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11개 · 1 / 1쪽 · 한 쪽 20개
맨발의 권투 선수 비유
설교자는 바울이 겪은 네 가지 고난, 곤경과 혼란, 박해와 쓰러짐을 설명하기 위해 권투 경기의 장면을 듭니다. 맨발로 링에 선 권투 선수는 싸움이 직업이지만, 모든 주먹에 쓰러지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는 분노와 고통 속에서 '나는 떠나야겠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싸우는 사람이 여전히 링 안에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링 위에서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청중에게 이런 경험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설교자는 쓰러짐이 싸움의 끝이 아니라 싸움 가운데 겪는 현실이라고 설명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4
설교 내 9–9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이삭이 바울이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랑심과 교만, 자기 확신,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나 배경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견디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 버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읽다 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모세에게 '내가 바로에게 가라'고 하자, 모세는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선택이에요. 제 형을 생각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말만 하고 능력은 없어요. 저를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려서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바로, 저는 여기 왔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에게 '용감한 장군이여, 너를 보냈다'고 하자, 기드온은 '말씀하신 분이 저를 말씀하신 겁니까? 저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2절을 보세요. '주께서 보시는 이는 누구인가 하시되, 영혼이 겸손하고 부끄러워하며 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원리가 드러납니다. 시험을 피하면 축복을 놓치고, 우리의 약함을 감추려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과 자랑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정의상 부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이 되었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대해야 할지를 보면, 바울이 2코린도서를 마무리하면서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반복합니다. 얼마나 솔직한 말입니까? '내가 머리가 커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바울은 사도이니 머리가 커질 리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교만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훌륭한 배경, 훌륭한 대학, 훌륭한 신학과 율법을 지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 배경이 자신의 장점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이 사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3인칭으로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끌려 올라갔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겁니다. 저는 육체에 박힌 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할 때 강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멈추어 보세요.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북미의 현대적 복음주의의 방향을 따르며, 영웅들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강조하며,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면, 바울은 2코린도서 8장과 9장에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죠. 그러나 그는 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가지 앱이 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바울의 앱입니다. '곤경'입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녀들, 나는 너희를 보며 혼란스럽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가 항상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박해'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기독교인을 사냥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박해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격투나 권투 경기처럼 말입니다. 맨발로 서 있는 권투 선수, 그의 직업은 싸움입니다. 그는 모든 주먹에 의해 쓰러지고 상처 입으며, 분노와 고통 속에서 '나는 떠나야겠다. 나는 떠나야겠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링 위에서 쓰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래 전 스코틀랜드에서, 제게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던 한 분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제 머릿속에서 전설이 된, 커다란 체구를 가진 콜린스 씨입니다. 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모습
설교자는 야고보서 5장 7절의 농부를 길이 참음의 본보기로 소개합니다. 유대 농경 배경에서 농부는 가을 무렵 씨를 뿌리고 봄 무렵 수확하는데, 씨를 뿌릴 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오랫동안 씨가 자라기를 고대합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이 '길이 참으라'는 말씀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합니다. 길이 참는다는 것은 스스로 서둘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인정하며 판단을 유보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본문에서 '길이 참으라'가 세 번 반복되고, '굳건하게 하라'는 말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의 굳건한 마음과 같은 단어라고 짚습니다. 이를 근거로 설교자는 인내가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가 인내로 시작해 인내로 마무리되고, 인내를 통해 신앙의 여러 요소가 균형 있게 세워져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점도 덧붙입니다. 그래서 성도도 농부가 열매를 바라보듯 재림의 때를 바라보며 인내의 열매를 맺어 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토요 묵상 말씀은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눈밖에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큰 일교 차이에 우리 성도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을 견디는 소망의 인내'라는 제목으로 함께 야고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낸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 다 아시죠, 여러분? 그래서 그 믿음, 그 오늘과 미래의 사이에 있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 믿음의 대표적인 행함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5장에는 앞절 말씀에 보면 의인이 가난한 종이 착취받고 억압받는 부자에 의해서 핍박받는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인내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는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7절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길이 참으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길이 참다는 것은 스스로 바로바로 적시적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이 참을 때에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길이 참는 자들의 좋은 예가 되는 사람이 바로 농부들인 것이죠. 농부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따라서 그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죠. 이 유대 어 배경에서 농부들은 파종기 그러니까 우리나라 계절로 따지면 한 10월쯤 됩니다. 10월 전으로 해서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고요. 그리고 수확기 한 4월쯤 됩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그때 전으로 수확을 하게 되는데 씨를 뿌릴 때에 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씨가 그 비에 의해서 자라나기를 고대하는 농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길이 참으라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시작할 때 인내와 기도의 말씀으로 시작했다가 또 마지막도 오늘 인내의 말씀이고 내일 또 나눌 말씀인 야고보서 다음 장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을 했었죠. 1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리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또 이렇게 인내에 관한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그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신앙에 여러 요소들이 있거든요. 신앙에도 여러 요소들이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그 모든 요소들을 균형 있게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설명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죠. 성을 향해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온전하게 준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말씀으로는 그렇죠.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뭐 좀 편하게 설명하자면 복받을 그릇이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데 인내를 통해서 그 받을 그릇이 더 넓어지고 빈틈 없어지고 하는 일들이 바로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라. 