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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8개 · 1 / 1쪽 · 한 쪽 20개

강아지 캐니와 어린 시절의 사랑 이야기

설교자는 아홉 살, 열 살 무렵의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집에서는 털이 날린다는 이유로 강아지를 키우지 못하게 하셨지만, 옆집 1층 마당에 아저씨가 데려온 회색 큰 강아지 캐니를 보고 그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는 캐니가 근본 없는 믹스견이었지만 학교가 끝나면 계단에 앉아 세 시간, 네 시간씩 캐니와 대화했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도시락 반찬으로 귀하던 오양맛살이 나오면 그는 반찬통을 다시 닫고 밥만 먹었다가, 학교가 끝나 집에 뛰어가 캐니에게 오양맛살을 부어 주었습니다. 캐니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10초 만에 다 먹어 치웠지만, 그는 그 모습이 너무 기뻤다고 회상합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줄 만큼 캐니를 사랑했다고 말하면서도, 캐니처럼 개가 되어 좁은 마당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 설교자는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비와 은혜인지 적용합니다.

남득현 · 2026-10-28

설교 내 14–18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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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제가 아홉 살인가 열 살 때쯤에 강아지를 너무 키우고 싶었어요. 제가 막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는데, 저희 어머니가 절대 못 키우게 하셨어요. 털 날린다고요. [웃음] 집에서 털 날린다고 막 못 키우게 하셨어요. 제가 너무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서, 그런데 어느 날인가 저희 옆집, 저희 집이 2층이었는데 1층 마당에 그 아저씨께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오신 거예요. 회색 큰 강아지를. 이름이 케니였어요. 캐니. 제가 지금도 기억해요. 캐니. 얼마나 우리 둘이 친했는지. 와, 너무 좋았어요. 제가 아홉 살, 열 살 나이에 우리 집에서는 강아지를 못 키우는데, 바로 우리 집 옆에 붙어 있는 집, 우리 계단을 올라가면 볼 수 있는 그 1층 마당에 캐니를 데리고 오신 거예요, 아저씨께서. 제가 그 캐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학교가 끝나면 하루에 세 시간, 네 시간씩 거기 계단에 앉아서 캐니랑 대화했습니다. 진짜예요? 제가 세 시간씩 캐니랑 대화했어요. 캐니는 저한테 꼬리를 치고, 그 근본이 없는 개였거든요. [웃음] 옛날에 근본이 없는 개들 많았잖아요. 전형적인 근본이 없는 개였어요. 믹스견이었죠. 너무 좋아서 제가 진짜 너무 좋아했어요. 캐니를 학교가 없는 날, 토요일 같은 날은 정말 하루 종일 계단에 앉아 있었어요. 제가 캐니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그 당시 초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거든요. 그때 처음 나오기 시작한 반찬이 뭐였냐면 오양맛살이에요. 제가 너무 좋아했어요. 오양맛살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오면 너무 좋아했어요. 저희 어머니께서 많이 싸 주시지도 않으셨어요. 가끔, 정말 가끔 가뭄에 콩 나듯 오양맛살을 싸 주셨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왜 그 '오양'이란 회사가 가장 먼저 맞는 거 같아요. [웃음] 그래서 오양 마사이인 거야. 옛날에 오양 마사이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개마사이'라지만. 기억하시죠? [웃음] 그 반찬을 제가 너무 좋아했어요. 아홉 살짜리, 열 살짜리가. 그런데 제가 캐니를 만난 이후로, 학교에 가서 도시락 반찬을 열었을 때 반찬통에 오양맛살이 있으면 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 아홉 살짜리가 반찬통을 다시 닫았어요. 캐니 주려고.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거니까 캐니도 좋아하겠지. 그래서 밥만 먹었어요. 밥만. 그래서 제가 학교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거예요. 학교 끝나기만을 기다려. 그래서 학교 끝나면 진짜 뛰어서 집으로 가고, 케니한테 그 반찬통을 열고 오양맛살을 막 부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캐니는 10초 컷입니다. 그 귀한 오양 마사를 나한테 고맙다 얘기도 안 하고 그냥 10초 안에 다 먹어요. 저는 그냥 그게 너무 기뻤어요. 케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게. 여러분, 아홉 살짜리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줄 정도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그 강아지를. 여러분, 제가 그렇게 캐니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그렇게 캐니를 사랑하고, 오양 마사를 줄 정도로, 하루 종일 세네 시간씩 앉아서 캐니랑 대화할 정도로 사랑했지만, 여러분, 저는 한 번도 캐니처럼 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어린 나이였을지라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겠죠. 저는 캐니를 제가 너무 사랑하는 존재지만, 여러분, 캐니처럼 개가 돼서 그 좁은 마당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찰스 메어 목사에게 보낸 케어드의 편지

