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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5개 · 1 / 1쪽 · 한 쪽 20개

여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설교자는 키가 작은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던 장면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삭개오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거리에 사람이 나오기 전에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설교자는 우리 성경에 뽕나무라고 된 나무가 실제로는 돌무화과나무라고 설명하며, 여리고에서는 그 나무가 매우 크다고 말합니다. 삭개오는 나뭇잎 뒤에 몸을 숨기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고 싶어서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위를 올려다보시며 '삭개오야, 내려오라' 하고 이름을 부르셨고, 오늘 밤 그의 집에서 머무셔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놀라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집에 가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집이었지만, 예수님이 오시자 등불을 켜고 손님을 맞았습니다. 이때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돈을 따라 살던 삭개오가 돈으로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증거한 사례로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65–73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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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우리 성경에는 뽕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에요. 뽕나무가 아니고 돌무화과나무인데, 여러분 무화과하고 뽕나무가 과가 같아요. 돌무화과, 야생 무화과나무인데, 여리고에 가면 지금도 그 나무인지 모르지만 굉장히 큽니다. 우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나무가 커요. 올라가서 나뭇잎 뒤에 싹 몸을 숨기고 그냥 본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고 내가 본다, 보고 싶다는 겁니다. 나는 이런 심리,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심리가 남아 있다는 건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거라고 봐요. 몸을 딱 숨기고 있는데, 왜 올라갔느냐 하면 키가 작아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이 지나가도 못 봐요. 길바닥에 있으면 못 보는 거예요. 예수님을 사람들이 에워싸고 앞에 가고 뒤에 가고 하니까 못 볼 것 같아서 자기가 나무에 올라가면 잘 보이죠. 그래서 보고 있는데, 보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 열두 제자와 어떤 여인들과 사람들이 좌편에 우편에 쭉 함께 갑니다. 그냥 지나가면 될 텐데, 삭개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도 안 깜빡이고 딱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밑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갑자기 위를 쳐다보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나는 삭개오가 오줌을 싸지 않았겠나 싶어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이름을 덜컥 불러 봐요. 보기만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데 예수님께서 “내가 오늘 밤에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야 되겠다” 하십니다. 세상에, 나는 삭개오가 내려왔는지 후루룩 떨어졌는지 몰라요. 놀라서 막 떨어지지 않았겠나? 보기만이라도 하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자야 되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막 내려와서, 그때는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몰랐을 거예요.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시지 이름을 딱 불러 버리면 어떡해요? 세리장은 그 마을에서 지역 유지급이나 되는데 나무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들통났잖아요. 그러나 그냥 상관이 없어요. 내려와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입니다. 앞을 봐요. 이제 예수님께서 잔치를 하시는데, 삭개오 집에 가 보니까 마당에 이끼가 끼어서 아무도 안 와요. 아무도 친구로 온 사람이 없어요. 그저 대문간에서 마당으로 가는 길만 조금 발자국 흔적이 있고, 화장실 가는 길 같은 게 있고, 사람이 아무도 안 와서 괴한 집처럼 되어 있어요. 모처럼 예수님이 오시니까 등불을 켜고 사람 사는 집 같아요. 키가 좀 작죠? 봐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계시는데 삭개오가 뭐라고 하느냐? “제가 가진 재산 절반을 일단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토색한 것은 네 배씩 다 갚아 주겠습니다.” 토색했는가 봐요. 보나 마나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절반으로 토색한 것을 네 배 갚아 버리고 나면 뭐가 남겠어요? 내가 볼 때 별로 남는 게 없고 거덜 나는 거예요. 이제 예수님 때문에 쫄딱 망했어도 좋다는 거예요. 아무 친구 하나 없이 길에서 만나면 얼굴을 휙 돌려 버리던 삭개오에게 예수님만 오신 게 아니잖아요. 열두 사도도 왔어요. 지금은 마태 같은 세리를 제자로 받아 준 예언자 정도로 알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열두 사도를 자기 집에 모셔서 대접할 수 있었다, 이게 아무나 누리는 기회가 아니잖아요. 일단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봐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에요. 한때 돈의 맘몬 귀신, 돈 귀신에 걸려 돈을 쫓아갔지만, 그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만족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삭개오가 아주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의 태도

설교자는 소크라테스가 사약 사발을 받아 마시기 직전 친구들에게 얼굴에 희색을 띠며 '드디어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정말 가까운 데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대목을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자신도 죽음 가까이에 와 있어 이 말이 실감 난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존재가 무로 돌아가 완전히 소멸되는 허무함이고, 둘째는 죽는 순간까지 겪을 고통이며, 셋째는 믿음이 가짜여서 영원한 형벌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와 이 세 가지 두려움을 나란히 놓으며 죽음 앞에서의 질문을 청중에게 던집니다.