오늘 두 점 말씀에서 무려 세 번이나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굳건하게 되어서 굳건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굳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는 그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보하게 되어서 마음을 고정시키는 단어. 그것이 바로 굳건하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고정시켜서 확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 인내는 여러분, 소극적이거나 그냥 수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아주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의 열매 우리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보면 첫 번째 해당되는 것이 사랑은 오래 참고 다른 것 많이 있지만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드리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말씀에 보면 그 성령의 열매 중에서 네 번째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오래참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여러 가지 열매들이 많이 있지만 오래참음의 열매, 오래참음이 바로 인내가 바로 열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은 오래 참는 상황은 그렇게 결과를 좋은 결과를 맺어지는 때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시험을 앞둔 수험생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앞두고 인내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힘겹고 또 많은 수고가 요구되어지는 그러한 과정 중에 있는 단계가 바로 인내 오래 참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열매라고 말씀을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많은 분들 중에서 인내의 열매 과정 중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이 시간도 열매 맺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농부가 최종적인 귀한 열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최종 시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공의가 세워지고 모든 정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많은 성도들처럼 우리는 길이 참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자, 두 번째는 인내는 오늘 야고보서에 보면 많은 언어의 교훈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내는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 제가 언어의 표현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금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데요. 첫 번째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원망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9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요. 그 단어는 한탄하다. 또 두 주변 사람에게 비탄을 고백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원망, 불평, 좌절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 오늘 본문 문맥상으로 보면 어떤 부자에게 그런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통함을 가지고 주의 형제들에게 와서 원망, 불평, 힘든 말,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형제들 내에서는 또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원망하지 말라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 그 한탄하는 마음, 비탄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이죠.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 헤아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는 바로 원망이 아니라 있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그랬고요. 25년 동안 출산되지 못하게 하다가 25년 후에 열매 맺지 않습니까? 모세도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원망 불평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말씀, 우리 1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볼까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여러분, 맹세하는 것은 또 다른 그 원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내가 재단을 하려고 하는 유혹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미래를 내가 재단하려고 하는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하나도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앞장 4장 말씀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어느 마을로 가서 장사하여 1년 후에는 많은 이익을 보리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죠? 4장 14절 말씀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런데 그 안개는 몇 시간 지나면 오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그런 안개와 같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죠. 원망을 하지 말고 맹세를 하지 말라.
아브라함과 모세가 오래 기다린 시간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셨던 성경의 인물들을 예로 듭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자녀를 얻지 못하다가 25년 후에 열매를 맺었다고 설명합니다. 모세 역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기다림이 그냥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결국 열매로 이어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과정에서 원망과 불평을 입술로 쏟아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원망을 쉽게 주변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마음의 한탄과 비탄을 하나님께 가져갈 때 그분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신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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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묵상 말씀은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눈밖에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큰 일교 차이에 우리 성도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을 견디는 소망의 인내'라는 제목으로 함께 야고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낸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 다 아시죠, 여러분? 그래서 그 믿음, 그 오늘과 미래의 사이에 있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 믿음의 대표적인 행함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5장에는 앞절 말씀에 보면 의인이 가난한 종이 착취받고 억압받는 부자에 의해서 핍박받는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인내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는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7절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길이 참으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길이 참다는 것은 스스로 바로바로 적시적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이 참을 때에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길이 참는 자들의 좋은 예가 되는 사람이 바로 농부들인 것이죠. 농부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따라서 그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죠. 이 유대 어 배경에서 농부들은 파종기 그러니까 우리나라 계절로 따지면 한 10월쯤 됩니다. 10월 전으로 해서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고요. 그리고 수확기 한 4월쯤 됩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그때 전으로 수확을 하게 되는데 씨를 뿌릴 때에 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씨가 그 비에 의해서 자라나기를 고대하는 농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길이 참으라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시작할 때 인내와 기도의 말씀으로 시작했다가 또 마지막도 오늘 인내의 말씀이고 내일 또 나눌 말씀인 야고보서 다음 장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을 했었죠. 1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리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또 이렇게 인내에 관한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그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신앙에 여러 요소들이 있거든요. 신앙에도 여러 요소들이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그 모든 요소들을 균형 있게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설명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죠. 성을 향해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온전하게 준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말씀으로는 그렇죠.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뭐 좀 편하게 설명하자면 복받을 그릇이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데 인내를 통해서 그 받을 그릇이 더 넓어지고 빈틈 없어지고 하는 일들이 바로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라. 