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7개 · 1 / 1쪽 · 한 쪽 20개
마가복음의 벗은 몸으로 도망간 청년
설교자는 마가복음 14장 51절과 52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표현이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에는 제자들이 순식간에 후다닥 달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그가 홑옷만 입고 있었던 것 같다고 추측하며,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달아난 모습으로 전합니다. 그 청년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고, 마가복음에 나오므로 마가 자신이 아니겠느냐는 얘기가 많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마가가 자기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핵심은 제자들이 다 도망갔고 그 가운데 한 청년이 옷을 벗고 달아났다는 사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장면은 체포의 순간에 제자들이 얼마나 급히 흩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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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51절, 52절의 말씀을 나눠서 함께 보시겠습니다. 시작. 51절, 52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요한복음에는 그 표현이 안 나와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예수 제자들이 일단 순식간에 후다닥 도망을 갔고,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아마 그는 홑옷만 입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안에 아무것도 없고, 그런데 그 사건이라니까 홑옷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다고 돼 있습니다. 그 제자가 누구냐? 이게 궁금한데, 이것이 마가복음에 나오는 것이니까, 마가 자신이 아니겠냐는 얘기가 많습니다. 자기 이름을 넣을 수는 없고, 제자들이 다 도망갔고 마가는 옷 벗고 도망갔다는 겁니다.
멀찍이 따라간 베드로와 늦게 오는 교인
설교자는 누가복음 22장 54절의 '멀찍이 따랐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자니 용기가 없고 도망가자니 양심이 괴로워서, 알아보지 못할 만큼 떨어져 갔다고 해석합니다. 말고의 귀를 칼로 깎았던 베드로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우리 주변의 교인에게 적용합니다. 주님을 따르고 교회에 다니지만 확실히 믿자니 자신이 없고 떠나자니 벌을 받을 것 같아 교회에는 늦게 오고 일찍 가며, 행사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고 설교만 듣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베드로와 성향상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10–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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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누가복음 22장 54절에 아주 중요한 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누가복음 22장 54절, 시작.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세,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멀찍이' 따랐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가까이 가자니 용기가 없고, 도망가자니 양심이 괴로우니까,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멀찍이 간 거예요. 왜 멀찍이 갔을까요? 갑자기 겁이 난 거예요.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깎았던 베드로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분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주님을 따르고 교회를 다니는데 확실히 믿자니 자신이 없고, 교회를 안 다니자니 벌 받을 것 같고, 그러니까 교회 오긴 오는데 꼭 늦게 옵니다. 그리고 일찍 가십니다. 그리고 절대 교회 행사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설교만 듣고 가는 그런 형태의 사람이 이 베드로와 성향상 비슷합니다. 끼어들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가게 됩니다.
여종과 하속들 앞에서 세 번 부인한 베드로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고, 그때가 추웠기 때문에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 있었으며 베드로도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고 기록됩니다. 설교자는 이 여자가 대단하거나 무서운 인물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겁을 먹으면 상대가 굉장히 커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쩔쩔매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런 상태였고, 여자 문지기 앞에서도 신분을 숨기며 신앙 고백을 바꾸었다고 전합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옆에서 당신도 예수의 제자 같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나는 예수 제자가 아니라고 두 번째로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에는 대제사장의 종 중 귀를 잘린 자의 친척이 동산에서 함께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고 다그쳤고, 베드로는 다시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설교자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하며 영적으로 비참해졌다고 말하며, 고난을 두려워하기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권면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23–51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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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이 베드로가 첫 번째 '나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요'라고 부인을 합니다. 이 여자가 대단한 여자는 아닙니다. 무서운 여자도 아닙니다. 근데 사람이 한번 겁을 먹고 사람을 무서워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이 굉장히 커 보여요. 아무것도 아닌 사건에도 쩔쩔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겁니다. 여자 문지기에게까지도 쩔쩔매고, 자기 신분을 숨기고, 자기의 신앙 고백을 바꾸어 예수 나 안 믿는다, 나 예수 제자 아니라고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발견하는 게 뭘까요? 두 가지. 그가 가진 믿음은 굉장히 좋은 믿음 같았는데, 사실 보니까 인간적인 믿음이었다. 육적인 믿음이었다는 거예요. 그게요, 보통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이런 위기 상황에 들어오면 딱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러분에게 누가 욕을 바가지로 해 보면 알아요. 그리고 여러분을 막 오해하고 여러분을 막 힘들게 하면, 딱 그 순간에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적인 믿음인지 성령으로부터 온 믿음인지가 구분이 돼요. 제일 쉬운 예로,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릴 거냐 말 거냐, 이제 그런 거예요. 속옷을 달라면 겉옷을 주고, 오리를 가자 그러면 십 리를 가고 이렇게 돼 있잖아요. 여기서부터 내가 가진 믿음이 인간적인 믿음이냐 인간적인 봉사냐,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냐 하는 것이 이제 드러나는 거예요. 베드로는 창피하게 다 드러난 거예요. 3년 따라다녀 봐야 말짱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수준이 그거니까.
