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10개 · 1 / 1쪽 · 한 쪽 20개
가룟 유다에게 들어간 사탄의 생각
설교자는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를 예로 듭니다. 그는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는지 물으며,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뒤 유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가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성도의 삶과 연결합니다.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계시기에 그분을 통해 이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고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선포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설교자는 사탄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고 경고하며, 말씀과 성령으로 맞설 것을 강조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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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존재는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빛을 비춰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한참 젊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결국 결과를 보게 만들어요. 내가 하는 것, 여러분이 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의 결과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깁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았던 그 가론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사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이후에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디에 쉬었습니까?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뭐였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옵니다.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돼 있어요. 사람마다 뭘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3명이나 모여서 같이 성령님의 인도를 맛보고 삶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들어와야 하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의 가르침,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도망가는 것이었죠.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죄라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도망가는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보면, 출애굽하고 나서 그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갑니까? 옛날 생각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었던 옛자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옛날엔 이랬었지, 저했었지.' 그런데 우리는 다 새생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옛자에 속지 말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두려움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를 의심하죠? 주님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의심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단절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소명이 생깁니다. 여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유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코이노니아 얘기했잖아요.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죠? 나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 번째 누굴 나눴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눴고, 두 번째는 간증을 했고, 세 번째는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그러니까 영적으로, 혼적으로 풀리면 무엇이 풀리죠? 물질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다 풀리게 됩니다. 순서가 있더라고요. 근데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이 되고, 혼쪽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막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그것도 주님께 맡기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혼까지도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이루셨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제입니다. 나눔입니다. 그게 영적인 교제든, 육적인 교제든, 아니면 물건을 통한 교제든, 그 코이노니아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합에요. 누구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사람과의 연합이 됩니다. 사람이 연합이 되면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 통해 저변이 확대됩니다. 근데 그게 없으니까 요즘 교회는 다들 힘듭니다. 마음속에서 꺼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뭐를 꺼내 놓으면 그냥 듣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정작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고 계시니까, 그것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듯이 삶 가운데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가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질 때, 주님이 서로 일으켜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면 너희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어요.' 교제.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 누구와 교제가 되죠? 지체들과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거기에서는 기도가 있을 것이고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교제가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같이 교제하다 보면, 아, 내가 내 모양이 이래서, 내 죄성이 이래서 이렇게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일부분이고, 잠시 보여지는 일부분이고, 죄를 꺼내 놓고 좋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다른 것도 같이 꺼내 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무언가 간증을 들어보고 그걸 판단하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고 여겨질 수 있게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때는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떤 간증이 있고, 어떤 죄성이 있어. 그걸 하나님께 고발했더니 이렇게 해 주셨어.' 이게 자부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다가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광야 생활 중에서 제일 감사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런 것도 있지만 매일매일 뭘 내려 주셨습니까? 만나.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근데 그 만나의 양이 많아도 안 됩니다. 딱, 집안에 네 식구라면 네 개만 딱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더 주면 받아야 되나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 양식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보여지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제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 말하기를 더고 뭐라고 얘기하시죠? 듣기를 속해하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음으로써 벌써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한 분이라면, 그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떤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과 더 뛰어난 것을 불러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의 그릇이 있고 저만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점진적으로 단련한 후에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단련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떤 교제를 통해, 어떤 마음을 통해 흔들리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이 수직적인 관계가 해결되면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절.
