐진 사람을 오히려 가장 앞세울 수 있는 세계입니다. 준비는 많이 했지만 다다라지 못한 사람도, 내놓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는 다릅니다. 사람이 사람의 나라에서만 살면, 밀리기 시작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자기 존재와 가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무가치한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38년 된 병자처럼 가장 낮게 보이는 자라도 가장 먼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각자가 자기 삶을 살도록 해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성령이 주체가 되어 성령의 존재를 낳는 것입니다. 아기가 나올 때 누가 나옵니까? 엄마가 나와야 합니다. 엄마가 힘을 주고 아기를 낳습니다. 성령이 힘을 주어 영적인 존재를 태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이 노력하기보다는, 성령이 한 사람을 하나님의 세계로 밀어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믿고 기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니고데모에게는 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법과 전통을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살아온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태어나면 그것들은 모두 없어지고, 완전히 새로 출발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로 완전히 새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세계를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림을 받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항상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새롭게 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그대로 고집하거나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항상 아기처럼, 모르는 것을 알고 배우는 태도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출발점입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모험 소설이나 영화처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가던 길로 가는지, 모험을 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복음 3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나라와 땅의 나라가 있지만, 결국 사람의 나라는 경쟁 사회이고, 1등만 기억하는 세계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뒤쳐지는 그런 세계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가장 뒤쳐진 자가 가장 먼저 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세계와 땅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 영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시 찾아오시고, 성령이 주체가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역사를 이루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풍성하며 생명을 얻으며 사랑을 알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은혜가 풍성하도록 축복하여 주소서. 각 사람에게 항상 말씀이 임하시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숨이 없는 몸에 빗댄 죽은 믿음

설교자는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를 몸의 숨에 빗댑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영혼'은 숨이라는 뜻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만,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살아 있는 몸도 공기와 산소가 외부에서 들어와야 숨을 쉴 수 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창세기의 장면을 연결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을 근거로,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이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된다고 적용합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살아 있는 믿음을 구하도록 권면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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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을 끌어앉는 그런 행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서 세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하나님이 살리시는 믿음입니다. 오늘 21절부터의 말씀을 쭉 보면요. 야고보서는 두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요.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고요. 두 번째는 라합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너무나 유명한 두 인물이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었고, 언약의 약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반면에 라합은 여리코 성에 살던 이방 여인이었고, 기생이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아가던 두 인물을 야고보서는 같은 원리 아래 뒀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살펴볼까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완성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죠. 일례로,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였던 사라를 어떻게 합니까?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 23절을 한번 볼까요?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드러내십니까? 창세기 22장의 말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이었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장면을 통하여서 그 행함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의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어서 신이 얻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9절의 말씀인데요. 이 말씀 우리 한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웃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아브라함은 계산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으면 얼마나 슬플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지 않습니다. 숨겨주지 않습니까? 그 숨겨준 사실을 걸리면 죽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이유에 대해서 라합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요. 여호수아 2장 10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것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온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아멘. 라합이 고백합니다. 모든 일들을 다 본 겁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정탐꾼들에게 합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의 행함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게 되죠.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자신의 누를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족보, 그리스도의 족보에 하나님께서 올려두게 됩니다. 