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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개 · 1 / 1쪽 · 한 쪽 20개

팔을 들어 올리기 힘든 일상의 경험

설교자는 청중에게 요즘 팔을 들어 올리기 힘든 분이 있는지 묻습니다. 5년 전과 10년 전, 20년 전을 비교하며 나이가 들수록 팔을 드는 일이 어려워진다는 일상의 경험을 꺼냅니다. 이어서 팔을 들고 있다가 지쳐 내려온 모세를 본문으로 가져옵니다. 홍해를 가르고 백성을 인도한 위인 모세도 팔이 지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필 인물은 모세가 아니라 성경에 잘 드러나지 않는 훌이라고 소개합니다. 배경으로 르비 골짜기에서 마실 물이 없던 백성이 모세에게 항의했고, 하나님이 물을 주셔서 겨우 목을 축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아말렉이 쳐들어와 싸움이 시작되었고, 설교자는 어려움을 넘기면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오는 모습이 우리 인생과 닮았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싸움을 맡기고 아론, 훌과 함께 산 꼭대기에 올라가는데, 설교자는 이들이 비슷한 연배였을 것이라며 할아버지들이 산에 오른 셈이라고 웃으며 전합니다.

이원희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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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혹시 팔을 들어 올리기가 힘든 분 계십니까? 예. 맞습니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이 5년 전만 해도 충분히 힘들지 않았을 텐데, 10년 전, 20년 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팔을 들어 올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팔을 들고 있다가 지쳐버린 한 사람이 나오는데요. 누군지 아십니까? 모세죠. 홍해를 가르고 이집트에서 백성들을 인도한 그 훌륭한 모세도 팔이 지쳐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가 아니라, 우리가 이번 학기의 주제로 다루고 있는 ‘연약해도 넉넉합니다’라는 주제 아래, 성경에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데요. 바로 훌입니다. 여러분, 훌이 성경에 몇 번 나오는지 아십니까? 몇 번 나오는지 아세요? 저는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실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의 주제,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그동안 우리가 이 주제 안에서 뭐 나오리 빌립보의 간수를 만났습니다. 오늘 만나는 훌도 성경에 몇 번 나오지 않는데요. 그런데 이 사람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처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좀 살펴 봤으면 좋겠는데요.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걷다가 르비 골짜기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르비가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우리가 읽었던 17장 1절부터 보면, 마실 물이 없어서 힘들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이 르비입니다. 이 르비에서 목마르다고 백성들이 모세에게 항의를 하죠. 모세도 이 항의에 두렵고 또 항의를 맞이하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저는 살려 달라’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죠. 물을 주셔서 겨우 간신히 목을 추이게 됩니다. 여러분, 근데 이 르비 골짜기에서 위기를 넘겼는데 이번에는 아말렉이 쳐들어옵니다. 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때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에서 싸우니라. 여러분,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이 좀 되나 싶었더니 곧바로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생존의 문제가 목마른 것도 생존의 문제이지만 이제는 전투가 찾아오는 것이죠. 여러분, 르비에서 일어난 이 문제들은 흡사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려움을 넘겼다 싶으면 또 어려움이 찾아오고, 몸이 좀 괜찮아졌다 싶으면 무릎이 아프고, 무릎이 괜찮았다 싶으면 팔이 아프고,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르비에서 그런 어려움을 만나죠.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분, 전공이 무엇입니까? 벽돌 만드는 겁니다. 그냥 시키는 일을 하는 노예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받았던 것도 아니고, 군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과 싸우라고 하니까 굉장히 당황하죠. 근데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 모세랑 여호수아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싸움터에 내보내고 모세는 산 꼭대기로 올라간다고 하죠. 근데 혼자 올라가지 않습니다. 10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누구랑 올라간다고요? 아론과 훌과 함께 올라갑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모세, 아론, 훌은 동년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들께서 산 꼭대기로 올라간 겁니다. 대단하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세 가지 단어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살펴봤으면 좋겠는데요.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피곤, 붙듬, 깃발. 다시 한번 읽을까요? 시작. 피곤, 붙듬, 깃발. 여러분, 첫 번째 나오는 단어입니다. 첫 번째는 피곤입니다. 피곤. 바로 밑에 있는 글을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모세도 지쳤. 여러분, 모세도 지쳤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절 11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여러분,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이죠. 제가 유년부 아이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주일마다 유년부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경을 많이 읽었다면 충분히 알고 있을 법한 부분입니다. 승패의 달려 있음이 여호수아의 칼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있었습니까? 모세와, 모세의 팔 그리고 기도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세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었습니까? 