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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12개 · 1 / 1쪽 · 한 쪽 20개

스펄전 자신의 구원 고백

설교자는 자신의 개인적 구원 경험을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뼈아프게 깨닫고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몰렸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행하거나 어떤 사람이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 자체를 받아 주시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완전하고 신적인 의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던 중 그는 그 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믿음으로 자기 것이 된다는 말씀을 읽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한 죄에 대해 공의가 만족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전에는 그와 비슷한 것조차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처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마음의 짐이 벗겨졌던 순간과, 구주의 상처를 다시 바라볼 때마다 옛 기쁨이 되살아났던 수많은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는 새로운 교리는 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대속 교리가 진리임은 확실히 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다른 것을 전할 수 없으며, 대속 제사를 돌이킬 수 없는 결심으로 계속 전하겠다고 적용합니다. 이 고백은 그의 설교가 개인적 체험에서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8

설교 내 10–1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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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두고 사용된 천박한 표현들로 제 입술을 더럽히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이 악한 말들을 용납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사역하면서 대속 제사를 전파하는 일을 가장 단호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결심으로 계속할 것입니다. 제가 반드시 그렇게 하려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어떤 근원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조금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대속자가 아니시라면 저는 멸망한 사람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죄를 뼈아프게 깨닫고 막다른 곳에 몰렸습니다. 제가 무엇을 행하거나 어떤 사람이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저 자체를 보시고 받아 주시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포기했습니다. 저에게는 의가, 완전하고 신적인 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제 힘으로는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합니다. 그 의가 믿음으로 제 것이 된다는 말씀을 읽고,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제 양심은 제가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한 데 대하여 그분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기 전에는 그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제가 처음 그분을 바라보고 마음의 짐이 벗겨졌던 때를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죄인으로 구주의 발 앞에 나아가 그분의 상처를 다시 바라보고 영생을 새롭게 믿을 때마다, 그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옛 기쁨이 되살아났던 수많은 순간을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저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하기에 다른 것을 전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교리들은 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가 진리라는 사실은 확실히 압니다.

'죽은 죄인'에게 믿으라고 한 설교

설교자는 한 사람과 나눈 대화를 소개합니다. 그 사람은 설교자가 죽은 죄인에게 믿으라고 한 것을 비판했습니다. 설교자는 잘못을 인정하는 듯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믿기에 다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상대는 그것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상대에게 필요한 믿음이 없다면 그것이 쓸모없게 느껴질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전하면 죽은 죄인들이 믿고 살아난다고 답했습니다. 설교자가 의지하는 것은 죽은 죄인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를 살리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대화는 설교자가 자신의 사역 근거를 설명하는 장면이며, 복음이 죽은 자를 살린다는 확신을 드러냅니다. 설교자는 인간의 능력에 기대지 않고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는 태도를 적용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8

설교 내 67–67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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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죽은 죄인에게 믿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잘못을 인정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도 다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시간 낭비라고 느낄 것입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어쩌면 당신에게는 정말 쓸모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필요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 것을 믿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면 죽은 죄인들이 믿고 살아납니다.’ 제가 의지하는 것은 죽은 죄인이 스스로 살아날 능력이 아니라 그를 살리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군대에서 대인 공포증이 깨진 경험

설교자는 자신에게 대인 공포증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어려서부터 낯선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기 어려웠고, 군에 다녀오고 목회를 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고 합니다. 지리산 산골 출신이라 산청읍만 가도 겁이 났는데, 군에서 똑같은 군복을 입히고 머리를 빡빡 깎자 누구나 비슷해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등병 계급장을 단 사람은 아무리 잘나가던 사람이라도 우스워 보이고, 병장이 되면 무엇을 해도 폼이 난다는 군대의 모습을 재치 있게 묘사합니다. 그렇게 두려움은 많이 사라졌지만, 설교자는 변유복 전도사의 '잘하지 못해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여전히 머리에 남아 있다고 나눕니다. 그 말을 알고도 실천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며, 사람을 만나는 일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습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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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말을 듣고 백 번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는 그것을 잘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왜 잘하지 못하는지 살펴보니, 제가 보기보다 대인 공포증이 있어서, 낯선 사람과 서슴없이 이런 대화를 잘 하지 못합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습관이 좀 있었는데, 군에 다녀와서 많이 나아졌고, 목회를 하면서도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사람을 괜히 두려워할 것도 없는데, 군에 가서 그것이 많이 깨졌어요. 군에 가서 보니 저는 지리산 산골 촌사람이라서, 산청읍만 가도 겁이 나고 만나는 사람마다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군에 가서 똑같은 군복을 입히고 머리를 다 빡빡 깎아 버리니, 그놈이 그놈이고 네놈이나 내 놈이나 똑같아서 별다른 사람이 없었어요. 여러분, 아무리 잘나가는 사람이라도 머리를 빡빡 깎고 이등병 계급장 한 개를 달아 놓으면, 세상에 그런 바보가 없습니다. 다 쪼다가 되는 거지요. 그때 군대는 3년을 복무했으니, 3년쯤 된 사람들은 보통 병장이 되는데, 병장들은 뭘 해도 폼이 나요. 욕을 한마디 해도 아주 폼나게 합니다. 쫄병은 아무리 잘해도 쪼다가 되는 거죠. 그래서 군대에서 대인 공포증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 변유복 전도사는 나중에 목사가 되었는데, 이분의 말이 늘 잊혀지지 않습니다. 잘하지는 못해도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그 말이 머리에 늘 남아 있어요.

