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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7개 · 1 / 1쪽 · 한 쪽 20개

마가복음의 벗은 몸으로 도망간 청년

설교자는 마가복음 14장 51절과 52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표현이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에는 제자들이 순식간에 후다닥 달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그가 홑옷만 입고 있었던 것 같다고 추측하며,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달아난 모습으로 전합니다. 그 청년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고, 마가복음에 나오므로 마가 자신이 아니겠느냐는 얘기가 많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마가가 자기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핵심은 제자들이 다 도망갔고 그 가운데 한 청년이 옷을 벗고 달아났다는 사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장면은 체포의 순간에 제자들이 얼마나 급히 흩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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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51절, 52절의 말씀을 나눠서 함께 보시겠습니다. 시작. 51절, 52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요한복음에는 그 표현이 안 나와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예수 제자들이 일단 순식간에 후다닥 도망을 갔고,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아마 그는 홑옷만 입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안에 아무것도 없고, 그런데 그 사건이라니까 홑옷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다고 돼 있습니다. 그 제자가 누구냐? 이게 궁금한데, 이것이 마가복음에 나오는 것이니까, 마가 자신이 아니겠냐는 얘기가 많습니다. 자기 이름을 넣을 수는 없고, 제자들이 다 도망갔고 마가는 옷 벗고 도망갔다는 겁니다.

오순절에 회개하고 세례받은 사람들

설교자는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외방인 등으로 유대교에 속해 있었지만 진리를 보고 믿었다고 설교자는 설명합니다. 그들은 이 결정으로 박해를 받을 것과 가족에게 미움과 배척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했고, 침례를 받는 것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에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주님이시다'라고 선포하며 예수 외에 다른 주님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이를 침례의 의미로 적용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이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분만을 주님으로 따르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와 연결합니다. 설교자는 이 사례를 통해 침례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를 나타낸다고 정리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3

설교 내 5–5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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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마른 땅 위를 걸어가고 그들의 적들은 그들을 따라간다. 바다, 즉 적홍해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물에 잠기게 하고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이제 사도가 이 일을 언급하고 있고, 그가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로에게 침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오직 하나의 의미밖에는 없다. 그들은 모세의 지도력과 영향권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모세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과 그의 사명에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그들은 이집트에서 살던 자들로부터 분리되고 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구원받은 자들, 보호받는 자들로서, 세상과 바로의 영역에 속한 모든 자들과 구분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따라서 침례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과 영향권, 그분의 지도력 속으로 들어감을 나타내고 표현한다. 이는 우리가 본래 세상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상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인 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새롭게 말하자면, 신약 성경은 이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가 어둠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곧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세상에서 빼앗겨 하나님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새 영역에 있다. 우리는 새 영역과 새 영향력 아래 있다.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분께 자신을 내어 드렸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 되었고, 우리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라. 그들이 원했다면 이집트에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일어나 모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랐다. 그들은 모세와 함께 목숨을 위태롭게 감수했다. 모세가 그들을 적홍해로 데려가자,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세가 말했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자." 믿음으로 모세를 따르자, 바다가 갈라지고 그들은 건너갔다. 그들은 모세의 지도력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 드렸다. 그들은 자신을 그분에게 바쳤고, 자신을 그분에게 내어 드렸다. 그분은 그들의 지도자이자 주인이며, 그분은 그들의 주님이 되었다. 그들은 모세에게 침례를 받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침례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더 이상 세상과 그 영역과 그 이익에 속하지 않고,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표현한다. 한 분의 주님이시다. 네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한 분의 주님만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그분을 따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침례의 의미이며, 이것이 침례가 표현하는 것이다. 오순절 날의 사람들이 보라. 그들은 유대인과 외방인과 다른 사람들이었고, 유대교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은 진리를 보고 믿었으며, 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이로 인해 박해를 받을 줄 알았다. 그들은 가족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혹시나 배척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예수, 이 나사렛 사람, 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우리는 그분을 보았다."라고 그들이 말했다. 그들은 자신을 그분과 동일시했다. 그들은 침례를 받는 것을 순종했다. 침례를 받음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에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분이 주님이시다."라고 그들이 말했다. "세수는 주님이 아니다. 예수만 주님이시다. 다른 주님은 없다. 이분이 바로 기다리던 구원자이시다." 그렇다. 이제 침례의 중요성을 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모든 자는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이제부터는 그분을 따를 것이라는 것을 선포한다.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떠안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므로 침례는 바로 이 일을 나타내고 표현한다. 그리고 침례의 단일성과 단일 교회 안의 단합의 중요성을 보라. 우리가 이전에는 개인들로서, 각자 자신의 뜻을 따르고, 각자 자신의 길을 걷고, 자기 중심적이었고 이기적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떠안고 그리스도를 따랐다.