그리고 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줄 알았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 일부러 가서 기도하셨어요. 근데 그 아주 중요한 시간에 베드로는 졸았다 말이죠. 다른 제자들도 졸았다 말이죠. 그러니 영적으로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때로는 여러분의 가정에, 자녀들에게, 때로는 우리의 비즈니스에, 여러분이 일하는 직장에 위기가 올 수 있어요. 어쩌면 당신이 그 직장을 떠나야 될지도 몰라요. 다음 직장을 구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죠. 이렇게 계속 가다가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지, 이런 불안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죠. 불안은 여러분을 점점 지배하게 될 거예요. 두려움은 점점 여러분을 지배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상상을 하지 못하고 나쁜 상상을 계속합니다. 최악의 상상을 하고, 나중에는 그 상상이 사실이라고 자기가 또 믿어요. 바로 이런 현상이 베드로에게서 지금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자, 요한복음 18장 19절부터 21절까지 쭉 읽겠습니다. 시작.
대제사장이 예수께 그 제자들과 그 교훈을 물으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말하였노라. 내가 항상 회당과 성전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내게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자, 베드로가 그렇게 아주 겁에 질려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문지기 여자한테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시간에 재판과 질문이 시작된 거예요. 그 대제사장이 묻죠. 너는 제자들이 누구며 무엇을 가르쳤기에 여기까지 왔느냐?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누구를 공격하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이 없는 말이에요. 두려움이 없는 표정이에요. 왜 그럴까요?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거든요. 그날 밤에 금식하셨고, 그날 밤에 준비하셨고, 하나님하고 말씀을 많이 나누셨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거야.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은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되기를 축원하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
세상에 어떤 사건이 생기고 누가 뭐래도 하나님하고 대화를 많이 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어. 아니 내가 어디 뭐 숨어서 얘기했냐? 다 공개적으로 얘기했는데 내가 하는 말은 숨길 것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고 싶으면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을 다 불러다 증인 삼아서 물어보면 알 거 아니냐. 아, 예수님의 그 태도가 얼마나 당당한지 몰라요. 그런데요, 또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당당한 사람을 꼴배기 싫어해요. 머리도 숙이고 손도 비비고 뭐 좀 이래야 권력자가 좀 이렇게 재미가 있는데 예수님이 안 그러시거든요.
요한복음 18장 22절 읽어 주십시오. 시작.
