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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개 · 1 / 1쪽 · 한 쪽 20개

광야에서 내려온 만나

설교자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날마다 내려온 만나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감사했던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있었지만, 매일 내려 주신 일용할 양식인 만나였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만나가 많아도 안 되고, 집안 식구 수만큼 딱 필요한 만큼만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누가 와서 더 주더라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의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은 양식으로 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근거를 하나님과 함께 찾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교제인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진다고 전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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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존재는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빛을 비춰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한참 젊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결국 결과를 보게 만들어요. 내가 하는 것, 여러분이 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의 결과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깁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았던 그 가론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사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이후에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디에 쉬었습니까?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뭐였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옵니다.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돼 있어요. 사람마다 뭘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3명이나 모여서 같이 성령님의 인도를 맛보고 삶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들어와야 하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의 가르침,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도망가는 것이었죠.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죄라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도망가는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보면, 출애굽하고 나서 그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갑니까? 옛날 생각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었던 옛자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옛날엔 이랬었지, 저했었지.' 그런데 우리는 다 새생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옛자에 속지 말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두려움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를 의심하죠? 주님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의심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단절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소명이 생깁니다. 여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유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코이노니아 얘기했잖아요.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죠? 나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 번째 누굴 나눴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눴고, 두 번째는 간증을 했고, 세 번째는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그러니까 영적으로, 혼적으로 풀리면 무엇이 풀리죠? 물질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다 풀리게 됩니다. 순서가 있더라고요. 근데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이 되고, 혼쪽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막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그것도 주님께 맡기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혼까지도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이루셨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제입니다. 나눔입니다. 그게 영적인 교제든, 육적인 교제든, 아니면 물건을 통한 교제든, 그 코이노니아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합에요. 누구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사람과의 연합이 됩니다. 사람이 연합이 되면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 통해 저변이 확대됩니다. 근데 그게 없으니까 요즘 교회는 다들 힘듭니다. 마음속에서 꺼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뭐를 꺼내 놓으면 그냥 듣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정작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고 계시니까, 그것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듯이 삶 가운데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가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질 때, 주님이 서로 일으켜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면 너희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어요.' 교제.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 누구와 교제가 되죠? 지체들과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거기에서는 기도가 있을 것이고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교제가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같이 교제하다 보면, 아, 내가 내 모양이 이래서, 내 죄성이 이래서 이렇게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일부분이고, 잠시 보여지는 일부분이고, 죄를 꺼내 놓고 좋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다른 것도 같이 꺼내 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무언가 간증을 들어보고 그걸 판단하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고 여겨질 수 있게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때는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떤 간증이 있고, 어떤 죄성이 있어. 그걸 하나님께 고발했더니 이렇게 해 주셨어.' 이게 자부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다가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광야 생활 중에서 제일 감사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런 것도 있지만 매일매일 뭘 내려 주셨습니까? 만나.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근데 그 만나의 양이 많아도 안 됩니다. 딱, 집안에 네 식구라면 네 개만 딱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더 주면 받아야 되나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 양식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보여지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제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 말하기를 더고 뭐라고 얘기하시죠? 듣기를 속해하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음으로써 벌써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한 분이라면, 그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떤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과 더 뛰어난 것을 불러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의 그릇이 있고 저만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점진적으로 단련한 후에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단련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떤 교제를 통해, 어떤 마음을 통해 흔들리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이 수직적인 관계가 해결되면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절.

광야를 지나며 찬양의 간증

설교자는 '광야를 지나며'라는 찬양을 소개합니다. 그는 이 곡의 가사를 처음에는 원망하는 마음으로 불렀지만, 과거를 돌아보니 광야가 주님만 도움이 되시고 빛이 되시며 친구가 되시는 자리였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가사의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라는 구절을 자신의 시카고 시절과 연결합니다. 그 시절 그는 왜 깊은 어둠에 가두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말합니다. 또 설교자는 찬양을 검색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린 나이에 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한 여성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고 나눕니다. 가사의 결론처럼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정결케 하시려고 택하여 보내신 곳이 광야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찬양의 의미를 다음 주일에 이어서 설명하겠다고 예고합니다.