오늘 두 점 말씀에서 무려 세 번이나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굳건하게 되어서 굳건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굳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는 그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보하게 되어서 마음을 고정시키는 단어. 그것이 바로 굳건하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고정시켜서 확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 인내는 여러분, 소극적이거나 그냥 수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아주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의 열매 우리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보면 첫 번째 해당되는 것이 사랑은 오래 참고 다른 것 많이 있지만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드리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말씀에 보면 그 성령의 열매 중에서 네 번째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오래참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여러 가지 열매들이 많이 있지만 오래참음의 열매, 오래참음이 바로 인내가 바로 열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은 오래 참는 상황은 그렇게 결과를 좋은 결과를 맺어지는 때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시험을 앞둔 수험생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앞두고 인내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힘겹고 또 많은 수고가 요구되어지는 그러한 과정 중에 있는 단계가 바로 인내 오래 참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열매라고 말씀을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많은 분들 중에서 인내의 열매 과정 중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이 시간도 열매 맺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농부가 최종적인 귀한 열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최종 시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공의가 세워지고 모든 정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많은 성도들처럼 우리는 길이 참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자, 두 번째는 인내는 오늘 야고보서에 보면 많은 언어의 교훈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내는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 제가 언어의 표현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금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데요. 첫 번째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원망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9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요. 그 단어는 한탄하다. 또 두 주변 사람에게 비탄을 고백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원망, 불평, 좌절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 오늘 본문 문맥상으로 보면 어떤 부자에게 그런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통함을 가지고 주의 형제들에게 와서 원망, 불평, 힘든 말,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형제들 내에서는 또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원망하지 말라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 그 한탄하는 마음, 비탄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이죠.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 헤아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는 바로 원망이 아니라 있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그랬고요. 25년 동안 출산되지 못하게 하다가 25년 후에 열매 맺지 않습니까? 모세도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원망 불평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말씀, 우리 1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볼까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여러분, 맹세하는 것은 또 다른 그 원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내가 재단을 하려고 하는 유혹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미래를 내가 재단하려고 하는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하나도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앞장 4장 말씀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어느 마을로 가서 장사하여 1년 후에는 많은 이익을 보리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죠? 4장 14절 말씀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런데 그 안개는 몇 시간 지나면 오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그런 안개와 같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죠. 원망을 하지 말고 맹세를 하지 말라.
시험을 앞둔 수험생의 오래 참음
설교자는 인내를 결과를 앞둔 시간으로 설명하며, 시험을 앞둔 수험생을 예로 듭니다. 수험생은 합격이라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래 참으며 힘겹고 많은 수고가 요구되는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설교자는 이처럼 인내는 유쾌하지 않은 시간일 수 있지만, 바로 그 과정이 열매로 이어지는 단계라고 말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 오래 참음으로 시작한다는 말씀과,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오래참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씀을 함께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인내의 과정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지금 이 시간도 열매를 맺는 시간이라고 격려합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믿음으로 버티며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적용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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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묵상 말씀은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눈밖에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큰 일교 차이에 우리 성도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을 견디는 소망의 인내'라는 제목으로 함께 야고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낸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 다 아시죠, 여러분? 그래서 그 믿음, 그 오늘과 미래의 사이에 있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 믿음의 대표적인 행함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5장에는 앞절 말씀에 보면 의인이 가난한 종이 착취받고 억압받는 부자에 의해서 핍박받는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인내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는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7절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길이 참으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길이 참다는 것은 스스로 바로바로 적시적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이 참을 때에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길이 참는 자들의 좋은 예가 되는 사람이 바로 농부들인 것이죠. 농부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따라서 그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죠. 이 유대 어 배경에서 농부들은 파종기 그러니까 우리나라 계절로 따지면 한 10월쯤 됩니다. 10월 전으로 해서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고요. 그리고 수확기 한 4월쯤 됩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그때 전으로 수확을 하게 되는데 씨를 뿌릴 때에 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씨가 그 비에 의해서 자라나기를 고대하는 농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길이 참으라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시작할 때 인내와 기도의 말씀으로 시작했다가 또 마지막도 오늘 인내의 말씀이고 내일 또 나눌 말씀인 야고보서 다음 장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을 했었죠. 1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리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또 이렇게 인내에 관한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그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신앙에 여러 요소들이 있거든요. 신앙에도 여러 요소들이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그 모든 요소들을 균형 있게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설명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죠. 성을 향해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온전하게 준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말씀으로는 그렇죠.