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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4개 · 1 / 1쪽 · 한 쪽 20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설교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맞이하신 무서운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이 일이 무엇을 뜻하게 될지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분이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고 고백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그분의 순종이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과정의 절정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순종이 승리를 향한 길이었음을 청중이 기억하도록 권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60–60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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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순종하셨고, 그 순종은 계속 이어집니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동산에서 그 무서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일이 무엇을 뜻하게 될지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으로 가셨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와 생명을 아버지께 맡김

설교자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떠올립니다. 본문 베드로전서 2장 23절은 예수님이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실 때에도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그 말씀을 따라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기도를 인용합니다. 그는 주님을 의지하는 인생이란 곧 내 생명을 아버지께 맡기는 인생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상에는 내가 가진 것과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서,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의 손에 맡겨라'고 말씀하신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인간적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하며 살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양석효 · 2026-10-22

설교 내 8–8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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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썩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는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여러분, 고대 동방에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재산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창고의 곡식이고, 두 번째는 옷이며, 세 번째는 쌓아둔 금과 은이었습니다. 창고의 곡식도 있고, 좋은 옷도 있고, 금과 은도 쌓여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보면서 만족하고 사는 인생입니다. '이 정도면 내 인생 괜찮은 거지', '이 정도면 잘 사는 거지' 이렇게 만족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하나님 없이도 자기가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곡식은 썩을 것이고, 옷은 썩을 것이고, 금과 은은 녹이 슬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금과 은은 원래 녹이 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금과 은이 녹이 슬 거야.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 사라질 거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 말씀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헛된 것들이다라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인스타를 많이 하지는 않는데, 인스타그램 같은 걸 보고 있으면 SNS를 보고 있으면 화려한 것, 좋아 보이는 것, 대단해 보이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나 빼고는 다 잘 사는 것처럼 느껴져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죠. 저도 운동을 좋아해서 러닝이나 사이클 같은 걸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인스타그램 보면 최근 러닝 붐이 일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기록을 올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4분 30초로 뛰었다', '42.195km 일곱, 서브 3, 서브 4'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뛰는 것처럼 보입니다. 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나도 저기 도달해야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삽니다. 다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아이 펀런 하는 게 중요합니다. 펀런 죄송합니다. 영어 잘 못해서 펀런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 보면 절대 펀런 하지 않습니다. 기록에 매어 가지고 인스타에 올라와 있는 기록 보고 나도 저기 도달해야지. 허상가도 같은 거죠. 그게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부자들 보고 잘 사는 인생들 보면 그 뒤에 감춰져 있는 허상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 모습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건 SNS죠. 그런데 정말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을 풍족하게 하고 책임져 주는 걸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부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는 뭐냐면, 그것들이 썩고 썩고 녹이 슬었다고 얘기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를 책임져 주지 못할 것이다. 마음의 살진 자의 첫 번째 특징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4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삭기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귀에 들렸느니라.' 마음이 살진 자의 두 번째 특징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관심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프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재물이 부족해서 품삯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재물을 쌓아두고, 두었고, 그것으로 만족하니까 다른 사람이 고통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내 배를 채우기에 급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풍족하고 많은 것들을 누리고 많은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울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 재물이 얼마나 늘어나는지는 중요한데, 마땅히 돌아가야 될 그 삭이 돌아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이 살찌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것에는 관심이 많은데,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에는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 재미있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주지 않는 삭기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입니까?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주지 않는 삭기 소리를 지르고, 그 비명과 소리를 누가 듣고 있다고 얘기합니까? 하나님이 듣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살진 자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이미 나의 부유함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고통당하는 것을 바라보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음 상한 자의 소리를 듣고 있다. 이렇게 성경은 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이 살진 세 번째 특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심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5절 보니까 이렇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취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이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죽음 너머에 어떤 것이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마지막을 생각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끝이 있고, 그 끝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알고 있고, 그 죽음 너머의 생명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살진 자들은 죽음 너머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내가 누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그것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음 너머의 그 인생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이 없는 인생은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끝을 넘어 영원히 사는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마음이 살 있다면 지금과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당장 하고 있는 그것에 집중해서, 그 이후의 삶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살찐 자들, 부한 자들은 그런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재물에 한물되어 있고, 그것이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고, 두 번째는 내 주변에 아픈 그 신음 소리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무감각합니다. 세 번째로는 끝이 없이 지금 생애가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심판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첫 번째 장사하는 자, 두 번째 부자, 둘 다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인생입니다. 오늘 세 번째 마지막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6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의인을 정지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의인은 일차적으로는 당시 부자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던 가난한 성도들을 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지 당했다'라는 것은 법정 용어거든요. 그러니까 부당하게 법정적으로도 부당한 어떤 수탈을 당해서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냐면,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않았다'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너무 좋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참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너무 안 좋고, 너무 어렵고, 너무 힘들 때 무엇을 하라고 성경 기록합니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나님께 모든 것들을 맡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의 힘입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어떤 수단을 생각하고 이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은혜를 사모함으로 기다리고 참는다는 의미가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7절을 보니까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9절에 보니깐요. '심판주가 문 밖에서 계시니라.' 오늘을 살지만 우리는 내일을 기다리는 자들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고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인간적 방법을 생각해서 어떤 방법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해결하심을 기다리고 그 응답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게 의인이라고 오늘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시는데요. 제가 한번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실 때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대요.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지막 말씀 기억합니까?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그 말씀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정말 주님을 의지한다면, 주님을 의지하는 인생은 내 생명을 아버지께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굉장히 많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정말 많고, 누릴 수 있는 것도 많고,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 착각할 수 있는 그 너무 쉬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손에 맡겨라'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의지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나는 오늘 어떤 것을 의지하는지를 살펴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기도하실 때에, 어 나의 삶을 한번 좀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들, 내가 고집하고 있는 것들, 그것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오늘 기도하시면서 우리 인생을 한번 돌아보고, 정말 하나님께 모든 것들을 맡기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하면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위의 두 강도와 예수님

