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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13개 · 1 / 1쪽 · 한 쪽 20개

공수특전단 출신 목사의 목숨 건 사역

설교자는 대전에 있는 동행침례교회의 목사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목사님은 공수특전단 출신으로, 목회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임한다고 합니다. 공수특전단원들이 늘 목숨을 걸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듯, 그 목사님은 죽기 살기로 사역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면 목숨을 걸고 전하겠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평소 하던 일에도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짚으며, 이 사례를 통해 최선을 다하는 신앙이 얼마나 철저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맡은 말씀 앞에서 대충 하지 않는 마음을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23–23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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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살기로 목숨을 걸고 대전에 가면은 동행침례교회라는 교회가 있어요. 어, 그 목사님이 공수특전단 출신인데, 어, 목회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데 목숨을 걸어놓고 한다. 죽기 살기로 한다. 공수특전단들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어, 비행기를 [목을 가다듬음] 타고 뛰어내리고 이제 그렇게 하잖아요. 보통 항상 목숨을 거는 그런 일에도 목숨을 걸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맡았다면은 내가 목숨을 걸고 전하겠다. [콧방귀] 그런 분도 있습니다. [목을 가다듬음]

열기 속에 녹아 버리는 초콜릿 병정

설교자는 열기 속에서 녹아 버리는 초콜릿 병정을 비유로 들어, 어려움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이 아닌 이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절실히 구해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공개적으로 반응하라고 요청하지는 않겠다고 밝힙니다. 대신 함께 고개를 숙이고 마음으로 삶을 그리스도께 새롭게 드리자고 권합니다. 그는 청중이 그분을 사랑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말씀드리기를 권면합니다. 이 비유는 시련 앞에서 쉽게 녹아내리지 않는 헌신을 구하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28–28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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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주님께서 열기 속에 녹아 버리는 초콜릿 병정과 같은 사람들이 아닌 이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절실히 구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께 공개적으로 반응하시라고 요청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저와 함께 고개를 숙이면서, 마음으로 여러분의 삶을 그리스도께 새롭게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을 사랑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살룸과 그의 딸들이 함께 성벽을 중수하다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9절과 12절에 나오는 예루살렘 지방의 행정관들을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던 르바야와, 다른 절반을 다스리던 살룸이 자기 도시의 성벽을 맡았다고 설명합니다. 그중 살룸은 자기 딸들과 함께 성벽을 중수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눈에 띕니다. 설교자는 무너진 성벽을 쌓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떠올리며, 딸들이 무거운 돌을 옮기다 여린 손을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딸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자녀를 단기 선교사로 보낸 부모의 마음에 빗대어 적용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9–9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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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살룸의 이야기는 더욱더 아름다운 면이 있어요. 12절 보십시오. 살룸이 누구와 함께 성벽을 중수했다고 되어 있습니까? 자기 딸들과 함께. 여러분, 무너진 성벽 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저도 딸 가진 아빠로서 그런 생각을 한번 해 봅니다. ‘이 딸이 무거운 돌을 옮기다가 그 여린 손에 상처라도 나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 아버지는 딸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던 거죠. 마치 자녀를 단기 선교사로 보낸 부모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말기야가 맡은 분문 수리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14절에 나오는 벧학게렘 지방의 지도자 말기야를 소개합니다. 말기야는 예루살렘의 쓰레기와 배설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분문을 중수했습니다. 설교자는 '분'이 오물이나 배설물을 뜻한다고 설명하며, 이 문이 똥문이라 불릴 만큼 궂은 자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리에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팻말을 세우기는 어색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데도 말기야는 이 자리를 기꺼이 맡았습니다. 설교자는 남들이 꺼리는 일을 맡은 그의 모습을 보며, 그런 사람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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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도 14절,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다 온 말기야의 이야기는 또 더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14절을 자세히 보시면 그는 분문을 중수합니다. 한글로 분문 하니까 멋있어 보이죠? 여기서 ‘분’은 오물, 배설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덩 게이트’입니다. 예루살렘의 쓰레기와 배설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문입니다. 똥문입니다, 똥문. 그거 지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여기 내가 지었음’이라고 팻말 하기 이상하잖아요. 그런데도 말기야는 여길 맡은 것이죠. 나중에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굳어진 루터의 손가락