강아지 캐니와 어린 시절의 사랑 이야기

설교자는 아홉 살, 열 살 무렵의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집에서는 털이 날린다는 이유로 강아지를 키우지 못하게 하셨지만, 옆집 1층 마당에 아저씨가 데려온 회색 큰 강아지 캐니를 보고 그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는 캐니가 근본 없는 믹스견이었지만 학교가 끝나면 계단에 앉아 세 시간, 네 시간씩 캐니와 대화했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도시락 반찬으로 귀하던 오양맛살이 나오면 그는 반찬통을 다시 닫고 밥만 먹었다가, 학교가 끝나 집에 뛰어가 캐니에게 오양맛살을 부어 주었습니다. 캐니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10초 만에 다 먹어 치웠지만, 그는 그 모습이 너무 기뻤다고 회상합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줄 만큼 캐니를 사랑했다고 말하면서도, 캐니처럼 개가 되어 좁은 마당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 설교자는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비와 은혜인지 적용합니다.

남득현 · 2026-10-28

설교 내 14–18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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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제가 아홉 살인가 열 살 때쯤에 강아지를 너무 키우고 싶었어요. 제가 막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는데, 저희 어머니가 절대 못 키우게 하셨어요. 털 날린다고요. [웃음] 집에서 털 날린다고 막 못 키우게 하셨어요. 제가 너무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서, 그런데 어느 날인가 저희 옆집, 저희 집이 2층이었는데 1층 마당에 그 아저씨께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오신 거예요. 회색 큰 강아지를. 이름이 케니였어요. 캐니. 제가 지금도 기억해요. 캐니. 얼마나 우리 둘이 친했는지. 와, 너무 좋았어요. 제가 아홉 살, 열 살 나이에 우리 집에서는 강아지를 못 키우는데, 바로 우리 집 옆에 붙어 있는 집, 우리 계단을 올라가면 볼 수 있는 그 1층 마당에 캐니를 데리고 오신 거예요, 아저씨께서. 제가 그 캐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학교가 끝나면 하루에 세 시간, 네 시간씩 거기 계단에 앉아서 캐니랑 대화했습니다. 진짜예요? 제가 세 시간씩 캐니랑 대화했어요. 캐니는 저한테 꼬리를 치고, 그 근본이 없는 개였거든요. [웃음] 옛날에 근본이 없는 개들 많았잖아요. 전형적인 근본이 없는 개였어요. 믹스견이었죠. 너무 좋아서 제가 진짜 너무 좋아했어요. 캐니를 학교가 없는 날, 토요일 같은 날은 정말 하루 종일 계단에 앉아 있었어요. 제가 캐니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그 당시 초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거든요. 그때 처음 나오기 시작한 반찬이 뭐였냐면 오양맛살이에요. 제가 너무 좋아했어요. 오양맛살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오면 너무 좋아했어요. 저희 어머니께서 많이 싸 주시지도 않으셨어요. 가끔, 정말 가끔 가뭄에 콩 나듯 오양맛살을 싸 주셨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왜 그 '오양'이란 회사가 가장 먼저 맞는 거 같아요. [웃음] 그래서 오양 마사이인 거야. 옛날에 오양 마사이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개마사이'라지만. 기억하시죠? [웃음] 그 반찬을 제가 너무 좋아했어요. 아홉 살짜리, 열 살짜리가. 그런데 제가 캐니를 만난 이후로, 학교에 가서 도시락 반찬을 열었을 때 반찬통에 오양맛살이 있으면 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 아홉 살짜리가 반찬통을 다시 닫았어요. 캐니 주려고.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거니까 캐니도 좋아하겠지. 그래서 밥만 먹었어요. 밥만. 그래서 제가 학교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거예요. 학교 끝나기만을 기다려. 그래서 학교 끝나면 진짜 뛰어서 집으로 가고, 케니한테 그 반찬통을 열고 오양맛살을 막 부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캐니는 10초 컷입니다. 그 귀한 오양 마사를 나한테 고맙다 얘기도 안 하고 그냥 10초 안에 다 먹어요. 저는 그냥 그게 너무 기뻤어요. 케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게. 여러분, 아홉 살짜리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줄 정도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그 강아지를. 여러분, 제가 그렇게 캐니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그렇게 캐니를 사랑하고, 오양 마사를 줄 정도로, 하루 종일 세네 시간씩 앉아서 캐니랑 대화할 정도로 사랑했지만, 여러분, 저는 한 번도 캐니처럼 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어린 나이였을지라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겠죠. 저는 캐니를 제가 너무 사랑하는 존재지만, 여러분, 캐니처럼 개가 돼서 그 좁은 마당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설교자의 어린 시절 학업 중단과 늦은 고등학교 진학

