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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3개 · 1 / 1쪽 · 한 쪽 20개

다윗의 쫓김과 시편의 찬양

설교자는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곧 왕이 되는 듯했으나, 사울 왕의 시기를 사서 십수 년 동안 쫓기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살인의 위협 앞에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난 속에서 다윗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주목합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많은 노래와 고백은 우리가 잘 아는 시편에 담겨 있습니다. 설교자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고난이 사람을 하나님께 향하게 만드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성도가 지나는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설교자의 메시지입니다.

안성준 · 2026-10-28

설교 내 4–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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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다윗은 어떠합니까? 다윗에게도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이제 왕이 되는가 싶었는데, 그 왕이 되는 것도 잠시, 사울 왕에게 시기를 사서 십수 년 동안 쫓김을 당하고 살인의 위협 앞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수차례의 순간을 견뎌내는 것이 다윗이 지나는 고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고난을 통하여 다윗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 많은 노래와 고백들이 저희가 잘 알고 있는 시편에 담겨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며 찬양의 간증

설교자는 '광야를 지나며'라는 찬양을 소개합니다. 그는 이 곡의 가사를 처음에는 원망하는 마음으로 불렀지만, 과거를 돌아보니 광야가 주님만 도움이 되시고 빛이 되시며 친구가 되시는 자리였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가사의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라는 구절을 자신의 시카고 시절과 연결합니다. 그 시절 그는 왜 깊은 어둠에 가두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말합니다. 또 설교자는 찬양을 검색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린 나이에 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한 여성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고 나눕니다. 가사의 결론처럼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정결케 하시려고 택하여 보내신 곳이 광야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찬양의 의미를 다음 주일에 이어서 설명하겠다고 예고합니다.