설교자는 마틴 루터가 1546년 세상을 떠난 뒤 장례를 치르던 사람들이 그의 모습에서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고 전한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이 마치 펜을 계속 잡고 있는 듯 굳어 있었던 것이다. 설교자는 그 근육들이 펜을 잡는 자세에 너무 익숙해져서 죽음 속에서도 그 자세로 돌아갔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장면이 루터가 평생 자신의 모든 능력과 에너지를 글쓰기에 쏟았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또한 설교자는 루터의 전집이 약 백 권에서 백십 권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고 소개하며, 그가 놀라운 기억력과 빠른 사고, 글쓰기 능력을 지녔다고 전한다. 설교자 자신도 그 분량을 보며 평생 손으로 옮겨 적기조차 어렵겠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이 장면은 루터의 업적이 얼마나 놀라웠는지를 청중에게 실감나게 전하는 역할을 한다.

W. 로버트 고드프리 · 2026-10-24

설교 내 6–6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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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루터는 성경의 광범위한 부분을 암송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도 신약 전서와 구약의 많은 부분을 암송했을 것입니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 뛰어난 에너지, 그리고 빠른 사고와 글쓰기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터의 전집은 약 백 권에서 백십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차지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평생 동안 그것을 손으로 옮겨 적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훨씬 더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모든 능력과 에너지를 사용했습니다. 1546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은 그의 오른손 손가락이 마치 펜을 계속 잡고 있는 듯이 굳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근육들은 펜을 잡는 자세에 너무 익숙해져서, 죽음 속에서도 그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이루었던 업적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윌리엄 그림쇼의 하나님과의 계약

설교자는 18세기 영국 요크셔 하워스에서 목사로 있던 윌리엄 그림쇼의 기록을 소개합니다. 그는 1752년 12월 4일 하나님이신 주님과 계약을 맺었고, 1760년 6월 5일에 그 엄숙한 헌신을 다시 다짐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하워스가 에밀리와 샬럿 브론테의 아버지가 목사로 있던 마을이라는 배경도 덧붙입니다. 그림쇼는 계약을 맺는 것, 다시 다짐하는 것, 기억하는 것, 지키는 것을 구분하며 신선함을 보였고, 매 분기 첫 번째 금요일에 헌신을 새롭게 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의 기록에는 세상, 육체, 마귀라는 이전 주인들을 버리고 자신을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며, 세상의 물건과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설교자는 그가 이 글을 발표하거나 자녀에게 보여 주지 않았으며, 하나님과 그 사이의 일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사람들의 평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조용한 자리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적용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많은 증인들의 구름에 둘러싸여 있음을 기억하며, 디모데처럼 의와 경건을 추구하라는 메시지로 마무리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2