설교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며 처음에는 참 불행했다고 말합니다.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공부를 하다가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다니고 그만두었고, 중학교도 중단했습니다. 그러다 스물아홉 살 때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열여섯 살에 가야 할 학교에 다른 사람보다 13년을 돌아서 간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나중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회에 나가 보니 하나님을 아는 동창이 몇 명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처음보다 나중에 조금 나아졌다고 느끼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중이 좋아졌다고 증언합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에 어려웠어도 끝이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적용으로 연결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30–3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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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처음에 어렵다가 나중이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처음부터 시종일관 좋으면 제일 좋죠. 그런데 여기 처음에 잘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나부터 처음에 참 불행했어요. 너무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서 공부를 하다가 그만뒀거든요. 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가다가 그만두고, 중학교도 그만두고, 그러고 나서 스물아홉 살 때 고등학교에 갔어요. 열여섯 살에 가야 되는데 스물아홉 살에 고등학교에 가니까 다른 사람보다 13년이나 둘러서 학교에 간 거예요. 그래도 나중에 동창회에 가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안 그럴 수 있는데 내가 볼 때는 내가 제일 잘된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의 잘 몰라요. 초등학교 동창, 중학교 동창들을 보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 안 돼요. 초등학교 동창 중에 한두 사람, 중학교 동창 중에 한두 사람, 그게 다예요. 저도 어쩌면 처음보다 나중에 조금 나아졌지 않느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예수 믿고 정말 나중이 좋아졌다는 거예요.

설교자가 받은 인도 의료 선교 제안 편지

설교자는 약 30년 전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며 복음을 전하려 하던 때의 일을 회상합니다. 그 무렵 외국 선교사단의 총무가 편지를 보내어, 그가 영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대신 인도의 병원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하라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그 자리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고, 편지를 보낸 이는 설교자가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여겼습니다. 설교자는 그 제안의 동기가 훌륭했고 그에게 깊이 공감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편지를 쓴 사람에게 성경적인 부르심의 교리를 믿는지, 주님께서 여전히 사람을 선택하시고 어디로 보낼지 결정하신다고 믿는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그 점을 믿었기 때문에 인도에 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그 일을 해야 한다고 권하는 것 자체가 정신적인 무례일 수 있다고 지적하며, 교회나 필요가 사람을 특정 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고 적용합니다. 그는 사람을 어디로 보낼지 결정하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5