곁에 섰던 아랫사람 중 한 사람이 예수를 쳐서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말이 옳으냐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의 태도가 건방지다 이거예요. 어디서 딱딱거리고 대답하냐 이거예요. 그래서 주먹이 하나 날아온 거예요. 여기 보니까. 근데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도 또 흔들리지 않아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증거를 대라. 잘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자,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의 태도에 흔들림이 없었다는 거예요.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돈에 흔들리지 않고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폭력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교만하지도 않아요. 기도하는 사람들은 교만하지도 않지만 흔들리지도 않아요. 담담하게, 자유롭게, 불안하지 않게 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 없는 게 가장 불행한 게 아니라 흔들리는 게 불행한 겁니다. 여러분 집이 없는 게 불행한 게 아니고요. 여러분이 아직도 공포와 두려움에 휩쓸려 있는 게 불행한 겁니다. 미래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고, 자존감이 없는 이것이 문제지, 물질이 문제가 아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부 생활을 해 가면서, 사업을 해 가면서 어려운 일들이 한두 번 있습니까? 그리고 이 어려운 문제가 지금 끝났다고 끝난 것입니까? 아니에요.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과 이 얘기를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어떤 환난이 와도 고난은 파도 같은 거예요. 저 또 왔다, 또 왔다, 또 왔다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물이 말이죠, 뚝을 넘지 않게 하기만 하면 돼요. 뚝을 넘으면 홍수가 납니다. 물이 뚝 끝까지 왔다가 막 찰랑거리고 난리를 쳐도 다시 내려가면 돼요. 근데 이 뚝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면 사고가 나요.
안나스 대제사장은 자기가 더 이상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사위인 가야바 대제사장에게로 예수를 보냅니다. 요한복음 18장 24절 읽어 주십시오. 시작.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더라.
자, 이제 카메라 앵글이 또다시 베드로에게로 왔어요. 지금까지는 베드로에게 있다가 이제 가야바에게로 갔다가 다시 앵글이 베드로에게로 돌아왔습니다. 25절 읽어 주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쬘 때에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너도 그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더라.
이번에는 여자가 그런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이 예수님 제자 같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니다. 나는 예수 제자가 아니다라고 두 번 부인했습니다.
26절, 27절을 보십시오. 시작.
대제사장의 종 중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자의 친척 한 사람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너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하니, 베드로가 다시 부인하매 곧 닭이 우는지라.
빌라도의 미신적 두려움과 중립의 불가능성
설교자는 빌라도가 미신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정의를 행하고 싶은 일말의 마음과, 군중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형을 선고하기는 꺼려져서 예수님을 넘겨주어 채찍질하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빌라도는 그리스도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설교자는 그 점에서 빌라도가 우리 중 어떤 사람들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립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마태복음의 기록이 빌라도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요약한다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입 밖으로 말하지만 자기 마음을 향해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고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질문이 오늘 청중에게도 똑같이 남아 있다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24–24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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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는 미신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여기에 정의를 행하고 싶은 일말의 마음과, 군중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형을 선고하기는 꺼려져서, 예수님을 넘겨주어 채찍질하게 합니다. 본질적으로 빌라도는 그리스도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중 어떤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우리가 깨닫는 것처럼, 중립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빌라도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요약합니다. 빌라도는 입 밖으로 말하지만 자기 마음을 향해 묻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함
설교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뒤 가장 먼저 한 행동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던 관계에 죄로 인한 두려움이 들어와 도망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도망가는 삶이 매우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출애굽 후 광야 생활을 언급하며, 두려움이 있을 때 사람들은 옛 생각, 옛날의 자신에게 치우치게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도는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이므로 옛것에 속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앞서 나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두려움이 올 때 그는 말씀에 머물러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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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존재는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빛을 비춰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한참 젊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결국 결과를 보게 만들어요. 내가 하는 것, 여러분이 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의 결과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깁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았던 그 가론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사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이후에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디에 쉬었습니까?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뭐였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옵니다.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돼 있어요. 사람마다 뭘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3명이나 모여서 같이 성령님의 인도를 맛보고 삶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들어와야 하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의 가르침,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도망가는 것이었죠.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죄라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도망가는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보면, 출애굽하고 나서 그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갑니까? 옛날 생각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었던 옛자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옛날엔 이랬었지, 저했었지.' 