설교 내 9–9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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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경건이 반드시 특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말할 것이 많지만, 말하지 않겠다. 그냥 여기서 멈추겠지만, 나는 시간을 더 가까이 가져와 18세기에 가서 다른 인용문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나는 윌리엄 그림쇼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그는 하워스에서 목사로 있을 때, 1752년 12월 4일에 하나님이신 주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워스는 영국 요크셔에 있는 작은 마을로, 에밀리와 채털린 브론테의 아버지가 윌리엄 그림쇼가 목사였던 지 80년 뒤에 목사로 있었다. 그는 1760년 6월 5일에 이 엄숙한 헌신을 매우 두려운 방식으로 다시 다짐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주님, 내가 이 것을 신중히 기억하고 지키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이 마음에 든다. 계약을 맺는 것은 한 가지이고, 그것을 다시 다짐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며,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이 사람은 신선함이 있다. 그는 "나는 앞으로 매 분기마다 1월, 4월, 7월, 10월의 첫 번째 금요일에 이 헌신을 다시 다짐하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한다. 이 헌신의 맛을 조금만 보여드리겠다. 나는 의와 경건을 추구하는 이 개념에 대해 매우 도전적인 내용을 발견했다. 그는 "영원하신 주님, 영원한 기억의 책에 기록하여, 이제부터 나는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오늘 이 날, 저는 세상, 육체, 마귀라는 이전의 주인들을 엄숙히 버립니다. 더 이상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들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을 버렸고, 이제는 영원히 버립니다. 오늘 이 날 저는 주님께 살아 있는 제물로 드려 드릴 것입니다. 주님께 거룩하고 기쁨을 드리는 것이며, 이는 제가 아는 바로는 합당한 제사입니다. 주님께 저는 제 모든 세상 물건들을 바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용하여 주님의 영광을 이루시고, 제가 행하거나 고난을 당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제가 사는 세상에 이익을 드릴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오늘 이 날부터 주님께서 제게 특별한 백성으로 계수어 주소서. 저는 이제 더 이상 낯선 자나 이방인이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하늘의 가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제가 죽어 이 세상의 모든 관심사가 영원히 끝났을 때, 만약 이 엄숙한 기록이 어떤 생존한 친구나 가족의 손에 들어갔다면, 이는 경건의 예입니다. 그는 이 글을 써서 발표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대면해서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그와 하나님 사이의 일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짜 문제는 당신과 하나님, 나와 하나님 사이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입니다. 사람들이 관찰하고 추정하고 결정하고 비판하겠지만, 진짜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조용한 장소에서 일어납니다. 그들이 우리의 문서를 살펴보면 무엇을 찾을까요? 내 자식들이 오늘 알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무엇을 찾을까요? 재정 보고서일까요? 그는 "만약 이 글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면, 지금은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이 글이 그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그들이 이 말을 내 말만이 아니라 자기 말로 읽으며, 주님을 두려워하고, 나와 함께 그분의 날개 그늘 아래에 신뢰를 두어 시간과 영원을 위해 신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와 함께 이 은혜를 경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계약에 참여하게 하시고, 우리가 그 계약에 참여하고자 할 때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모든 구원받은 민족들과 함께 아버지, 아들, 성령께 이 놀라운 일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마땅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나는 1752년 12월 4일, 천사들과 모든 보이지 않는 증인들 앞에서 영원히 복된 삼일 하나님께 이 자기 헌신을 엄숙히 서명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많은 증인들의 구름에 둘려 있습니다. 이미 떠난 이들, 경주를 완주한 이들, 싸움을 싸운 이들, 믿음을 지킨 이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시대의 젊은 사람인 티모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티모티, 네가 건강하지 않은 논쟁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 네가 모든 이 싸움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 대신, 나는 너가 여우를 쫓는 개처럼 의와 경건을 추구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소서. >> [음악] 당신은 알리스테어 벡의 '진리로 삶을'을 듣고 계십니다. 알리스테어는 우리가 삶의 모든 나이와 단계에서 스스로에게 묻어야 할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입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우리는 앞으로보다 과거를 더 많이 바라보게 됩니다. 아마 당신은 자녀들이 자라났고, 직업이 끝나가고, 당신이 한 일이나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듣고 싶은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직 끝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천하는 책의 주제는 바로 이겁니다. 제목은 'Not Old, Not Young, Not Done, Following Jesus in your 50s and 60s'입니다.

진젠도르프의 한 가지 열정 인용

설교자는 진젠도르프가 남긴 고백을 인용합니다. 그 고백은 '나는 한 가지 열정이 있다. 바로 그분이시다. 그분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그분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붙든다면, 우리 삶의 많은 문제들이 즉시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라면 '내 삶이 그리스도요'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고백이 이루어질 때 다른 모든 일들은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모든 수정과 실패가 결국 한 분 주님만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이 적용은 그리스도 한 분을 중심으로 삶을 세우자는 권면입니다. 설교자는 우리 모두 그분을 알게 되면 그분만을 바라보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며 권면을 이어갑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1

설교 내 11–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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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일만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일도 보아야 합니다. 친구 여러분, 저와 동의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알고, 복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에 대한 우리의 교리가 올바르다면, 우리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즉시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내 삶이 그리스도요"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분을 아는 자라면, 또는 진젠도르프가 말한 것처럼 "나는 한 가지 열정이 있다. 바로 그분이시다. 그분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모든 다른 일들은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입니다.

