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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0개 · 1 / 1쪽 · 한 쪽 20개

알렉산드로스의 얼음도끼

설교자는 알렉산드로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알렉산드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들어가려 할 때, 얼음과 눈으로 덮인 산을 뚫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길이 험하자 병사들은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는 말에서 내려 얼음도끼를 들고 앞장섰습니다. 그는 자주 허리까지 눈에 잠긴 채 얼음덩이를 깨뜨리며 길을 열었습니다. 이것을 본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왕이 앞서 간다면 온 세상이라도 가로지를 수 있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통과하여 앞장서 가셨으니, 신자들도 그분이 어디로 이끄시든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고난이 있을 때 비교할 대상을 동료 군사들 가운데서만 찾지 말고, 죄인들의 거역을 견디신 주님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도자가 먼저 고난의 길을 여는 모습이 따르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8

설교 내 51–51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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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회자는 외칩니다. ‘저는 너무나 부끄러운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도 훨씬 더 나쁜 대우를 받았습니다. 고난에서 비교할 상대를 동료 군사들 가운데서만 찾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친히 죄인들의 그토록 심한 거역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생각하십시오. 알렉산드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들어가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산을 뚫고 나아가야 했을 때, 병사들은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가 말에서 내려 얼음도끼를 들고 앞장섰습니다. 자주 허리까지 눈에 잠긴 채 얼음덩이를 깨뜨리며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앞서간다면 온 세상이라도 가로지를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 도구 됨

설교자는 요셉의 삶을 통해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시기를 받아 노예로 팔려갔고, 이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설교자는 요셉이 그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한 형통을 경험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화가 임한 것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그 일을 통해 요셉은 결국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7년 대흉년이 닥쳤을 때 요셉은 이집트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 역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과정을 통해 고난이 단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일하실 수 있음을 붙들기를 권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하나님의 주권 쪽으로 옮겨 놓는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안성준 · 2026-10-28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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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요셉을 생각해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 시기를 받고 노예로 팔려가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고난을 통하여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한 형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화가 임한 줄 알았는데, 그 일을 통하여 7년 대흉년이 왔을 때 이집트와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쫓김과 시편의 찬양

설교자는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곧 왕이 되는 듯했으나, 사울 왕의 시기를 사서 십수 년 동안 쫓기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살인의 위협 앞에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난 속에서 다윗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주목합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많은 노래와 고백은 우리가 잘 아는 시편에 담겨 있습니다. 설교자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고난이 사람을 하나님께 향하게 만드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성도가 지나는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설교자의 메시지입니다.

안성준 · 2026-10-28

설교 내 4–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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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다윗은 어떠합니까? 다윗에게도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이제 왕이 되는가 싶었는데, 그 왕이 되는 것도 잠시, 사울 왕에게 시기를 사서 십수 년 동안 쫓김을 당하고 살인의 위협 앞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수차례의 순간을 견뎌내는 것이 다윗이 지나는 고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고난을 통하여 다윗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 많은 노래와 고백들이 저희가 잘 알고 있는 시편에 담겨 있습니다.

욥의 고난과 친구들의 위로

설교자는 욥을 고난의 대명사처럼 떠올리며,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쳤다고 말합니다. 욥을 위로하러 온 것 같았던 친구들에게서도 위로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상처 난 곳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고난 후에 욥이 하나님께 고백한 내용에 주목합니다. 욥은 이전에는 주를 귀로 들었으나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백을 근거로, 하나님의 사람이 겪는 고난이 결국 사람을 하나님을 보게 만드는 길로 인도한다고 설명합니다. 고난은 잠자던 영혼을 깨우는 경종과 같아서,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고 찬양과 감사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도 그 고난을 영혼을 울리는 경종으로 받아들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보는 은혜가 있기를 권면합니다.

안성준 · 2026-10-2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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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난 하면 대명사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욥이죠. 이 욥을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그에게 닥쳤습니다. 그리고 욥을 위로하러 온 것 같아 보이는 친구들에게도 어떠한 위로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 상처 난 곳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도 같은 어려운 일을 욥이 지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고난 후에 욥이 하나님께 대하여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전에는 주를 귀로 들었으나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아시아 환난과 사형 선고 같은 고난

설교자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는 고백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그 고난이 힘에 겹도록 심했고, 살 소망까지 끊어져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일을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폭동과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추정하면서도, 그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아데미 신전과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일이 위협을 받았고,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해 바울을 거의 죽이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 바울에게 주어진 깨달음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 큰 사망에서 건지셨고 지금도 건지시며 앞으로도 건지시기를 소망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난이 성도의 시선을 자기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리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소망하게 만드는 변화를 준다고 적용합니다.

안성준 · 2026-10-28

설교 내 28–29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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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도행전 19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아시아에 있는 수도와 같은 도시 중에 하나였던 에베소에서 있었던 폭동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이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에베소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아데미 신전을 숭배하고,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서 파는 그 일들이 위협당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 아데미 신상을 만들던 은장색이었던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 바울을 거의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19장에 나옵니다.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할 수 있는데, 아무튼 사도 바울은 이 극심한 고난으로 인하여 정말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그 고난이 임했을 때예요. 그때에 사도 바울에게 주어지는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게 어떠한 깨달음인가?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아멘." 네. 이렇게 거의 죽은 것과도 같은 고난이 임했을 때에 사도 바울에게 주어지는 깨달음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구나. 무엇이요? 고난이요.