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뭐 좀 편하게 설명하자면 복받을 그릇이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데 인내를 통해서 그 받을 그릇이 더 넓어지고 빈틈 없어지고 하는 일들이 바로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라. 오늘 두 점 말씀에서 무려 세 번이나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굳건하게 되어서 굳건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굳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는 그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보하게 되어서 마음을 고정시키는 단어. 그것이 바로 굳건하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고정시켜서 확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 인내는 여러분, 소극적이거나 그냥 수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아주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의 열매 우리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보면 첫 번째 해당되는 것이 사랑은 오래 참고 다른 것 많이 있지만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드리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말씀에 보면 그 성령의 열매 중에서 네 번째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오래참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여러 가지 열매들이 많이 있지만 오래참음의 열매, 오래참음이 바로 인내가 바로 열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은 오래 참는 상황은 그렇게 결과를 좋은 결과를 맺어지는 때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시험을 앞둔 수험생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앞두고 인내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힘겹고 또 많은 수고가 요구되어지는 그러한 과정 중에 있는 단계가 바로 인내 오래 참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열매라고 말씀을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많은 분들 중에서 인내의 열매 과정 중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이 시간도 열매 맺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농부가 최종적인 귀한 열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최종 시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공의가 세워지고 모든 정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많은 성도들처럼 우리는 길이 참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자, 두 번째는 인내는 오늘 야고보서에 보면 많은 언어의 교훈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내는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 제가 언어의 표현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금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데요. 첫 번째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원망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9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요. 그 단어는 한탄하다. 또 두 주변 사람에게 비탄을 고백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원망, 불평, 좌절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 오늘 본문 문맥상으로 보면 어떤 부자에게 그런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통함을 가지고 주의 형제들에게 와서 원망, 불평, 힘든 말,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형제들 내에서는 또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원망하지 말라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 그 한탄하는 마음, 비탄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이죠.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 헤아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는 바로 원망이 아니라 있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그랬고요. 25년 동안 출산되지 못하게 하다가 25년 후에 열매 맺지 않습니까? 모세도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원망 불평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말씀, 우리 1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볼까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여러분, 맹세하는 것은 또 다른 그 원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내가 재단을 하려고 하는 유혹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미래를 내가 재단하려고 하는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하나도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앞장 4장 말씀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어느 마을로 가서 장사하여 1년 후에는 많은 이익을 보리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죠? 4장 14절 말씀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런데 그 안개는 몇 시간 지나면 오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그런 안개와 같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죠. 원망을 하지 말고 맹세를 하지 말라.
욥의 인내와 그가 받은 결말
설교자는 욥의 이야기를 통해 인내와 하나님이 주신 결말을 설명합니다. 욥은 천상에서 있었던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명백하게 알지 못한 채 소유와 몸에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라'라고 고백하며 끝까지 버텼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욥이 중간에 한탄하고 친구들에게 원망하며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했지만, 큰 흐름에서는 인내했다고 봅니다. 욥기 19장 25절과 26절의 대속자에 대한 고백은 부활 신앙을 보여 주며, 인내의 과정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열매가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욥의 마지막 결말을 통해 인내 끝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적용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로 나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4–6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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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인내한 자를 복되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인내의 신학이 있습니다. 1장 12절 말씀에 보면, '시험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뎌내는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인내의 끝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하나님께서 예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예로 든 욥의 인내를 보았습니다. 욥의 인내는 어떻습니까? 욥은 천상의 대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명백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온전하고 순전하고 정직하여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이 세상에 욕 같은 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자, 하나님께서 욥의 소유와 몸을 치셨습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도 욥은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라'고 고백하면서 끝까지 버텼습니다.
물론 욥은 중간중간 생애를 한탄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강하게 원망하기도 하였으며,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 욥은 인내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욥기 16장 19절 말씀을 보면, '이제 나의 정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의 인내 과정 중에서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 중보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욥기 19장 25절과 26절 말씀을 보면,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며, 내 가족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부활 신앙을 소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내의 과정 중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열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은 그런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11절 하반절에 보면, '주께서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원어적 표현은 '많은 창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연민이나 긍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로우셔서, 욥이 부분적으로는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할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100% 완전하게 신뢰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욥의 인내를 인정해 주시고, 그 과정 속에 많은 하나님의 열매를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욥의 마지막 결말은 어떻습니까? 42장 말씀에 보면, 친구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욥이 중보자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욥의 소유물이 두 배가 되었고, 예쁜 자녀들도 많이 두었습니다. 그러나 욥기 42장 맨끝절 말씀은 '용이 죽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욥의 결말은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인내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최종적으로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열매를 맺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곳으로 결말을 맺습니다. 그러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결과를 바라지 않는 간병인과 친구