성 길리스 대성당의 교회 보좌관이었던 케어드는 당시 목사였던 찰스 메어 목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교인들이 아직 우리가 있어야 할 만큼의 모든 것이 아니며, 분명 많은 책망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목사가 설교하기보다 교인들에게 사랑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설교자는 이 편지를 소개하며, 교인들이 목회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적용했다. 성경을 가르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그 말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교인들이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목회자가 큰 실수를 하더라도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65–65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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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어드는 성 길리스 대성당의 교회 보좌관이었는데, 당시 목사였던 찰스 메어 목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가 그분에게 전한 말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만큼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는 많은 질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설교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인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가르치고,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명확하게 말하려고 노력합니다. 때때로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들이 우리가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설령 우리가 큰 실수를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흙으로 만든 우상과 사람 숭배

설교자는 자녀나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일을 우상 숭배에 빗댑니다. 자녀를 지나치게 우상처럼 받드는 이들도 우상 숭배자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흙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일, 즉 힌두교가 그렇다고 알려진 모습을 언급하며, 이를 사람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비교합니다. 사람도 결국 흙과 같은 존재인데, 먼지 같은 존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어 하나님과 다툴 수 있겠느냐고 설교자는 묻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우리를 고통받게 하신다면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하신다는 것이 그의 근거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19

설교 내 9–9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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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이 종종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 그 자녀들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이들도 우상 숭배자가 됩니다. 우리가 흙으로 만든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 즉 힌두교가 그러하다고 알려진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결국 흙이 아닌가요? 우리가 먼지 같은 존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어 하나님과 다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고통받게 하신다면, 우리는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해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설교자는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을 주면서 마틴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정의한 말을 소개합니다. 루터의 정의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사랑 안에서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만물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붙들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가 '구원받았으니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천국에서 만나자'는 방종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열심과 애정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자유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거룩한 삶을 기쁘게 살아갈 힘이며,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선택하게 하는 힘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자유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향과 목적, 믿음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벌받을까 두려워서 하거나 상을 받으려고 수고하는 믿음과 다르다고 덧붙입니다. 결국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며, 청중이 이 믿음의 방향을 붙들도록 권면합니다.

유재준 · 2026-10-18

설교 내 21–2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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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 이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을 주면서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사랑 안에서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만물의 종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내가 이제 구원받았으니 내가 하고 싶은 욕망대로 살아가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시는 방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열심과 애정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자유는 성령, 즉 거룩한 영이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대로 거룩한 삶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힘,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선택할 수 있는 힘, 내 이웃과 내 몸을 내 이웃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거룩한 힘이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방향과 목적, 믿음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거 안 하면 벌받을까 봐 두려워서 아니면 이렇게 해야만 상받을 수 있으니까 하면서 수고하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줄 믿습니다.

페라리와 직장을 포기하는 사랑의 방정식

설교자는 자신이 만든 '사랑과 포기의 방정식'을 소개합니다. 한 사람이 나를 얻기 위해 페라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의 값은 페라리를 넘어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나를 얻기 위해 구글 직장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 사랑의 값은 구글보다 못하다는 예를 듭니다. 설교자는 이 등식이 사랑의 가치를 가늠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택하기 위해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는가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옥합 여인의 이야기에 적용합니다. 여인은 거의 전재산에 가까운 옥합을 예수님께 모두 포기했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그녀에게 예수님이 그만큼 소중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포기는 사랑의 값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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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왜 이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삶의 예배에 이런 헌신의 허의를 요청하실까요?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랑에 대한 값을 먹길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실 사랑의 값을 먹긴다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만, 제가 만들어 본 방정식, 사랑과 포기의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어느 정도 사랑의 값이란 걸 먹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나란 사람을 얻기 위해 기꺼이 페라리를 포기할 수 있다면, 나를 향한 그 사람의 사랑이 값이지인데, 페라리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구글 회사 직원이고, 나를 얻기 위해 구글이라는 직장을 포기할 수 없다면, 안타깝게도 나를 포기합니다. 그러면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값은 구글보다 못 합니다. 어찌 보면 이렇게 사랑의 값을 정하는 것이 꽤 우순 일이겠지만, 사랑의 가치를 가늠하는 데는 이 등식이 매우 유용합니다. 내가 이걸 택하기 위해 얼만큼 포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그걸 향한 내 사랑의 값이요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포기란 사랑의 값을 보여줄 수 있는 법입니다.

