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8개 · 1 / 1쪽 · 한 쪽 20개
말기야가 맡은 분문 수리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14절에 나오는 벧학게렘 지방의 지도자 말기야를 소개합니다. 말기야는 예루살렘의 쓰레기와 배설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분문을 중수했습니다. 설교자는 '분'이 오물이나 배설물을 뜻한다고 설명하며, 이 문이 똥문이라 불릴 만큼 궂은 자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리에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팻말을 세우기는 어색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데도 말기야는 이 자리를 기꺼이 맡았습니다. 설교자는 남들이 꺼리는 일을 맡은 그의 모습을 보며, 그런 사람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5
본문 발췌 보기
그런데 여기서도 14절,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다 온 말기야의 이야기는 또 더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14절을 자세히 보시면 그는 분문을 중수합니다. 한글로 분문 하니까 멋있어 보이죠? 여기서 ‘분’은 오물, 배설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덩 게이트’입니다. 예루살렘의 쓰레기와 배설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문입니다. 똥문입니다, 똥문. 그거 지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여기 내가 지었음’이라고 팻말 하기 이상하잖아요. 그런데도 말기야는 여길 맡은 것이죠. 나중에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드고아 귀족들의 거부와 드고아 사람들의 두 구간 수고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5절에 나오는 드고아 귀족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의 작은 성읍이었고, 귀족들은 공사를 돕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원문이 멍에를 매려 하지 않았다는 강한 거부의 표현을 쓴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다고 말하며, 교만이나 느헤미야에 대한 적대감 등을 가능성으로만 언급합니다. 반면 귀족이 아닌 드고아 사람들은 오히려 두 구간을 중수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대비를 통해 성벽 공사에 참여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은 헌신이었음을 적용합니다. 귀족들은 함께 세워지는 성벽을 보는 기쁨을 놓쳤다고 말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13–16문단 · 예화 6
본문 발췌 보기
그런데 모든 소도시 지도자들이 혹은 그 도시 귀족들이 이렇게 성벽 재건에 헌신했던 것은 아닙니다. 5절에 드고아라는 지역의 귀족들이 나오는데요.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던 유다의 작은 성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모스라는 선지자가 바로 이 드고아 도시 출신이에요. 그런데 그 드고아 귀족들은 공사를 전혀 돕지 않았습니다. 한글 성경은 그저 분담하지 않았다 정도로 되어 있지만 원문으로 보면 훨씬 더 강력한 거부의 표현을 써요. 자기 목에 멍에를 매려고 하지 않았다, 멍에를 매고 일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표현입니다.
드고아의 일부 고위층은 성벽 건축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왜 그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교만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강 건너 페르시아에서 총독으로 온 느헤미야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죠. 아무리 그가 자기 동족이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 드고아 귀족들의 행동 덕분에 우리는 이 성벽 재건 공사에 참여하는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헌신이요 섬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었겠습니까? 무거운 돌을 옮겨야 했고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려야 했을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직업이 있었고 돌봐야 할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처럼 참여하지 않을 이유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이유들을 모두 작게 여긴 것이죠. 누군가는 목을 빼고 뒤로 물러섰지만 누군가는 기꺼이 자기 목에 멍에를 매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일을 남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했습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드고아의 사람들은 오히려 5절과 27절에서 두 구간을 중수합니다. 므레못이라는 사람도 4절과 21절에서 두 구간을 중수하고요. 므술람이라는 사람도 4절과 30절에서 두 구간을 중수합니다. 20절에 나오는 바룩이라는 사람은 한 구간을 중수했지만 성경은 그가 그것을 힘써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만 ‘힘써’라는 말이 나와요. 아마도 제일 어려운 구간을 공사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비 오는 파고라에서 우산으로 복음 전도를 돕는 성도들
설교자는 지난주 새생명축제 때 비가 많이 와서 야외 파고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시간이 어려웠던 일을 소개합니다. 파고라는 지붕은 있었지만 옆이 뚫려 있어서 빗물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김성훈 목사님에게서 들은 장면이 설교자에게 깊이 남았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듣는 테이블 뒤쪽에서 몇몇 성도들이 비닐우산을 들고 서 있었는데, 일부는 우산으로 빗물을 막고 일부는 몸으로 막아서 있었습니다. 우산 아래 하의는 다 젖었지만 그들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보며 교회를 함께 세워 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하는 일은 달랐지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세워지기를 함께 바랐다는 점을 적용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35–36문단 · 예화 8
본문 발췌 보기
특히 이 야외 파고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고라가 여러분 아시다시피 지붕은 있어도 옆은 뚫려 있잖아요. 그래서 비가 막 들어왔습니다, 안으로. 그런데 우리 김성훈 목사님으로부터 제가 참 잊히지 않는 그런 장면을 하나 소개받았습니다. 보시면 복음을 듣고 있는 분들의 테이블이 있고 그 뒤쪽으로 몇몇 성도님들이 우산을 들고 서 계시죠. 비닐우산이라 잘 안 보이지만 다 우산 들고 계신 겁니다, 지금. 일차는 비가 들어오는 걸 우산으로 막고, 이차는 자기 몸으로 막아서 서고 있는 것이죠. 비가 이렇게만 내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내리기 때문에 저렇게 서 계시면 우산 밑으로 하의는 다 젖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저게 교회를 함께 세워 가는 것이구나.’ 비가 많이 왔지만 교회를 함께 세워 가니까 그것이 하나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어요. 누군가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 사진에서 누군가는 우산을 들고 그 비를 몸으로 막아서고 있습니다. 서로 하는 일은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함께 바라고 있었던 것은 똑같았죠. 저 테이블에 앉은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클리블랜드 도심 목사의 사역 이야기