사탄의 점진주의와 예수님의 절대주의

설교자는 아내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사탄과 예수님의 요구 방식을 대비합니다. 아내가 사탄은 깊은 점진주의자라고 말하자, 설교자는 예수님은 완전한 절대주의자라고 응답합니다. 설교자는 사탄이 결코 모든 것을 요구하지 않고 항상 작은 것만 요구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사탄이 이브에게는 과일 한 입만 먹으라고 했고, 엘리야에게는 가시나무 아래에서 한 오후만 쉬라고 했으며, 다윗에게는 한 번 더 보기만 하라고 했다고 예를 듭니다. 반면 예수님은 부분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전부를 요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고, 모든 것을 버리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부유한 청년이 슬퍼하며 떠나간 장면을 떠올리며, 예수님께서 기준을 낮춰 협상하지 않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드려야 하는데, 그분이 전부를 받으실 만한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해를 바탕으로 설교자는 목회자의 전 삶이 설교에 들어간다고 적용합니다. 누군가 설교 준비에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전 생애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삶 자체가 교인들에게 본이 되고 모범이 되는 것이 베드로가 말하는 바라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17–17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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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당신을 무릅쓰고, 당신 주위에서, 심지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분이 창조자이십니다. 당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깨진 것과 불완전한 악기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분이 고통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와 깨끗한 욕망은 여전히 방법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대부분의 목자들이 가장 큰 유혹을 받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당신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여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권력을 행사하다'는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외방인들이 그들의 백성을 억압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베드로가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상적인 권력을 진단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이들에게 '아니, 당신은 그들이 따를 수 있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양떼는 당신의 말을 주로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의 삶을 지켜보며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는지 판단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당신의 삶이 당신의 신뢰도를 가장 크게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을 대하고, 당신은 자녀들을 양육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삶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 그들을 이끄는 방식입니다. 새约为는 교회가 당신의 삶을 검토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저는 목사님과 그분의 아내들이 '물고기 그릇 속에서 사는 삶'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지겹게 느낍니다. 바로 그렇게 당신은 이끌어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주요 도구 중 하나입니다. 제자 양육은 사람들이 당신의 삶으로 들어와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보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나 또한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당신은 가상의 사생활 구역을 가지지 않습니다. 곡물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 아내는 제가 아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제가 놀랄 만한 말을 합니다. 어느 날 그녀가 제 연구실에 앉아 있었어요. 저는 설교를 준비하며 바쁘게 일하고 있었고, 그녀는 컴퓨터를 들고 제 연구실의 소파에 앉았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궤도에 있었지만, 서로의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할 일이 있지만, 여전히 같은 방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앉아 있었고, 저는 공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말했습니다. '사탄은 깊은 점진주의자입니다.' 저는 '사탄은 깊은 점진주의자인가요? 예수님에 대해 이와 반대되는 말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녀의 질문과 요청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진술이 신학적으로 정확한지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은 완전한 절대주의자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군요. 사탄은 깊은 점진주의자이고, 예수님은 완전한 절대주의자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두 문장이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왜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탄은 결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결코요. 그는 항상 작은 것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이브에게는 과일 한 입만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lijah에게는 가시나무 아래에서 한 오후만 쉬라고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한 번 더 보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항상 작은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작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부분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다루겠습니까? 죽습니다. '나를 제자로 삼아라. 모든 것을 버려라. 뒤를 돌아보는 자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저는 부유한 젊은 사복도가 슬퍼하며 떠나는 것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협상해 보자. 잠시 기준을 낮춰 보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하지 않으십니다. 아니요, 예수님께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져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당신의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전부를 받으실 만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부분을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사역에 자신의 삶을 드린다는 것을 이해하면, 당신의 전 삶이 그 설교에 들어갑니다. 누군가가 '주일 아침 설교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세요?'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전 생애'입니다. 당신의 삶이 설교에 들어갑니다. 당신의 삶이 목양에 들어갑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본이 되고, 형식이 되고, 모범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한 목사님 친구가 있었는데, 그분은 저에게 조언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교인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세요. 너무 가까워지면 그들은 당신을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20대 초반의 젊은 목사였지만, 이 말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와 가까워지고 존경을 잃는다면, 그것은 제 잘못입니다. 문제는 저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저와 가까워질수록, 그들이 저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보는 만큼, 그들의 존경은 더 커져야 합니다. 저는 깨지고 떨어진 존재임을 그들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제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열정을 보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을 바로잡으시기를 거부한다면, 양떼 속에서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교인들은 당신의 본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설교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삶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분을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이 어떻게 대우받는지 더 신경 쓸 수 있습니다.

