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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개 · 1 / 1쪽 · 한 쪽 20개

삭개오의 재산 절반 나눔과 네 배 배상

설교자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뒤 보인 결단을 전합니다.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겠다고 말하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그에게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도 삭개오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약속했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약속을 따르면 재산이 거의 남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삭개오가 그로 인해 거덜이 나도 좋다고 여겼다고 말합니다. 친구 하나 없이 외면당하던 그가 이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열두 제자와 함께 대접하게 되었다는 점도 설교자는 주목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셨음을 전합니다. 설교자는 삭개오가 돈 귀신에 홀렸다가 돈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었다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73–76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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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아무 말씀 하지 않고 있는데 삭개오가 뭐라 하느냐? “제가 가진 재산 절반을 일단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겠습니다. 그리고 토색한 것은”, 토색했는가 봐, “토색한 것은 네 배씩 다 갚아 주겠습니다.” 보나 마나 절반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남은 절반을 가지고 토색한 것을 네 배로 갚아 버리고 나면 뭐가 남겠어요? 내가 볼 때 별로 남은 게 없겠어. 거덜 나는 거야. 이제 예수님 때문에 쫄딱 망했어. 그래도 좋다는 거야. 친구 하나 없이 길에서 만나면 얼굴을 휙 돌려 버리던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만 만난 게 아니잖아. 열두 사도가 더 왔어요. 여러분, 지금은 예수님을 예언자 정도, 마태 같은 세리를 제자로 받아 준 예언자 정도로 알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잖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열두 사도를 자기 집에 모셔서 대접할 수 있었다. 이게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일단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봐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한때 돈의 맘몬 귀신, 돈 귀신에 홀려서 돈을 좇아갔지만 그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만족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삭개오가 아주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게 아니고, 그냥 앞에 있는데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너 이거 토색했지?” 이렇게 한 게 아니야. 아닌데 삭개오가 그런 고백을 하고 다 있는 데서 그런 약속을 한 겁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여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설교자는 키가 작은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던 장면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삭개오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거리에 사람이 나오기 전에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설교자는 우리 성경에 뽕나무라고 된 나무가 실제로는 돌무화과나무라고 설명하며, 여리고에서는 그 나무가 매우 크다고 말합니다. 삭개오는 나뭇잎 뒤에 몸을 숨기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고 싶어서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위를 올려다보시며 '삭개오야, 내려오라' 하고 이름을 부르셨고, 오늘 밤 그의 집에서 머무셔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놀라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집에 가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집이었지만, 예수님이 오시자 등불을 켜고 손님을 맞았습니다. 이때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돈을 따라 살던 삭개오가 돈으로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증거한 사례로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65–73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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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우리 성경에는 뽕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에요. 뽕나무가 아니고 돌무화과나무인데, 여러분 무화과하고 뽕나무가 과가 같아요. 돌무화과, 야생 무화과나무인데, 여리고에 가면 지금도 그 나무인지 모르지만 굉장히 큽니다. 우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나무가 커요. 올라가서 나뭇잎 뒤에 싹 몸을 숨기고 그냥 본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고 내가 본다, 보고 싶다는 겁니다. 나는 이런 심리,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심리가 남아 있다는 건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거라고 봐요. 몸을 딱 숨기고 있는데, 왜 올라갔느냐 하면 키가 작아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이 지나가도 못 봐요. 길바닥에 있으면 못 보는 거예요. 예수님을 사람들이 에워싸고 앞에 가고 뒤에 가고 하니까 못 볼 것 같아서 자기가 나무에 올라가면 잘 보이죠. 그래서 보고 있는데, 보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 열두 제자와 어떤 여인들과 사람들이 좌편에 우편에 쭉 함께 갑니다. 그냥 지나가면 될 텐데, 삭개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도 안 깜빡이고 딱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밑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갑자기 위를 쳐다보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나는 삭개오가 오줌을 싸지 않았겠나 싶어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이름을 덜컥 불러 봐요. 보기만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데 예수님께서 “내가 오늘 밤에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야 되겠다” 하십니다. 세상에, 나는 삭개오가 내려왔는지 후루룩 떨어졌는지 몰라요. 놀라서 막 떨어지지 않았겠나? 보기만이라도 하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자야 되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막 내려와서, 그때는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몰랐을 거예요.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시지 이름을 딱 불러 버리면 어떡해요? 세리장은 그 마을에서 지역 유지급이나 되는데 나무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들통났잖아요. 그러나 그냥 상관이 없어요. 내려와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입니다. 앞을 봐요. 이제 예수님께서 잔치를 하시는데, 삭개오 집에 가 보니까 마당에 이끼가 끼어서 아무도 안 와요. 아무도 친구로 온 사람이 없어요. 그저 대문간에서 마당으로 가는 길만 조금 발자국 흔적이 있고, 화장실 가는 길 같은 게 있고, 사람이 아무도 안 와서 괴한 집처럼 되어 있어요. 모처럼 예수님이 오시니까 등불을 켜고 사람 사는 집 같아요. 키가 좀 작죠? 봐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계시는데 삭개오가 뭐라고 하느냐? “제가 가진 재산 절반을 일단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토색한 것은 네 배씩 다 갚아 주겠습니다.” 토색했는가 봐요. 보나 마나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절반으로 토색한 것을 네 배 갚아 버리고 나면 뭐가 남겠어요? 내가 볼 때 별로 남는 게 없고 거덜 나는 거예요. 이제 예수님 때문에 쫄딱 망했어도 좋다는 거예요. 아무 친구 하나 없이 길에서 만나면 얼굴을 휙 돌려 버리던 삭개오에게 예수님만 오신 게 아니잖아요. 열두 사도도 왔어요. 지금은 마태 같은 세리를 제자로 받아 준 예언자 정도로 알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열두 사도를 자기 집에 모셔서 대접할 수 있었다, 이게 아무나 누리는 기회가 아니잖아요. 일단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봐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에요. 한때 돈의 맘몬 귀신, 돈 귀신에 걸려 돈을 쫓아갔지만, 그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만족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삭개오가 아주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번연의 순례자와 막대기가 내려오는 문