베드로의 완벽한 고백과 십자가 앞의 실패

설교자는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34절까지의 유명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고,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은 그리스도시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설교자는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을 함께 언급하며,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인류 역사상 예수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대답이라고 평가하고, 예수님도 베드로를 칭찬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며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돌이키셔서 베드로를 꾸짖으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베드로가 가장 온전한 지식과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바로 직후에 사탄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점을 충격적인 장면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는 점도 함께 짚습니다. 설교자는 우리의 믿음이 행함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적용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자기 부인의 실패에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남득현 · 2026-10-21

설교 내 4–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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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가 한 번 성경을 떠나서 마가복음 8장 말씀을 보시겠어요?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30절, 34절 말씀을 보시면, 이건 아주 유명한 장면입니다. 이건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한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는 첫 번째 질문하는 장면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한테 물어봐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는지. 그리고 제자들한테도 물어보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29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을 듣고 대답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님은 그리스도시이다'라고 대답해요. 여러분, 마태복음의 동일한 말씀을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하냐면,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해요. 여러분, 인류 역사상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완전하고 온전한 대답을 베드로가 합니다. 지식적으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칭찬하시죠. 베드로한테 '잘하였다.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시죠.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완벽한 대답을 합니다. 지식적으로.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 대답을 듣고 그제서 예수님이 자신이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제자들한테 말하죠.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반응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어 놓고 '절대 그렇게 안 될 거다'라고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하죠. 그때 마가복음 8장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세요. 여러분, 베드로가 가장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 후에 사단이 됩니다. 이게 충격적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온전한 지식, 가장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 후에 사단이 됩니다. 직후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죠.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왜 행함을 만들어 내지 못하냐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게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행동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지식은 있는데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알고 있는데, 정작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간디의 그리스도 사랑과 기독교 거부