노우호 · 2026-10-23

설교 내 70–70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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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한번, 아까 관원이고 부자인데 가장 궁극적인 의문과 질문과 소원은 존재라는 거예요. 여러분, 죽음이 두려운 것은 제가 볼 때 두세 가지가 있다고 봐요. 저도 이제 죽음 앞에 가까이 와 있으니까 실감이 나는데, 소크라테스가 사약 사발을 받아 마시기 직전에 친구들을 보고 얼굴에 만면의 희색을 띠면서 “친구들이여, 가까이 오게. 드디어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정말 가까운 데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그랬다는 거예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대목에 나와요.

플로우먼과 허비 씨의 대화

설교자는 플로우먼이 허비 씨에게 사람들이 구원받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이냐고 묻는 대화를 소개합니다. 허비 씨는 죄 많은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플로우먼은 죄 많은 자기보다 의로운 자기가 사람들의 구원에 더 큰 장애가 된다고 답합니다. 설교자는 이 대화를 통해 죄인은 용서를 구하러 예수께 나아오지만,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예수께 오지 않는다는 점을 짚습니다. 그는 앞서 말한 가득 찬 기름 항아리를 다시 떠올리며, 이미 가득 찬 항아리는 더 이상 기름을 담을 수 없다고 연결합니다. 설교자는 죄인 중에서도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구주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구주도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경고합니다. 이 대화는 자기 의를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사례로 제시됩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지 말고, 빈 그릇처럼 자신을 비우고 예수께 나아오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구원의 길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죄보다도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마음이라는 적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11–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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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과 플로우먼, 허비 씨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플로우먼이 허비 씨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는 데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허비 씨는 "죄 많은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플로우먼이 말했습니다. "죄 많은 자기보다는, 의로운 자기가 사람들의 구원에 더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죄인들은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러 올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결코 예수님께 오지 않습니다. 가득 찬 기름 항아리는 더 이상 기름을 담을 수 없습니다. 죄인 중에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주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구주도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살리신 예수님

설교자는 요한복음 8장에서 여자 외에 아무도 남지 않은 장면을 소개했습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여인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있었고,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여인을 살려내신 뒤에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하나님의 나라는 판단이 아니라 구원하는 나라라는 근거로 적용했습니다. 사람의 나라는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기 쉬운 곳이라는 대비도 함께 드러냈습니다.