모세와 기드온의 겸손한 응답
설교자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을 낮춘 두 인물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모세는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모세가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냈다고 봅니다. 기드온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용감한 장군이라 부르셨을 때, 기드온은 자신이 가난한 집안의 막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이사야 66장 2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이 겸손하고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설교자는 시험을 피하거나 약함을 감추려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적용합니다. 교만과 자랑심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4
설교 내 9–9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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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바울이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랑심과 교만, 자기 확신,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나 배경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견디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 버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읽다 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모세에게 '내가 바로에게 가라'고 하자, 모세는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선택이에요. 제 형을 생각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말만 하고 능력은 없어요. 저를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려서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바로, 저는 여기 왔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에게 '용감한 장군이여, 너를 보냈다'고 하자, 기드온은 '말씀하신 분이 저를 말씀하신 겁니까? 저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2절을 보세요. '주께서 보시는 이는 누구인가 하시되, 영혼이 겸손하고 부끄러워하며 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원리가 드러납니다. 시험을 피하면 축복을 놓치고, 우리의 약함을 감추려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과 자랑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정의상 부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이 되었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대해야 할지를 보면, 바울이 2코린도서를 마무리하면서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반복합니다. 얼마나 솔직한 말입니까? '내가 머리가 커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바울은 사도이니 머리가 커질 리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교만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훌륭한 배경, 훌륭한 대학, 훌륭한 신학과 율법을 지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 배경이 자신의 장점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이 사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3인칭으로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끌려 올라갔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겁니다. 저는 육체에 박힌 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할 때 강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멈추어 보세요.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북미의 현대적 복음주의의 방향을 따르며, 영웅들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강조하며,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면, 바울은 2코린도서 8장과 9장에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죠. 그러나 그는 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가지 앱이 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바울의 앱입니다. '곤경'입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녀들, 나는 너희를 보며 혼란스럽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가 항상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박해'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기독교인을 사냥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박해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격투나 권투 경기처럼 말입니다. 맨발로 서 있는 권투 선수, 그의 직업은 싸움입니다. 그는 모든 주먹에 의해 쓰러지고 상처 입으며, 분노와 고통 속에서 '나는 떠나야겠다. 나는 떠나야겠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링 위에서 쓰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래 전 스코틀랜드에서, 제게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던 한 분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제 머릿속에서 전설이 된, 커다란 체구를 가진 콜린스 씨입니다. 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오래 기다린 시간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셨던 성경의 인물들을 예로 듭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자녀를 얻지 못하다가 25년 후에 열매를 맺었다고 설명합니다. 모세 역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기다림이 그냥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결국 열매로 이어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과정에서 원망과 불평을 입술로 쏟아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원망을 쉽게 주변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마음의 한탄과 비탄을 하나님께 가져갈 때 그분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신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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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묵상 말씀은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눈밖에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큰 일교 차이에 우리 성도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을 견디는 소망의 인내'라는 제목으로 함께 야고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낸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 다 아시죠, 여러분? 그래서 그 믿음, 그 오늘과 미래의 사이에 있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 믿음의 대표적인 행함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5장에는 앞절 말씀에 보면 의인이 가난한 종이 착취받고 억압받는 부자에 의해서 핍박받는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인내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는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7절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길이 참으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길이 참다는 것은 스스로 바로바로 적시적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이 참을 때에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길이 참는 자들의 좋은 예가 되는 사람이 바로 농부들인 것이죠. 농부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따라서 그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죠. 이 유대 어 배경에서 농부들은 파종기 그러니까 우리나라 계절로 따지면 한 10월쯤 됩니다. 10월 전으로 해서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고요. 그리고 수확기 한 4월쯤 됩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그때 전으로 수확을 하게 되는데 씨를 뿌릴 때에 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씨가 그 비에 의해서 자라나기를 고대하는 농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길이 참으라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시작할 때 인내와 기도의 말씀으로 시작했다가 또 마지막도 오늘 인내의 말씀이고 내일 또 나눌 말씀인 야고보서 다음 장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을 했었죠. 1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리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또 이렇게 인내에 관한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그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신앙에 여러 요소들이 있거든요. 