지팡이. 그 지팡이로 수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와 함께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이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라는 믿음의 선포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것이죠. 근데 12절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함에, 여러분 모세도 피곤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모세가 피곤한 것을 애써서 감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그 위인이라고 해도 피곤함을 감추지 않아요. 믿음이 좋으면 안 지칠까요?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소년이어도 지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우리도 기도하다가 분명히 지칠 때가 있습니다. 3개월, 6개월 기도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자녀들을 위해, 손주들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10년, 20년 놓고 기도하신 우리 성도님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모세와 같이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내가 신앙이 약해서 그런가 보다. 내가 기도를 덜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까지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믿음이 없어서 지쳤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유한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누구나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음목사님께서 바울의 가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약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모세도 똑같이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 페이지요.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지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지치고 아파지는 것은 누구나 당연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애써 숨기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모세도 이 지침이 힘들어짐이 그냥 기록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지침을 강건하게 또한 건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데 팔이 내려온 모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두 번째 단어인데요. 두 번째 단어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붙듬. 여러분 함께 붙들면 넉넉합니다. 12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모세의 팔이 피곤함에, 그들이 모세의 아래에 놓아 안게 하고, 아론과 훌,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아멘. 아멘. 아멘. 여러분, 아론과 훌의 한 일을 하나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뭘 가지고 오죠? 돌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핀잔을 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약합니까? 왜 이렇게 민족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힘이 없습니까?’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지금 지쳐 있는 모세에게 필요한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앉을 자리입니다. 돌 하나를 놓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양쪽에서 그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붙들어 줍니다. 모세의 팔을 대신해서 들어 준 것은 아닙니다. 모세에게 ‘잠깐 좀 쉬시라고, 내가 대신 들어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기도하는 모세의 팔을 붙들어 줍니다. 기도는 모세가 하고, 아론과 훌은 그 기도가 멈추지 않도록 곁에서 붙들어 주었습니다. 해가지도록 붙들어 줍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 그리고 아론, 훌은 아마도 비슷한 연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론과 훌도 붙들어 주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함께 붙들면 넉넉하다라는 진리를 이들은 알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여러분,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13절 말씀인데요. 1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여러분, 통쾌한 승리 아닙니까?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못 찍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대의 훈련을 받지도 않고 군사 훈련을 받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찔러 이겼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씀이 이어지는데요. 14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단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라는 것만 기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잊지 말라고 책에 적어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10절 말씀에 나왔던 모세, 아론, 훌이 기록이 됩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는 그 훌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록해 놓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전쟁의 공로자가 누구였을까요? 여호수아도 공로자였을 것이고, 모세도 당연히 공로자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팔을 붙든 아론과 훌 또한 공로자였습니다. 특별히 훌이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작게 등장하는 그이지만, 그가 이 전쟁의 주역이었음을 하나님을 기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4절 말씀에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가는데요.