뚝을 넘지 않게 하는 물

설교자는 고난을 파도에 비유합니다. 고난이 와도 파도처럼 계속 밀려오고, 또 왔다, 또 왔다 하며 거듭 닥쳐와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들으면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뚝 끝까지 차올라 찰랑거리고 난리를 쳐도 다시 내려가면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뚝을 넘으면 홍수가 나고, 뚝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면 사고가 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물이 뚝을 넘지 않게만 하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환난이 와도 다시 가라앉을 수 있다는 적용을 전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44–44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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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어떤 환난이 와도 고난은 파도 같은 거예요. 저 또 왔다, 또 왔다, 또 왔다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물이 말이죠, 뚝을 넘지 않게 하기만 하면 돼요. 뚝을 넘으면 홍수가 납니다. 물이 뚝 끝까지 왔다가 막 찰랑거리고 난리를 쳐도 다시 내려가면 돼요. 근데 이 뚝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면 사고가 나요.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보내진 예수님

설교자는 요한복음 18장 39절로 돌아가 예수님이 헤롯에게서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져 오신 장면을 그립니다. 그는 사람들이 우주의 창조주를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보내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길을 따라 보냈다가 다시 돌려보내는 모습입니다. 설교자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뺨을 맞고, 수염에 침 뱉음을 당하고, 옆구리를 걷어차이셨다고 묘사합니다. 이렇게 돌아오신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빌라도가 이 일에서 빠져나갈 마지막 기회를 발견했다고 설명합니다.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로마 당국의 관례였습니다. 빌라도는 대답이 그렇다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달라고 외쳤다고 전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23–23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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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한 설교 안에서 일곱 편쯤 듣고 계시는군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9절로 돌아가십시오. 빌라도가 “너희에게는 전례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헤롯에게서 다시 보내져 오셨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우주의 창조주를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보내고 있습니다. 길을 따라 보냈다가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뺨을 때리고, 수염에 침을 뱉고, 속이 뒤틀릴 만큼 옆구리를 걷어찹니다. 그렇게 그분이 돌아오셨고, 다시 빌라도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일에서 빠져나갈 마지막 기회를 발견합니다. 유월절에는 로마 당국이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이들에게 일종의 “그래, 잘한다”라는 선심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이 제발 그렇다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묻습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이 소리쳐 대답합니다. “아니오, 그 사람이 아닙니다! 바라바를 주시오!”

맨발의 권투 선수 비유

설교자는 바울이 겪은 네 가지 고난, 곤경과 혼란, 박해와 쓰러짐을 설명하기 위해 권투 경기의 장면을 듭니다. 맨발로 링에 선 권투 선수는 싸움이 직업이지만, 모든 주먹에 쓰러지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는 분노와 고통 속에서 '나는 떠나야겠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싸우는 사람이 여전히 링 안에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링 위에서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청중에게 이런 경험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설교자는 쓰러짐이 싸움의 끝이 아니라 싸움 가운데 겪는 현실이라고 설명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4

설교 내 9–9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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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바울이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랑심과 교만, 자기 확신,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나 배경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견디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 버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읽다 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모세에게 '내가 바로에게 가라'고 하자, 모세는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선택이에요. 제 형을 생각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말만 하고 능력은 없어요. 저를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려서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바로, 저는 여기 왔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에게 '용감한 장군이여, 너를 보냈다'고 하자, 기드온은 '말씀하신 분이 저를 말씀하신 겁니까? 저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2절을 보세요. '주께서 보시는 이는 누구인가 하시되, 영혼이 겸손하고 부끄러워하며 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원리가 드러납니다. 시험을 피하면 축복을 놓치고, 우리의 약함을 감추려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과 자랑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정의상 부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이 되었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대해야 할지를 보면, 바울이 2코린도서를 마무리하면서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반복합니다. 얼마나 솔직한 말입니까? '내가 머리가 커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바울은 사도이니 머리가 커질 리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교만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훌륭한 배경, 훌륭한 대학, 훌륭한 신학과 율법을 지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 배경이 자신의 장점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이 사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3인칭으로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끌려 올라갔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겁니다. 저는 육체에 박힌 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할 때 강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멈추어 보세요.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북미의 현대적 복음주의의 방향을 따르며, 영웅들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강조하며,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면, 바울은 2코린도서 8장과 9장에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죠. 그러나 그는 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가지 앱이 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바울의 앱입니다. '곤경'입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녀들, 나는 너희를 보며 혼란스럽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가 항상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박해'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기독교인을 사냥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박해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격투나 권투 경기처럼 말입니다. 맨발로 서 있는 권투 선수, 그의 직업은 싸움입니다. 그는 모든 주먹에 의해 쓰러지고 상처 입으며, 분노와 고통 속에서 '나는 떠나야겠다. 나는 떠나야겠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링 위에서 쓰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래 전 스코틀랜드에서, 제게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던 한 분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제 머릿속에서 전설이 된, 커다란 체구를 가진 콜린스 씨입니다. 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아내의 쓰러짐과 고난 속 기도의 시작

설교자는 책의 저자가 겪은 고난의 시작을 소개합니다. 2001년 1월 7일, 저자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주님의 돌보심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화장실에 가던 아내가 쓰러졌습니다. 가족은 급히 병원 응급실로 옮겼고, 응급실에서는 아내를 곧바로 중환자실로 보냈습니다. 진단은 내출혈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저자는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렸다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책의 서두가 6페이지에 나온다고 밝히며 이 경험이 책의 배경임을 알려 줍니다. '내 인생을 기도와 감사로 물들이고 싶다'는 고백이 이 고난의 여정 속에서 나왔다고 적용합니다. 평탄하지 않은 인생의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가 삶의 방향이 될 수 있음을 설교자는 강조합니다.