이바울 · 2026-10-19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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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이게 됩니다. 가두어 두게 돼요. 사람을. 사람을 가두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뭐 이거 해 저거 해 막이 막 하면은 힘들지, 힘들어하죠. 예. 이 부모와 아이들이 부딪히는 게 그거잖아요. 그죠? 부모는 부모의 법이 있고, 애들은 자유롭기를 원하는데, 하면 이제 뛰쳐나가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것이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자유하리라.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이 자유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자유는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종이 아닌 주인, 주인이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순 집사님 생각에 자유는 뭐예요? 사장님으로서의 자유, 오늘 시간에 시간, 그 참 시간에 얽매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시간이 얽매지 않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시간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명령 따르지 않는, 남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죠?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뭘 말할까요? 그리고 전혀 얽매이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죠. 어차피 사유라는 게 지위 계통이 있고, 시키는 대로 해야 되고, 또 나도 남을 시켜야 되고, 그렇잖아요. 가정해 주도 그렇고, 뭐 다 어떤 있는데,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유롭다는 게 과연 뭘까요? 예수님은 자유를 주셨다고 돼 있거든요. 그럼 그 자유라는 게 마음대로 하라는 그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결국 성령의 자유로움을 줄 수 있는 자유는, 우리가 이 땅에 있기 때문에 질서라든지 이런 걸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벗어날 수는 없는데, 거기에 따라서 순종을 하되,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하고 싶어 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자유롭다고 할 때는, 사람 사이에 사람이 같이 있기 때문에, 그걸 벗어날 수는 없잖아요. 뭐 그걸 벗어나려면서 저 산으로 가든지, 누가 사람을 산으로 갔는데 모기가 있더라. 목에 시달렸다. 결국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근데 니고데모는 뭐라 그랬냐면, 9절 한번 볼까요? 9절을 읽어 볼까요? 시작. 어찌 그 한 일이 있을 수 있나? 무슨 말 같아요?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변사님, 뭐 무슨 말인가요? 니고데모의 말은,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어찌 그런 일 수 있습니까? 우리 그런 말, 어찌 그런 일 수 있지? 니고데모는 법의 세계에서 살아왔잖아요. 법의 세계. 그 법의 세계는 어떤 세계예요? 법의 세계는 한계가 있고, 법을 지키면 찬양을 주고, 안 지키면 벌을 주는 세계입니다. 원인과 결과, 행위와 보상의 세계에서 살아왔는데, 바람이 임의로 위로 막 부는 세계,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의 문제는, 법의 세계, 원인과 결과의 세계에 살아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유로운 세계, 원인과 결과를 초월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제 이걸 뭐냐면, 하나님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는 다른 세계예요. 다른 세계인데,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보게 되면, 이해가 안 돼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삼손을 공부하면, 삼손에 대해서 대체로 뭐라고 해요? 이방 여자 사랑하다가 망한 인생이죠. 근데 히브리서에 가면 삼손을 뭐라 했습니까?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쭉 말할 때, 바라 기도한 삼손 들어합니다. 삼손도 믿음의 영웅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그런 겉으로는 바람둥이 같은 사람을 믿음의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기 어렵죠. 자유 신학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모든 기적은 다 부정을 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안 맞기 때문이죠.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없어요. 하나도. 그래서 심지어 그런 말도 있다고 해요. 성경에서 다 맞는데, 하나 딱 맞는 게 있다. 하나. 그게 뭐냐면, 기원 1세기에 나사렛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거는 확실하다. 그 하나는 확실하다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부정하죠.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 세계를 보려고 하니까, 이게 안 되는 거죠. 요즘 개를 많이 키우잖아요. 개를 융새 끌고 다니고, 왜 그러지? 왜 그래요? 일단 수도 강아지 키우죠. 왜 강아지 안 키워? 강아지는 물이 똑 앉아 가지고, 이건지 아기도 아니고 사람 아기도 아니고, 그러면 강아지는 주인의 세계를 알 수 있을까? 알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3장 12절을 읽어 볼까요? 시작. 내가 땅에 이 말도 너희가 아니.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일을 말하는 거죠. 하늘의 일을 땅의 일로 비유해서 말하는데, 바람의 비유로도 못 알아듣죠. 하늘의 일을 말하면 도대체 어떻게 믿겠느냐? 여기서는 하늘의 일이 있고, 땅의 일이 있는 거예요. 하늘은 하늘의 법이 있고, 땅은 땅의 법이 있어요. 하늘의 법에는 산상수에 나오는 대표적인 법이 있어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땅을 받을 거다. 땅의 법은 센 사람이 땅을 받죠. 센 사람이 온유한 자를 다 뺏을 수 있어요. 또 하늘의 법은 누가 오리를 가져가지, 심리를 가져라. 걷옷을 달라면 속옷도 줘라. 이건 이해가 안 되죠. 하늘의 법은 사람의 법이라는 거예요. 근데 땅의 법으로는 하늘의 법이 이해가 안 돼요. 예수님은 그 하늘의 법을 가르치러 온 거예요. 자, 3장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 생명의 나라예요.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에요. 일반 사람의 생명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살리는 생명. 하늘의 하나님의 생명은 다른 삶을 살리는 생명이에요. 사람의 생명은 자기만 사는 생명이죠. 하나님의 생명은 살리는 생명이고요. 17절 같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에 보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니,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조화를 받으리라. 하늘나라는 심판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정죄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사람 사이에서 가장 반지처럼 하는 건 판단하고 비난하는 거죠. 잘했어, 잘못했어. 근데 하나님은 구원한다고 했거든요. 판단하고 비난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요? 공부 안 한 애에게 왜 공부 안 해? 할 때는 그 애가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혀 할 수 없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해요? 화를 안 내죠. 예를 들어서, 한 살짜리, 몇 개월 된 아이한테는 안 하고, 그냥 누워 있던 아이가 뒤집기만 해도 막 박수를 치고, 디지털 시대에 일찍 이름을 내기만 해도 천재인가 봐하고 그렇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구원한다는 말은, 그 사람이 요구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죠. 약해서, 혹은 어떤 걸 매어서 할 수 없기 때문에 건져내면, 구원해 내면 할 수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연약함과 죄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정말 구원하려는 세계입니다. 사람의 나라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난하는데, 실제로는 잘 못 하죠. 하문이 좋은데도 못하면 계속 판단하고 비난하면 피곤하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너를 여자가 없답다. 죄가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를 성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벗어지라. 결국 여자가 벗어날 수 없는 걸 아시고,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여자를 살려냈죠. 살리는 다음에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뒤집기만 해도 박수치는 아기의 예