부모의 이혼을 겪은 설교자가 공동체에서 받은 사랑

설교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가족 관계에서 본능적인 사랑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너무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셨고, 이혼하실 때 누님이 어머니를 따라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족 안의 사랑을 경험적으로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가장 어려웠다고 나눕니다. 믿기지 않는 그 사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매우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대학에 올라와 20대와 30대를 보낸 공동체에서 형들과 누나들을 만났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꽁꽁 닫혀 있던 마음을 형들과 누나들이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설교자는 그 공동체가 늘 생각나며, 그때 받은 사랑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마음 한편에는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약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형들과 누나들은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이 조금씩 닿으면서 마음이 약간씩 부드러워졌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탁 와닿았을 때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 지체를 가족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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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제가 여러 번 말했지만, 저는 가족 관계 안에 있는 본능적인 사랑을 거의 못 느끼고 자랐어요. 너무 일찍 아버지 어머니가 이혼하셨고, 아버지 어머니 이혼하실 때 누님이 어머니를 따라갔기 때문에 저는 사실 형제들 가운데 혹은 가족 가운데 있는 본능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참 경험적으로 약했고, 그래서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 하는 말이 제일 어려웠어요. 안 믿겨지는 그 사랑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대학으로 올라오면서 제 젊은 시절 20대와 30대를 보냈던 그 공동체에서 그렇게 꽁꽁으로 붙어 있는 제 마음을 만져 주는 형들과 누나들을 만났어요. 저는 참 잊을 수가 없어요. 늘 그 공동체가 생각나는 것은 그때 형들에게, 누나들에게 받았던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버림 받았다 하는 약간의 상처들이 남아 있었는데, 형들과 누나들은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게 뭔지를 가르쳐 줬어요. 꽁꽁으로 붙어 있는 제 마음을 형들과 누나들의 사랑이 많이 만지기 시작하면서 약간씩 약간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을 때,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이렇게 탁 와닿왔을 때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신학 공부 중 불편했던 동료 목사와 주님의 질문

설교자는 에버르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때의 경험을 나눕니다. 그곳에는 한국 목사님들 15가정 정도가 함께 와서 공부했고, 대부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자에게 유독 불편한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설교자에게 잘해 주었고 사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설교자는 성격 탓인지 그를 보면 속에서 부글부글 무언가가 올라온다고 고백합니다. 여러 제목으로 그를 싫어했는데,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잘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를 매일 바라보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는 태도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 그의 약점이 드러나는 현장을 포착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장면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고 표현하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겨 너무 기뻐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칭찬할 때마다 그 약점을 한 번씩 열어 보며 이중적인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엉뚱한 기쁨으로 기뻐하던 어느 날 주님이 질문하셨다고 나눕니다. 설교자가 되묻자, 주님은 그에게 '너에게 부활은 뭐야?'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허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며, 오늘 부활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을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설교자는 그때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세상이 상대의 약점을 붙들고 자기를 높이는 자리라면,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일로 배웠다고 적용합니다. 상대의 약점을 붙들고 낮추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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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르에서 공부할 때, 여러분 한국 목사님들이 한 15 가정 정도가 와서 같이 신학을 공부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좋은 관계를 잘 맺으면서 지냈는데 한 분은 참 불편했어요. 저한테 참 잘해 줬고, 정말 그 사회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인정을 많이 받던 분인데, 희한하게 저는 성격이 약간 뭐가 나서 그런지, 그냥 보고 있으면 속에서 부글부글 뭐가 자꾸 끌어 올라오면서 그렇게 한 분 힘들게 생각했어요. 여러 가지 제목으로 그분을 싫어했는데, 그중에 영어도 너무 잘해요. 저는 사투인데 그분은 네이티브처럼 영어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 많은 것들 때문에 불편해 하고 있을 때, 매일 가지고 '그래,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 이러고 딱 보고 있었는데, 놀랍게 놀라운 현장을 딱 포착했어요. 예. 여러분, 제가 그 현장을 딱 포착하고 보자에 딱 사서 호주머니에 딱 넣었어요. 그리고 너무 기뻤어요. '내가 아무한테도 말 안 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도 나는 아무한테 토스하지 않았다. 얼마나 훌륭한가 나요. 이러면서 너무 좋아했어. 너무 좋아했어.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그분 칭찬을 하면 한 번씩 열어 봤어요. 그러면서 이중적인 기쁨이 왔어요. 이 사람 이런 사람인데 나는 말 안 한다. 그 사람의 그 약점도 붙들고 있고, 그죠. 말 안 하는 저의 또 고매함이 드러나면서 막 너무 기뻤는데, 하도 그렇게 엉뚱한 기쁨으로 기뻐하니까 주님이 하루는 질문하셨어요. '쏘왓 영국이니까 영어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냐?' 그렇게 물었어요. 제가 주님께 대답했어요. '주님, 이걸 보시고 다 아시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제가 여쭈었어요. 그때 주님이 저에게 '너에게 부활은 뭐야?' 이렇게 질문하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 그 사람은 정말 그 일을 허물 있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고, 오늘 부활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을지 네가 어떻게 아냐?' 이렇게 주님이 반문 딱 하셨을 때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세상은 끝없이 상대의 약점이 드러나고 모자람이 보이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걸 붙들고 어떤 형태든지 그걸 붙들고 자기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어 하는 이런 세상에, 사랑을 하기를 사랑을 가르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은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끓다가 냄비가 터지기 직전인 물에 빗댄 열심