설교자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도심 빈민가에서 수십 년간 사역한 목사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목사는 마약 중독과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이웃을 섬겼고, 한 번에 한 명씩 부목사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부목사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2년이었고, 2년이 지나면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는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고 마약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려 애썼지만 실망하여 우울해지고 좌절해 떠났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오래 남을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예수님의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가난을 없앨 생각이나 마약 밀매를 끝낼 생각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면 다섯 명이 다시 빠져드는 현실을 알았고, 자신의 사명은 이 문제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그들이 있을 때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증거를 마리아의 태도와 연결하며, 마리아가 지금 그리스도께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본다고 적용합니다.
R.C. 스프로울 · 2026-10-25
설교 내 5–5문단 · 예화 6
본문 발췌 보기
저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내부 도심가난한 이웃에서 수십 년간 사역한 목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마약 중독과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분은 한 번에 한 명씩 부목사를 데려오셨지만, 그 부목사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두 년이었습니다. 두 년이 지나면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왜 그분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나요?”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실망을 했습니다. 신학교를 나와서 가난한 이웃에 나와 그리스도를 섬기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두 해 동안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마약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분은 이어가셨습니다. “그들이 우울해졌고, 좌절하여 떠났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당신은 이 긴 시간 동안 남아 있을 수 있었나요?”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말씀인가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들어본 바로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인용할 때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을 핑계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왔을 때 가난을 없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클리블랜드에서 마약 밀매를 끝내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저는 교인들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이어가셨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가난한 이웃에서 한 사람을 구원할 때마다, 그 자리를 대체할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마약에서 구원하면, 이 가난한 이웃에서는 다섯 명이 다시 빠져듭니다. 그러나 제 사명은 가난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사명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사명은 이 문제들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그들이 이곳에 있을 때, 제가 이곳에 있을 때 섬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증거입니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태도입니다.” 마리아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장례에 쓸 것을 간직했지만, 이제 저는 이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내일, 모레, 또 그 다음 날에도 가난한 이들을 섬길 수 있지만, 매일이 제가 그리스도께 애정을 표현할 기회는 아닙니다. 결국 이분은 제 형제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낸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와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자로는 무덤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과도한 허영이었을까요? 마리아가 가져온 향유의 열 배를 가져와야 할 사람은 카이파스였습니다. 카이파스는 거기서 말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표적들을 보았습니다. 로마 군대가 오든 말든, 우리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카이파스에게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실용적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에게도 실용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 이 허영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지 2천 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저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 이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행위, 이 예배의 행위, 이 찬양과 영광의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원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용주의와 즉흥주의 철학에 치명상을 입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실용주의 철학이 결국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어도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영혼을 위하여 무엇을 바꾸어 놓겠는가? 영혼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당신의 명성인가? 당신의 편리인가? 일 년의 급료인가? 안전인가?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세상 전체를 합쳐도, 당신의 영혼의 가치를 바꾸어 놓을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 우리는 마리아의 증거를 기뻐합니다. 우리는 카이파스의 예를 회개합니다. 주님, 우리가 종종 두려움과 자존심으로 인해 즉흥적인 길을 택하는 것을. 아버지, 첫 세기의 성도들이 실용주의를 거부하고 주님께 허영스럽게 봉사했던 용기를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설교자는 요한복음 13장의 최후의 만찬 장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똑같이 씻어 주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발을 씻는 일이 단순히 죄를 씻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위치로 내려가 눈높이에서 들어주고 교제하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에 누가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경지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과의 기준 안에서 낮아진 상태로 서로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제를 단계나 급으로 나누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성도는 서로 높여 주고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5
본문 발췌 보기