설교 내 5–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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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나에게 다른 일을 하라고 하실 수도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하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오, 우리는 이 성경에 어긋난 생각, 즉 필요가 부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주님만이 직접 부름을 주신다는 이 원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말하겠는데, 교회는 부름을 주지 않으며, 교회가 사람을 특정한 일에 직접 부르는 일은 결코 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이는 제 생각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우리 사랑하는 주님과 구주께서 직접 말씀하신 말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말한 바를 뒷받침하고, 그 바탕을 세우고, 지지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졌으니, 그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사의 양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직접 어떤 사람을 사도로, 어떤 사람을 선지자로, 어떤 사람을 전도사로, 어떤 사람을 목사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을 들어 보세요. 마태복음 9장 37절과 38절에 있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확실히 수확할 것이 풍성하나, 일꾼은 적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회가 사람의 손을 얹어 수확장에 내보내야 할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수확할 것이 풍성하나, 일꾼은 적으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수확장에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우리가 그들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시고, 우리가 할 일은 그분께 그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우리 사이에서 비극적으로 잊혀져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 우리의 일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젊은 남자들에게 이 일을 하라, 저 일을 하라, 이거나 저거나 하라고 제안합니다. 이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누가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제안할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이는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로 사역하게 된 이유는 단지 어떤 나이 든 목사나 다른 누군가, 혹은 집사가 그들에게 '당신은 목회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약 30년 전, 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며 이 방식으로 사역에 들어가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느꼈을 때, 외국 선교사단의 총무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제가 이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대신 인도에서 의료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그에게는 당시 인도의 병원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고, 저는 그 자리에 딱 맞는 인물이라고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국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이었고, 그는 제가 인도의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의 동기는 훌륭했고, 저는 그분에게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단순히 한 가지 질문만 했습니다. "당신은 성경적인 부름의 교리에 대해 믿습니까? 주님께서 여전히 사람을 선택하시고, 어디로 보낼지 결정하신다고 믿습니까? 저는 그 점을 믿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인도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거의 무례한 요소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무례 말입니다. 우리가 누가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아는 자격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일에서도 실수를 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라고 서론을 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교회가 사람에게 제안하는 일은 결코 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은 더더욱 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필요성이 강조되고 젊은이들에게 강하게 인상될 때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누가 자원할 사람인가?"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친구 여러분, 저는 이 문제를 이론적인 관심사로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서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이로 인해 망가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들어보세요. 모든 젊은 기독교인의 의무는 선교장에 가는 것입니다. 부름 따위는 신경 쓰지 마세요. 필요가 곧 부름입니다.'

뽀빠이 과자 박스 앞에서 느낀 가난의 결핍

설교자는 중학생 무렵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다가 충격을 받은 일을 전합니다. 누나 집에는 뽀빠이 과자가 박스째 사 놓여 있었고, 누나가 선반에 올려 둔 그 과자를 매일 놀러 오는 동생이 하나씩 얻어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에게 이 가난은 결핍으로 남았습니다. 사춘기 무렵부터 철이 들수록 자신의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기준에 못 미친다고 인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너무 가난했고 외모와 소유물도 부족했으며,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던 아버지가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다는 사실까지 더해져 결핍이 많은 시절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자신을 평가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나눕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스스로가 작고 부족하게만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이런 결핍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며 청중과 자신의 약함을 함께 나누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찬수 · 2026-10-25