설교자는 번연의 글과 같은 꿈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 사람이 친구와 함께 동쪽의 한 도시로 가던 중, 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문 위의 막대기들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몸을 굽혀 보았지만 막대기가 너무 빨리 내려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도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느껴 절박하게 시도했고, 아름다운 리본이 달린 조끼를 벗은 뒤 땅에 몸을 눌러 자갈을 긁으며 그 밑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빛나는 자가 그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빛나는 옷으로 입혀 주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화려한 옷차림, 빛나는 이론, 인기와 수사학적 장식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적용으로 연결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51–51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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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 책을 넘기면 과거의 많은 추억이 떠오릅니다. 이 책의 페이지는 제가 설명할 수 없는 빛으로 빛나고 있으며, 어둠 속에서 제 영혼을 비추어 준 별들로 가득합니다. 당시 저는 이 신성한 책을 읽을 때 말씀을 찾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읽었습니다. 당시 저는 마르다처럼 여러 가지 걱정에 얽매여 있지 않았고, 라자로처럼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적 길의 처음 목표들을 회복하는 부흥을 주소서. 그때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이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런가요? 우리는 이제 설교를 잘 아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렇죠? 우리는 마치 자신의 기술에 능숙해진 것처럼 느낍니다. 아마도 우리가 그렇게 준비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기도하는 약함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자신감 있는 힘으로 준비하는 것보다 낫다고 믿습니다. 제가 "어리석은 자라!"라고 탄식하며 설교를 마치고, 제 처참한 시도에 부끄러워하며 예배당을 나설 때, 제가 자신의 성과에 만족할 때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중 누가 이 감정을 느끼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 설교 때는 얼마나 큰 책임감을 느꼈는지 기억합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진지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나요? 그때는 찬송가 한 곡을 선택하거나 성경을 읽는 방식조차도 기도하면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무거운 불안감이 우리 마음에 깊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집에서 성경을 신중히 읽고, 그것을 사람에게 읽기 전에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습관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루 종일 바빴고, 저녁에 설교해야 하는데, 어쨌든 해내겠지."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비용 없이 드리는 것을 기쁘시게 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설교 자료를 여러 개 가지고 있고, 예배당에 가기 전에 그 중 하나를 골라서 아무런 준비 없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읽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빵을 제물의 빵상에 올리는 상태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소서. 아니, 이제는 더욱 성실하고 경외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자. 많은 이들이 첫 기도와 경계심, 그리고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되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형제여,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축복으로 당신은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되찾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전만큼 열정적일 수 있습니다. 저는 늙은 말들이 풀밭으로 내보내졌다가 다시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게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피곤한 말이 풀을 먹고 다시 복음의 전차에 매여 새롭게 된 힘으로 다시 달릴 수 있는 풀밭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예수님과 만났던 그 거룩한 장소들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아미나다브의 전차처럼 되었습니다. 주님, 당신의 이전 은혜들을 회복해 주소서. 그러면 우리는 재앙에서 깨어난 학개처럼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존 번연은 한 순례자가 자신의 스크롤을 잃고 길을 세 번이나 되돌아가야 했으며, 태양이 지기 전에 그는 그의 캠프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어제 저는 한 꿈이 어떤 사람의 회심을 이끌어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친구와 함께 동쪽의 한 도시로 가는 길이었고, 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문 위의 막대기들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내려오자 그는 몸을 굽혔지만, 너무 빨리 내려와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도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느껴 절박하게 시도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리본이 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고, 그것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막대기들이 계속 내려오자, 그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이 벗어나는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땅에 몸을 눌러 자갈을 긁으며 그 밑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그가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가자, 빛나는 자가 그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빛나는 옷으로 입혀 주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이 화려한 옷차림, 빛나는 이론,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망, 수사학적 장식들을 모두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 우리가 이 문을 통과하고, 하나님께서 사랑받는 자의 수용의 옷으로 우리를 입혀 주신다면, 이 투쟁이 우리에게 어떤 비용을 치렀든 간에 충분히 보상받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그렇게 나쁜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후회합니다. 제 주님께서는 자주 그리고 엄하게 저를 다스리셔야 합니다. 저는 날카롭게 다듬어지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는 펜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날카로운 칼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 주님께서 제게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글을 쓰신다면, 저는 고통과 십자가를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들 사이에서 많은 고통의 원인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역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릇 속의 물이 너무 적어서 도달할 수 없었고, 그래서 돌을 하나씩 집어 그릇에 던져 물을 높이 올려 마실 수 있게 했습니다.