뒤집기만 해도 박수치는 아기의 예

설교자는 아직 뒤집기도 못하는 아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누워 있던 아이가 뒤집기만 해도 부모가 박수를 치는 모습은, 아이가 요구를 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설교자는 구원도 이와 같아서, 사람이 요구대로 할 수 없는 연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약하거나 무언가에 매여 있어 할 수 없는 사람을 건져낼 때 비로소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의 나라는 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판단하고 비난하기 쉽다고 지적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예화로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의 연약함과 죄를 깊이 이해하는 세계임을 드러냈습니다.

이바울 · 2026-10-19

설교 내 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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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이게 됩니다. 가두어 두게 돼요. 사람을. 사람을 가두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뭐 이거 해 저거 해 막이 막 하면은 힘들지, 힘들어하죠. 예. 이 부모와 아이들이 부딪히는 게 그거잖아요. 그죠? 부모는 부모의 법이 있고, 애들은 자유롭기를 원하는데, 하면 이제 뛰쳐나가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것이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자유하리라.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이 자유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자유는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종이 아닌 주인, 주인이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순 집사님 생각에 자유는 뭐예요? 사장님으로서의 자유, 오늘 시간에 시간, 그 참 시간에 얽매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시간이 얽매지 않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시간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명령 따르지 않는, 남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죠?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뭘 말할까요? 그리고 전혀 얽매이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죠. 어차피 사유라는 게 지위 계통이 있고, 시키는 대로 해야 되고, 또 나도 남을 시켜야 되고, 그렇잖아요. 가정해 주도 그렇고, 뭐 다 어떤 있는데,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유롭다는 게 과연 뭘까요? 예수님은 자유를 주셨다고 돼 있거든요. 그럼 그 자유라는 게 마음대로 하라는 그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결국 성령의 자유로움을 줄 수 있는 자유는, 우리가 이 땅에 있기 때문에 질서라든지 이런 걸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벗어날 수는 없는데, 거기에 따라서 순종을 하되,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하고 싶어 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자유롭다고 할 때는, 사람 사이에 사람이 같이 있기 때문에, 그걸 벗어날 수는 없잖아요. 뭐 그걸 벗어나려면서 저 산으로 가든지, 누가 사람을 산으로 갔는데 모기가 있더라. 목에 시달렸다. 결국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근데 니고데모는 뭐라 그랬냐면, 9절 한번 볼까요? 9절을 읽어 볼까요? 시작. 어찌 그 한 일이 있을 수 있나? 무슨 말 같아요?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변사님, 뭐 무슨 말인가요? 니고데모의 말은,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어찌 그런 일 수 있습니까? 우리 그런 말, 어찌 그런 일 수 있지? 니고데모는 법의 세계에서 살아왔잖아요. 법의 세계. 그 법의 세계는 어떤 세계예요? 법의 세계는 한계가 있고, 법을 지키면 찬양을 주고, 안 지키면 벌을 주는 세계입니다. 원인과 결과, 행위와 보상의 세계에서 살아왔는데, 바람이 임의로 위로 막 부는 세계,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의 문제는, 법의 세계, 원인과 결과의 세계에 살아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유로운 세계, 원인과 결과를 초월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제 이걸 뭐냐면, 하나님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는 다른 세계예요. 다른 세계인데,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보게 되면, 이해가 안 돼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삼손을 공부하면, 삼손에 대해서 대체로 뭐라고 해요? 이방 여자 사랑하다가 망한 인생이죠. 근데 히브리서에 가면 삼손을 뭐라 했습니까?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쭉 말할 때, 바라 기도한 삼손 들어합니다. 삼손도 믿음의 영웅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그런 겉으로는 바람둥이 같은 사람을 믿음의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기 어렵죠. 자유 신학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모든 기적은 다 부정을 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안 맞기 때문이죠.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없어요. 하나도. 그래서 심지어 그런 말도 있다고 해요. 성경에서 다 맞는데, 하나 딱 맞는 게 있다. 하나. 그게 뭐냐면, 기원 1세기에 나사렛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거는 확실하다. 그 하나는 확실하다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부정하죠.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 세계를 보려고 하니까, 이게 안 되는 거죠. 요즘 개를 많이 키우잖아요. 개를 융새 끌고 다니고, 왜 그러지? 왜 그래요? 일단 수도 강아지 키우죠. 왜 강아지 안 키워? 강아지는 물이 똑 앉아 가지고, 이건지 아기도 아니고 사람 아기도 아니고, 그러면 강아지는 주인의 세계를 알 수 있을까? 알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3장 12절을 읽어 볼까요? 시작. 내가 땅에 이 말도 너희가 아니.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일을 말하는 거죠. 하늘의 일을 땅의 일로 비유해서 말하는데, 바람의 비유로도 못 알아듣죠. 하늘의 일을 말하면 도대체 어떻게 믿겠느냐? 여기서는 하늘의 일이 있고, 땅의 일이 있는 거예요. 하늘은 하늘의 법이 있고, 땅은 땅의 법이 있어요. 하늘의 법에는 산상수에 나오는 대표적인 법이 있어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땅을 받을 거다. 땅의 법은 센 사람이 땅을 받죠. 센 사람이 온유한 자를 다 뺏을 수 있어요. 또 하늘의 법은 누가 오리를 가져가지, 심리를 가져라. 걷옷을 달라면 속옷도 줘라. 이건 이해가 안 되죠. 하늘의 법은 사람의 법이라는 거예요. 근데 땅의 법으로는 하늘의 법이 이해가 안 돼요. 예수님은 그 하늘의 법을 가르치러 온 거예요. 자, 3장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 생명의 나라예요.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에요. 일반 사람의 생명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살리는 생명. 하늘의 하나님의 생명은 다른 삶을 살리는 생명이에요. 사람의 생명은 자기만 사는 생명이죠. 하나님의 생명은 살리는 생명이고요. 17절 같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에 보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니,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조화를 받으리라. 하늘나라는 심판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정죄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사람 사이에서 가장 반지처럼 하는 건 판단하고 비난하는 거죠. 잘했어, 잘못했어. 근데 하나님은 구원한다고 했거든요. 판단하고 비난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요? 공부 안 한 애에게 왜 공부 안 해? 할 때는 그 애가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혀 할 수 없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해요? 화를 안 내죠. 예를 들어서, 한 살짜리, 몇 개월 된 아이한테는 안 하고, 그냥 누워 있던 아이가 뒤집기만 해도 막 박수를 치고, 디지털 시대에 일찍 이름을 내기만 해도 천재인가 봐하고 그렇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구원한다는 말은, 그 사람이 요구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죠. 약해서, 혹은 어떤 걸 매어서 할 수 없기 때문에 건져내면, 구원해 내면 할 수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연약함과 죄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정말 구원하려는 세계입니다. 사람의 나라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난하는데, 실제로는 잘 못 하죠. 하문이 좋은데도 못하면 계속 판단하고 비난하면 피곤하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너를 여자가 없답다. 죄가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를 성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벗어지라. 결국 여자가 벗어날 수 없는 걸 아시고,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여자를 살려냈죠. 살리는 다음에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