설교 내 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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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이 여기 있다고 치고 한 번 보세요. 멀쩡히 그 존재로 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꺾어 가지고 꽃꽂이로 만들어 놓으면 이미 그 꽃은 죽은 꽃이에요. 살아 있던 생명력으로 며칠 연장하는 거지. 이게 에리프롬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에서 맨 앞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눈여겨 살펴보니, 콧마하고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는 뭘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꽃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궁금해요. 눈 여겨 봐야 보이는 꽃이에요. 여러분, 꽃구경 가자, 단풍놀이 가자 해서 버스 대절하고 설상 가는 건, 눈 여겨 봐야 찾을 수 있는 꽃이 아니잖아요.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명한 꽃을 보러 가는 건데, 하나님은 눈 여겨 살펴봐야 하는 초라한 꽃, 존재가 별로 없는 꽃을 보고 계신 거예요. 확 뽑아버려도 되는데, 눈 여겨 살펴본 그 꽃이 너무 아름다운데도 꺾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설교 준비하려고 에리프롬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쭉 읽으면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점이 있었어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천 같아요. 그 책 뒤에 보면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그런 내용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에리프롬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모르겠지만, 마음이 감동이 되었어요. 왜 우리 하나님은 테니슨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의 시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신가요? 눈 여겨 봐야 볼 수 있는, 보살 것 없는 초라한 작은 꽃도 인간의 평가긴 하지만, 그걸 존귀하게 보고 눈여겨 보고, 감상하되 생명력을 존중해서 꺾지 않는 게 우리 하나님 성품이구나. 왜 제가 유난히 그게 은혜가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저는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철이 들수록 제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양식의 삶의 기준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식했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걸 사춘기 때부터 느꼈어요. 너무나 가난했고요.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 집에서 중학생 때 충격을 받았어요. 뽀빠이라는 과자를 박스로 사 놓고 먹더라고요. 선반에 올려 놓고, 누나가 매일 놀러갔잖아요. 하나씩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 가난이 제게 결핍이었어요. 외모나 소유물도 부족했고요.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어요. 결핍이 많았습니다. 제 결핍의 정점은 이민 초기예요. 정말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밥벌지'였어요. 20대 초반에요. '밥이나 춥네요'라는 뜻이었죠.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었어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 살기 전에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형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비웃겠나 싶었죠. 막노동하고 살고, 영어도 못 하니까요. 83년도는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도 심했어요. 길 가면 지들끼리 '하이, how are you, fine, thank you' 하는데, 육사람 지나가는데 '하이' 하면 고개를 돌려요.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어요. 제 존재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요. 일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그렇게 살았어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그때 저를 살려 준 건 교회예요. 교회는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어요.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께 이걸 전하고 싶어요. 교회는 그런 기준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고, 막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 중에는 영어 못 하는 걸 대놓고 무시하거든요. 비웃고 그러면 너무 리얼했나? 교회만 가면 그런 걸로 저를 대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어릴 때부터 격려해 주었어요. '너 걱정도 하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되? 네 아버지가 교회를 위해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축복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우리 청년들이, 기성 세대, 은퇴하신 분들이, 세상은 퇴직하면 퇴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눈 여겨 봐야 보이는, 조그만한 꽃을 그냥 작은 꽃이라고 보세요. 자기 틈새에 있는 귀한 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고 난 이후로는 열정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있으면 바로바로 하루 이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없애 주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왜 지난주 설교로 끝내지 않고, 이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나누고 싶었어요. 지난주와는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자는 거예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대답하길,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가 방송실에 요청했더니, 직원이 어색하다고 했어요. '목사님, 이거 어디 그 어색하잖아요. 뿐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썼어요. 왜 '뿐인이다'라고 썼겠냐고요. 제자들 입장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린아이 도시락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출처가 어린아이 도시락이라고 나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장난치나? 예배 풀치를 하려고 이걸 갖고 왔냐?' 그런데 놀라운 건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죠.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은밀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이 보잘이 뿐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갖고 왔는데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꽃이 너무 존귀하고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뿐인이다' 인생을 '충분하다'로 바꾸어 주세요. 저는 주님 만나기 전에 '뿐인이다' 인생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고 죽고 싶다고 미시간 호수까지 가봤지만, 실제로 시도한 건 아니에요.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우울하고 밥이나 춥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충분하다'의 인생이 되었어요. 주님 앞에 너무나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어요.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20대 때 제가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20대, 30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뿐인이다' 인생은 누구나 겪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비하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저를 비하하기를 원해요.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저를 만나서 득담하시느라고 '목사님은 뭘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사업하면 잘하셨을 거예요'라고 하시면, 그런 칭찬으로 기분이 나빠요. 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 어디 시느냐고요? 뭘 해도 다 잘하는 사람이면요. 그래서 저는 저를 피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비하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비하가 충분치 못하니까요. 더 비하하고 더 비하해도 '뿐인이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가지예요.

설교자가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30년 넘게 기도한 경험

설교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나눕니다. 그는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30년 넘게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그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는 기도 제목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 기도가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니라고 적용합니다. 오랜 시간 같은 제목을 붙들고 기도해 온 성도들도 이 자리에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기다림이 길어지는 기도 앞에서 낙심하기보다, 그 기도를 계속 붙들고 있는 마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성도들과 함께 기도의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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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소예배실에서 회개의 영을 경험한 설교자의 기억