신앙에도 여러 요소들이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그 모든 요소들을 균형 있게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설명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죠. 성을 향해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온전하게 준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말씀으로는 그렇죠.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뭐 좀 편하게 설명하자면 복받을 그릇이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데 인내를 통해서 그 받을 그릇이 더 넓어지고 빈틈 없어지고 하는 일들이 바로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라. 오늘 두 점 말씀에서 무려 세 번이나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굳건하게 되어서 굳건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굳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는 그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보하게 되어서 마음을 고정시키는 단어. 그것이 바로 굳건하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고정시켜서 확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 인내는 여러분, 소극적이거나 그냥 수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아주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의 열매 우리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보면 첫 번째 해당되는 것이 사랑은 오래 참고 다른 것 많이 있지만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드리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말씀에 보면 그 성령의 열매 중에서 네 번째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오래참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여러 가지 열매들이 많이 있지만 오래참음의 열매, 오래참음이 바로 인내가 바로 열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은 오래 참는 상황은 그렇게 결과를 좋은 결과를 맺어지는 때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시험을 앞둔 수험생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앞두고 인내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힘겹고 또 많은 수고가 요구되어지는 그러한 과정 중에 있는 단계가 바로 인내 오래 참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열매라고 말씀을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많은 분들 중에서 인내의 열매 과정 중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이 시간도 열매 맺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농부가 최종적인 귀한 열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최종 시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공의가 세워지고 모든 정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많은 성도들처럼 우리는 길이 참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자, 두 번째는 인내는 오늘 야고보서에 보면 많은 언어의 교훈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내는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 제가 언어의 표현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금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데요. 첫 번째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원망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9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요. 그 단어는 한탄하다. 또 두 주변 사람에게 비탄을 고백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원망, 불평, 좌절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 오늘 본문 문맥상으로 보면 어떤 부자에게 그런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통함을 가지고 주의 형제들에게 와서 원망, 불평, 힘든 말,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형제들 내에서는 또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원망하지 말라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 그 한탄하는 마음, 비탄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이죠.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 헤아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는 바로 원망이 아니라 있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그랬고요. 25년 동안 출산되지 못하게 하다가 25년 후에 열매 맺지 않습니까? 모세도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원망 불평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말씀, 우리 1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볼까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여러분, 맹세하는 것은 또 다른 그 원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내가 재단을 하려고 하는 유혹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미래를 내가 재단하려고 하는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하나도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앞장 4장 말씀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어느 마을로 가서 장사하여 1년 후에는 많은 이익을 보리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죠? 4장 14절 말씀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런데 그 안개는 몇 시간 지나면 오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그런 안개와 같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죠. 원망을 하지 말고 맹세를 하지 말라.
요셉과 다윗의 도덕적 실패 앞의 반응
설교자는 창세기 39장에 요셉이 집을 뛰쳐나갔다고 기록된 점과, 사무엘하 11장에 다윗이 지붕을 걸었다고 기록된 점을 나란히 놓습니다. 도덕적 실패의 가능성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은 집을 뛰쳐나가고, 지붕 위를 걷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도망치라는 명령이 여기서 선명해집니다. 그는 이 말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청중의 반응을 언급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라와 하지 말라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답합니다. 유혹 앞에서 머무르지 말아야 할 자리를 분별하라는 것이 이 대목의 적용입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9–9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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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 가지 문제에서 양보하면, 우리 교인들은 그 양보에 더해진 X 요소까지도 기꺼이 따라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티모티는 4장 12절에서 이 사람들을 본받는 예를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과 삶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서 본받는 예를 세워야 합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저는 어느 주일에 "그렇다면 저는 아마도 사역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당신 백성들에게 삶의 패턴을 세워야 합니다. 당신의 그리스도인 삶과 제 삶, 당신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측정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숙은 우리가 무엇에서 도망치는지, 무엇을 향해 달리는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무엇을 마음에 두었는지, 무엇을 마음속에서 거부하는지를 보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덕성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요셉과 다윗의 삶에서 나타난 도덕적 실패의 잠재적 가능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을 통해 이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창세기 39장에 "요셉은 집을 뛰쳐나왔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 2 Samuel 11장에 "다윗은 지붕을 걸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람아, 집을 뛰쳐나가라. 지붕 위를 걷지 말라. 하나님의 자녀여, 도망쳐라. 이제 사람들은 이 말을 보고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이건 좀 부정적인 것처럼 들리지 않겠어요? 