페라리와 직장을 포기하는 사랑의 방정식

설교자는 자신이 만든 '사랑과 포기의 방정식'을 소개합니다. 한 사람이 나를 얻기 위해 페라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의 값은 페라리를 넘어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나를 얻기 위해 구글 직장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 사랑의 값은 구글보다 못하다는 예를 듭니다. 설교자는 이 등식이 사랑의 가치를 가늠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택하기 위해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는가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옥합 여인의 이야기에 적용합니다. 여인은 거의 전재산에 가까운 옥합을 예수님께 모두 포기했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그녀에게 예수님이 그만큼 소중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포기는 사랑의 값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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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왜 이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삶의 예배에 이런 헌신의 허의를 요청하실까요?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랑에 대한 값을 먹길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실 사랑의 값을 먹긴다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만, 제가 만들어 본 방정식, 사랑과 포기의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어느 정도 사랑의 값이란 걸 먹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나란 사람을 얻기 위해 기꺼이 페라리를 포기할 수 있다면, 나를 향한 그 사람의 사랑이 값이지인데, 페라리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구글 회사 직원이고, 나를 얻기 위해 구글이라는 직장을 포기할 수 없다면, 안타깝게도 나를 포기합니다. 그러면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값은 구글보다 못 합니다. 어찌 보면 이렇게 사랑의 값을 정하는 것이 꽤 우순 일이겠지만, 사랑의 가치를 가늠하는 데는 이 등식이 매우 유용합니다. 내가 이걸 택하기 위해 얼만큼 포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그걸 향한 내 사랑의 값이요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포기란 사랑의 값을 보여줄 수 있는 법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배우 공유와 설교자의 아내

설교자는 아내가 겪은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아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다리다 문이 열렸을 때 배우 공유가 걸어 나왔습니다. 아내는 놀라서 '어머, 세상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숨이 멎는 듯했고, 자기도 모르게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감탄과 이끌림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는 '어머, 세상에'라는 감탄이 경배이고, 그 이끌림이 헌신이라고 적용합니다. 참된 예배는 보상이나 위로를 기대하며 억지로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와 사도들이 변한 이유도 이 목격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즐거움으로, 그분만을 향하여, 이끌리듯 무언가를 허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33–33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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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사야서를 보면 사자들이 주님을 향하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치며 경배가 터져 나옵니다. 이유는 의지적으로 행한 게 아니라, 너무 아름다워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거룩’이란 ‘카도’라는 단어는 온 우주에서 무한히 탁월하고 아름답고 지고한 최고의 상태를 뜻하여서, 동시에 그 거룩을 본 자들의 감탄과 최고의 찬사가 됩니다. 언젠가 제 아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다리다가 문이 열렸는데, 배우 공유가 걸어나오더랍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막고 ‘어머, 세상에’라고는 안 했고, ‘어머, 세상에’라고 하며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참고로 제 앞에서 숨을 잘 쉽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이끌리듯 공유를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답니다. 여러분, ‘어머, 세상에’가 경배입니다. 그리고 그 이끌림이 헌신입니다.

결혼 서약과 영적 간음의 비유

설교자는 결혼이 한 남자와 한 여자만 바라보겠다는 약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결혼한 뒤에도 이전의 연인들과 만남을 이어 간다면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고 탐욕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주님을 향해 이런 모습으로 살 때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십자가의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어서, 두 주인을 모두 놓치기 싫어 계산을 회피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연인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랑에 빠진 뒤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신앙에 적용합니다. 강렬한 끌림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지만, 그 이후에 성도는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두 주인을 섬기려는 태도를 분명히 경계합니다.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사람이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신앙의 응답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2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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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