설교자는 서울역 사랑나눔부와 사회복지법인 헤세드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기보다 정의로운 마음과 막연한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았다고 돌아봅니다. 사역 중 막막하고 가슴 아픈 일을 겪을 때마다 그는 불안과 두려움, 걱정에 사로잡혔고, "너무 억울합니다"라며 하나님께 왜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 묻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던 연약함 속에서, 관계가 틀어져 있는데도 회개가 되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고 나눕니다. 어느 날 그는 소예배실 제일 앞, 어두컴컴한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렸는데,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터져 나왔고, 그는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높아져 열정을 쏟았던 자신을 회개했습니다. 또 교회와 부서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셨고, 그는 너무 기뻤다고 전합니다. 그는 이 회개와 죄 사함의 은혜, 그리고 진리 안의 자유함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지금도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회개는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윤진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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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예. 반갑습니다. 예. 단임 목사님이 아니셔서 여러분들이 좀 마음이 어려우실 수 있을 텐데 저는 누군지 아시죠? 예. 서울역 사랑나눔부 섬기고 있는 윤진수 목사입니다. 어, 서사부라고 하죠. 서사부의 예배가 따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 설교를 하다가 이렇게 또 목사님께서 부르시고 또 하나님께서 세워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또 하나님께서 종에게 깨닫게 해 주신 말씀 그리고 그 은혜를 담백하게 좀 나누고 또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또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한번 인사할 때에 오늘 제목이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입니다. 그래서 오른쪽에 계신 분이 '내가 믿으면' 이렇게 인사하시고 반대쪽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렇게 화답하며 인사하겠습니다. 인사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 이제 한번 바꿔서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시작.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참 큰 상과 같은 그런 어려움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절벽과 같고 또 낭떨어지와 같고 참 막막하고 답답하고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일, 또 도저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고 해결이 되지 않는 그런 어려움들, 큰 고통이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마주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정말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님의 품에 부름을 받으셨다든지, 또는 배신이나 그런 인간관계에 있어서 큰 갈등을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도 있겠고, 이렇게 우리가 사회적으로, 또 학교에서, 또는 집에서, 또 교회에서 여러 가지의 일들로 막막하고 그런 상실감을 느끼면서 큰 고통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만날 때 우리는 낙심이 되고, 또 절망하게 되고, 포기하고 싶고, 마음이 자꾸만 내로운 마인드가 되어서 좁아지고 좁아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또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싫어지겠죠. 기도도 안 되겠죠. 그럴 때는 회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혹시 그런 일들을 지금 겪고 계시는 분들이 계실까요? 아니면 최근에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지나오신 분들이 계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에는 그런 여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시라 간략하게 핵심만 스토리를 말씀드리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자주 들리셨던 그런 관계 속에 있었던 남매들이죠. 마르다가 제일 큰 언니가 되겠고, 그다음에 마리아, 그리고 남동생 나사로가 됩니다. 그렇게 학자들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누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봅니다. 어쨌든 이렇게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있었지만, 갑자기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 살려 주십시오. 빨리 오십시오.'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사랑하시지만, 성경에 보시면 사랑한다고 되어 있어요. 사랑하시지만 미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완전히 사망에 이르렀을 때,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마을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도착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당도했을 때 마르다의 첫 마디가 뭐였죠?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 오라고 할 때 빨리 오셨어야죠. 왜 내가 제일 힘들 때, 내가 제일 큰 어려움을 마주할 때, 왜 그때 예수님 도와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내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압니다. 부활의 때, 마지막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살려 주실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살려 주셨을 텐데, 지금 죽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거잖아요. 그렇게 낙심하면서 절망하면서 예수님께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다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고, 마리아, 마르다는 그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뭐라도 도와주실지 않을까?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집에 남자, 남자 가장이 죽었기 때문에 경제력의 상실로 굉장히 두려워서 뭐라도 좀 도와주십시오 하면서 예수님께 요청을 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를 못했습니다. 깊이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신앙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만 그렇습니까? 마리아도 마찬가지죠.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 대해서는 다시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곳에 있던 모든 우는 자들, 예루살렘에서 무난 왔던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는지요. 거기 쓰여졌던 단어가 '에분히 여기시고', 과거에 우리 개혁 성경은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이 여기서 개혁 계정에는 '비통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서' 이게 어떤 표현이냐면요. 예수님께서 강한 분노를 드러내신 겁니다. 호흡을 치면서 부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떨고 있는 단어를 요한은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전히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고 짓눌려 있고, 부활과 생명의 주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진리의 자유함 가운데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 여전히 마귀의 속박 가운데 죽음의 권세에 놓여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비통함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에다크리센' 예수님께서 흐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돌을 옮겨 놓아라. 무덤 입구에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아라.' 근데 말하다가 뭐라고 하죠? '죽은지가 벌써 나흘이 되었습니다. 시체에서 냄새가 납니다.' 라면서 예수님을 일축해 버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가 인사 나누었던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이 한 말, 진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고,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갇혀서 두려움에 떨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그 장례 현장 가운데 있던 사람들만 이렇게 믿음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제 삶과 신앙생활을 뒤돌아보면은 마르다, 마리아처럼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제가 서울역 사랑 나눔부를 섬기면서, 또 사회복진 법인 헤세드를 섬겨오면서, 지금은 이제 사무국장이 아니죠. 그렇게 섬겨오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고 그렇게 의지하기보다, 정의로운 저의 마음 또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막연한 열정과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지 않았나? 그렇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역하면서 정말 막막한 어려운 일을 경험하거든요.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걱정하면 하는 제 모습을 얼마 전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데 왜 이런 어려운 시련과 이런 일들이 나에게 닥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의롭게 교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 너무너무 억울합니다. 왜 저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내 옹절한 그런 의로움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고, 그런 연약함 속에 놓여졌던 제 모습을 한번 돌아봅니다. 그러다가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너무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움, 하나님과의 그 관계에서의 뭔가 이상하게 틀어져 있는데 하나님께 회개가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다 죄 죄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언제 해 보셨습니까? 회개를 해보셨겠죠. 회개는 정말 제 힘으로,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소예배실에 어느 날 가서 제일 앞에 어두컴컴한데 무릎 꿇고 딱 이렇게 엎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더라고요. 그 순간 제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이 단어가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하나님, 하나님보다 제가 더 의롭게 더 높아져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했던 것 하나님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다른 사람, 우리 교회 안에 저희 부서 안에 일어난 모든 일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입니다. 하나님,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죄 잘못입니다. 죄 죄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가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기뻤습니다. 회개와 죄사함의 은혜, 그로 인해서 주어지는 그 진리 가운데의 자유함,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큰 은혜였고 지금도 그 은혜의 힘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또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좀 집중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을 맞이하고 염려, 근심, 걱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 믿음의 바닥이 드러났을 때, 시험에 빠져서 혼돈 속에 있을 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찾고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아내가 말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설교자는 결혼 전 아내에게 자신이 유머가 없는 사람이라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솔직히 말했다고 나눕니다. 그러면서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아내는 설교자에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감사로 받아들이며, 이 정도일 줄 몰랐기에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웃으며 전합니다. 이 일화를 통해 설교자는 우리도 주님을 잘 모른 채 따라왔지만, 그분의 사랑이 좋아서 따라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 없다고 적용합니다.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설교자는 이 고백이 결혼 생활에서 웃음을 주는 말인 동시에, 신앙의 여정에서도 되새길 만한 고백이라고 덧붙입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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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듯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사기치듯 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심과 동시에, 그분을 따를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끊임없이 무리들과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무리 안에는 훗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제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하자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합니다.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놓고, 주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을 가시자 움직여 주지 않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꾸 우리는 그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말씀이 무겁게만 들린다면, 왜 무겁게만 들릴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에 천국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함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지고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비용 계산이 끝났습니다.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는 거저받은 것이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사실 간음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인 무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따르는 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유익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용 계산 없이 제자인 척하는 자들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 자꾸 세상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세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억울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유익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재정이 아까워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고를 뛰어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밤에 한 번, 저를 향해 질문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임정태 목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 안수식을 보면서, 임정태 목사님은 안 보고 저의 10년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 수품 받은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목회 벌써 40년 하셨다고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조금 배운 쪼물레기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전에 목사 수품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비용 계산을 다 끝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비용 계산하는 저를 보면서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내가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비용 계산을 했더라면 선택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이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랑만 생각하고, 그냥 그것이 좋아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한테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니까, 너를 재미있게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솔직하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저희 아내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감사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고 사실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냥 주님의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담임 목사님 지금 40년 목회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만약이란 없지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질문은 안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볼 때,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복음을 증언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귀해서, 매일 강단에서 표현하시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을 써 주시는 거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뚜벅뚜벅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어떠하십니까? 신앙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그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세상에 작은 것 좀 반짝여 보이는 그런 것들의 눈이 멀고, 여전히 주님과 저울질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거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해 두라고. 너를 부인하고, 너보다 더 그 너의 삶의 참 주인 되신 주님을 따르라고. 네가 움켜지고 있는 그 소유를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붙잡고 따르기로 결단하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그 비용 계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 그 영광스러움 앞에, 아까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보고 따르실 수 있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의 이혼을 겪은 설교자가 공동체에서 받은 사랑