오경제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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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책의 표지에는 제가 잊혀지지 않는 문장이 있습니다. '아, 내 인생을 기도와 감사로 물드리고 싶다'는 이 책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이제 넘겨 보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잠깐 읽어 드릴게요. 2001년 1월 7일, 나는 아내와 두 딸을 함께 주님의 돌보심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화장실에 갔던 아내가 쓰러졌습니다. 급히 병원 응급실로 옮겼는데, 응급실에서는 아내를 보자마자 중한 자실로 보냈고, 내출혈이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렸습니다. 이 책의 서두는 6페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서평에 담긴 '고통의 계곡' 고백

설교자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다시 읽어 줍니다. 서평의 제목은 '고통의 계곡에서 참된 기도의 빛을 발견하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저자가 고통의 계곡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모든 삶이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바뀌었다고 소개합니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질병과 병상에서 보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저자는 기도로 채웠습니다. 설교자는 고통 중에 무너지지 않고 고통을 진주로 만들어 낼 때 삶이 거룩한 울림이 된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병원과 가정, 차 안, 일터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독자들도 고난을 이겨 내기를 응원한다는 서평의 문장도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문장을 통해 고난이 기도의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나눕니다. 서평의 이 표현은 저자의 고백과 맞닿아 있다고 설교자는 이해합니다.

오경제 · 2026-10-23

설교 내 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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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서평들을 한번 더 읽어 드리면, '고통의 계곡에서 참된 기도의 빛을 발견하다'라고 써 있습니다. 고통의 계곡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질병과 병상에서의 시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기도로 채우면서 저자가 한 고백입니다. 고통 중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진주로 만들어낼 때, 고통을 품고 기도할 때, 삶은 거룩한 울림이 됩니다. 병원에서, 가정에서, 차 안에서, 일터의 현장에서 저자가 기도한 것처럼, 독자들 역시 고난을 이겨내며 고통을 진주로 만들어내기를 응원해 봅니다. 이 출판 서평이 이렇게 써 있습니다.

믿음의 선지자들이 겪은 고난

설교자는 야고보서 5장 10절에서 형제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소개합니다. 그는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았던 선지자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짚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장을 예로 들며, 아브라함, 모세, 다윗도 모두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고 그 결말을 보여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도 주의 말씀을 전하며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언급합니다. 설교자는 이들의 삶을 통해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를 수 있으나, 그 고난을 오래 참고 견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3–3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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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 번째는 인내의 끝에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결말이 있습니다. 인내의 결말을 말하는 것이죠. 우리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인내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인내 끝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는 결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10절과 11절을 보십시오. 10절 말씀을 읽어보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았던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만 보더라도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모두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자들로, 그 결말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도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살았던 많은 자들에게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로마 군인의 모습에서 보는 사역의 고난

설교자는 로마 제국에서 군인을 알아보기가 어렵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군인들은 군인처럼 입고 갑옷을 입었으며, 창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항상 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제국의 이름으로 정복하는 힘의 주체였습니다. 그러나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겪는 고난이 분명히 보였다고 합니다. 갑옷을 입고 다니는 일도,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도 쉽지 않았으며, 평소에는 지루할 만큼 평범하지만 가끔은 전혀 지루하지 않은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로마 제국의 상징이 된 군인의 이미지를 골랐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를 근거로 그는 목회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앨버트 몰러 · 2026-10-22

설교 내 17–17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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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은 이 세 가지 비유, 세 가지 그림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 번째는 전사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군인도 민간 사무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는 뽑아 준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리스도인 군사처럼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군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군중 속에서 누가 군인이고 누가 아닌지 알아보는 일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군인처럼 입고 있었고,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항상 모든 상황에 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제국의 이름으로 정복하는 힘의 주체였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는지 분명히 보였습니다.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거의 지루할 정도로 평범하지만, 가끔은 전혀 지루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제국의 상징이 되는 군인의 이미지를 선택한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는 군인의 비유를 선택함으로써 이 세상의 군인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비유는 운동선수입니다. 올림픽의 유래가 분명히 드러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하지 않으면 관을 얻지 못한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즌에도, 제가 얼마나 뛰어난 스포츠 팬인지 아실 것입니다.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것이 참으로 설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규칙을 어긴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 벌이 결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관을 얻으려면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사상적으로 군인과 운동선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세 번째 비유는 농부입니다. 이 비유는 가장 인상 깊은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농부는 수확물의 첫 번째 분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서신은 짧은 편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평생 농사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도시 문화의 산물이었고, 도시 문화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그의 서신들은 대부분 도시 교회들에 보내졌습니다. 로마 제국은 농업을 존중했지만, 다른 직업보다 낮은 위치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군사가 되어라.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하는 운동선수가 되어라. 열심히 일하는 농부를 본받아라."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이 내용은 2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복음의 진술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기사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억하여라. 다윗의 자손이신 분이시며, 나의 복음에 따라 내가 고난을 받고 죄인처럼 쇠사슬에 묶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묶이지 않았노라.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모든 일을 참고 견디노라.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영광과 함께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서신의 1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로 자신을 온전히 드리려고 최선을 다하여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일꾼이 되어라.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다루어라." 이 말씀은 바로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올바르게 나누어라"는 고린도전서 14장 6절의 킹제임스 성경 표현에서 나는 기억입니다. 올바른 해석입니다. 따라서 운동선수가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해야 하듯이, 성경 해석자는 해석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운동에서 실패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성경 해석에서의 실패는 훨씬 더 심각하고 중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디모데에게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22절부터 젊은 시절의 열망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어리석고 무지한 논쟁에는 끼지 말라. 그 논쟁은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다투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며, 가르칠 줄 아는 자가 되어 악을 참아내며, 온유하게 반박해야 한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셔서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하시고, 그들이 깨달아 악마의 덫에서 벗어나 악마의 뜻대로 행동하던 채로 있던 것을 벗어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3장에서 말하려는 내용으로 나아가는 전제입니다. 그리고 3장은 올바른 영어 번역으로 시작되지만, "이것을 이해하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즉,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고백한 하나님의 붙드심