46절은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 함께 46절을 읽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는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마지막 만찬, 즉 최후의 만찬이 나와요. 거기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똑같이 씻어 줘라'고 말씀하십니다. 발을 씻는다는 건 죄를 같이 씻어 주는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사람의 눈높이에 가서 들어주고 교제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생각이나 의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목적은 그 사람의 위치에 들어가서 같이 하는 거예요. 동일한 선상에서 그 사람을 통해 교제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죠? '이 사람이 낮아'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다 죄인이기 때문에 누가 높고 낫고 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A를 깨달았고, 어떤 사람이 B를 깨달았어요. 그들이 만나서 교제하면, 풍요롭고 좋겠죠.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누가 있나요? 예수님이 있으니까요. 좋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경지와 이 사람의 경지는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람의 경지를 향해서 가야 합니까? 아니요.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기준이 있어요. 하나님과 여러분의 만남의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기준 안에서 낮아진 상태에서 서로 교제하면, 주님의 은혜가 있고, 서로 오해가 아니라 높고 낮음이 없는 교제가 됩니다. 교제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얘기한 걸 들어주고,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해야 돼'라는 명령이 아니라, 서로 은혜 나누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교제, 코인노니아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교제에 대해 도시락을 만드는 거예요. 원 스텝, 투 스텝, 쓰리 스텝, 4단계 이런 게 아니에요. 교제는 주님 안에서 하나면 돼요. 거기에 그레이드를 나누거나, 어떤 급을 나누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만한 존재가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걸 사랑하고 서로 높여 주는 게 맞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방법은 내려가서 씻어 주고,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주셨어요. 그게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과 제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만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믿음을 가지고 누구를 권면하고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아까 처음에 나온 내용은 그런 거예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돼 있어요. 그 가르침을 받으면, 위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에요. 당시의 초대교회는 그렇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성령의 은혜로 여러분 개개인이 교회예요. 교회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역할의 본질은, 서로 낮아진 상태에서 죽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봐야 한다는 거예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돼 있어요. 이건 성만찬이죠. 떡은 말씀이죠. 누가복음 22장 19절을 보겠습니다. '또 떡을 가져다가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고 돼 있어요. 떡은 몸,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기념해야 하는 거예요. 공동체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는 건,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서예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교제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교제하면서 내가 높아지거나, 여러분이 높아지면 안 돼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높아져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자리에서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그 역할들이 안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이 안 돼요. 그걸 기념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라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얘기합니다.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거예요. 육적인 건 제사상의 음식을 먹는 건 맞지만, 서로 교제하면서 음식을 나누고, 떡을 떼고 음료를 마시는 건 맞지만,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건 영적인 삶, 영적인 풍요로움을 얘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5절에서 58절을 보겠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돼 있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먹은 사람들인 거예요. 그럼 그 안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리고 얘기합니다. '이 떡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해요. 영원히 산다. 이 떡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 사람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렇죠? 우리 천국 백성이잖아요. 이미 하늘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이요. 그런데도 여기서 우리가 '높다, 낮다'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그 목적을 만들려고 하는 사탄에게 속는 게 문제예요. 그것들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시고, 주님께 가져가시면, 주님께서 다 흠량하시고 다 해결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미 해결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몸이고 참된 피라. 이것을 먹는 자는 영원하다. 이 말씀이 성만찬의 의미예요. 우리가 이미 성만찬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주님을 기념해야 해요. 계속해서 성령님과 함께 기념하는 삶이 되면, 어떠한 교제든 풍성하게 누릴 수 있고, 먹고 마실 수 있어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은 초교의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서로 주님 안에서 기꺼이 주님을 꺼내 놓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돼 있어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고,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해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사건을 우리가 알고 있어요. 세상 가운데 주님과 없을 때,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거예요. 그 사실들, 그 영적인 교제들이 있을 거예요. 그 하나됨을 왜 바울이 강조하겠어요? 그동안 바울 서신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요. 결국 예수님을 다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힘든 상황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예수 안에 하나라는 걸 반증하려는 거예요. 성령이 너희로 하나되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교제 속에서 분열을 일으킬 수 있겠어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갇힌 자들이기 때문에, 절대 분열이 없어요. 분열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문제인 거예요. 내가 문제인 거지,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을 발견해서 서로 주님과 사귐이 있을 수 있게끔, 계속해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 초대교회도 이러한 문제가 없었을까? 있었어요.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로 버텼습니까?