설교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가족 관계에서 본능적인 사랑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너무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셨고, 이혼하실 때 누님이 어머니를 따라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족 안의 사랑을 경험적으로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가장 어려웠다고 나눕니다. 믿기지 않는 그 사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매우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대학에 올라와 20대와 30대를 보낸 공동체에서 형들과 누나들을 만났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꽁꽁 닫혀 있던 마음을 형들과 누나들이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설교자는 그 공동체가 늘 생각나며, 그때 받은 사랑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마음 한편에는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약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형들과 누나들은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이 조금씩 닿으면서 마음이 약간씩 부드러워졌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탁 와닿았을 때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 지체를 가족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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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제가 여러 번 말했지만, 저는 가족 관계 안에 있는 본능적인 사랑을 거의 못 느끼고 자랐어요. 너무 일찍 아버지 어머니가 이혼하셨고, 아버지 어머니 이혼하실 때 누님이 어머니를 따라갔기 때문에 저는 사실 형제들 가운데 혹은 가족 가운데 있는 본능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참 경험적으로 약했고, 그래서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 하는 말이 제일 어려웠어요. 안 믿겨지는 그 사랑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대학으로 올라오면서 제 젊은 시절 20대와 30대를 보냈던 그 공동체에서 그렇게 꽁꽁으로 붙어 있는 제 마음을 만져 주는 형들과 누나들을 만났어요. 저는 참 잊을 수가 없어요. 늘 그 공동체가 생각나는 것은 그때 형들에게, 누나들에게 받았던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버림 받았다 하는 약간의 상처들이 남아 있었는데, 형들과 누나들은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게 뭔지를 가르쳐 줬어요. 꽁꽁으로 붙어 있는 제 마음을 형들과 누나들의 사랑이 많이 만지기 시작하면서 약간씩 약간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을 때,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이렇게 탁 와닿왔을 때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신학 공부 중 불편했던 동료 목사와 주님의 질문