설교자는 어머니에게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견디셨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한마디로 "하나님 없었으면 나 그때 죽었다"고 답하셨습니다. 이 말이 설교자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예수님, 내주하시는 성령, 예배의 자리, 찬양,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살아간다고 나눕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다고 해서 낙담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함께 말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설교자는 믿음이 고난 가운데 사람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는 적용을 전합니다.

오경제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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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시간, 당신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지난 주일 세제 때 만났던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한 권사님이 예배를 오셨는데, 제가 있는 모습을 보고 막 뛰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분을 초청해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편모 가정의 엄마와 딸이 함께 오는 과정이었습니다. 몇 가지 상황을 듣고 기다리다 엄마와 딸을 만났습니다. 딸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는데, 부모로부터 상황을 듣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고 나서 권사님과 함께 기도를 드렸고 예배를 드린 후, 오후에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그 문자를 읽어드리면, "목사님, 기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매님은 20년 전 순원의 친정 언니로, 영육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라 3주 전부터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치유와 회복을 얻고 있습니다. 특성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딸도 여기 왔으면 해서 오늘 오게 되었습니다. 딸은 왕따로 힘들었고, 최근에는 중동 문제로 치료 센터를 다녔지만 효과가 없어 그만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배 후 얼굴이 밝아지고 웃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초청을 했기 때문에 초청자의 마음을 알잖아요. 예배 때 와서 하나님이 만져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교회에 대한 호의적인 마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는 편모 가정에서 자라며 어려움을 겪고, 엄마의 마음이 위로받고 돌아가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돌아갔을 때, 아이의 얼굴이 웃는 얼굴로 변화되었고, 대화를 나누며 그 웃는 얼굴을 본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평안했을까 생각하니, 저 또한 마음이 포근해졌던 주일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다시 보며 위로를 받고 기뻐하려고 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참 거창한 일이 아니구나. 그분을 기다려 주는 마음, 그분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초청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장에 와서 그 마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문자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초대하고 사랑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브라보 시니어를 섬기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자녀의 신앙을 위해 오랫동래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대 축제에 좋은 자리가 있지만, 그 자리에 초청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 초청했음에도 거절당하거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면 믿음을 가진 사람도 지칩니다. 누군가를 열심히 초청하려 노력하지만, 그분이 세대 축제 때 지쳐 있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세대 축제를 보내고 오후에는 많은 분들이 초청자들과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을 보내며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낙담한 성도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에 또 기회가 있겠지만, "이번에 오지 않으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제 마음이 치졸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때로는 버티는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제목을 "당신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습니까?"로 잡았습니다.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 어떤 분들은 잘 산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어떤 분들은 지금 견디고 있고, 버티고 있습니다. 버티는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견뎠는지 물어봤을 때, 어머니의 한마디가 제 마음속에 박혔습니다. "하나님 없었으면 나 그때 죽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예수님, 내 안에 내주하신 성령, 예배의 자리, 때로는 예배에 못 나오는 가나안 성도, 옛 추억, 찬양,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낙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대 축제를 보내면서 제 마음속에 계속 찾아오는 생각은, "내가 지금 이 상태인데 누군가를 전도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본이 되지 않는 모습인데,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가자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모습이 떳떳하지 못한 것 같고, 믿음이 약한 것 같아 스스로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전서입니다. 2,000년 전 소아시아의 한 마을에서, 오늘날과 비슷한 성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일상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한 성도는 낮에는 평소처럼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 앞에서는 웃으며 믿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과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도들을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표현은 아름답습니다. 2장 9절에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라고 극찬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믿음을 떨어뜨리는 이웃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신앙 상담을 받을 때, 내 믿음으로 설명하더라도 낙담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포기하고 믿음을 포기하면 좋은 세상이 열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한 게 정말 잘한 일일까?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왜 더 힘들어지는 걸까?"라고 하나님 앞에서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을 한 인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보면, 실루아노를 통해 기록된 내용 중에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도 있고, 소아시아 교회에 이름 없이 믿음을 지키려 하며 갈등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때로는 오해를 받고, 선을 행하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오히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세대 축제를 보내면서, 잘 초청된 분들도 있지만, 전도 대상자 명단은 적게는 900명, 많게는 1,300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에 오는 분은 주에 300명 내외입니다. 초청되지 못한 많은 분들에 대해 실망하고 넘어진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바울이 겪은 살 소망이 끊어질 만한 환난

설교자는 고린도후서 1장 8절을 인용하며 바울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힘에 겹도록 심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난이 사람의 소망을 흔들 만큼 컸다는 점을 짚습니다. 이어서 바울이 9절에서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한 말씀을 나눕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그 고난의 목적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을 통해 낙심과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소망을 바라보도록 권면합니다. 세대 축제를 앞둔 성도들에게도 그 소망이 견디는 힘이 된다고 적용합니다.