설교자는 11절의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을 짚습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물이 버글버글 끓어 냄비가 터지기 직전인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상태를 '열심'으로 해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물이 끓어 터지기 직전과 같은 열정이 생긴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열심이 사랑을 하는 일에 정말 중요하다고 덧붙입니다. 이 열심은 기질이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 내는 기적 같은 요소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 열심이 육신을 따라 인간의 방법으로 나오면 쉽게 공로주의에 빠진다고 경고합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은 남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방향으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열심이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로 나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또한 열심은 방향이 매우 중요하며, 방향이 잘못되면 많은 해를 끼치고 사랑이기보다 폭력이 될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주님을 향해 제대로 향할 때, 주님을 섬기는 연장선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성경이 원하는 바른 열심이 있는 사랑이라고 결론짓습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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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존중하기를, 상대의 훌륭함과 귀함을 인정하면서 그를 귀하게 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 봐가면서 평가하고 나서 그렇게 하지 말고, 사랑은 우리 같은 사람을 주님이 죄로 다 망가지고 일어선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주님이 필요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필요도 모르고 있던 그때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처럼, 사람들을 존중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지나가야겠어요. 사랑은 11절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게으르다는 것은, 오늘 해야 될 것을 내일로 연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해야 될 것을 지금 하지 않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늘 뭘 붙이나요? 어느 날 한꺼번에 기적같이 일어날 사건을 기대하면서 오늘 나의 게으음을 계속해서 딜레이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은 반드시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구분이 되시죠? 그죠? 바른 사랑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연기하고 미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주실 때, 사랑을 위한 기회로 선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죠?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깁니다. 여러분, 여기 ‘열심을 품고’ 하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물이 버글버글 끓어서 남비가 터지기 직전인 상태입니다. 그게 열심입니다. 물이 그냥 불에서 벌펄벌펄 끓어서 남비가 이제 더 이상 감당이 안 될 만큼 터지기 직전의 상태를 ‘열심’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여러분, 열심은 여러분이 사랑을 하는 일에 정말 중요합니다. 그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냥 물이 끓어서 터지기 직전인 상태와 같은 열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기질이 어떤 건가,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요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만약에 여러분의 육신적인 열심이면, 열심은 있기는 있는데 육체를 따라하는 열심이면, 여러분은 굉장히 쉽게 공로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에는 정말 열심이 너무너무 있게 되는데, 여러분 육체를 따라 인간의 방법으로 하는 열심은 자주 공로주의에 빠져서 남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제목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게 아니라 어떤 열심입니까?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로 열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죠? 사랑은 열심을 다하도록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열심은 방향이 너무 중요해요. 열심히 방향이 잘못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죠? 그런데 이 열심에 사랑은 열심을 드러내게 되는데, 어떤 방향을 가지고 주를 섬기는 방향을 가지고 열심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여러분과 저에게 가르치는 사랑입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사랑이기보다 폭력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주님께로 향해서 사랑이 딱 제대로 향하고 있을 때,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사랑이 되어 죽게 하듯이 주님을 섬기는 연장선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정말 성경이 원하는 바른 열심이 있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다음 빨리 보고 싶어서 서둘러 온 것 같아요. 여러분, 저는 이 본문 묵상할 때 12절이 너무 좋았어요. 여러분, 12절 앞에 ‘사랑은’ 붙여서 12절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사랑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쓴다.’ 여러분, 사랑을 세 가지로 12절은 소개해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 사랑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환난 중에 참는 것입니다. 그죠? 항상 사랑은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12절은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 주변을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 주로 뭘 가지고 좋아해요? 현재를 가지고 좋아합니다. 현재 지금 일어난 어떤 일, 지금 뭔가 바라든 일이 성취된 지금을 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원하는 대로 됐는데 안 기쁠 사람이 누구가 있겠어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랑은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여러분을 넘어뜨리고, 여러분을 낙심시키고, 여러분들이 그만하고 싶도록 만들고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만두지 않고, 낙심해지지 않고, 소망을 딱 붙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행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뭡니까?