요즘은 좀 더 긍정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저는 도대체 그리스도인 삶이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의 목록이 되는 삶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도대체 그리스도인 삶이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없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삶 자체가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없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비행기 조종도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없이 할 수 없고, 자동차 운전도, 수술도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없이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그리스도인 삶이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때로는 하지 말라는 것들이 앞서 나옵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을 보세요.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니요"라고 말하도록 가르칩니다. 무엇에 대해요? 불신앙과 세상적 욕망에 대해요. 바울은 단순히 시편의 아름다운 묘사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 1장에서 "악인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 자,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자, 조롱하는 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자"로 묘사된 그 사람을 말입니다. 아니요, 그 사람은 이 모든 것에서 도망칩니다. 바울은 티모티가 자신의 삶과 사역에 해로운 모든 것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점에 대해 매우 걱정합니다. 그가 티모티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쓸 때 2장 22절에서 "나는 너가 젊은 시절의 악한 욕망을 피하게 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원하는 욕망과 소유를 원하는 욕망, 그리고 자신의 열정을 마음껏 풀어가려는 욕망을 피하라고 말입니다. "이건 좀 어려운 요구가 아닌가요? 저는 아마도 이걸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혼자서는, 그리고 저는 역시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티모티에게 부르짖는 삶의 활동, 즉 그리스도인 삶의 활동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능력의 결과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 13절을 보세요. 바울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약 너희가 육체의 욕망대로 살면 죽을 것이요, 그러나 너희가 성령을 따라 육체의 악행을 죽이면 살 것이다." 바울은 삶의 방식이 한 가지는 확실히 죽음으로 이끄는 방식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성령을 따르며 본능적인 행동의 뿌리를 끊는 방식으로 삶을 살면 진정한 삶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능적인 행동의 뿌리를 끊는 것이 바로 방법입니다. 이 일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단순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졌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능력 있게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건강은 바로 이 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복음의 위로를 누리고, 영적 삶에서 에너지를 얻고 싶다면, 내 안의 죄를 죽여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들, 이론과 이론 사이, 의견과 의견 사이를 오가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전혀 그리스도인 삶이 없고, 단지 외형만 있고 변화가 없는 경우이거나, 우리가 가르침을 받지 않았거나, 순종을 원하지 않거나, 예수를 끝까지 따르는 삶에서 우리 삶 속에서 제거해야 할 모든 것을 죽이도록 부름받은 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날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골로새서 5장 3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육체의 멸절입니다. 멸절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이란 뜻입니다. 이전 세대에는 이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말했고, 이에 대한 교육이 부재한 것이 바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 교회에서 혼란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와 요한의 하나님 대면
설교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 속 두 인물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환상을 본 뒤 자신이 불결한 입술을 가진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은 영광스러운 존재를 보고 죽은 사람처럼 땅에 엎드렸습니다. 설교자는 기도가 곧 하나님과 대면하는 일이므로, 그분을 조금이라도 엿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낮추고 무릎을 꿇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가졌다면 이런 권면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합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디서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는 은혜를 감사하라고 권합니다. 이 대면은 가벼운 친숙함이 아니라 경외를 동반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1
설교 내 8–8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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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의 큰 은혜를 겸손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접근은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의 영광과 전능함을 가진 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무릎을 꿇는다." 예배, 경배, 찬양입니다. 우리는 특정한 기도 요청을 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감사드리고,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한 절대 기도 요청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이 작은 표현 "unto" 에 대해 한 마디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는다"고 하면서 "unto" 라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표현력 있는 단어입니다. 이는 "대면"을 뜻합니다. 만약 원한다면 "직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대면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기도가 곧 하나님과 대면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반드시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가 시야를 얻었을 때 그가 "나는 불결한 입술을 가진 자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요. 요한이 무언가를 보고 죽은 사람처럼 땅에 엎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만약 우리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아침 제가 드리는 이 권면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라도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엿보는 순간, 우리는 자동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 앞에 대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아, 이 점을 다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열린 얼굴로 마치 거울에 비추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고린도후서의 사도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대면합니다. 자, 이제 저는 오늘 아침 강조하고 싶은 마지막 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분은 그가 영혼을 낮추고 마음을 꿇으며 나아가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의 25년 기다림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75세에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 모래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아들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25년이 걸렸고, 설교자는 그동안 낙심될 일이 여러 번 있었다고 봅니다. 사라의 생리가 끊어지자 이는 자신을 통해서는 아니라는 판단이었다고 설명하며, 그래서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의 방에 들였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90세 가까이 되었을 무렵에는 생리적으로 자녀를 낳을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설교자는 추측합니다. 자연적으로 생명이 탄생하기 거의 불가능해 보일 때 이삭이 약속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보기에 더딘 것 같아도 가장 적합한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는 점도 함께 강조합니다.
노우호 · 2026-10-20
설교 내 32–36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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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아시는 대로 부족한 게 없어요. 다 만족한데 아들이 없는 거예요. 75세 때에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 모래같이 될 것이다. 아니, 하늘의 별은 놔두고 바다의 모래는 놔두고 하나나 주세요. 그냥 하나라도. 하나도 안 주면서 하늘의 별같이. 여러분,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거야. 하나님께서 하실 거다. 믿었는데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다.