오경제 · 2026-10-21

설교 내 5–5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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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내가 그 복음을 받아들었을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전할 때도 동일하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전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강압도 없다. 다음 주일에 어떻게 밧줄로 묶어 데려오라는 말도 아니고, 이날 안 오면 끊는다거나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이 내 안에 장착될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소망이 되어 장착된다면, 내가 가진 이 소망을 품은 복음을 누군가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전해야 한다. 때로는 그렇게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을 때, 그 사람을 맡겨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완벽해진 다음에 누군가를 초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온유와 두려움을 품고, 내가 애했던 것, 기다렸던 것, 기도했던 것, 메시지를 전달했던 모든 것들을 통해 결국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다는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 우리가 버티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을 행하는 것과 한 영혼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한다면, 첫 번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예수님의 존재이다. 18절을 함께 읽어보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베드로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겪는 고난이, 만약 그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려는 고난이라면, 예수님의 고난이 한 생명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본이 된 것처럼, 우리의 고난도 한 생명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대의 축제를 앞두고 낙심하고 힘들 때, 하나님은 나의 고난과 아픔, 실족을 통해 한 생명이 하나님 앞으로 분명히 인도될 것을 믿는다. 예수님처럼 나의 고난도 사용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면 좋겠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리가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21절과 22절은 이렇게 말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이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베드로는 죽음이 끝이 아니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모든 권세 위에 높히 계신다고 말한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영광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소망도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이 고난은 살 소망을 끊어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바울은 9절에서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대의 축제를 보내면서, 정말 이렇게 초청되어 복음의 잔치, 천국의 잔치를 맛볼 수 있는 분들이 그 안에서 기쁨의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은 천국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간절히 초대하고 싶은데 왜 안 되는지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분은 10년째 축제에 참석했고, 친구 두 명을 이번에도 데려왔지만, 그분은 왜 모르겠는지 계속 오지 않는다. 그 낙심은 얼마나 큰가. 그 외에도 초청하고 싶은데 입도 뻥할 수 없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위로를 얻고 견디는 믿음의 소망을 바라보자. 그 소망은 내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도하셨고, 고난이 부활의 소망과 은혜로 이어졌다는 것을 바라보면서, 세대의 축제 기간을 귀한 시간으로 보내길 바란다.

코리 테이붐의 기차표 이야기

설교자는 코리 테이붐이 들려준 기차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기차에 타기 3주 전에 기차 표를 미리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아버지가 미리 주면 어떠냐고 묻자, 그녀는 3주 전에는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유를 묻는 아버지에게 그녀는 잃어버릴까 봐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필요할 때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이 질문을 기억하시는지 묻고, 이 장면을 성령께서 오시는 방식에 비유합니다. 성령께서도 우리가 죽음과 고난의 순간을 맞을 때 오신다는 것입니다. 미리 주셔서 잃어버릴 염려를 하게 하시기보다,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주신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죽음 앞의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도우신다는 확신을 전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1

설교 내 5–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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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기서 멈춘다면, 당신은 단순히 승리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에 대해서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 이 사슬로 묶인 적을 어떻게 대하신다는 것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묶고 이끌어,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게 하십니다. 이제 제가 이 생각을 어디서 얻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모든 것이 너희 것이니라, 바울이든지 아볼로든지 케바냐든지 세상이든지 생명이든지 죽음이든지 현재가든지 미래가든지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지라.” 이 말씀을 간단히 세 가지로 요약해보면, 첫째, 죽음은 너희 것입니다. 둘째,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죽음은 너희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높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너희 것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죽음은 너희를 위해 존재하며, 너희를 섬기고, 너희를 영화롭히 하고, 너희를 높이며, 너희를 축복하며, 너희를 위해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묶고 억눌러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단순히 승리자 이상입니다. 단지 해방되고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죽음이 너희를 위해 봉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크 루돌프가 죽음에게 부드러운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단순한 낭만적인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죽음의 적대성에 대한 진실이 죽음의 승리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화가 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장례식에서 죽음의 적대성을 지나치게 영화롭히 묘사하는 경우도 보았고, 죽음의 적대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죽음의 적대성을 넘어, 이 적대성을 이기는 승리를, 그것도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적대성을 너희를 위해 봉사하게 하는 슈퍼 승리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앤드류 리브가 “이 이른바 적을 하늘의 교사로 삼아, 60년의 공부보다 더 많은 신학을 배웠다”고 말한 것이 단순한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죽음을 스테판을 위해 일하게 하셨는지 보고, 그 안에서 용기를 얻기를 원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테판을 위해 죽음을 세 가지 방식으로 일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55절의 말씀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황한 설교를 마무리할 때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적을—그가 마주한 죽음—을 마치 종처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개별적인 세부 사항은 특별할 수 있지만, 원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특별한 방식으로 도우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생각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는 아시겠지만, “나는 어둠의 음침한 계곡을 지날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라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끝내 보세요. “왜냐하면…” 여기서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양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어둠의 계곡을 지나기 시작할 때 목자가 “다음에 만나자”고 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제 두 번째 성경 구절은 몇 년 전에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어제 저의 집에 온 마티 웨이드가 이 구절을 언급했을 때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누군가 제가 설교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입니다. 저는 이 설교에서 성령께서 당신의 죽음을 도우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 구절은 간단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때, 영광과 하나님께 속한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무시느니라.” 저는 믿는 자들에게 죽음의 순간에 특별한 은혜가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은 제가 이 주간에 『스타』지에 쓴 이야기들을 읽으며, 고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내가 이걸 견딜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혀를 내밀었는데, 그걸 가위로 잡아 뜨거운 철로 태워 부풀게 하여, 그날 바로 화형대에서 증언할 수 없도록 만든 사람을 보세요. 당신은 그걸 견딜 수 있었을까? 당연히 우리는 모두 “아니요”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는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실이 우리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재의 자원으로는 아마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원이 바로 그 순간에 제한될 것은 아닙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내려오시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영광과 하나님께 속한 성령이 당신 위에 머무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 어둠의 계곡을 지날 때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는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며, 당신은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저는 코리 테이붐이 이 질문을 묻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3주 전에 기차 표를 주면 어때요? 기차에 타기 전에 주면 어때요?”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3주 전에는 주지 않으시죠.”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왜?”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잃을까 봐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필요할 때에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죽음과 고난의 순간에 오십니다. 이제 스테판으로 돌아가서, 죽음이 그를 위해 세 가지 방식으로 일한 것을 보겠습니다. 첫째, 적인 죽음이 스테판에게 다가오며 그를 삼킬 준비를 할 때, 성령께서는 죽음의 입을 하늘의 창문으로 바꾸십니다. 성령께서는 죽음의 입을 하늘의 창문으로 전환시키십니다. 55절입니다.