언어인팅 장로님들의 화장실 청소
언어인팅 특별 집회에서 장로님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화장실 청소와 주차 안내 봉사였습니다. 설교자는 장로님이 화장실 청소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럼에도 장로님들은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끼고 화장실 물에 손을 넣어 깨끗하게 청소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세미나 참석자들은 '강의보다 더 위대한 설교였다'고 말했습니다. 참석자들은 교회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놀라워했고, 돌아가서 자기 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섬김이 '저희로 하여금 보게 하옵소서, 알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와 이어진다고 적용합니다. 또 재난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그리스도인들과 장애인을 돕는 교인들의 헌신을 예로 들며, 그것이 진짜 예배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섬김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용조 · 2026-10-24
설교 내 18–18문단 · 예화 6
본문 발췌 보기
자, 25절 26절 보십시오. 시작. '오신 하나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고, 저희도 아버지를 부르신 것 같으의 이름을 저희로 알게 하여 또 알게 하리니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 아 지난번에요, 우리 언어인팅 때 우리 장로님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임무가 화장실 청소였습니다. 그리고 주차 안내 봉사였어요. 물론 장로님이 화장실 청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런 특별한 집회 때 우리 장로님들이 앞치마를 두르시고 고무 장갑을 끼고 화장실 물에 손을 넣어서 짓고 깨끗하게 청소하시는 일을 했어요. 이번 세미나에 오셨던 분들이 그걸 보고 뭐라 그런 줄 아세요? '강의보다 더 위대한 설교였다' 그러더라고. 그걸 보고 놀란 거예요. 그리고 다 말없이 '와, 교회는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가?'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 그리고 그분들이 자기 교회에 가서 또 그 비슷한 일을 하시더라고. 이게 뭐냐면 '저희로 하여금 보게 하옵소서. 저희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나라가 어려움이 생기고요. 지진이 나고 재앙이 남기면 제일 먼저 뛰어가는 사람들이 사실 그리스도인들이에요. 전 세계 전쟁 지역에 뛰어들어가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면 '와, 종교는 달라도 저 사람들은 참 좋은 일을 한다'는 말이에요. 당신의 희생, 당신의 포기, 당신의 헌신. 근데요. 화장실 청소하는 거 쉬워요? 안 쉬워요? 안 쉽지요. 매연 가스가 많은 주차장에서 빨간 등 들고 왔다 이거 하는 거 쉬워요, 안 쉬워요? 안 쉽죠? 그데 그거를 하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감동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쓰레기 짓는 모습을 보고요. 요즘 저희 교회 JDS가 많이 생겼는데, 내가 늘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감동하는 건요. 그거 섬기려고 그냥 뭐 보 딱 보 씌우고 청소하고, 음식 만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뒤에서 그걸 하더라고요. 빛도 안 나는 일인데, 아무튼 그거 열심히 해요. 근데 가서 이렇게 보고 있으면 '와, 와, 참 좋다, 참 아름답다, 참 감동적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교회 안에 그런게 많아요. 장애인들 돕는 사람들 보면요. 한 사람을 돕기 위하여 그 수고하고, 남멀리 가서 도와주고, 휠어 밀어 주고, 그들 앞길을 만들어 주는 걸 이렇게 보면요. 저게 진짜 예배지. 저게 예배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거예요. '세상이 당신들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십시오.'