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이미 시작한 그 위대한 놀라운 주님의 일을, 우리 몸에까지, 우리의 전 인격에까지 그 놀라운 일을 다 드러내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여러분과 제가 최선을 다해서 뭔가를 사랑함으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너무 돌아오지 않아서 낙심스럽고 멈추고 싶을 때, 여러분이 이 힘을 다해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들이 여러분을 배반하고 여러분을 낙심시킬 때, 그럴 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다 보시고 계시잖아요.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실 그 주님의 오실 그날을 사모하면서 오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죠?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좀 나쁜 말로 우리의 모든 사랑과 수고를 조롱할 때도, 전혀 섭섭해하지 않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죠? 환난 중에 참는 것. 여러분,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는 뭘 보면 알아요? 환난이 왔을 때 보면 되죠. 그죠? 환난이 딱 오면, 이게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짜 사랑은 참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죠?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할만큼 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참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그 위대한 장에 사랑은 하고, 제일 먼저 뭐가 나왔지요? ‘오래 참는다’가 나왔어요. 그죠? 사랑은 참된 사랑은 참게 됩니다. 포기하거나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그냥 모조품이었으니까 멈출 수 있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참게 하고 견디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믿게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한 번씩 넘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기도의 골방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죠?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아픔을 들으시고, 우리를 들으시는 그 기도의 골방에 항상 힘써서 들어가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죠?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그 자리에, 우리를 아시는 그분의 만짐이 일어나는 그 현장으로 항상 힘써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마지막 두 개 사랑이 있습니다. 그죠? 그게 뭡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익숙한 두 사랑이 나와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 이게 뭡니까? 뭐라고 말하면 될까요? 사랑은 나눔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여러분의 시간을 나누고, 관심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여러분의 재능을 여러분의 것으로만 쓰려고 하지 않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나누고, 여러분의 물질을 나누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누가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울 줄 모르면, 이것이 참으로 믿는 자이겠는가? 너희 사랑이 어디 있느냐? 주님이 반문하시는 것처럼, 사랑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흘려보내고 나누어서, 그들의 아픔을 만지고, 그들의 아픔을 만짐으로 형평케 하고 균등케 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여러분이 보는 것처럼, 정부가 세계의 정부들이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어서 획적인 균등을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제도가 하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해야 되는 사랑과 구별되기 때문이에요. 제도가 만들어서 획적인 평등을 만들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흘려 보내고 나누면서 균등케 하는 이 사랑이 살아나야, 우린 정말 아픔이 해소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랑. ‘나그네를 접대하라.’ 이게 뭐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환대하라입니다. 환대하라. 나은 사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집에 들리면 해괴한 짓을 할지, 정말 성도의 교재를 할지 전혀 검정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불편을 끼치고, 우리의 일상에 일상적인 삶의 리듬을 깨게 만드는 사람인데, 그러기 때문에 못 본체하고 지나가지 말고, 그를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환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 잘 몰라요.’ 하고 뒤걸음질 치지 말고, 처음 봤기 때문에 제 실력이 잘 안 나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누구든지 마음을 활짝 열어서 받아서, 그의 필요와 그의 아픔과 그의 여러 가지 상황이 해소될 수 있도록 사람을 마음을 열고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조국 땅에 오늘 이렇게 많은 아픔과 부르짖음의 핵심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이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오늘 이 시대, 조국 땅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에 제일 핵심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미루지 말고, 오늘 해야 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낯설기 때문에 못 다가간다고 그렇게 자꾸 말하지 말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모든 삶의 자리를 사랑을 행할 현장으로 여기면서, 누가 먼저 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먼저 공경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먼저 존경을 행하는 것이 사랑인 줄 알고, 삐죽되지 않고 뒤걸음질 치지 않고, 이 시대에 이런 보편적인 덤성덤성한 문화에 지지 말고, 피부치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칠 그 사랑을 바로 그 사람에게 적용하면서, 많이 사랑해서, 오늘 이 조국의 아픔이 여러분들의 믿음과 삶의 실천을 통해서 해소되고 극복되고, 정말 따뜻한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조국 사회 되도록,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 되어 주시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