화형대에서 증언하지 못하도록 된 순교자

설교자는 『스타』지에 실린 이 주간의 이야기들을 언급하며 고난 속에서 죽음을 맞은 성도들을 떠올려 보자고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은 혀를 내밀었는데, 그것을 가위로 잡아 뜨거운 철로 태워 부풀게 하여 그날 바로 화형대에서 증언할 수 없게 된 인물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당신은 그것을 견딜 수 있었을까?'라고 묻습니다. 청중은 대부분 '아니요'라고 느낄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정상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진실이 우리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우리의 현재 자원으로는 아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자원이 그 순간에 제한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려오시고 가까이 오셔서, 영광과 하나님께 속한 성령이 당신 위에 머무신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베드로전서 4장 13절을 인용하며, 어둠의 계곡을 지날 때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그 순간은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전합니다. 결국 고난 속의 죽음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실제로 주어진다는 확신을 강조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1

설교 내 5–5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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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기서 멈춘다면, 당신은 단순히 승리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에 대해서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 이 사슬로 묶인 적을 어떻게 대하신다는 것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묶고 이끌어,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게 하십니다. 이제 제가 이 생각을 어디서 얻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모든 것이 너희 것이니라, 바울이든지 아볼로든지 케바냐든지 세상이든지 생명이든지 죽음이든지 현재가든지 미래가든지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지라.” 이 말씀을 간단히 세 가지로 요약해보면, 첫째, 죽음은 너희 것입니다. 둘째,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죽음은 너희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높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너희 것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죽음은 너희를 위해 존재하며, 너희를 섬기고, 너희를 영화롭히 하고, 너희를 높이며, 너희를 축복하며, 너희를 위해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묶고 억눌러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단순히 승리자 이상입니다. 단지 해방되고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죽음이 너희를 위해 봉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크 루돌프가 죽음에게 부드러운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단순한 낭만적인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죽음의 적대성에 대한 진실이 죽음의 승리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화가 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장례식에서 죽음의 적대성을 지나치게 영화롭히 묘사하는 경우도 보았고, 죽음의 적대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죽음의 적대성을 넘어, 이 적대성을 이기는 승리를, 그것도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적대성을 너희를 위해 봉사하게 하는 슈퍼 승리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앤드류 리브가 “이 이른바 적을 하늘의 교사로 삼아, 60년의 공부보다 더 많은 신학을 배웠다”고 말한 것이 단순한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죽음을 스테판을 위해 일하게 하셨는지 보고, 그 안에서 용기를 얻기를 원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테판을 위해 죽음을 세 가지 방식으로 일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55절의 말씀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황한 설교를 마무리할 때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적을—그가 마주한 죽음—을 마치 종처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개별적인 세부 사항은 특별할 수 있지만, 원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특별한 방식으로 도우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생각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는 아시겠지만, “나는 어둠의 음침한 계곡을 지날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라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끝내 보세요. “왜냐하면…” 여기서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양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어둠의 계곡을 지나기 시작할 때 목자가 “다음에 만나자”고 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제 두 번째 성경 구절은 몇 년 전에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어제 저의 집에 온 마티 웨이드가 이 구절을 언급했을 때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누군가 제가 설교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입니다. 저는 이 설교에서 성령께서 당신의 죽음을 도우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 구절은 간단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때, 영광과 하나님께 속한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무시느니라.” 저는 믿는 자들에게 죽음의 순간에 특별한 은혜가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은 제가 이 주간에 『스타』지에 쓴 이야기들을 읽으며, 고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내가 이걸 견딜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혀를 내밀었는데, 그걸 가위로 잡아 뜨거운 철로 태워 부풀게 하여, 그날 바로 화형대에서 증언할 수 없도록 만든 사람을 보세요. 당신은 그걸 견딜 수 있었을까? 당연히 우리는 모두 “아니요”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는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실이 우리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재의 자원으로는 아마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원이 바로 그 순간에 제한될 것은 아닙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내려오시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영광과 하나님께 속한 성령이 당신 위에 머무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 어둠의 계곡을 지날 때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는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며, 당신은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저는 코리 테이붐이 이 질문을 묻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3주 전에 기차 표를 주면 어때요? 기차에 타기 전에 주면 어때요?”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3주 전에는 주지 않으시죠.”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왜?”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잃을까 봐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필요할 때에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죽음과 고난의 순간에 오십니다. 이제 스테판으로 돌아가서, 죽음이 그를 위해 세 가지 방식으로 일한 것을 보겠습니다. 첫째, 적인 죽음이 스테판에게 다가오며 그를 삼킬 준비를 할 때, 성령께서는 죽음의 입을 하늘의 창문으로 바꾸십니다. 성령께서는 죽음의 입을 하늘의 창문으로 전환시키십니다. 55절입니다.