설교자는 아직 뒤집기도 못하는 아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누워 있던 아이가 뒤집기만 해도 부모가 박수를 치는 모습은, 아이가 요구를 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설교자는 구원도 이와 같아서, 사람이 요구대로 할 수 없는 연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약하거나 무언가에 매여 있어 할 수 없는 사람을 건져낼 때 비로소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의 나라는 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판단하고 비난하기 쉽다고 지적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예화로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의 연약함과 죄를 깊이 이해하는 세계임을 드러냈습니다.

이바울 · 2026-10-19

설교 내 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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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이게 됩니다. 가두어 두게 돼요. 사람을. 사람을 가두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뭐 이거 해 저거 해 막이 막 하면은 힘들지, 힘들어하죠. 예. 이 부모와 아이들이 부딪히는 게 그거잖아요. 그죠? 부모는 부모의 법이 있고, 애들은 자유롭기를 원하는데, 하면 이제 뛰쳐나가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것이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자유하리라.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이 자유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자유는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종이 아닌 주인, 주인이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순 집사님 생각에 자유는 뭐예요? 사장님으로서의 자유, 오늘 시간에 시간, 그 참 시간에 얽매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시간이 얽매지 않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시간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명령 따르지 않는, 남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죠?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뭘 말할까요? 그리고 전혀 얽매이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죠. 어차피 사유라는 게 지위 계통이 있고, 시키는 대로 해야 되고, 또 나도 남을 시켜야 되고, 그렇잖아요. 가정해 주도 그렇고, 뭐 다 어떤 있는데,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유롭다는 게 과연 뭘까요? 예수님은 자유를 주셨다고 돼 있거든요. 그럼 그 자유라는 게 마음대로 하라는 그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결국 성령의 자유로움을 줄 수 있는 자유는, 우리가 이 땅에 있기 때문에 질서라든지 이런 걸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벗어날 수는 없는데, 거기에 따라서 순종을 하되,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하고 싶어 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자유롭다고 할 때는, 사람 사이에 사람이 같이 있기 때문에, 그걸 벗어날 수는 없잖아요. 뭐 그걸 벗어나려면서 저 산으로 가든지, 누가 사람을 산으로 갔는데 모기가 있더라. 목에 시달렸다. 결국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근데 니고데모는 뭐라 그랬냐면, 9절 한번 볼까요? 9절을 읽어 볼까요? 시작. 어찌 그 한 일이 있을 수 있나? 무슨 말 같아요?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변사님, 뭐 무슨 말인가요? 니고데모의 말은,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어찌 그런 일 수 있습니까? 우리 그런 말, 어찌 그런 일 수 있지? 니고데모는 법의 세계에서 살아왔잖아요. 법의 세계. 그 법의 세계는 어떤 세계예요? 법의 세계는 한계가 있고, 법을 지키면 찬양을 주고, 안 지키면 벌을 주는 세계입니다. 원인과 결과, 행위와 보상의 세계에서 살아왔는데, 바람이 임의로 위로 막 부는 세계,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의 문제는, 법의 세계, 원인과 결과의 세계에 살아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유로운 세계, 원인과 결과를 초월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제 이걸 뭐냐면, 하나님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는 다른 세계예요. 다른 세계인데,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보게 되면, 이해가 안 돼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삼손을 공부하면, 삼손에 대해서 대체로 뭐라고 해요? 