이찬수 · 2026-10-18

설교 내 6–6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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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점점 매말라가고, 감사가 사라지고, 삶의 의욕은 없어지고, 기쁨도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뭐 있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 주시는데." 이런 원망이 넘쳐나는 여러분들,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혼미하게 하는 그 영역을 벗어나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역으로 들어가려고 어떻게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 아이처럼 가스 배관을 타고 집을 탈출해야 회복이 일어나듯이, 우리의 신앙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그곳을 배회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는 일어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그 생활은 청산하지 않으면서, 제가 돌아보면은요. 목사들인데도 어릴 때 항상 하나님 없어. 하나도 안 도와줘. 그걸 제가 많이 불평한 기억이 나거든요. 도와줄 수 없는 불신앙의 자리에 머물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했다고요. 20대 초반에 시카고로 이민 가서 가장 밑바닥에 있던 그 상황에서 진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때부터 제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은혜를 누리기 시작한 출발이 되는 거예요. 저는 가끔씩요. 저는 3월 15일 날 시카고로 이민을 갔는데, 그 날이 영적으로 내 생일이라고 얘기를 해요. 제가 미국에 안 갔으면, 시카고에 가지 않았으면, 그 절망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절대로 목사가 안 됐습니다. 교회도 안 나갈 수도 있어요. 그때까지 인격적으로 제가 애쓰지도 않았고 만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뭘 강조하고 싶은 겁니까? 여러분, 이런 점에서 저는 기독교 변증가거든요. CS 루이스라는 분. 여러분, 신앙생활 처음 하시거나, 오늘 초대 오신 분들, CS 루이스의 책을 구해서 읽어 보십시오. 어떤 책이라도 괜찮아요. 이분이 정말 대단한 분인데요. 이분이 쓴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그분의 확성기입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그분의 확성기입니다. 우리가 그냥 내 힘을 의지하여 전도해 보면, 그런 분들이 옛날에 많았습니다. "난 주먹을 믿어. 난 내 주먹을 믿지. 난 하나님 없어도 돼." 너무나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려고 바둥바둥 그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리는 거예요. 들리지 않습니다. 옛날에 종이 신문이 있을 때, 신문 보내라고 몰입하고 있으면, 아내가 처음에는 아주 부드러운 소리로 "식사하세요. 밥 먹으라고요." 안 들려요. 신문에 내가 몰입하고 있으면, 밥 먹으라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거거든요. 오늘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풍요로운 삶을 원하세요. 계속 말씀하십니다. "진짜 얘들아, 땅이 다가 아니라고, 왜 그렇게 바둥바둥 그리냐고." 응.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혼이 없다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설명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요. 그 반통만 알고 있기 때문에, 안 그렇던가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건 전부이고, 나는 영혼이 없는 짐승하고 똑같이, 나 우리 강아지를 보면서, 이 강아지가 어떨 때는 나하고 차이가 뭐지? 걔도 모든 흰혈구를 다 갖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동물들하고 저하고의 결정적인 차이는, 저는 영혼이 있어요. 영혼이. 그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는, 하나님 말씀이 안 들려요. 그리고 집에 가서 생각해 보세요. 아, 그러고 보니까 이 땅이 끝이라고 한다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잖아요. 설명이 안 되는 그 많은 일들이, 왜 이후에 연장되는 그 부분을 모르기 때문이거든요. 하나님은 계속 그 말씀을 해 주세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관점으로 보면 참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는데요. 본문에서 "다 배불리 먹고" 이런 결과가 이제 결론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결론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어땠는 줄 아십니까? 자, 15절 다시 한번 보십시오. 마태복음 14장 15절입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두 대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빈 들은 결핍의 상징 아닙니까? 게다가 제자들이 관찰한 그대로, 이미 밤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구할 수 없다. 그 이야기를 지금 고백한 거거든요. 그래서 빈 들이요. 이거가 어떻게 다 배불리 먹고의 재료가 됐나?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결핍의 상징인 빈 들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기에 지금 밤까지 찾아왔는데, 놀라운 건 그게 역설적으로 수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게 된 원인이었다는 거예요. 다른 데서 그날 군중들 먹일 수 있는 양식을 구해 왔으면, 예수님의 기적에 음식은 나오지 않았을 거 아니냐고요. 결핍이 기적을 만든 재료가 된 거거든요. 빈 들이 다 배불리 먹고, 이 풍요로움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누가 저한테, "아니 그 장소가 빈 들이었는데, 거기는 결핍이었는데,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걸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저한테 물으시면, 저는 대답 간단하게 다 그거요. 정답은요,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결핍이 재료가 된 겁니다.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과 우리 교회 오래 다니지만 복음이 뭔지 모르는 분에게 드리고 싶은 핵심이 이거거든요. 여러분, 살다 보면 빈 들이 오지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차원의 빈 들이 오고, 관계적으로 배신당해서 상처받는 빈 들이 오고,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마음을 나눌 길이 없어 가지고 막 절망하고, 이게 인생 아닙니까? 저는 하나님이 그때 이미 분당 우리 교회 만 명에 단임 목사로 딱 계획을 하고 계셔 가지고, 저희에게 빈 들을 좀 빨리 보내 주셨어요. 저는 20대 초에 인생의 빈 들, 인생의 쓴맛을 본 거거든요. 지금도 기억해요. 절망적인 제 상황, 환경은요. 아니, 내가 한국 살다가 미국 갔는데, 그때 경제 격차가 미국하고 한국은 비교할 수 없이만큼 우리나라가 낙후가 됐는데, 세상에, 난 미국이라고 갔는데, 미국에서 저 화장실 가는데 새벽에 불을 켜면은 바퀴벌레들이 막 놀라가고, 이것 왜 일찍 일어나서 그러면서 막 바퀴벌레가 도망가는 그 그거, 아, 내가 한국에도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요. 이 목조 건물, 막 미국에 낡아 빠진 100년된 목조 건물에 제가 사는데, 하여튼 한심했어요. 그리고 아버지셨죠. 온 남매 중에 뚝 떨어지는 막내죠. 대학교 2학년 맞추고 이민을 갔는데, 거기서 다시 공부를 해야 되는데, 학비를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이게 절망이 온 거죠. 빈 들이 찾아왔죠. 자꾸 좌절이 겹치니까, 그냥 죽고 싶더라고요. 조금만 더 제가 용감했으면, 뭐 도전했을지 모르죠. 무서워서 못 죽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에요. 그 빈 들들이 저로 하여금 놀랍게도 배불리 먹고, 이 인생을 만들어 준 거 아닙니까? 배불리 먹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한테, 아 참, 저희 교회가요, 지금도 자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너무 힘듭니다. 그 오연을 하지 말아 주세요. 얼마나 주 목사가 욕심이 많아 가지고, 나까지 신도 만들려고 그냥 저렇게 쓴다고 그러는데, 진짜 오해하세요. 저희는요, 일만 소도 파송 운동으로 만 명 이상을 다 파송한 교회예요. 이 오해만 가지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왜 그 영화 한편 참 재밌는 거 보고 나면, 막 진짜 우리에 보고, 너 그거 봐야 된다. 말 안 들어, 너 진짜 이 영화는 봐야 된다. 아직도 안 봤니? 같이 가져 나오고, 이런 영화가 있잖아요. 최근에도 그런 영화가 있었는데, 이 심정으로 여러분을 초대한 거예요. 여러분이 마음 말고는 다른 거 없습니다. 바로 어제인데요.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 마음을 울린 찬양, 이게 참, 원래부터 잘 아는 곡인데, 하나님은 때에 따라 새롭게 은혜를 주세요. 광야를 지나며, 이런 제목의 찬양인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써 있네." 제가 이 가사가 너무 어제 와닿 가지고요. 왜 시카고에 만 명 때 저를 보는 거 같으니까요. "왜 나를 깊은 어둠에 가두어 두느냐고, 막 떼지를하고, 당신이 신이냐고, 막 이렇게 무능한 시기냐고, 막 되들고 그랬거든요." 그때 땅이 가사 그대로예요.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요." 과거형이에요. 과거를 돌아보니까, 그 광야가 내게,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광야가 어떤 곳이냐?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제가 이 곡을 선분 검색을 해 보니까요, 여성분인데요, 저하고 좀 환경이 비슷하더라고요.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 그것도 비슷해요. 그리고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아직 그 어린 학생인데, 자기가 벌어서 생활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 얼마나 그 광야 그 길이 심했겠냐고요. 그 고백을 쭉 하면서, 아까 여기에 저는 과거형으로 썼는데, 저는 단수로 여러분께 설명했던 게 뭐였죠? 왜 나를 다시 한번 보세요.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요." 과거형이에요. 과거를 돌아보니까, 그 광야가 내게,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그리고 결론에 있는 그다음 가사가 너무 중요합니다. "주께서 나를 사,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고,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신 곳, 그 광야에 내가 서 있네." 이 찬양 아닙니까? 이 부분은 다음 주일 날 제가 또 설명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제가 결심한 게 하나 있는데요. 오늘은 설교를 끝내지 않고 마치리라. 요렇게 설교를 끝내려고요. 지금 여러분 생각에, 우리 목사님 스타일을 보니까, 아직 서론하고 있는데, 폴로는 도대체 언제 하는 거야? 두려워하고 있는데, 폴로는 다음 주일 할 거예요. 이 설교 끝났습니다. 요렇게 설교를 제가 끝내고요.