설교자는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달리며 개선이 없는데도 계속 돌보는 간병인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간병인은 어디로 가는지 거의 알면서도 그 어려운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죄로 고통받는 친구를 인내심 있게 돕는 사람을 함께 예로 듭니다. 그 친구가 다시 죄에 빠져도 그는 여전히 도와줍니다. 또 어려움을 겪는 젊은 어머니를 조용히 지지하는 노인 여성도 그녀가 안정되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사랑을 결과로 측정하면 가장 오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포기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가장 깊은 필요가 있는 곳일수록 보상이 빨리 오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둔 사랑의 신학을 가르치고, 불완전하더라도 성령의 힘으로 인내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5–5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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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도움이 가장 쉬운 사람만을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으로 하는 일은 단순한 일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일은 쉬워지나요? 만약 그런 사랑이 있다면 일은 쉬워지나요? 절대 아닙니다. 사랑으로 동기화된 일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에너지를 새로워주는 일은 피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과가 노동이 되면 우리의 힘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하늘의 사랑은 피로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당신을 그 노동 속에서 지지해 줍니다. 그 사랑은 일을 쉬워하게 하지 않습니다. 비용을 무릅쓰고 일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그분은 소중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욕구와 필요를 부담으로 받아들이고, 보상을 걱정하지 않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처럼요, 그렇죠?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내가 이전에 예를 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비용을 표현합니다. 교회가 서로에게 어떻게 섬김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여, 우리가 사랑을 측정하는 방식은 사랑이 무언가를 주었는지, 눈에 보이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주었는지로 판단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도운 사람이 회복되었는지, 관계가 회복되었는지, 우리의 노력이 감사받았는지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일은 종종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사람과 달리며 개선이 없이 달리고, 어디로 가는지 거의 알아차리면서도 여전히 그 어려운 일을 하는 간병인. 죄로 고통받는 친구와 인내심 있게 일하는 친구는 그 친구가 다시 빠져들어도 여전히 도와줍니다. 어려움을 겪는 젊은 어머니를 조용히 지지하는 노인 여성이 그녀가 완전히 안정되기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결과를 사랑의 가치 기준으로 삼는다면, 사람들이 가장 오래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때에 그들을 포기하거나, 우리의 믿음을 그들의 부담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가장 깊은 필요 상황은 우리의 노력이 빠르게 보상받을 가능성이 가장 낮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가는 쓴 여정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본질에 뿌리를 둔 사랑의 신학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것이 성화의 수단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제공하고 받는 불완전한 도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야 할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이나 느린 반응으로 인해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는 인내로운 사랑입니다. 이 힘은 무한합니다. 좋은 방식으로 시험해 보세요.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행함을 낳고, 사랑이 행함을 낳는다면, 믿는 자가 특히 어려운 시기에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이 그를 계속하게 하겠습니까? 이제 바울이 테살로니가인들에게 말한 다음 내용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지속적인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이는 제3, 마지막 주제입니다. 기억할 만한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에 뿌리를 둔 끈기로 스스로 지속됩니다. 테살로니카의 젊은 교회가 직면한 주요 문제는 거짓 교리에 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이 거짓 교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습니다. 이 거짓 교리의 출처는 약간 불확실하고 애매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거짓말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1세기 교회에서 다른 곳에서도 문제였습니다. 이 거짓말은 가르침으로 전해졌습니다. 뒤에 기록된 제2테살로니가서에서 거짓 선생들은 바울 자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위장된 예언이나 서신을 인용하며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마치 바울이 그 거짓말에 가담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울이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끈기로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것이 그들의 기억할 만한 믿음의 일부였음을 기억합니다. 이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성도들이 다시금 열린 이교적 생활 방식에서 최근에 개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속한 사회가 원래 기독교 이념에 기반을 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점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에게 강한 소망을 은혜롭게 심어 주셨습니다. 많은 해설가들이 지적했듯이, '인내'로 번역되는 단어는 오래된 번역에서 자주 사용되는 '인내'보다 더 적절한 번역은 '지속'입니다. 지속적인 소망 대신 인내로운 소망. 우리 현대인의 귀에 들리면, 인내는 단순히 조용하고 수동적인 표현처럼 들립니다. 불평 없이 기다릴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더 강력합니다. 다시 레온 모리스의 지혜를 빌리자면, 이는 조용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역경에 직면한 활발한 회복력입니다. 한 사람이 말했듯이, 타오르는 소망입니다. 타오르는 소망입니다.
스토아주의자와 그리스도인의 인내
설교자는 유대인의 소망이 순교자의 희망으로 표현되었다는 배경을 먼저 말합니다. 그는 극한의 압박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확고한 끈기가 바울이 말한 인내이며, 테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런 모습으로 주님께 충성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스토아주의자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인의 인내와 대비합니다. 스토아주의자는 단순히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의 의지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려 합니다. 그는 무언가를 억지로 억누르며 자제력을 유지하려 하므로 결국 최악의 경우 무너질 수 있다고 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은 확실한 희망 때문에 인내하며, 그 희망은 주님이 보여 주시고 마음에 심어 주셨기에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게 합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한 사람,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고 강조하며, 이 소망이 삶의 방식을 바꾼다고 적용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6–6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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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이 끈기 있는 삶은 순교자의 희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교자는 극한의 압박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바로 이 끈기, 이 확고함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삶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희망이 필요했습니다. 이 두 가지 희망의 차이는 정확히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차이가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을 바꾸어 놓습니다. 