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명장말씀을 찾고, 설교를 읽다명장 게시판 홈

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개 · 1 / 1쪽 · 한 쪽 20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살리신 예수님

설교자는 요한복음 8장에서 여자 외에 아무도 남지 않은 장면을 소개했습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여인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있었고,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여인을 살려내신 뒤에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하나님의 나라는 판단이 아니라 구원하는 나라라는 근거로 적용했습니다. 사람의 나라는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기 쉬운 곳이라는 대비도 함께 드러냈습니다.

이바울 · 2026-10-19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얽매이게 됩니다. 가두어 두게 돼요. 사람을. 사람을 가두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뭐 이거 해 저거 해 막이 막 하면은 힘들지, 힘들어하죠. 예. 이 부모와 아이들이 부딪히는 게 그거잖아요. 그죠? 부모는 부모의 법이 있고, 애들은 자유롭기를 원하는데, 하면 이제 뛰쳐나가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것이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자유하리라.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이 자유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자유는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종이 아닌 주인, 주인이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순 집사님 생각에 자유는 뭐예요? 사장님으로서의 자유, 오늘 시간에 시간, 그 참 시간에 얽매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시간이 얽매지 않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시간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명령 따르지 않는, 남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죠?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뭘 말할까요? 그리고 전혀 얽매이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죠. 어차피 사유라는 게 지위 계통이 있고, 시키는 대로 해야 되고, 또 나도 남을 시켜야 되고, 그렇잖아요. 가정해 주도 그렇고, 뭐 다 어떤 있는데,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유롭다는 게 과연 뭘까요? 예수님은 자유를 주셨다고 돼 있거든요. 그럼 그 자유라는 게 마음대로 하라는 그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결국 성령의 자유로움을 줄 수 있는 자유는, 우리가 이 땅에 있기 때문에 질서라든지 이런 걸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벗어날 수는 없는데, 거기에 따라서 순종을 하되,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하고 싶어 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자유롭다고 할 때는, 사람 사이에 사람이 같이 있기 때문에, 그걸 벗어날 수는 없잖아요. 뭐 그걸 벗어나려면서 저 산으로 가든지, 누가 사람을 산으로 갔는데 모기가 있더라. 목에 시달렸다. 결국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근데 니고데모는 뭐라 그랬냐면, 9절 한번 볼까요? 9절을 읽어 볼까요? 시작. 어찌 그 한 일이 있을 수 있나? 무슨 말 같아요?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변사님, 뭐 무슨 말인가요? 니고데모의 말은,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어찌 그런 일 수 있습니까? 우리 그런 말, 어찌 그런 일 수 있지? 니고데모는 법의 세계에서 살아왔잖아요. 법의 세계. 그 법의 세계는 어떤 세계예요? 법의 세계는 한계가 있고, 법을 지키면 찬양을 주고, 안 지키면 벌을 주는 세계입니다. 원인과 결과, 행위와 보상의 세계에서 살아왔는데, 바람이 임의로 위로 막 부는 세계,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의 문제는, 법의 세계, 원인과 결과의 세계에 살아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유로운 세계, 원인과 결과를 초월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제 이걸 뭐냐면, 하나님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는 다른 세계예요. 다른 세계인데,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보게 되면, 이해가 안 돼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삼손을 공부하면, 삼손에 대해서 대체로 뭐라고 해요? 이방 여자 사랑하다가 망한 인생이죠. 근데 히브리서에 가면 삼손을 뭐라 했습니까?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쭉 말할 때, 바라 기도한 삼손 들어합니다. 삼손도 믿음의 영웅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그런 겉으로는 바람둥이 같은 사람을 믿음의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기 어렵죠. 자유 신학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모든 기적은 다 부정을 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안 맞기 때문이죠.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없어요. 하나도. 그래서 심지어 그런 말도 있다고 해요. 성경에서 다 맞는데, 하나 딱 맞는 게 있다. 하나. 그게 뭐냐면, 기원 1세기에 나사렛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거는 확실하다. 그 하나는 확실하다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부정하죠.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 세계를 보려고 하니까, 이게 안 되는 거죠. 요즘 개를 많이 키우잖아요. 개를 융새 끌고 다니고, 왜 그러지? 왜 그래요? 일단 수도 강아지 키우죠. 왜 강아지 안 키워? 강아지는 물이 똑 앉아 가지고, 이건지 아기도 아니고 사람 아기도 아니고, 그러면 강아지는 주인의 세계를 알 수 있을까? 알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3장 12절을 읽어 볼까요? 시작. 내가 땅에 이 말도 너희가 아니.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일을 말하는 거죠. 하늘의 일을 땅의 일로 비유해서 말하는데, 바람의 비유로도 못 알아듣죠. 하늘의 일을 말하면 도대체 어떻게 믿겠느냐? 여기서는 하늘의 일이 있고, 땅의 일이 있는 거예요. 하늘은 하늘의 법이 있고, 땅은 땅의 법이 있어요. 하늘의 법에는 산상수에 나오는 대표적인 법이 있어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땅을 받을 거다. 땅의 법은 센 사람이 땅을 받죠. 센 사람이 온유한 자를 다 뺏을 수 있어요. 또 하늘의 법은 누가 오리를 가져가지, 심리를 가져라. 걷옷을 달라면 속옷도 줘라. 이건 이해가 안 되죠. 하늘의 법은 사람의 법이라는 거예요. 근데 땅의 법으로는 하늘의 법이 이해가 안 돼요. 예수님은 그 하늘의 법을 가르치러 온 거예요. 자, 3장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 생명의 나라예요.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에요. 일반 사람의 생명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살리는 생명. 하늘의 하나님의 생명은 다른 삶을 살리는 생명이에요. 사람의 생명은 자기만 사는 생명이죠. 하나님의 생명은 살리는 생명이고요. 17절 같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에 보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니,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조화를 받으리라. 하늘나라는 심판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정죄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사람 사이에서 가장 반지처럼 하는 건 판단하고 비난하는 거죠. 잘했어, 잘못했어. 근데 하나님은 구원한다고 했거든요. 판단하고 비난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요? 공부 안 한 애에게 왜 공부 안 해? 할 때는 그 애가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혀 할 수 없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해요? 화를 안 내죠. 예를 들어서, 한 살짜리, 몇 개월 된 아이한테는 안 하고, 그냥 누워 있던 아이가 뒤집기만 해도 막 박수를 치고, 디지털 시대에 일찍 이름을 내기만 해도 천재인가 봐하고 그렇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구원한다는 말은, 그 사람이 요구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죠. 약해서, 혹은 어떤 걸 매어서 할 수 없기 때문에 건져내면, 구원해 내면 할 수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연약함과 죄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정말 구원하려는 세계입니다. 사람의 나라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난하는데, 실제로는 잘 못 하죠. 하문이 좋은데도 못하면 계속 판단하고 비난하면 피곤하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너를 여자가 없답다. 죄가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를 성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벗어지라. 결국 여자가 벗어날 수 없는 걸 아시고,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여자를 살려냈죠. 살리는 다음에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