쓰레기 수거와 고백의 비유

설교자는 내일이 집에서 쓰레기 수거일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쓰레기통과 재활용통을 합하면 다섯 개의 큰 통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쓰레기를 쥐고 있거나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집이 냄새나고 가득 찬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거리 끝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쓰레기를 가지고 있으며, 수거인이 가져가 주는 것에 감사하듯이 우리도 죄를 끌어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모든 죄를 고백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께 숨기는 죄는 계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세지 않으신다는 점을 강조하며, 숨긴 죄의 무게와 고백을 통한 자유를 대비하여 청중에게 고백을 권합니다.

케빈 드영 · 2026-10-19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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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드영 집에서 큰 날입니다. 월요일이 쓰레기 수거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쓰레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재활용품이 더해지면, 쓰레기통은 두 개, 재활용통은 세 개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나열하면, 다섯 개의 큰 통이 됩니다. 다섯 개입니다. 쓰레기 수거인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는 그냥 가져가 버립니다. 이제, 우리가 쓰레기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마치 집안에서 쓰레기가 전혀 생기지 않는 것처럼요. 여기엔 쓰레기가 없습니다. 당신의 집은 냄새가 날 것입니다. 그냥 쥐고 있다면, 가득 찰 것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반드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집에서 많은 냄새나는 쓰레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리 끝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솔직하고 휴가 중이 아니라면, 누구나 쓰레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쓰레기를 수거해 주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져가지만, 당신은 그것을 길가에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죄를 끌어내지 않는다면요. 물론, 당신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모든 죄를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하지만 당신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께, 당신이 숨기는 죄는 하나님께서 계산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고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죄를 세지 않으십니다.