테살로니가 교인들은 자신의 주님께 확고하고 충성심 있게 서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너뜨릴 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희망은 기대에 의해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희망의 특징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결심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끈기는 예수님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희망은 여기서 동반자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제, 오래 지속되는 끈기를 유지하려면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희망을 빼앗는다면, 끈기는 점차적으로 사라져서, 최악의 경우는 단순한 스토아적 인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조차 결국 무너질 것입니다. 희망을 빼앗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바탕으로 확고히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희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자신과 그의 선교 동료들에게도 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그들에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그것은 그분이 약속하신 재림이었습니다. 언젠가 그분이 그들을 데려가시고, 모든 부당함을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은 미래를 향한 것입니다. 이는 3절의 삼중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 가지 은혜, 믿음, 사랑, 희망이 단순히 나열된 것이 아닙니다. 모리스가 그의 주석에서 지적했듯이, 여기에는 내재된 논리가 있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뢰이기 때문에 활동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함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특히 아가페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든, 얼마나 고통스럽든 간에 말입니다. 희망은 끈기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정말로 미래가 어디로 가는지 확신할 때,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파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잘 버틸 수도 있습니다. 이제 모리스가 언급했듯이, 이 세 가지 은혜는 각각 외부 표현에서 자신만의 특성을 낳습니다. 이 생성적 연결이 바로 이 목록이 단순한 덕목의 나열이 아닌 이유입니다. 이는 단순한 덕목 목록 이상입니다. 이는 그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당신도 볼 수 있습니다.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 희망은 제1테살로니가서의 각 장이 마무리될 때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희망은 아이디어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기다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미래는 그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당신의 희망이 단순한 원리나 이데올로기 대신 한 사람에 있을 때, 그 희망은 그 사람의 성품과 힘, 약속에 의해 형성됩니다. 이러한 종류의 희망은 교회가 당신의 삶을 바꾸는 방식을 바꿉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사람의 종말론이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지 이유입니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아마도 점점 더 세속화된 세상에서 이 현상이 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영혼이나 "자기"가 단순히 사라진다고 믿습니다. 소멸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희망은 무엇일까요? 삶의 시련을 견디는 그들의 끈기는 최악의 경우 단순한 스토아적 인내에 불과합니다. 스토아주의자는 단순히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의 의지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그 외에도, 그들은 무언가를 억지로 억누르고, 자제심과 자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할까요? 반대로, 무언가나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처럼, 이 스토아주의자는 희망을 억누르며 인내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무엇도 원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바로 희망 때문에 인내합니다. 이 희망은 믿는 자에게 매우 확고하고 확신되어 현재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네, 이 기독교인은 주님께서 보여주셨고, 그의 마음에 심어주셨으며, 알려주셨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최고 수준으로 높입니다. 모든 믿는 자가 스토아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낙관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어떤 무신론자 낙관주의자가 무엇을 할까요? 당신은 당신의 날들이 끝날 때 낙관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저는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을 다시 괜찮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주의자들이 바로 그리스도께 가장 마음을 닫고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곡선을 따라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인내심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받은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이 은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인내해야 하는 필요는 절망을 낳을 수 있으며, 아마도 자만심도 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승선을 바라보는 마라톤 선수
설교자는 마라톤 선수가 결승선을 바라보는 모습을 비유로 듭니다. 선수는 결승선 너머에 기다리는 분이 남은 거리 전체의 가치가 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누군가 더 달리라고 재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그리스도인의 인내에 적용합니다. 인내는 단순한 끈기나 의지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향한 소망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가 받을 유업,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주의를 집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통해 인내가 생겨난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감사한 대상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이 인내 역시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 소망이 기억할 만한 믿음을 지속시키는 힘이라고 마무리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7–7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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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뱅이 옳습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대상은 테살로니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인내심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인내심은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내심이 단지 끈기로만 이해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끈지르는 마음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인내심을 유지하려 한다면 결국 소진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향한 소망에 집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의 부활과 여러분의 필수적인 유업과 영원한 생명을 생각해 보세요. 만약 기도와 주의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소망에 집중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통해 그 인내심이 생겨날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결승선을 보고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분이 모든 남은 거리의 가치가 된다고 느낀다면, 그는 더 달리라고 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인내심은 바로 이 소망에서 비롯됩니다. 교회여, 저는 이 말씀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바울이 테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평범하고 지친, 새롭게 회개한 사람들에게 이르렀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 안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로 인해 그들의 믿음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기억할 만한 믿음이 어떤 모습인지 보았습니다. 기억할 만한 믿음은 선한 행위를 통해 표현됩니다. 이는 비어 있는 말이나 빈약한 소망이 아닙니다. 이는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행동입니다. 또한 기억할 만한 믿음은 사랑으로 동기화된 노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주는, 소중하고 고된 아가페의 믿음입니다. 그녀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섬깁니다. 기억할 만한 믿음은 소망에 뿌리를 둔 인내심을 통해 자신을 지속시킵니다. 이는 단순한 절제나 의지력이 아닙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약속하신 재림에 대한 열정적이고 활발한 확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믿고 소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설교자가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30년 넘게 기도한 경험
설교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나눕니다. 그는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30년 넘게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그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는 기도 제목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 기도가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니라고 적용합니다. 오랜 시간 같은 제목을 붙들고 기도해 온 성도들도 이 자리에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기다림이 길어지는 기도 앞에서 낙심하기보다, 그 기도를 계속 붙들고 있는 마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성도들과 함께 기도의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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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늦잠 자는 T.S.와 설교 후 대화