이 모든 스토리에 대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 뒤에 우리가 이 믿음이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먼저 행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우리 함께 다 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행함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향한 큰 행함과 순종을 행할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나의 믿음이 살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믿음이 죽어 있는 것 같다'라는 주저함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 오늘도 무릎 꿇고 나아가며 기도하는 그 복된 걸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기꺼이 순종할 때에 그 순종하는 삶 위에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2장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요. 그러나 그 공기와 산소 역시도 외부로부터 들어올 때에 숨을 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에,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던 것처럼,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에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시간, 그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모든 이의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어제 또 많은 순간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시면서, 전심으로 한 명, 한 명, 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이미 나에게 주신 그 부요함을 베풀어내는 은혜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같이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 믿음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 제목 가지고, 또 우리가 가지고 온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다가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복된 예배에

끓다가 냄비가 터지기 직전인 물에 빗댄 열심

설교자는 11절의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을 짚습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물이 버글버글 끓어 냄비가 터지기 직전인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상태를 '열심'으로 해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물이 끓어 터지기 직전과 같은 열정이 생긴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열심이 사랑을 하는 일에 정말 중요하다고 덧붙입니다. 이 열심은 기질이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 내는 기적 같은 요소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 열심이 육신을 따라 인간의 방법으로 나오면 쉽게 공로주의에 빠진다고 경고합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은 남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방향으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열심이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로 나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또한 열심은 방향이 매우 중요하며, 방향이 잘못되면 많은 해를 끼치고 사랑이기보다 폭력이 될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주님을 향해 제대로 향할 때, 주님을 섬기는 연장선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성경이 원하는 바른 열심이 있는 사랑이라고 결론짓습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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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존중하기를, 상대의 훌륭함과 귀함을 인정하면서 그를 귀하게 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 봐가면서 평가하고 나서 그렇게 하지 말고, 사랑은 우리 같은 사람을 주님이 죄로 다 망가지고 일어선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주님이 필요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필요도 모르고 있던 그때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처럼, 사람들을 존중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지나가야겠어요. 사랑은 11절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게으르다는 것은, 오늘 해야 될 것을 내일로 연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해야 될 것을 지금 하지 않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늘 뭘 붙이나요? 어느 날 한꺼번에 기적같이 일어날 사건을 기대하면서 오늘 나의 게으음을 계속해서 딜레이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은 반드시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구분이 되시죠? 그죠? 바른 사랑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연기하고 미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주실 때, 사랑을 위한 기회로 선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죠?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깁니다. 여러분, 여기 ‘열심을 품고’ 하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물이 버글버글 끓어서 남비가 터지기 직전인 상태입니다. 그게 열심입니다. 물이 그냥 불에서 벌펄벌펄 끓어서 남비가 이제 더 이상 감당이 안 될 만큼 터지기 직전의 상태를 ‘열심’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여러분, 열심은 여러분이 사랑을 하는 일에 정말 중요합니다. 그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냥 물이 끓어서 터지기 직전인 상태와 같은 열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기질이 어떤 건가,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요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만약에 여러분의 육신적인 열심이면, 열심은 있기는 있는데 육체를 따라하는 열심이면, 여러분은 굉장히 쉽게 공로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에는 정말 열심이 너무너무 있게 되는데, 여러분 육체를 따라 인간의 방법으로 하는 열심은 자주 공로주의에 빠져서 남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제목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게 아니라 어떤 열심입니까?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로 열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죠? 사랑은 열심을 다하도록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열심은 방향이 너무 중요해요. 열심히 방향이 잘못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죠? 그런데 이 열심에 사랑은 열심을 드러내게 되는데, 어떤 방향을 가지고 주를 섬기는 방향을 가지고 열심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여러분과 저에게 가르치는 사랑입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사랑이기보다 폭력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주님께로 향해서 사랑이 딱 제대로 향하고 있을 때,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사랑이 되어 죽게 하듯이 주님을 섬기는 연장선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정말 성경이 원하는 바른 열심이 있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다음 빨리 보고 싶어서 서둘러 온 것 같아요. 여러분, 저는 이 본문 묵상할 때 12절이 너무 좋았어요. 여러분, 12절 앞에 ‘사랑은’ 붙여서 12절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사랑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쓴다.’ 