이찬수 · 2026-10-18

설교 내 6–6문단 · 예화 8

본문 발췌 보기

우리 마음이 점점 매말라가고, 감사가 사라지고, 삶의 의욕은 없어지고, 기쁨도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뭐 있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 주시는데." 이런 원망이 넘쳐나는 여러분들,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혼미하게 하는 그 영역을 벗어나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역으로 들어가려고 어떻게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 아이처럼 가스 배관을 타고 집을 탈출해야 회복이 일어나듯이, 우리의 신앙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그곳을 배회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는 일어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그 생활은 청산하지 않으면서, 제가 돌아보면은요. 목사들인데도 어릴 때 항상 하나님 없어. 하나도 안 도와줘. 그걸 제가 많이 불평한 기억이 나거든요. 도와줄 수 없는 불신앙의 자리에 머물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했다고요. 20대 초반에 시카고로 이민 가서 가장 밑바닥에 있던 그 상황에서 진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때부터 제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은혜를 누리기 시작한 출발이 되는 거예요. 저는 가끔씩요. 저는 3월 15일 날 시카고로 이민을 갔는데, 그 날이 영적으로 내 생일이라고 얘기를 해요. 제가 미국에 안 갔으면, 시카고에 가지 않았으면, 그 절망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절대로 목사가 안 됐습니다. 교회도 안 나갈 수도 있어요. 그때까지 인격적으로 제가 애쓰지도 않았고 만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뭘 강조하고 싶은 겁니까? 여러분, 이런 점에서 저는 기독교 변증가거든요. CS 루이스라는 분. 여러분, 신앙생활 처음 하시거나, 오늘 초대 오신 분들, CS 루이스의 책을 구해서 읽어 보십시오. 어떤 책이라도 괜찮아요. 이분이 정말 대단한 분인데요. 이분이 쓴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그분의 확성기입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그분의 확성기입니다. 우리가 그냥 내 힘을 의지하여 전도해 보면, 그런 분들이 옛날에 많았습니다. "난 주먹을 믿어. 난 내 주먹을 믿지. 난 하나님 없어도 돼." 너무나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려고 바둥바둥 그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리는 거예요. 들리지 않습니다. 옛날에 종이 신문이 있을 때, 신문 보내라고 몰입하고 있으면, 아내가 처음에는 아주 부드러운 소리로 "식사하세요. 밥 먹으라고요." 안 들려요. 신문에 내가 몰입하고 있으면, 밥 먹으라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거거든요. 오늘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풍요로운 삶을 원하세요. 계속 말씀하십니다. "진짜 얘들아, 땅이 다가 아니라고, 왜 그렇게 바둥바둥 그리냐고." 응.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혼이 없다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설명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요. 그 반통만 알고 있기 때문에, 안 그렇던가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건 전부이고, 나는 영혼이 없는 짐승하고 똑같이, 나 우리 강아지를 보면서, 이 강아지가 어떨 때는 나하고 차이가 뭐지? 걔도 모든 흰혈구를 다 갖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동물들하고 저하고의 결정적인 차이는, 저는 영혼이 있어요. 영혼이. 그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는, 하나님 말씀이 안 들려요. 그리고 집에 가서 생각해 보세요. 아, 그러고 보니까 이 땅이 끝이라고 한다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잖아요. 설명이 안 되는 그 많은 일들이, 왜 이후에 연장되는 그 부분을 모르기 때문이거든요. 하나님은 계속 그 말씀을 해 주세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관점으로 보면 참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는데요. 본문에서 "다 배불리 먹고" 이런 결과가 이제 결론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결론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어땠는 줄 아십니까? 자, 15절 다시 한번 보십시오. 마태복음 14장 15절입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두 대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빈 들은 결핍의 상징 아닙니까? 게다가 제자들이 관찰한 그대로, 이미 밤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구할 수 없다. 그 이야기를 지금 고백한 거거든요. 그래서 빈 들이요. 이거가 어떻게 다 배불리 먹고의 재료가 됐나?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결핍의 상징인 빈 들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기에 지금 밤까지 찾아왔는데, 놀라운 건 그게 역설적으로 수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게 된 원인이었다는 거예요. 