설교자는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못가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못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낫는 구조였고, 설교자는 이를 경쟁이 필수인 땅의 나라에 빗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38년 된 병자, 곧 가장 뒤처진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꼴찌가 1등이 되는 반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준비가 부족해 다다르지 못한 사람도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낮게 보이는 자라도 먼저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적용했습니다. 사람의 나라에서 밀린 사람이 자기 가치를 부정적으로 느끼는 것과 대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각자 자기 삶을 살도록 해 준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바울 · 2026-10-19

설교 내 3–3문단 · 예화 3

본문 발췌 보기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고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사람의 나라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나라죠. 그런 나라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리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주는 물은 여기서 여기서 이 물이라. 물리적 물이지만 비유한다면, 야곱이 주는 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주는 물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사람이 주는 칭찬, 인정, 사랑 속에서 결국 사람들은 서로를 요구하죠. 서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이해받기를 바라지만, 사람의 것을 받으면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사람의 칭찬을 받기 시작하면, 칭찬은 좋긴 하지만 그것에 매여 버립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정을 먹으면 그 하나로 충분합니다. 다른 걸 필요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의 칭찬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예수님의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 사람의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어떤 사회가 있을까요? 사람에게 매여 있으면 결국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정 속에 살아가면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각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가 큽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요한복음 5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 되었음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가 고치겠느냐? 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때에 나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먼저 내려가라. 베데스다 못가에서는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나옵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경쟁이 필수입니다. 예전에 한때 포요가 있었는데,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고치셨나요? 제일 꼴찌에 있는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꼴찌가 1등이 되게 한 것입니다. 꼴찌의 반란이라는 말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가장 뒤쳐진 사람을 오히려 가장 앞세울 수 있는 세계입니다. 준비는 많이 했지만 다다라지 못한 사람도, 내놓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는 다릅니다. 사람이 사람의 나라에서만 살면, 밀리기 시작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자기 존재와 가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무가치한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38년 된 병자처럼 가장 낮게 보이는 자라도 가장 먼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각자가 자기 삶을 살도록 해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성령이 주체가 되어 성령의 존재를 낳는 것입니다. 아기가 나올 때 누가 나옵니까? 엄마가 나와야 합니다. 엄마가 힘을 주고 아기를 낳습니다. 성령이 힘을 주어 영적인 존재를 태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이 노력하기보다는, 성령이 한 사람을 하나님의 세계로 밀어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믿고 기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니고데모에게는 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법과 전통을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살아온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태어나면 그것들은 모두 없어지고, 완전히 새로 출발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로 완전히 새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세계를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림을 받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항상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새롭게 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그대로 고집하거나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항상 아기처럼, 모르는 것을 알고 배우는 태도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출발점입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모험 소설이나 영화처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가던 길로 가는지, 모험을 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복음 3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나라와 땅의 나라가 있지만, 결국 사람의 나라는 경쟁 사회이고, 1등만 기억하는 세계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뒤쳐지는 그런 세계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가장 뒤쳐진 자가 가장 먼저 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세계와 땅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 영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시 찾아오시고, 성령이 주체가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역사를 이루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풍성하며 생명을 얻으며 사랑을 알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은혜가 풍성하도록 축복하여 주소서. 각 사람에게 항상 말씀이 임하시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