설교자는 에버르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때의 경험을 나눕니다. 그곳에는 한국 목사님들 15가정 정도가 함께 와서 공부했고, 대부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자에게 유독 불편한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설교자에게 잘해 주었고 사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설교자는 성격 탓인지 그를 보면 속에서 부글부글 무언가가 올라온다고 고백합니다. 여러 제목으로 그를 싫어했는데,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잘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를 매일 바라보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는 태도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 그의 약점이 드러나는 현장을 포착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장면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고 표현하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겨 너무 기뻐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칭찬할 때마다 그 약점을 한 번씩 열어 보며 이중적인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엉뚱한 기쁨으로 기뻐하던 어느 날 주님이 질문하셨다고 나눕니다. 설교자가 되묻자, 주님은 그에게 '너에게 부활은 뭐야?'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허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며, 오늘 부활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을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설교자는 그때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세상이 상대의 약점을 붙들고 자기를 높이는 자리라면,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일로 배웠다고 적용합니다. 상대의 약점을 붙들고 낮추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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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르에서 공부할 때, 여러분 한국 목사님들이 한 15 가정 정도가 와서 같이 신학을 공부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좋은 관계를 잘 맺으면서 지냈는데 한 분은 참 불편했어요. 저한테 참 잘해 줬고, 정말 그 사회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인정을 많이 받던 분인데, 희한하게 저는 성격이 약간 뭐가 나서 그런지, 그냥 보고 있으면 속에서 부글부글 뭐가 자꾸 끌어 올라오면서 그렇게 한 분 힘들게 생각했어요. 여러 가지 제목으로 그분을 싫어했는데, 그중에 영어도 너무 잘해요. 저는 사투인데 그분은 네이티브처럼 영어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 많은 것들 때문에 불편해 하고 있을 때, 매일 가지고 '그래,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 이러고 딱 보고 있었는데, 놀랍게 놀라운 현장을 딱 포착했어요. 예. 여러분, 제가 그 현장을 딱 포착하고 보자에 딱 사서 호주머니에 딱 넣었어요. 그리고 너무 기뻤어요. '내가 아무한테도 말 안 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도 나는 아무한테 토스하지 않았다. 얼마나 훌륭한가 나요. 이러면서 너무 좋아했어. 너무 좋아했어.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그분 칭찬을 하면 한 번씩 열어 봤어요. 그러면서 이중적인 기쁨이 왔어요. 이 사람 이런 사람인데 나는 말 안 한다. 그 사람의 그 약점도 붙들고 있고, 그죠. 말 안 하는 저의 또 고매함이 드러나면서 막 너무 기뻤는데, 하도 그렇게 엉뚱한 기쁨으로 기뻐하니까 주님이 하루는 질문하셨어요. '쏘왓 영국이니까 영어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냐?' 그렇게 물었어요. 제가 주님께 대답했어요. '주님, 이걸 보시고 다 아시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제가 여쭈었어요. 그때 주님이 저에게 '너에게 부활은 뭐야?' 이렇게 질문하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 그 사람은 정말 그 일을 허물 있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고, 오늘 부활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을지 네가 어떻게 아냐?' 이렇게 주님이 반문 딱 하셨을 때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세상은 끝없이 상대의 약점이 드러나고 모자람이 보이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걸 붙들고 어떤 형태든지 그걸 붙들고 자기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어 하는 이런 세상에, 사랑을 하기를 사랑을 가르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은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