아내가 말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설교자는 결혼 전 아내에게 자신이 유머가 없는 사람이라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솔직히 말했다고 나눕니다. 그러면서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아내는 설교자에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감사로 받아들이며, 이 정도일 줄 몰랐기에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웃으며 전합니다. 이 일화를 통해 설교자는 우리도 주님을 잘 모른 채 따라왔지만, 그분의 사랑이 좋아서 따라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 없다고 적용합니다.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설교자는 이 고백이 결혼 생활에서 웃음을 주는 말인 동시에, 신앙의 여정에서도 되새길 만한 고백이라고 덧붙입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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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듯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사기치듯 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심과 동시에, 그분을 따를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끊임없이 무리들과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무리 안에는 훗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제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하자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합니다.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놓고, 주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을 가시자 움직여 주지 않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꾸 우리는 그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말씀이 무겁게만 들린다면, 왜 무겁게만 들릴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에 천국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함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지고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비용 계산이 끝났습니다.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는 거저받은 것이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사실 간음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인 무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따르는 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유익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용 계산 없이 제자인 척하는 자들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 자꾸 세상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세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억울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유익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재정이 아까워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고를 뛰어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밤에 한 번, 저를 향해 질문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임정태 목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 안수식을 보면서, 임정태 목사님은 안 보고 저의 10년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 수품 받은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목회 벌써 40년 하셨다고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조금 배운 쪼물레기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전에 목사 수품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비용 계산을 다 끝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비용 계산하는 저를 보면서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내가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비용 계산을 했더라면 선택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이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랑만 생각하고, 그냥 그것이 좋아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한테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니까, 너를 재미있게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솔직하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저희 아내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감사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고 사실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냥 주님의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담임 목사님 지금 40년 목회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만약이란 없지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질문은 안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볼 때,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복음을 증언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귀해서, 매일 강단에서 표현하시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을 써 주시는 거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뚜벅뚜벅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어떠하십니까? 신앙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그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세상에 작은 것 좀 반짝여 보이는 그런 것들의 눈이 멀고, 여전히 주님과 저울질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거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해 두라고. 너를 부인하고, 너보다 더 그 너의 삶의 참 주인 되신 주님을 따르라고. 네가 움켜지고 있는 그 소유를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붙잡고 따르기로 결단하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그 비용 계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 그 영광스러움 앞에, 아까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보고 따르실 수 있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비유

설교자는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의 천국 비유를 인용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는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고 말씀합니다. 설교자는 두 사람이 값의 크기를 알았기 때문에 전부를 내어놓을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비용 계산이 끝났고, 가치를 알아보았기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구원에 적용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거저 받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으므로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맹목적인 무리가 아니라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신다고 말합니다. 또한 비용 계산을 철저히 하지 않는 사람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 얻는 유익과 치러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 보라고 권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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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듯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사기치듯 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심과 동시에, 그분을 따를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끊임없이 무리들과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무리 안에는 훗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제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하자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합니다.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놓고, 주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을 가시자 움직여 주지 않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꾸 우리는 그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말씀이 무겁게만 들린다면, 왜 무겁게만 들릴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에 천국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함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지고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비용 계산이 끝났습니다.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는 거저받은 것이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사실 간음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인 무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따르는 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유익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용 계산 없이 제자인 척하는 자들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 자꾸 세상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세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억울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유익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재정이 아까워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고를 뛰어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밤에 한 번, 저를 향해 질문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임정태 목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 안수식을 보면서, 임정태 목사님은 안 보고 저의 10년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 수품 받은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목회 벌써 40년 하셨다고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조금 배운 쪼물레기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전에 목사 수품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비용 계산을 다 끝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비용 계산하는 저를 보면서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내가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비용 계산을 했더라면 선택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이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랑만 생각하고, 그냥 그것이 좋아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한테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니까, 너를 재미있게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솔직하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저희 아내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감사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고 사실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냥 주님의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담임 목사님 지금 40년 목회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만약이란 없지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질문은 안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볼 때,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복음을 증언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귀해서, 매일 강단에서 표현하시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을 써 주시는 거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뚜벅뚜벅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어떠하십니까? 신앙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그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세상에 작은 것 좀 반짝여 보이는 그런 것들의 눈이 멀고, 여전히 주님과 저울질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거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해 두라고. 너를 부인하고, 너보다 더 그 너의 삶의 참 주인 되신 주님을 따르라고. 네가 움켜지고 있는 그 소유를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붙잡고 따르기로 결단하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그 비용 계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 그 영광스러움 앞에, 아까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보고 따르실 수 있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