바울과 함께 선 오니시포로스

설교자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처음 고난을 받았을 때 그의 곁에 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니시포로스만이 예외였다는 말을 짚는다. 설교자는 이것이 아주 오래된 일이므로 지금은 모두가 바울과 함께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겠느냐는 반문을 먼저 제기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거리두기가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스코틀랜드에서 자주 들었다는 말을 소개하며, 사람들이 예수님은 좋아하지만 사도 바울은 싫다고 하고, 복음서는 읽어도 서신은 싫다고 하며, 바울의 여성관과 교회의 침묵에 대한 견해, 성별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전한다. 설교자는 이런 불편함 때문에 사람들이 방향을 잘못 잡기도 하며, 특히 로마서 1장의 진리를 설교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 진리 앞에 설 용기가 없으면 사람들은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디모데와 다른 디모데들에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아가라는 권면이 숨 쉬는 한 유효하다고 적용한다.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사함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21세기 서양 문화에서도 이 복음이 여전히 생명과 불사함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며, 복음을 받아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역을 풍성히 하실 것이라고 격려한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7–7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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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고난을 당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옆에서 나와 함께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니시포로스만이 예외였다. 그는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다." 여러분은 "그건 아주 오래된 일이고,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우리가 모두 바울과 함께 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면, 이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저는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주 들었지만, 여기에서는 덜 들었지만, 사람들은 "나는 예수님을 좋아하지만, 사도 바울은 싫다. 나는 복음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서신을 읽는 것은 싫다. 나는 바울을 싫어한다. 그의 여성에 대한 견해를 싫어한다. 교회에서 침묵에 대한 그의 견해를 싫어한다. 성별에 대한 그의 견해도 싫어한다. 나는 바울의 견해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 우리 삶 속에서도 사람들이 바울과 함께 선 데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로 인해 방향을 잘못 잡은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1장의 진리를 설교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로 그 원인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해 서 있을 용기를 내지 못함으로 인해 그들은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티모티와 다른 티모티들에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한, 우리는 이 도전에 나서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가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폐하셨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사함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21세기 서양 문화 속에서도 생명과 불사함은 여전히 복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서서 이 복음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분의 사역을 풍성히 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실제로 말하는 것은 "내 사역은 끝났지만, 복음 사역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마무리 단계에 있다. 내 떠나는 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용한 단어는 *아날루시스*입니다. 이는 하루 동안 갈고리를 끌어당긴 소를 묶는 것, 또는 앵커를 내리는 것, 또는 안정된 목적지로 돌아가기 위해 진영을 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가 사용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 속에는 불안함이 없습니다. 떠나는 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내 삶은 제물로 부어지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다"고 말하며, 이는 구약의 비유입니다. 속죄의 제물이 뒤따르는 데는 헌신의 제물이 있습니다. 이는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너희 몸을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기를 간구한다." 그리스도의 제물은 속죄적이었고, 그리스도의 따르는 자들의 제물은 헌신적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바울은 마지막 명령을 내립니다. "티모티, 네가 맡은 책무는 이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너를 충성스럽게 맡긴다. 그리스도 예수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판단하실 분이시다." 이 명령의 특징 중 하나는 엄숙함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이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손을 주머니에 넣고 말하는 것이 아니듯이, 명령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일부분 군인 분들이 계시겠지만, 저는 군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맡거나 무언가를 맡길 때, 그것은 공식적이고 엄숙하며 중요한 일입니다. 이 명령이 얼마나 엄숙한지에 대한 이유는 맥락입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너를 충성스럽게 맡긴다. 그리스도 예수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판단하실 분이시다." 티모티와 우리 모두는 결국 교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무는 교회를 지키고 돌보고 돌보는 것입니다. 이 책무가 얼마나 엄숙한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 책무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이 역사적 정통성을 따르며 이루어질 때—물론 제가 본 많은 결혼식은 이와 거리가 있습니다—그것은 매우 엄숙한 행사입니다. 결혼식의 순서는 무엇이 되든 간에, 저는 내 사역 기간 동안 각각의 결혼식에 각각의 영국 기독교 기도서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특히 이상한 결혼식에서 온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합니다. 우리는 교회와 신랑신부에게 이 일을 가볍게 접근하지 말고, 신중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세우으신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제도는 평생 동반자인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완전한 충성심을 바치기 위한 것입니다.

욥, 다윗, 히즈키야의 고통

설교자는 욥과 다윗, 히즈키야가 고통을 겪었던 사실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백성이 병드는 일이 낯선 일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는 먼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도 여전히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의 필요와 약점에서 면제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인간의 약점으로부터 우리를 면제시키지 않으며, 은혜의 언약도 결핵이나 풍습성 관절염, 천식으로부터 면제되는 증명서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육체에 있는 자들이 모두 고통스럽다고 말한 것을 인용하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훈련하신다는 말씀도 덧붙입니다. 그는 병원 복도에서 차례가 온다고 놀랄 필요가 없다는 비유적 질문을 던지며, 청중이 자신의 병을 예상된 일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합니다. 또한 이 병이 종종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기억하면, 병든 상황에서도 놀라지 않고 차분히 주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19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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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단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의 보통 필요와 약점으로부터 우리를 면제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사람입니다. 은혜의 언약은 결핵, 풍습성 관절염, 천식으로부터 면제되는 증명서가 아닙니다. 육체의 병은 우리의 육체를 통해 우리에게 찾아와 무덤까지 우리를 따라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육체에 있는 자들이 모두 고통스럽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기 때문에 더 자주 병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그분이 훈련하시고, 모든 아들을 그분이 징계하신다.”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녀의 표징 중 하나이며, 종종 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병원 복도에서 우리의 차례가 온다고 놀라야 할까요? 요브와 다윗, 히즈키야가 고통을 겪었으니, 우리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병으로 인해 종종 우리에게 큰 이익이 생긴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병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아야 합니다.