설교자는 오래전 북아일랜드 랜던데리의 메서디스트 교회에서 일주일 동안 설교하도록 초청받았던 일을 회상합니다. 초청한 사람은 청소년 사역을 맡은 T.S. 모니로, 일흔두 살쯤 된 미혼의 은행장이자 신앙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저녁 설교 전에 교회 뒤쪽에서 짧게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첫날 설교 도중 설교자가 네다섯 번째 줄을 돌아보니 T.S.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화요일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요일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설교자는 참지 못하고, 말씀을 잘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 놓고 설교가 시작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잠드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잠시 뒤 T.S.는 처음에는 깨어서 설교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괜찮다는 것을 알면 잠깐 잔다고 대답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대답을 알아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어 청중의 찬사를 얻는 말보다 사람을 건강하고 주님께 유용하게 만드는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14–16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단순한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더 이상 '단순하다'는 말을 쓰지 않나요? 여러분 중 몇 명이 누군가의 사역이 단순하다고 말했나요? 그것은 매우 드문 말입니다. 영국에서는 항상 이슈였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믿을 수 있어. 그는 복음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에서 50년대, 60년대에는 "아, 그는 단순하다. 그는 단순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떠오른 이유는 제가 오래 전에 북아일랜드 랜던데리에서 청소년 사역을 맡았던 작은 남자에게 설교를 하러 갔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T.S. 모니입니다. 그는 아마 72세 정도로, 매우 늙은 남자였습니다. 그는 저를 일주일 동안 설교를 하러 초청했습니다. 이 일은 북아일랜드 랜던데리의 메서디스트 교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신앙 깊은 작은 남자였습니다. 그는 정말 작은 남자였습니다. 그는 83세에 죽었습니다. 그는 은행장이었고, 미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가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뒤쪽에서 저녁 설교 전에 짧은 기도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첫날 밤, 저는 네 번째 또는 다섯 번째 줄을 뒤돌아보았고, T.S.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T.S.는 이미 마취의 두 번째 단계에 있었고, 그는 없어졌습니다.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는 늙은 남자야. 70년대 초반이었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 [웃음] >> 화요일에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우리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저는 더 참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리고 당신은 늙은 사람을 꾸짖어서는 안 되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저는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말했습니다. "T.S., T.S., 당신은 저를 괴롭게 하시는데, 당신은 뒤에서 기도하시면서 저는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시는데, 그렇죠?" 그가 말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제가 네 분도 지나지 않아서 사라지시는 거예요." 그리고 오래간만에 잠깐 멈췄다가 그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말해드릴게요. 저는 처음 조금은 깨어 있어 제가 말이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말이 괜찮다는 걸 알면 잠깐 자러 가는 거죠." >> [웃음소리] >> 저는 말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잘 알아들었어요." 그들은 올바른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올바른 가르침이란 무엇입니까? 올바른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남녀를 건강하고 주님께 유용하게 만드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대로, 가려운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 교사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이 교사들은 듣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책망하고, 책망하며, 권면하고, 격려하는 성령님의 일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는 사람들을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일치시키는 책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는 사람들이 "아마 당신은 좋아하시겠지만 저는 싫어요"라고 말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박수를 치는 거죠. 예를 들어, 빌리 그레이엄이 초기에 활동했을 때,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박수를 치면 그는 무언가 잘못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박수를 치는 겁니까? 박수를 치나요? 저는 음악에 맞춰 박수치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찬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듣자, 제가 찬사를 원한다면, 저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겠죠. 그리고 당신은 박수를 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찬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찬사를 위해 이런 일을 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원하는 말만 해주어 당신이 즐기고, 감사하며, 찬사를 보내고, 자신이 더 나아졌다고 느끼게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요구하는 성경의 권면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티모티 시대에도 이사야 시대와 다를 바 없었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에게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세요. "우리에게 옳은 말을 예언하지 마라. 부드러운 말만 해주어라. 환상만 예언해 주어라." 즉, 거짓말을 해주어라, 달콤한 거짓말을 해주어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 해도 상관없고, 그렇게 믿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대로 사랑받습니다." 아닙니다. 제 큰 형, 신클레이어 퍼거슨이 말했듯이, 하나님이 그대로 사랑하신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티모티에게 이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당신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합니다. 그들은 올바른 교리를 거부하고 새롭고 이색적인 것을 찾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계시를 떠나 인간의 추측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제가 가진 특권의 시간 동안, 저는 어떤 좋은 날에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우린 다 겪어왔죠, 그렇죠? 순회하는 순회단이 몇 번이나 도시를 지나쳤습니까? 우리는 토론토 축복에서 온 짖는 개들을 경험했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닥을 굴렀고, 이것이 기독교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이걸 보고 놀랐나요? 저는 "아니요,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건 관심도 없습니다. 순회단이 도시를 지나가고 결국 누군가가 코끼리 똥을 모아 장미 위에 올려놓고 삶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인 중심"이라는 것을 겪었습니다. 교회를 조니 카슨 쇼처럼 바꾸지 않으면 현실 세계에 살고 있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일들은 지나가고 계속될 것입니다. 우린 열린 신론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아시는 것을 아시는지 아닌지 생각해 보셨나요? 아,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냥 말씀을 전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잘해주고, 골프를 치고, 책을 읽으면 괜찮습니다. 모든 것은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티모티가 이 일을 겪었듯이, 우리가 겪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은혜가 악한 존재와의 적대관계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 중입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군인을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지휘관에게 충성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농부는 그의 노력의 열매를 얻습니다. 규칙에 따라 경쟁하는 선수입니다. 규칙에 따라 경쟁하는 것입니다. 랜스 암스트롱은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총 7개의 타이틀을요. 왜냐하면 그는 규칙에 따라 경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일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일이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자리에서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실제로 말씀이 무엇인지 말할 용기를 갖지 못했군요."