설교자는 간디를 예로 들며, 간디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도 기독교인은 싫어했다고 말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간디는 예수님처럼 살고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성령의 영향 아래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그런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삶의 원칙이나 규율을 지키는 일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영적으로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돌 같은 마음을 떼어내고 살 같은 마음을 심는 변화가 영적 형성의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그는 찰스 셰일론의 '예수라면 무엇을 할까?'와 비슷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경적 주제와 연결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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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생활 원칙'에 대해 다루는 글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 원칙들을 세울 때 종종 세속적인 인물들, 예를 들어 건강 트레이너나 유사 인물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세속적인 건강 트레이너들이 좋은 조언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1만 걸음을 걷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주에 누군가가 저에게 154kg의 데드리프트를 성공했다고 문자로 알려왔습니다. 네, 정말 인상 깊습니다. 정말 힘이 세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때때로 이러한 원칙들이 종합적이라는 이유로 혼동될 수 있습니다. 매튜, 당신은 삶 속에 분명히 규율이 있을 텐데요. 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문제는 '원칙'이라는 단어 자체에 있습니까? 저는 삶의 원칙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가치들을 동등한 수준으로 놓고 다루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종종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제 삶의 규칙 중 하나가 성경을 읽는 것이고, 또 하나가 하루에 1만 걸음을 걷는 것이며, 이 모든 지침이 목사나 기독교 저자 같은 영적 지도자로부터 나온다면, 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고,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믿는 자로서 1만 걸음을 걷지 못하는 시기도 있을 수 있고,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는 자로서 성경 말씀을 받지 않는 시기, 묵상하지 않는 시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시기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벤, 마크, 아니면 다른 누구와도 이런 상황을 마주치십니까? 사람들이 강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저는 자주 이 책과 존 마크 코머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은 이런 영적 접근법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벤, 아니요? 코머처럼 말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코머는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네, 저는 이 사고방식이 분명히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받는 것 같은 사례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만난 20대나 30대의 젊은이들 중 상담을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마치 영적 형성의 일부분이 심리상담사 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듯이 말이죠. 저는 그가 말하는 방식이 특정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저는 그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 있고 그들의 귀를 얻고 있으며, 그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지혜를 제공한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이 기독교적인 삶을 살도록 도울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는 제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단지 서부 버전의 율법주의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전 방식을 싫어하고, 새로운 규칙과 원칙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죠. 만약 이 규칙을 따르면 반드시 번영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번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벤, 우리가 조언과 예시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밝은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시로부터 영적 성장과 도전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반드시 모방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코머와 대화하거나 그의 책을 읽을 때, 그가 말하는 원칙이 '성경 말씀이 당신 삶의 전반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그의 규칙이 아닙니다. 빙엄 박사가 말했듯이, 여러 가지가 동등한 수준으로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동등하지 않으며, 성경만큼 중요하게 다뤄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 세대에 대한 가정을 드리자면, 저는 여전히 복음에 대한 지지자입니다. 저는 건강한 삶의 원칙이 여러 면에서 좋은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복음에 뿌리를 두고 싶습니다. 제 지식과 신분이 복음에 기반하고, 제 모든 행위가 복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입니다. 네, 이 점에서, '도'의 실천에서 분명히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다시 태어남과 새 생명의 교리입니다. 저는 아마도... 뭔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이 지속적인 변화의 주요한 주체라고 언급한 예는 찾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그것이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그를 압박한다면 그가 이를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영적 발전이나 영적 형성은 돌 같은 마음을 떼어내고 살 같은 마음을 심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강한 인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 점이 결여되었다면, 당신의 모든 노력, 당신의 삶의 규칙, 1만 걸음, 규율은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간디 같은 인물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유명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기독교인을 싫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고 제자 되고 싶어 했지만, 성령의 영향하에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요? 이건 찰스 셰일론의 '예수라면 무엇을 할까?'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경적 주제입니다.

기초만 쌓고 멈춘 망대 공사 현장

설교자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 망대를 세우던 모습을 먼저 소개합니다. 그런데 자금이 떨어지거나 재료가 부족해 기초만 쌓아 두고 공사가 중단되면, 그 모습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지금 교회 곁에서 지어지고 있는 교육관 이야기를 꺼냅니다. 교육관은 우여곡절 끝에 완공을 앞두고 있는데, 공사 전에 얼마나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 보고 준비했기에 차질 없이 올라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 건물이 완공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 하고 시작했다'며 비웃었을 것이고, 그 순간이 얼마나 아찔했겠느냐고 묻습니다. 설교자는 여기서 핵심을 짚습니다. 시작할 때는 다들 응원해 주지만, 완성되지 않으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제자의 길에 적용합니다. 은혜에 감격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믿기 시작했다가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에 기초만 쌓아 둔다면,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남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고, 처음부터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러야 한다'고 정직하게 말씀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가 단순한 건축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의 끝까지 가는 자세에 대한 말씀이라고 풀어 설명합니다. 시작은 쉬워도 끝을 맺으려면 계산과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신앙의 출발점에서 미리 값을 계산하고 준비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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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

만 명의 왕과 2만 명의 왕의 전쟁 비유

설교자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또 하나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두 배인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 본다는 장면입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승산이 없다면 싸우는 대신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패배해서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편이 낫다는 뜻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의 핵심을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앞선 망대 비유와 공통된 메시지, 즉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고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가르침으로 연결합니다. 적용으로 설교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제자의 길에서 요구되는 값을 미리 알고 나서야 정직하게 걸음을 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감정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주님이 요구하시는 대가를 분명히 보고 결단하라는 권면입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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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

죄수의 십자가 행진

설교자는 당시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직접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철저한 죽음의 행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그런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철학적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을 각오한 걸음임을 보여 주고, 성도 역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따르겠다는 태도를 경계하는 메시지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이 말씀을 쉽게 흘려듣지 않도록 당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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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