용광로와 정원의 과일로 본 고난의 연단

설교자는 라자로에게 어떤 구체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강한 사람이 종종 가혹하고 지배적이며 무감각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용광로에 던져 녹여야 한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어 설교자는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부드러워진 그리스도인 여성들을 알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이 고통을 거치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부드럽고, 약하고, 지혜롭고, 경험 많고, 거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정원에 비유하여, 인간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짓누르지 않으면 익지 않는 과일들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고난은 사람을 빚어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이 설교자의 적용이며, 이 대목은 고통을 단순한 손실로 보지 않도록 이끕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19

설교 내 5–5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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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에게 어떤 구체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강한 사람은 종종 가혹하고 지배적이며 무감각하므로, 그들을 용광로에 던져 녹여야 합니다. 저는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부드러워진 그리스도인 여성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결코 그렇게 부드럽고, 약하고, 지혜롭고, 경험 많고, 거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원에서는 인간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짓누르지 않으면 익지 않는 과일들이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예수께 가져간 일

설교자는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이 스승이 머리 베인 뒤 그 시체를 들고 예수님께 알린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는 이들이 슬픔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주님께 소식을 전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근거로, 어떤 어려움이든 예수님께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의 불행을 감추지 말라고 권합니다. 예수님께는 억누를 필요가 없으며, 차갑게 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잔혹하게 배신하지 않으실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우리를 결코 배신하지 않는 믿음직한 분이시며 거절하지 않는 친구이시므로, 모든 것을 말씀드리면 좋은 희망이 있다고 격려합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예수님께 찬송을 부르고 모든 것을 말씀드리라는 권면으로, 주님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신앙의 자세를 강조하며 이 대목을 맺습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19

설교 내 6–6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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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고 자랑스럽거나 말 많은 젊은 소녀들은 병으로 인해 자비롭고 온화해지며, 예수님의 발 앞에서 앉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시인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고난을 당함으로 주의 계명을 배우는 것이 좋았도다.' 그러므로 존경받고 복된 여인들조차도 마음 깊은 곳에 칼이 찔리는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이 병들고 죽는 일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익이 됩니다. 라자로는 사도들이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병들고 죽었습니다. 그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라자로의 병이 있은 지 19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든 믿는 자들이 그로부터 이익을 얻었으며, 오늘날 우리는 그의 병과 죽음으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선한 자들의 고난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관심한 자들이 깨어나고, 의심하는 자들이 확신을 얻으며, 악한 자들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병 중에 우리가 전하는 증언을 통해 슬퍼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통과 약함을 피하려 하겠습니까? 우리가 친구들이 우리에 대해 '주님, 보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로 그 사실에 대한 메시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동생들이 예수님께 알리기 위해 보냈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주님과의 지속적인 소통을 유지해야 합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예수님께 찬송을 부르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말해야 합니다. 기쁨이든 불평이든,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지만, 그분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이 그 선생이 머리 베인 것을 보고 시체를 들고 예수님께 알렸을 때,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든 예수님께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의 불행을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억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차갑고 자랑스럽게 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잔혹하게 배신하지 않으실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배신하지 않으시는 믿음직한 분이시며, 우리를 거절하지 않는 친구이십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말하면 좋은 희망이 있으며, 그분께서 반드시 우리를 지지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서 '전능하신 주님, 내가 왜 병들었는지 알려 주소서'라고 묻는다면, 내가 건강할 때는 유용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알려 주실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알려 주지 않으신다면, 그분께서는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인내심 있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를 통해 당신을 격려하고, 당신의 임재로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예상치 못한 위로를 보내거나 고난 속에서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마음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님께 경고를 보냈다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도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사와 약을 거부하면서 허황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치 도살장이나 옷감 장인을 해고하고 믿음만으로 먹고 입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님을 아예 잊고 사람만 의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육체와 영혼의 치유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약물을 사용하지만, 그 약물은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고통, 점점 사라지는 힘, 그리고 약해지는 기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 하나님께 묻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머리가 아프면 예수님께 그 아픔을 치유해 달라고 감히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세셨으니, 머리 속의 맥박과 압력을 완화시키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큰 일은 크신 하나님께는 작고, 우리의 작은 일은 더 작을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자녀들 중 누구의 가장 작은 고통이나 필요를 잊지 않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와 크기의 증거입니다. 숨쉬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폐와 생명을 주셨으시기 때문입니다. 시력이 약해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것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가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은 무릎, 고름이 생긴 손가락, 뻐근한 목, 또는 삐진 발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몸의 모든 부위를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속량하셨으며, 그 모든 것을 무덤에서 일으키실 것입니다. 즉시 가서 '주님, 보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라자로의 사건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님께 소식을 보낼 때, 그들은 메신저가 예수님께 도착하자마자 라자로가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틀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고,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야야 유대지방으로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아시면서도 무관심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치유를 위한 기도가 항상 응답받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친구나 가족, 지인이 기도해 주는 모든 사람이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