예레미야와 요나의 부르심
설교자는 자발적인 목회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예레미야와 요나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아무도 듣지 않는 자리에서도 설교하도록 부르셨고, 그분은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그의 뼈 속에 불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교자는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요나의 뜻을 바꾸셨던 일을 언급합니다. 요나에게 있어 순종은 자신의 마음과 맞지 않는 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길로 그를 다시 이끄셨습니다. 설교자는 이런 사례들을 통해 자발성이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을 자연스러운 경향이나 선호와 반대되는 자리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갈등과 고난 속에서도 결단하고 끈기 있게 순종할 때,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하는 자발적인 드림이라고 설교자는 적용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가치를 인하여 드리는 헌신입니다. 설교자는 목회라는 개념을 사랑하기보다 목회라는 일 자체와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권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15–15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이 표현은 히브리서 12장 15절에도 사용되는데, 거기서는 ‘보아라, 조심하여’라고 번역됩니다. ‘보아라, 조심하여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감독의 의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감독을 마치 관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듯이 말입니다. 분명히 이 직분에는 권위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그 구절을 생각해 보세요. ‘보아라, 조심하여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지 말라. 쓴 뿌리가 생겨서 어려움을 일으키지 않게 하라.’ 저는 장로가 바로 경계의 사람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바로 ‘보아라, 조심하여’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쓴 뿌리에 대한 경계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운영의 관리자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쓴 뿌리가 생기지 않도록 보살펴야 하지만, 당신 자신 안에 쓴 뿌리가 생겼다면, 즉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자리가 당신이 받을 만한 것보다 적다고 생각하거나,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그것이 쓴 뿌리가 되는 경우, 당신은 교회 안에서 쓴 뿌리를 보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무리 안에서 감독을 올바르게 행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개념을 교회 그 자체보다 더 사랑하는 것도 위험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단지 교회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설교대에 서는 목회자는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올바른 교회에 충성스럽게 머무르면서도 잘못된 방식으로 목회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마음의 문제이며, 동기의 문제입니다. 피터가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제 그는 우리에게 세 가지 시험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목회는 자발적으로 하라, 강요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회하다’는 이 동사 자체가 결단을 의미합니다. 성격이나 기질의 제안이 아닙니다. 성격이나 인격의 문제도 아닙니다. ‘강요받지 않고’와 ‘자발적으로’라는 대조를 주목해 보세요. 피터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이 보이는 목회 행위가, 한쪽은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다른 쪽은 사랑을 드리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쪽은 단순히 의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고, 다른 쪽은 예배로서의 헌신입니다. 행동은 바깥에서 보면 똑같이 보이지만, 그 뿌리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플랫폼, 박수, 기대, 급여가 사라졌을 때도 여전히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더 적은 돈으로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반응도 없을 때도 할 수 있겠는가?’ 자발성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을 그들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나 선호와 반대로 부르십니다. 저는 예레미야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아무도 듣지 않을 때에 설교하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만두고 싶어 했지만, 그는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뼈 속에 불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나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뜻을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갈등과 고난 속에서도 결단하고 끈기 있게 순종할 때, 바로 이것이 피터가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치를 인하여, 당신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당신은 목회라는 개념을 사랑하는 것보다 목회라는 일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당신은 직분을 사랑하면서도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꽃이 온실에서 자라서 잘려나가서 백악관에 있는 화환에 담깁니다. 그 화환은 중요한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다른 꽃은 산속 초원의 숲속에 있는 공간에서 자라며, 아무도 보지 못합니다. 그 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주시를 위해서만 자랍니다. 두 꽃 모두 하나님의 기쁨을 받고, 두 꽃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두 꽃 중 어느 하나라도 만족할 수 있겠는가요? 당신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만 피어나는 꽃이 되는 것이 충분할까요? 비평가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고, 아마도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요.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기쁨이 당신에게 있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자발성만으로도 여전히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시험입니다. 피터는 말합니다. ‘목회는 열심히 하라, 부끄러운 이익을 얻지 말라.’ 그는 ‘이익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만족감은 큰 이익입니다. 이익을 얻는 것은 꼭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가 그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목회는 단지 당신에게 어떤 쾌감, 어떤 플랫폼, 어떤 기쁨을 주기 위한 것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단지 돈만이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항상 설교자들에게 말합니다. 돈을 위해서 목회에 들어온 사람은 바보입니다. 목회에는 돈이 별로 없습니다. 돈을 목표로 한다면 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직업이 많습니다. 그러나 돈을 넘어서서, 이익은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 존경받는 것,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