결과를 바라지 않는 간병인과 친구
설교자는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달리며 개선이 없는데도 계속 돌보는 간병인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간병인은 어디로 가는지 거의 알면서도 그 어려운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죄로 고통받는 친구를 인내심 있게 돕는 사람을 함께 예로 듭니다. 그 친구가 다시 죄에 빠져도 그는 여전히 도와줍니다. 또 어려움을 겪는 젊은 어머니를 조용히 지지하는 노인 여성도 그녀가 안정되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사랑을 결과로 측정하면 가장 오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포기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가장 깊은 필요가 있는 곳일수록 보상이 빨리 오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둔 사랑의 신학을 가르치고, 불완전하더라도 성령의 힘으로 인내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5–5문단 · 예화 5
본문 발췌 보기
그분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도움이 가장 쉬운 사람만을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으로 하는 일은 단순한 일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일은 쉬워지나요? 만약 그런 사랑이 있다면 일은 쉬워지나요? 절대 아닙니다. 사랑으로 동기화된 일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에너지를 새로워주는 일은 피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과가 노동이 되면 우리의 힘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하늘의 사랑은 피로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당신을 그 노동 속에서 지지해 줍니다. 그 사랑은 일을 쉬워하게 하지 않습니다. 비용을 무릅쓰고 일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그분은 소중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욕구와 필요를 부담으로 받아들이고, 보상을 걱정하지 않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처럼요, 그렇죠?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내가 이전에 예를 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비용을 표현합니다. 교회가 서로에게 어떻게 섬김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여, 우리가 사랑을 측정하는 방식은 사랑이 무언가를 주었는지, 눈에 보이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주었는지로 판단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도운 사람이 회복되었는지, 관계가 회복되었는지, 우리의 노력이 감사받았는지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일은 종종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사람과 달리며 개선이 없이 달리고, 어디로 가는지 거의 알아차리면서도 여전히 그 어려운 일을 하는 간병인. 죄로 고통받는 친구와 인내심 있게 일하는 친구는 그 친구가 다시 빠져들어도 여전히 도와줍니다. 어려움을 겪는 젊은 어머니를 조용히 지지하는 노인 여성이 그녀가 완전히 안정되기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결과를 사랑의 가치 기준으로 삼는다면, 사람들이 가장 오래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때에 그들을 포기하거나, 우리의 믿음을 그들의 부담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가장 깊은 필요 상황은 우리의 노력이 빠르게 보상받을 가능성이 가장 낮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가는 쓴 여정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본질에 뿌리를 둔 사랑의 신학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것이 성화의 수단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제공하고 받는 불완전한 도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야 할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이나 느린 반응으로 인해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는 인내로운 사랑입니다. 이 힘은 무한합니다. 좋은 방식으로 시험해 보세요.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행함을 낳고, 사랑이 행함을 낳는다면, 믿는 자가 특히 어려운 시기에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이 그를 계속하게 하겠습니까? 이제 바울이 테살로니가인들에게 말한 다음 내용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지속적인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이는 제3, 마지막 주제입니다. 기억할 만한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에 뿌리를 둔 끈기로 스스로 지속됩니다. 테살로니카의 젊은 교회가 직면한 주요 문제는 거짓 교리에 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이 거짓 교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습니다. 이 거짓 교리의 출처는 약간 불확실하고 애매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거짓말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1세기 교회에서 다른 곳에서도 문제였습니다. 이 거짓말은 가르침으로 전해졌습니다. 뒤에 기록된 제2테살로니가서에서 거짓 선생들은 바울 자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위장된 예언이나 서신을 인용하며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마치 바울이 그 거짓말에 가담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울이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끈기로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것이 그들의 기억할 만한 믿음의 일부였음을 기억합니다. 이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성도들이 다시금 열린 이교적 생활 방식에서 최근에 개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속한 사회가 원래 기독교 이념에 기반을 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점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에게 강한 소망을 은혜롭게 심어 주셨습니다. 많은 해설가들이 지적했듯이, '인내'로 번역되는 단어는 오래된 번역에서 자주 사용되는 '인내'보다 더 적절한 번역은 '지속'입니다. 지속적인 소망 대신 인내로운 소망. 우리 현대인의 귀에 들리면, 인내는 단순히 조용하고 수동적인 표현처럼 들립니다. 불평 없이 기다릴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더 강력합니다. 다시 레온 모리스의 지혜를 빌리자면, 이는 조용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역경에 직면한 활발한 회복력입니다. 한 사람이 말했듯이, 타오르는 소망입니다. 타오르는 소망입니다.