그런데 우리는 다 새생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옛자에 속지 말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두려움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를 의심하죠? 주님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의심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단절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소명이 생깁니다. 여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유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코이노니아 얘기했잖아요.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죠? 나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 번째 누굴 나눴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눴고, 두 번째는 간증을 했고, 세 번째는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그러니까 영적으로, 혼적으로 풀리면 무엇이 풀리죠? 물질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다 풀리게 됩니다. 순서가 있더라고요. 근데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이 되고, 혼쪽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막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그것도 주님께 맡기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혼까지도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이루셨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제입니다. 나눔입니다. 그게 영적인 교제든, 육적인 교제든, 아니면 물건을 통한 교제든, 그 코이노니아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합에요. 누구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사람과의 연합이 됩니다. 사람이 연합이 되면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 통해 저변이 확대됩니다. 근데 그게 없으니까 요즘 교회는 다들 힘듭니다. 마음속에서 꺼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뭐를 꺼내 놓으면 그냥 듣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정작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고 계시니까, 그것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듯이 삶 가운데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가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질 때, 주님이 서로 일으켜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면 너희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어요.' 교제.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 누구와 교제가 되죠? 지체들과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거기에서는 기도가 있을 것이고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교제가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같이 교제하다 보면, 아, 내가 내 모양이 이래서, 내 죄성이 이래서 이렇게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일부분이고, 잠시 보여지는 일부분이고, 죄를 꺼내 놓고 좋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다른 것도 같이 꺼내 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무언가 간증을 들어보고 그걸 판단하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고 여겨질 수 있게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때는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떤 간증이 있고, 어떤 죄성이 있어. 그걸 하나님께 고발했더니 이렇게 해 주셨어.' 이게 자부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다가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광야 생활 중에서 제일 감사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런 것도 있지만 매일매일 뭘 내려 주셨습니까? 만나.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근데 그 만나의 양이 많아도 안 됩니다. 딱, 집안에 네 식구라면 네 개만 딱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더 주면 받아야 되나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 양식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보여지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제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 말하기를 더고 뭐라고 얘기하시죠? 듣기를 속해하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음으로써 벌써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한 분이라면, 그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떤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과 더 뛰어난 것을 불러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의 그릇이 있고 저만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점진적으로 단련한 후에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단련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떤 교제를 통해, 어떤 마음을 통해 흔들리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이 수직적인 관계가 해결되면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절.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의 태도
설교자는 소크라테스가 사약 사발을 받아 마시기 직전 친구들에게 얼굴에 희색을 띠며 '드디어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정말 가까운 데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대목을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자신도 죽음 가까이에 와 있어 이 말이 실감 난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존재가 무로 돌아가 완전히 소멸되는 허무함이고, 둘째는 죽는 순간까지 겪을 고통이며, 셋째는 믿음이 가짜여서 영원한 형벌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와 이 세 가지 두려움을 나란히 놓으며 죽음 앞에서의 질문을 청중에게 던집니다.
노우호 · 2026-10-23
설교 내 70–70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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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한번, 아까 관원이고 부자인데 가장 궁극적인 의문과 질문과 소원은 존재라는 거예요. 여러분, 죽음이 두려운 것은 제가 볼 때 두세 가지가 있다고 봐요. 저도 이제 죽음 앞에 가까이 와 있으니까 실감이 나는데, 소크라테스가 사약 사발을 받아 마시기 직전에 친구들을 보고 얼굴에 만면의 희색을 띠면서 “친구들이여, 가까이 오게. 드디어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정말 가까운 데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그랬다는 거예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대목에 나와요.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설교자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여겨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을 언급합니다. 설교자는 그 원인이 두려움이었다고 설명하며,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 실제로 두려운 길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처럼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조차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도 죽음을 각오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말로만 따르는 신앙이 아니라 실제 결단이 필요한 신앙임을 적용합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정죄의 대상이라기보다, 성도가 자신의 두려움과 자아를 직면해야 한다는 거울로 제시됩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자신의 두려움과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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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