여러분, 사랑을 세 가지로 12절은 소개해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 사랑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환난 중에 참는 것입니다. 그죠? 항상 사랑은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12절은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 주변을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 주로 뭘 가지고 좋아해요? 현재를 가지고 좋아합니다. 현재 지금 일어난 어떤 일, 지금 뭔가 바라든 일이 성취된 지금을 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원하는 대로 됐는데 안 기쁠 사람이 누구가 있겠어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랑은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여러분을 넘어뜨리고, 여러분을 낙심시키고, 여러분들이 그만하고 싶도록 만들고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만두지 않고, 낙심해지지 않고, 소망을 딱 붙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행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뭡니까?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이미 시작한 그 위대한 놀라운 주님의 일을, 우리 몸에까지, 우리의 전 인격에까지 그 놀라운 일을 다 드러내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여러분과 제가 최선을 다해서 뭔가를 사랑함으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너무 돌아오지 않아서 낙심스럽고 멈추고 싶을 때, 여러분이 이 힘을 다해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들이 여러분을 배반하고 여러분을 낙심시킬 때, 그럴 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다 보시고 계시잖아요.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실 그 주님의 오실 그날을 사모하면서 오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죠?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좀 나쁜 말로 우리의 모든 사랑과 수고를 조롱할 때도, 전혀 섭섭해하지 않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죠? 환난 중에 참는 것. 여러분,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는 뭘 보면 알아요? 환난이 왔을 때 보면 되죠. 그죠? 환난이 딱 오면, 이게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짜 사랑은 참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죠?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할만큼 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참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그 위대한 장에 사랑은 하고, 제일 먼저 뭐가 나왔지요? ‘오래 참는다’가 나왔어요. 그죠? 사랑은 참된 사랑은 참게 됩니다. 포기하거나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그냥 모조품이었으니까 멈출 수 있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참게 하고 견디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믿게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한 번씩 넘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기도의 골방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죠?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아픔을 들으시고, 우리를 들으시는 그 기도의 골방에 항상 힘써서 들어가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죠?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그 자리에, 우리를 아시는 그분의 만짐이 일어나는 그 현장으로 항상 힘써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마지막 두 개 사랑이 있습니다. 그죠? 그게 뭡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익숙한 두 사랑이 나와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 이게 뭡니까? 뭐라고 말하면 될까요? 사랑은 나눔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여러분의 시간을 나누고, 관심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여러분의 재능을 여러분의 것으로만 쓰려고 하지 않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나누고, 여러분의 물질을 나누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누가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울 줄 모르면, 이것이 참으로 믿는 자이겠는가? 너희 사랑이 어디 있느냐? 주님이 반문하시는 것처럼, 사랑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흘려보내고 나누어서, 그들의 아픔을 만지고, 그들의 아픔을 만짐으로 형평케 하고 균등케 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여러분이 보는 것처럼, 정부가 세계의 정부들이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어서 획적인 균등을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제도가 하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해야 되는 사랑과 구별되기 때문이에요. 제도가 만들어서 획적인 평등을 만들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흘려 보내고 나누면서 균등케 하는 이 사랑이 살아나야, 우린 정말 아픔이 해소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랑. ‘나그네를 접대하라.’ 이게 뭐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환대하라입니다. 환대하라. 나은 사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집에 들리면 해괴한 짓을 할지, 정말 성도의 교재를 할지 전혀 검정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불편을 끼치고, 우리의 일상에 일상적인 삶의 리듬을 깨게 만드는 사람인데, 그러기 때문에 못 본체하고 지나가지 말고, 그를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환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 잘 몰라요.’ 하고 뒤걸음질 치지 말고, 처음 봤기 때문에 제 실력이 잘 안 나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누구든지 마음을 활짝 열어서 받아서, 그의 필요와 그의 아픔과 그의 여러 가지 상황이 해소될 수 있도록 사람을 마음을 열고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조국 땅에 오늘 이렇게 많은 아픔과 부르짖음의 핵심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이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오늘 이 시대, 조국 땅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에 제일 핵심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미루지 말고, 오늘 해야 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낯설기 때문에 못 다가간다고 그렇게 자꾸 말하지 말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모든 삶의 자리를 사랑을 행할 현장으로 여기면서, 누가 먼저 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먼저 공경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먼저 존경을 행하는 것이 사랑인 줄 알고, 삐죽되지 않고 뒤걸음질 치지 않고, 이 시대에 이런 보편적인 덤성덤성한 문화에 지지 말고, 피부치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칠 그 사랑을 바로 그 사람에게 적용하면서, 많이 사랑해서, 오늘 이 조국의 아픔이 여러분들의 믿음과 삶의 실천을 통해서 해소되고 극복되고, 정말 따뜻한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조국 사회 되도록,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 되어 주시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