소예배실에서 회개의 영을 경험한 설교자의 기억

설교자는 서울역 사랑나눔부와 사회복지법인 헤세드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기보다 정의로운 마음과 막연한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았다고 돌아봅니다. 사역 중 막막하고 가슴 아픈 일을 겪을 때마다 그는 불안과 두려움, 걱정에 사로잡혔고, "너무 억울합니다"라며 하나님께 왜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 묻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던 연약함 속에서, 관계가 틀어져 있는데도 회개가 되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고 나눕니다. 어느 날 그는 소예배실 제일 앞, 어두컴컴한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렸는데,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터져 나왔고, 그는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높아져 열정을 쏟았던 자신을 회개했습니다. 또 교회와 부서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셨고, 그는 너무 기뻤다고 전합니다. 그는 이 회개와 죄 사함의 은혜, 그리고 진리 안의 자유함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지금도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회개는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윤진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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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예. 반갑습니다. 예. 단임 목사님이 아니셔서 여러분들이 좀 마음이 어려우실 수 있을 텐데 저는 누군지 아시죠? 예. 서울역 사랑나눔부 섬기고 있는 윤진수 목사입니다. 어, 서사부라고 하죠. 서사부의 예배가 따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 설교를 하다가 이렇게 또 목사님께서 부르시고 또 하나님께서 세워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또 하나님께서 종에게 깨닫게 해 주신 말씀 그리고 그 은혜를 담백하게 좀 나누고 또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또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한번 인사할 때에 오늘 제목이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입니다. 그래서 오른쪽에 계신 분이 '내가 믿으면' 이렇게 인사하시고 반대쪽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렇게 화답하며 인사하겠습니다. 인사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 이제 한번 바꿔서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시작.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참 큰 상과 같은 그런 어려움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절벽과 같고 또 낭떨어지와 같고 참 막막하고 답답하고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일, 또 도저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고 해결이 되지 않는 그런 어려움들, 큰 고통이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마주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정말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님의 품에 부름을 받으셨다든지, 또는 배신이나 그런 인간관계에 있어서 큰 갈등을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도 있겠고, 이렇게 우리가 사회적으로, 또 학교에서, 또는 집에서, 또 교회에서 여러 가지의 일들로 막막하고 그런 상실감을 느끼면서 큰 고통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만날 때 우리는 낙심이 되고, 또 절망하게 되고, 포기하고 싶고, 마음이 자꾸만 내로운 마인드가 되어서 좁아지고 좁아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또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싫어지겠죠. 기도도 안 되겠죠. 그럴 때는 회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혹시 그런 일들을 지금 겪고 계시는 분들이 계실까요? 아니면 최근에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지나오신 분들이 계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에는 그런 여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시라 간략하게 핵심만 스토리를 말씀드리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자주 들리셨던 그런 관계 속에 있었던 남매들이죠. 마르다가 제일 큰 언니가 되겠고, 그다음에 마리아, 그리고 남동생 나사로가 됩니다. 그렇게 학자들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누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봅니다. 어쨌든 이렇게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있었지만, 갑자기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 살려 주십시오. 빨리 오십시오.'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사랑하시지만, 성경에 보시면 사랑한다고 되어 있어요. 사랑하시지만 미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완전히 사망에 이르렀을 때,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마을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도착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당도했을 때 마르다의 첫 마디가 뭐였죠?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 오라고 할 때 빨리 오셨어야죠. 왜 내가 제일 힘들 때, 내가 제일 큰 어려움을 마주할 때, 왜 그때 예수님 도와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내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압니다. 부활의 때, 마지막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살려 주실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살려 주셨을 텐데, 지금 죽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거잖아요. 그렇게 낙심하면서 절망하면서 예수님께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다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고, 마리아, 마르다는 그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뭐라도 도와주실지 않을까?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집에 남자, 남자 가장이 죽었기 때문에 경제력의 상실로 굉장히 두려워서 뭐라도 좀 도와주십시오 하면서 예수님께 요청을 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를 못했습니다. 깊이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신앙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만 그렇습니까? 마리아도 마찬가지죠.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 대해서는 다시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곳에 있던 모든 우는 자들, 예루살렘에서 무난 왔던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는지요. 거기 쓰여졌던 단어가 '에분히 여기시고', 과거에 우리 개혁 성경은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이 여기서 개혁 계정에는 '비통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서' 이게 어떤 표현이냐면요. 예수님께서 강한 분노를 드러내신 겁니다. 호흡을 치면서 부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떨고 있는 단어를 요한은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전히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고 짓눌려 있고, 부활과 생명의 주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진리의 자유함 가운데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 여전히 마귀의 속박 가운데 죽음의 권세에 놓여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비통함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에다크리센' 예수님께서 흐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돌을 옮겨 놓아라. 무덤 입구에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아라.' 근데 말하다가 뭐라고 하죠? '죽은지가 벌써 나흘이 되었습니다. 시체에서 냄새가 납니다.' 라면서 예수님을 일축해 버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가 인사 나누었던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이 한 말, 진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고,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갇혀서 두려움에 떨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그 장례 현장 가운데 있던 사람들만 이렇게 믿음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제 삶과 신앙생활을 뒤돌아보면은 마르다, 마리아처럼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제가 서울역 사랑 나눔부를 섬기면서, 또 사회복진 법인 헤세드를 섬겨오면서, 지금은 이제 사무국장이 아니죠. 그렇게 섬겨오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고 그렇게 의지하기보다, 정의로운 저의 마음 또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막연한 열정과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지 않았나? 그렇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역하면서 정말 막막한 어려운 일을 경험하거든요.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걱정하면 하는 제 모습을 얼마 전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데 왜 이런 어려운 시련과 이런 일들이 나에게 닥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의롭게 교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 너무너무 억울합니다. 왜 저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내 옹절한 그런 의로움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고, 그런 연약함 속에 놓여졌던 제 모습을 한번 돌아봅니다. 그러다가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너무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움, 하나님과의 그 관계에서의 뭔가 이상하게 틀어져 있는데 하나님께 회개가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다 죄 죄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언제 해 보셨습니까? 회개를 해보셨겠죠. 회개는 정말 제 힘으로,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소예배실에 어느 날 가서 제일 앞에 어두컴컴한데 무릎 꿇고 딱 이렇게 엎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더라고요. 그 순간 제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이 단어가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하나님, 하나님보다 제가 더 의롭게 더 높아져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했던 것 하나님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다른 사람, 우리 교회 안에 저희 부서 안에 일어난 모든 일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입니다. 하나님,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죄 잘못입니다. 죄 죄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가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기뻤습니다. 회개와 죄사함의 은혜, 그로 인해서 주어지는 그 진리 가운데의 자유함,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큰 은혜였고 지금도 그 은혜의 힘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또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좀 집중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을 맞이하고 염려, 근심, 걱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 믿음의 바닥이 드러났을 때, 시험에 빠져서 혼돈 속에 있을 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찾고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신학 공부 중 불편했던 동료 목사와 주님의 질문