이방 여자 사랑하다가 망한 인생이죠. 근데 히브리서에 가면 삼손을 뭐라 했습니까?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쭉 말할 때, 바라 기도한 삼손 들어합니다. 삼손도 믿음의 영웅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그런 겉으로는 바람둥이 같은 사람을 믿음의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기 어렵죠. 자유 신학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모든 기적은 다 부정을 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안 맞기 때문이죠.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없어요. 하나도. 그래서 심지어 그런 말도 있다고 해요. 성경에서 다 맞는데, 하나 딱 맞는 게 있다. 하나. 그게 뭐냐면, 기원 1세기에 나사렛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거는 확실하다. 그 하나는 확실하다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부정하죠.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 세계를 보려고 하니까, 이게 안 되는 거죠. 요즘 개를 많이 키우잖아요. 개를 융새 끌고 다니고, 왜 그러지? 왜 그래요? 일단 수도 강아지 키우죠. 왜 강아지 안 키워? 강아지는 물이 똑 앉아 가지고, 이건지 아기도 아니고 사람 아기도 아니고, 그러면 강아지는 주인의 세계를 알 수 있을까? 알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3장 12절을 읽어 볼까요? 시작. 내가 땅에 이 말도 너희가 아니.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일을 말하는 거죠. 하늘의 일을 땅의 일로 비유해서 말하는데, 바람의 비유로도 못 알아듣죠. 하늘의 일을 말하면 도대체 어떻게 믿겠느냐? 여기서는 하늘의 일이 있고, 땅의 일이 있는 거예요. 하늘은 하늘의 법이 있고, 땅은 땅의 법이 있어요. 하늘의 법에는 산상수에 나오는 대표적인 법이 있어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땅을 받을 거다. 땅의 법은 센 사람이 땅을 받죠. 센 사람이 온유한 자를 다 뺏을 수 있어요. 또 하늘의 법은 누가 오리를 가져가지, 심리를 가져라. 걷옷을 달라면 속옷도 줘라. 이건 이해가 안 되죠. 하늘의 법은 사람의 법이라는 거예요. 근데 땅의 법으로는 하늘의 법이 이해가 안 돼요. 예수님은 그 하늘의 법을 가르치러 온 거예요. 자, 3장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 생명의 나라예요.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에요. 일반 사람의 생명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살리는 생명. 하늘의 하나님의 생명은 다른 삶을 살리는 생명이에요. 사람의 생명은 자기만 사는 생명이죠. 하나님의 생명은 살리는 생명이고요. 17절 같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에 보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니,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조화를 받으리라. 하늘나라는 심판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정죄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사람 사이에서 가장 반지처럼 하는 건 판단하고 비난하는 거죠. 잘했어, 잘못했어. 근데 하나님은 구원한다고 했거든요. 판단하고 비난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요? 공부 안 한 애에게 왜 공부 안 해? 할 때는 그 애가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혀 할 수 없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해요? 화를 안 내죠. 예를 들어서, 한 살짜리, 몇 개월 된 아이한테는 안 하고, 그냥 누워 있던 아이가 뒤집기만 해도 막 박수를 치고, 디지털 시대에 일찍 이름을 내기만 해도 천재인가 봐하고 그렇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구원한다는 말은, 그 사람이 요구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죠. 약해서, 혹은 어떤 걸 매어서 할 수 없기 때문에 건져내면, 구원해 내면 할 수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연약함과 죄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정말 구원하려는 세계입니다. 사람의 나라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난하는데, 실제로는 잘 못 하죠. 하문이 좋은데도 못하면 계속 판단하고 비난하면 피곤하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너를 여자가 없답다. 죄가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를 성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벗어지라. 결국 여자가 벗어날 수 없는 걸 아시고,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여자를 살려냈죠. 살리는 다음에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