여러분, 이 세상에 우리가 죄도 하나도 없고 허물도 없고 약점도 없고 이런 의는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걸 의로 여기시기로 했냐면 믿는 것. 믿어지지 않는 걸 믿는다는 건 아직 어딘가 인격 속에 순진한 구석이 좀 남아 있어야 뭘 믿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참 못된 놈이고 늘 거짓말하고 늘 속이고 하는 사람이 너도 나 같겠지 해서 아무것도 못 믿습니다. 아무것도 못 믿고 누구도 못 믿어. 그건 나쁜 사람이야. 아무것도 안 믿고 누구도 안 믿고 하는 사람치고 좋은 사람 없습니다.
더러 실수도 하고 부족함도 있고 해도 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순진하거나 아직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어서 믿는 거거든요. 남도 자기 같은 줄 알고 믿는 거야. 그래서 아무리 봐도 잘 믿다 보면 속을 때 속을 수 있지만 그래도 잘 믿는 사람이 아무도,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좀 낫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거예요.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 모래같이 네 자손이 많게 될 것이다 했는데, 이삭 하나를 하나님께서 약속해 놓고 얼마만큼 지나서 주시냐? 25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영원 속에 사시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25년도 잠깐 같으나 사람에게 25년은 긴 세월이죠. 그동안에 낙심될 만한 일이 몇 번 있었어요? 사라의 생리가 끊어졌어. 그러니까 나를 통해서는 아니구나 해서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 방에 들여보낸 거거든요.
그다음에 내가 볼 때 한 90세 이렇게 넘어가면서 아마도 그때는 아브라함이 나도 생리적으로 애를 못 낳는 거 아닌가 싶었을 거라. 다시 말하면 사라나 아브라함이나 자연적인 생명 탄생은 거의 불가능하다 싶을 때쯤 돼서 정말 약속의 자녀, 생물학적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 이삭이 태어나는 거예요.
다메섹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난 기도 응답
설교자는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이삭의 배필을 구하러 밧단아람에 가서 기도한 일을 소개합니다. 엘리에셀은 동네 입구에서 우물가의 처녀에게 물을 청했을 때 약대에게도 물을 길어 주겠다고 대답하는 여자를 이삭의 아내로 믿겠다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기도가 먼 훗날이 아니라 그날 응답되기를 구한 것이라고 짚습니다. 기도를 마치기 전에 브두엘의 딸 리브가가 물동이를 들고 나왔고, 엘리에셀이 물을 청하자 그녀는 마시게 해 주겠다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우물이 깊어 물을 긷는 일이 쉽지 않았고, 약대는 많은 물을 마시기 때문에 리브가가 계속 물을 길어 부어야 했다고 설명합니다. 엘리에셀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전해집니다. 설교자는 기도를 마치기 전에 응답받은 이 사건에서 엘리에셀의 믿음이 탁월하다고 평가하며, 일한 만큼 기도한 만큼 믿음이 나타난다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0
설교 내 40–44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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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어떤 사람의 기도는 굉장히 빨리 응답됩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 집의 청지기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존경하는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위해서 배필을 구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본토 밧단아람으로 가요. 동네가 가까워지니까, 지금 자기가 막중한 사명을 띠고 한 가문을 이어 갈 만한 좋은 며느릿감을 구해야 되는데, 여러분 사람 보고 이력서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다메섹 엘리에셀이 동네 가까이 올 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동네 입구에 가서 우물가에 물 길으러 오는 처녀들이 있을 텐데, 내가 어떤 처녀를 보고 소녀야, 내게 물 좀 다오 이렇게 하면, 예, 제가 마시게 해 드리리다 하고 당신의 약대를 위해서도 내가 물을 길으리다 하고 대답하는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가 이삭의 아내감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줄 내가 믿겠나이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굉장히 구체적이에요. 또 먼 훗날 얘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그날 응답되는 걸 봐야 될 텐데.
기도 끝나고 눈을 떠 보니까 바로 어떤 처녀가 나와. 브두엘의 딸, 라반의 여동생 리브가야. 오길래 물동이를 내려놓고 물을 하는데, 소녀야, 물을 좀 마시게 다오 하니까 그 처녀가 낯선 사람에게 못 본 체하지 않고, 예, 제가 마시게 해 드리리다 하고 당신의 약대를 위해서도 내가 물을 길으리다.
우리나라처럼 물 길기가 쉽거나 틀면 나오는 그런 게 아니고 우물이 상당히 깊어서 물을 길으려면 상당히 힘도 들여야 되고, 또 여러분 사람이야 한 잔이면 목마른 건 해갈되는데 약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약대가 물을 마시면 많이 마시거든요. 한번 충분히 마시면 15일간 물 안 마시고 갈 수 있어. 그래서 약대를 위해서 물을 길으리다 할 때는 약대에게 물 한 잔 주고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라. 물을 계속 길어서 붓고, 약대가 다 마시면 또 붓고 하는 걸 다메섹 엘리에셀이 묵묵히 보고 있는 겁니다.