24살 교육전도사를 맞이한 목장 어르신들의 섬김
설교자는 15년 전 24살에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교육전도사로 첫 사역을 시작했던 이야기를 꺼냅니다. 유년부를 맡으러 갔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사역을 맡게 되었고, 그중 하나는 연세 있는 성도들이 모인 목장의 목자로 파송되는 일이었습니다. 함께 사무실을 쓰던 여전도사님은 "가서 사랑 많이 받겠네"라고 말씀하셨는데, 설교자는 그 뜻을 가서 알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목장의 막내 성도는 77세, 첫째 언니 성도는 83세였고, 설교자는 당시 24살이었으니 어르신들 눈에는 아기 같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방문할 때마다 어르신들은 두꺼운 방석을 깔아 주며 "우리 전도사님 오셨다"며 앉으라고 하셨고, 여름에도 방석을 깔아 주셨습니다. 모임이 늘 점심시간과 겹쳐 식사 준비가 부담되실까 봐 설교자는 밥을 먹고 방문했는데, 이를 말씀드리자 모임과 예배가 끝난 3시쯤 어르신들은 저녁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젊은 사람이 돌도 씹어서 소화시킬 나이에 못 먹냐"는 말씀도 들었다고 합니다. 이번 말씀을 준비하며 설교자는 그 성도들이 자신에게 아론과 훌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칼을 들고 싸우던 여호수아 같았는데, 성도들은 자신을 세우고 성장하도록 기도해 주셨고 "큰 목사님 되라"고 격려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그 성도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설교자는 고백합니다.
이원희 · 2026-10-21
설교 내 3–5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첫 사역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 제가 15년 전에 처음 사역을 시작을 했어요. 24살에 이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을 했는데요. 신학 대학원을 다니면서 주중에 공부를 하면서 한 부서의 유년부라는 부서의 책임자로 교육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근데 저는 유년부 사역을 하러 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사역을 정말 많이 맡기시더라고요. 어떤 일을 맡겼냐면 이런 일을 맡겼습니다.
이 교회에, 우리로 따지면 다락방이죠. 이곳은 목장이라는 곳이 있었는데요. 교역자가 이 목장에 목자로 파송이 되는 거예요. 근데 모든 목장은 아니었고요.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 아마도 제 기억엔 우리 행복한 모임 성도님들 연세쯤 되시는 목장에 저를 파송을 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사무실을 같이 쓰는 전도사님, 여전도사님께서 "아이고, 가서 사랑 많이 받겠네"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요. 가서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우니까 사진은 좀 내려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네. 예. 사진이 안 내려가나요? 네. 예. 저희 목장에 제일 막내 성도님께서 77세셨습니다. 첫째 언니 성도님이 83세셨어요. 딱 우리 행복한 모임 성도님들 연세였습니다. 근데 제가 그때 24살이었으니까, 그분들이 볼 때 얼마나 그냥 아기 같았겠습니까? 근데도 제가 방문을 하면, 집집마다 방문을 하는 시기였어요. 방문을 하면 어떤 가정이든지 꼭 두꺼운 방석을 깔고, "아이고, 우리 전도사님 오셨다"고, "우리 전도사님 오셨다"고 여기 앉으시라고 하시는 거예요. 겨울에야 따뜻해서 너무 좋았지만, 여름에도 꼭 그 두꺼운 방석을 이렇게 깔아 주시더라고요. 뭐 식사 하셨냐고 물어보시면서, 모임이 항상 2시였거든요. 꼭 점심 시간이 겹쳐 있었어요. 근데 항상 가면은 또 식사 준비하시랴 이런 게 부담되실까 봐 제가 밥을 먹고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임에 가서 "오늘은 제가 밥을 먹고 왔어요"라고 이야기를 드렸더니, 모임이 탁 끝나고 한 3시쯤 되니까 예배를 드리고 3시쯤 되니까 저녁 드셔야죠 하면서 3시에 저녁을 준비를 하시더라고요. "아우, 젊은 사람이 뭐 돌도 씹어서 소화시킬 나이에 못 먹냐"라고 하시더라고요. 거기 나오시는 성도님들 중에서 초신자 성도님들도 굉장히 많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는데, [콧방귀]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걸 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그 성도님들이 저에게 아론과 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어설프게 칼을 들고 르비딘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던 여호수아였고, 저를 세워 주시고 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물론 이렇게 큰 목사, 작은 목사 이런 건 없지만, 꼭 항상 그런 말씀을 해 주셨어요. "아유, 큰 목사님 되라고." 저는 이미 뭐 키가 다 컸는데, 얼마나 더 크라고 하는지, 큰 목사님 되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또 그 성도님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