설교자는 에버르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때의 경험을 나눕니다. 그곳에는 한국 목사님들 15가정 정도가 함께 와서 공부했고, 대부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자에게 유독 불편한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설교자에게 잘해 주었고 사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설교자는 성격 탓인지 그를 보면 속에서 부글부글 무언가가 올라온다고 고백합니다. 여러 제목으로 그를 싫어했는데,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잘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를 매일 바라보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는 태도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 그의 약점이 드러나는 현장을 포착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장면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고 표현하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겨 너무 기뻐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칭찬할 때마다 그 약점을 한 번씩 열어 보며 이중적인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엉뚱한 기쁨으로 기뻐하던 어느 날 주님이 질문하셨다고 나눕니다. 설교자가 되묻자, 주님은 그에게 '너에게 부활은 뭐야?'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허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며, 오늘 부활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을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설교자는 그때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세상이 상대의 약점을 붙들고 자기를 높이는 자리라면,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일로 배웠다고 적용합니다. 상대의 약점을 붙들고 낮추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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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르에서 공부할 때, 여러분 한국 목사님들이 한 15 가정 정도가 와서 같이 신학을 공부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좋은 관계를 잘 맺으면서 지냈는데 한 분은 참 불편했어요. 저한테 참 잘해 줬고, 정말 그 사회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인정을 많이 받던 분인데, 희한하게 저는 성격이 약간 뭐가 나서 그런지, 그냥 보고 있으면 속에서 부글부글 뭐가 자꾸 끌어 올라오면서 그렇게 한 분 힘들게 생각했어요. 여러 가지 제목으로 그분을 싫어했는데, 그중에 영어도 너무 잘해요. 저는 사투인데 그분은 네이티브처럼 영어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 많은 것들 때문에 불편해 하고 있을 때, 매일 가지고 '그래,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 이러고 딱 보고 있었는데, 놀랍게 놀라운 현장을 딱 포착했어요. 예. 여러분, 제가 그 현장을 딱 포착하고 보자에 딱 사서 호주머니에 딱 넣었어요. 그리고 너무 기뻤어요. '내가 아무한테도 말 안 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도 나는 아무한테 토스하지 않았다. 얼마나 훌륭한가 나요. 이러면서 너무 좋아했어. 너무 좋아했어.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그분 칭찬을 하면 한 번씩 열어 봤어요. 그러면서 이중적인 기쁨이 왔어요. 이 사람 이런 사람인데 나는 말 안 한다. 그 사람의 그 약점도 붙들고 있고, 그죠. 말 안 하는 저의 또 고매함이 드러나면서 막 너무 기뻤는데, 하도 그렇게 엉뚱한 기쁨으로 기뻐하니까 주님이 하루는 질문하셨어요. '쏘왓 영국이니까 영어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냐?' 그렇게 물었어요. 제가 주님께 대답했어요. '주님, 이걸 보시고 다 아시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제가 여쭈었어요. 그때 주님이 저에게 '너에게 부활은 뭐야?' 이렇게 질문하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 그 사람은 정말 그 일을 허물 있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고, 오늘 부활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을지 네가 어떻게 아냐?' 이렇게 주님이 반문 딱 하셨을 때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세상은 끝없이 상대의 약점이 드러나고 모자람이 보이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걸 붙들고 어떤 형태든지 그걸 붙들고 자기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어 하는 이런 세상에, 사랑을 하기를 사랑을 가르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은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