보다가 다메섹 엘리에셀이 땅에 엎드려요. 종의 기도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빨리 들어주시다니 하면서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다. 여기 보면 기도하기를 마치지 못하여 응답됐다는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오래전에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어쩌면 다메섹 엘리에셀의 믿음이 아브라함보다 더 탁월하다.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의 기도가 그 사람의 믿음이거든. 보통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해도 우리 기도한 만큼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그 사람의 믿음이 뭘로 보이느냐? 일한 만큼, 기도한 만큼 그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일 안 하는 사람은 기도를 안 하고, 기도 안 하는 사람은 일이 안 돼.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런 건데.
욥, 다윗, 히즈키야의 고통
설교자는 욥과 다윗, 히즈키야가 고통을 겪었던 사실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백성이 병드는 일이 낯선 일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는 먼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도 여전히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의 필요와 약점에서 면제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인간의 약점으로부터 우리를 면제시키지 않으며, 은혜의 언약도 결핵이나 풍습성 관절염, 천식으로부터 면제되는 증명서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육체에 있는 자들이 모두 고통스럽다고 말한 것을 인용하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훈련하신다는 말씀도 덧붙입니다. 그는 병원 복도에서 차례가 온다고 놀랄 필요가 없다는 비유적 질문을 던지며, 청중이 자신의 병을 예상된 일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합니다. 또한 이 병이 종종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기억하면, 병든 상황에서도 놀라지 않고 차분히 주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19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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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단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의 보통 필요와 약점으로부터 우리를 면제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사람입니다. 은혜의 언약은 결핵, 풍습성 관절염, 천식으로부터 면제되는 증명서가 아닙니다. 육체의 병은 우리의 육체를 통해 우리에게 찾아와 무덤까지 우리를 따라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육체에 있는 자들이 모두 고통스럽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기 때문에 더 자주 병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그분이 훈련하시고, 모든 아들을 그분이 징계하신다.”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녀의 표징 중 하나이며, 종종 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병원 복도에서 우리의 차례가 온다고 놀라야 할까요? 요브와 다윗, 히즈키야가 고통을 겪었으니, 우리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병으로 인해 종종 우리에게 큰 이익이 생긴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병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약속 성취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75세에 자손의 약속을 받았지만 아들이 없어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이삭을 약속하셨으나 실제로 주신 것은 25년이 지난 뒤였다. 설교자는 그 사이 낙심할 만한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사라의 생리가 끊어지자 사람들은 약속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여겼고, 그래서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냈다. 아브라함이 90세를 넘기면서는 자연적인 출산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길 만한 때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삭은 생물학적 출생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 태어났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의 판단보다 늦게 보일 수 있으나, 가장 적합한 때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믿음이 낙심을 이기고 기다리는 힘이라고 적용한다.
노우호 · 2026-10-18
설교 내 36–40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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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아시는 대로 부족한 게 없어요. 다 만족한데 아들이 없는 거예요. 75세 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 모래같이 될 것이다. 아니, 하늘의 별은 놔두고 바다의 모래는 놔두고 하나나 주세요. 그냥 하나라도. 하나도 안 주면서 무슨 하늘의 별같이. 그런데 그래도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거야. 하나님께서 하실 거다. 믿었는데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다.
여러분, 세상에 우리가 죄도 하나도 없고 허물도 없고 약점도 없고 이런 의는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걸 의로 여기시기로 했느냐 하면 믿는 것. 믿어지지 않는 걸 믿는다는 건 아직 어딘가 그 인격 속에 순진한 구석이 좀 남아 있어야 뭘 믿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참 못된 놈이고 늘 거짓말하고 늘 속이고 하는 사람은 네놈도 내놈 같겠지 해 가지고 아무것도 못 믿습니다. 아무것도 못 믿고 누구도 못 믿어. 그건 나쁜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안 믿고 누구도 안 믿고 하는 사람치고 좋은 사람 없습니다.