C.S. 루이스가 말한 아름다움과 찬양

설교자는 20세기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의 글을 소개합니다. 설교자가 직접 읽어 준 내용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참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면 자연히 그것을 찬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그 영광이 대단했다고, 묵은지 김치찜이 참 맛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근거로 찬양이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쁨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적용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기뻐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연인들이 서로에게 아름답다고 계속 말하는 장면을 예로 듭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 기쁨이 완성되며, 표현되기 전의 기쁨은 불완전하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를 알고 맛보는 즐거움이 없다면 찬양도 삶의 예배도 불가능하다고 결론짓습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8–8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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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생 최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묵은지 김치찜입니다. 전라도 주신 어 김치찜 맛있게 먹는 법이 있습니다. 깊고 거룩하게 무릎 익은 묵은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돼지 수육과 함께 두꺼운 뚝배기에 넣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팔팔 끓립니다. 언제까지? 그 김치가 황금빛으로 변하고 투명해질 때까지요. 그리고 김이 모랑모랑 나는 그 흰살밥 한 수를 탁 뜹니다. 그리고 그 황금 김치를 큼지막하게 찢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불을 대듯이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야들야들하게 익은 돼지 수육을 딱 들었을 때 파르 떨어야 됩니다. 이 파르를 떠는 돼지 수육을 그 김치찜 위에 올려서 입을 크게 벌리고 한 입을 확 무는 순간, 지금 입에 침이 고이신 이분들, 이분들이 바로 김치찜을 아는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묵은지 김치찜을 실제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아멘. 왜요? 알아야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래야 그분이 영화롭는 까닭입니다. 호사야 6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게 아니라, 네가 만약 나 여호와 아는 것이 먼저이지 않는다면 그 제사 의미 없다. 왜? 네가 나를 알지 못하면 나를 기뻐할 수 없고, 기쁨이 없는 제사는 내게 의미 없다. 왜 한 때 뜨거웠던 우리 신앙 열정이 곧잘 식어가는 걸까요? 선교에 대한 긴급성이 좀 떨어져서, 세상가 좀 많이 힘들어서가 아닐지 모릅니다. 사실상 그 사랑스러운 하나님을 직접 맛보아 아는 경험이 점점 사라지면, 자연히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에게 뜨거웠던 예배도 헌신도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이들의 즐거움은 반드시 찬양과 경배와 헌신으로 터져 나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의 글인데요. 제가 한번 읽어 드리죠. 사람들은 어떤 것을 참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면 자연히 그것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녀는 참 사랑스럽지 않니? 그거 참 영광스럽지 않았니? 묵은지 김치찜 참 맛있지 않니? 찬양은 이건 제가 한 겁니다. 찬양은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기쁨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