다른 데서 그날 군중들 먹일 수 있는 양식을 구해 왔으면, 예수님의 기적에 음식은 나오지 않았을 거 아니냐고요. 결핍이 기적을 만든 재료가 된 거거든요. 빈 들이 다 배불리 먹고, 이 풍요로움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누가 저한테, "아니 그 장소가 빈 들이었는데, 거기는 결핍이었는데,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걸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저한테 물으시면, 저는 대답 간단하게 다 그거요. 정답은요,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결핍이 재료가 된 겁니다.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과 우리 교회 오래 다니지만 복음이 뭔지 모르는 분에게 드리고 싶은 핵심이 이거거든요. 여러분, 살다 보면 빈 들이 오지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차원의 빈 들이 오고, 관계적으로 배신당해서 상처받는 빈 들이 오고,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마음을 나눌 길이 없어 가지고 막 절망하고, 이게 인생 아닙니까? 저는 하나님이 그때 이미 분당 우리 교회 만 명에 단임 목사로 딱 계획을 하고 계셔 가지고, 저희에게 빈 들을 좀 빨리 보내 주셨어요. 저는 20대 초에 인생의 빈 들, 인생의 쓴맛을 본 거거든요. 지금도 기억해요. 절망적인 제 상황, 환경은요. 아니, 내가 한국 살다가 미국 갔는데, 그때 경제 격차가 미국하고 한국은 비교할 수 없이만큼 우리나라가 낙후가 됐는데, 세상에, 난 미국이라고 갔는데, 미국에서 저 화장실 가는데 새벽에 불을 켜면은 바퀴벌레들이 막 놀라가고, 이것 왜 일찍 일어나서 그러면서 막 바퀴벌레가 도망가는 그 그거, 아, 내가 한국에도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요. 이 목조 건물, 막 미국에 낡아 빠진 100년된 목조 건물에 제가 사는데, 하여튼 한심했어요. 그리고 아버지셨죠. 온 남매 중에 뚝 떨어지는 막내죠. 대학교 2학년 맞추고 이민을 갔는데, 거기서 다시 공부를 해야 되는데, 학비를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이게 절망이 온 거죠. 빈 들이 찾아왔죠. 자꾸 좌절이 겹치니까, 그냥 죽고 싶더라고요. 조금만 더 제가 용감했으면, 뭐 도전했을지 모르죠. 무서워서 못 죽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에요. 그 빈 들들이 저로 하여금 놀랍게도 배불리 먹고, 이 인생을 만들어 준 거 아닙니까? 배불리 먹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한테, 아 참, 저희 교회가요, 지금도 자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너무 힘듭니다. 그 오연을 하지 말아 주세요. 얼마나 주 목사가 욕심이 많아 가지고, 나까지 신도 만들려고 그냥 저렇게 쓴다고 그러는데, 진짜 오해하세요. 저희는요, 일만 소도 파송 운동으로 만 명 이상을 다 파송한 교회예요. 이 오해만 가지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왜 그 영화 한편 참 재밌는 거 보고 나면, 막 진짜 우리에 보고, 너 그거 봐야 된다. 말 안 들어, 너 진짜 이 영화는 봐야 된다. 아직도 안 봤니? 같이 가져 나오고, 이런 영화가 있잖아요. 최근에도 그런 영화가 있었는데, 이 심정으로 여러분을 초대한 거예요. 여러분이 마음 말고는 다른 거 없습니다. 바로 어제인데요.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 마음을 울린 찬양, 이게 참, 원래부터 잘 아는 곡인데, 하나님은 때에 따라 새롭게 은혜를 주세요. 광야를 지나며, 이런 제목의 찬양인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써 있네." 제가 이 가사가 너무 어제 와닿 가지고요. 왜 시카고에 만 명 때 저를 보는 거 같으니까요. "왜 나를 깊은 어둠에 가두어 두느냐고, 막 떼지를하고, 당신이 신이냐고, 막 이렇게 무능한 시기냐고, 막 되들고 그랬거든요." 그때 땅이 가사 그대로예요.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요." 과거형이에요. 과거를 돌아보니까, 그 광야가 내게,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광야가 어떤 곳이냐?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제가 이 곡을 선분 검색을 해 보니까요, 여성분인데요, 저하고 좀 환경이 비슷하더라고요.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 그것도 비슷해요. 그리고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아직 그 어린 학생인데, 자기가 벌어서 생활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 얼마나 그 광야 그 길이 심했겠냐고요. 그 고백을 쭉 하면서, 아까 여기에 저는 과거형으로 썼는데, 저는 단수로 여러분께 설명했던 게 뭐였죠? 왜 나를 다시 한번 보세요.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요." 과거형이에요. 과거를 돌아보니까, 그 광야가 내게,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그리고 결론에 있는 그다음 가사가 너무 중요합니다. "주께서 나를 사,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고,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신 곳, 그 광야에 내가 서 있네." 이 찬양 아닙니까? 이 부분은 다음 주일 날 제가 또 설명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제가 결심한 게 하나 있는데요. 오늘은 설교를 끝내지 않고 마치리라. 요렇게 설교를 끝내려고요. 지금 여러분 생각에, 우리 목사님 스타일을 보니까, 아직 서론하고 있는데, 폴로는 도대체 언제 하는 거야? 두려워하고 있는데, 폴로는 다음 주일 할 거예요. 이 설교 끝났습니다. 요렇게 설교를 제가 끝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