비록 실수도 하고 부족함도 있어도 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순진하거나 아직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거나 해서 믿는 거거든요. 남도 자기 같은 줄 알고 믿는 거야. 잘 믿다 보면 속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잘 믿는 사람이 아무도,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좀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거예요.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 모래같이 네 자손이 많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삭 하나를 하나님께서 약속해 놓고 얼마만큼 지나서 주시느냐? 25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영원 속에 사시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25년도 잠깐이지만 사람에게 25년은 긴 세월이죠. 그동안 낙심될 만한 일이 몇 번 있었어? 사라의 생리가 끊어졌어. 그러니까 나를 통해서는 아니구나. 그래서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 방에 들여보낸 거거든요.
그다음에 내가 볼 때 90세 이렇게 넘어가면서 아마도 그때는 아브라함이 나도 생리적으로 애를 못 낳는 거 아닌가 그랬을 거라. 다시 말하면 사라나 아브라함이나 자연적인 생명 탄생은 거의 불가능하다 싶을 때쯤 돼 가지고, 정말 약속의 자녀, 생물학적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 이삭이 태어나는 거예요.
다메섹 엘리에셀의 빠른 기도 응답
설교자는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주인의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러 밧단아람에 간 이야기를 소개한다. 동네가 가까워졌을 때 그는 막중한 사명을 앞에 두고 사람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온 처녀에게 물을 청했을 때 그가 약대에게도 물을 길어 주겠다고 대답하면 그 여인을 이삭의 아내로 믿겠다는 내용이었다.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브두엘의 딸 리브가가 나왔고, 그녀는 낯선 사람에게 물을 주고 약대를 위해서도 물을 길어 주었다. 약대는 많은 물을 마시기 때문에 그 일은 쉽지 않았지만, 엘리에셀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다. 설교자는 이를 빠른 응답의 예로 들며, 기도가 곧 그 사람의 믿음을 드러낸다고 말하고 종의 믿음이 아브라함보다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노우호 · 2026-10-18
설교 내 44–48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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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어떤 사람의 기도는 굉장히 빨리 응답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집의 청지기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존경하는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위해서 배필을 구하려고 아브라함의 본토 밧단아람으로 가요. 그 동네가 가까워지니까 자기가 막중한 사명을 띠고, 한 가문을 이어갈 만한 좋은 며느릿감을 구해야 되는데, 사람 보고 이력서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다메섹 엘리에셀이 동네가 가까워질 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동네 입구에 가서 우물가에 물 길으러 오는 처녀들이 있을 텐데, 제가 어떤 처녀를 보고 소녀야, 내게 물 좀 다오 하면, 예, 제가 마시게 해 드리리다 하고 당신의 약대를 위해서도 내가 물을 길으리이다 하고 대답하는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가 이삭의 아내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줄 제가 믿겠나이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아주 굉장히 구체적이에요. 먼 훗날 이야기가 아니고 당장 그날 응답되는 걸 봐야 될 텐데.
기도 끝나고 눈을 떠 보니까 바로 어떤 처녀가 나와. 브두엘의 딸, 라반의 여동생 리브가야. 오길래 물동이를 내려놓고 물을 길으려 하는데 소녀야, 물을 좀 마시게 다오 하니까, 그 처녀가 낯선 사람에게 못 본 체하지 않고 예, 제가 마시게 해 드리리다 하고 당신의 약대를 위해서도 내가 물을 길으리이다.
우리나라처럼 물을 긷기 쉬운 우물이 아니고 틀면 나오는 그런 게 아니고, 우물이 상당히 깊어 가지고 물을 길으려면 상당히 힘도 들여야 돼요. 또 사람이야 한 잔이면 목마른 것이 해갈되는데 약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약대가 물을 마시면 많이 마시거든요. 한 번 충분히 마시면 15일간 물 안 마시고 갈 수 있어. 그래서 약대를 위해 물을 길으리이다 할 때는 약대에게 물 한 잔 주고 끝내지 않았을 거라. 물을 계속 길어서 붓고, 약대가 다 마시면 또 붓고 하는 걸 다메섹 엘리에셀이 묵묵히 보고 있는 겁니다.
보다가 다메섹 엘리에셀이 땅에 엎드려요. 종의 기도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빨리 들어주시다니 하면서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거예요. 여기 보면 기도하기를 마치지 못하여 응답됐다는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오래전에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어찌 보면 다메섹 엘리에셀의 믿음이 아브라함보다 더 탁월하다.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의 기도가 그 사람의 믿음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