설교자는 예수님께서 두 강도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 십자가에는 두 강도뿐 아니라 예수님까지 세 사람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세워졌다고 한 말씀과 이를 연결합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죄로 형벌을 받았고, 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죄를 떠안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떠안으셨다는 사실이 부서진 모든 이에게 큰 위로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 계명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과 십자가 위의 용서라는 복음에 뿌리를 둔다고 적용합니다.

톰 그로엘스마 · 2026-10-19

설교 내 14–14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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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다른 이들을 대접하며, 충성되이 일하며 궁핍한 자를 도울 수 있도록 해달라. 또는 에베소서 4장을 돌아보자.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오히려 손으로 유익한 일을 하여, 필요한 자에게 줄 것이 있게 하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일에 대해 이 관점에서 생각하는가? 우리의 일은, 맞다, 생계를 유지하고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또한,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더 많은 연민을 갖도록 도와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가 축복을 받을 때, 단지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비심을 키우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여덟 번째 계명은 빼앗는 것을 금지하지만, 주는 것을 권면하고 명령한다. 이는 초기 교회를 구별한 것이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초기 교회와 그 교회를 지탱했던 기둥들을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 2:44-45에 보면, 초기 교회의 기둥 중 하나는 믿는 자들이 모두 함께 있었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복음의 영향력은 처음부터 마음을 열어 나누고 주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형제여, 자매여, 네가 필요가 있느냐?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친절한 마음을 품으라. 내가 자라난 교회, 그리고 내가 섬기던 교회 중 일부에서는 주의 식사 때 자선 모금이나 자선 기금을 모으곤 했다. 주의 식사로 드릴 때, 우리는 필요로 하는 자들을 돕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에 응답한다. 얼마나 훌륭한 관습인가. 친구들아, 우리는 풍성하게 사는 것을 부르심받았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가? 십일조인가? 신약 성경에는 우리가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은 없다. 예수님은 한 번 율법 교사들에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마늘과 고추를 십일조하지만,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하였다." 예수님은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더 중요한 것을 주목하라. 십일조를 그만두지 말라,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주목하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도록 넘치도록 주신다고 상기시켜 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부요함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가난해지셨다. 우리가 주는 것에 대해 복음을 반영하도록 하라. 그리고 복음을 우리의 기부의 동기와 기준이 되게 하라. 풍성한 기부는 돈이 우리에게 행사하는 권력을 깨뜨린다. 우리는 그것에 매달리며 말한다. "이것은 내 것이며, 내가 지킬 것이다." 그러나 주는 것이 바로 이 잡힌 손을 풀어주는 것이다. 켄트 휴즈가 말했다. "나는 매번 주면 돈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꾸준한 자비심은 돈에 대한 숭배를 끊임없이 해소하는 것이다." 얼마나 훌륭한 교훈인가. 우리 아이들에게도 얼마나 훌륭한 교훈인가. 부모님들, 이렇게 하시라. 기부용 주머니나 접시가 지나갈 때, 비워두지 마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기에 넣어라. 자녀들에게 타인에 대한 자비심의 예를 보여주라. 친구들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겠노라. 우리가 이 계명에 대한 순종을 이루는 것은, 다른 계명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 우리를 구속하시고 구원하신 일에 있다. 이 빛에서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두 강도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물론, 그 십자가에는 두 강도뿐 아니라 세 사람이 있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세워졌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으로 여겨졌다. 두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형벌을 받았고, 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죄를 떠안았다. 무죄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떠안으셨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이는 부서진 모든 이에게 말이다. 여덟 번째 계명은 분명히 오늘 밤 여기 계신 모든 분에게 적용된다. 십자가 위에서의 용서. 복음이 우리에게 우리가 얼마나 부유한지를 상기시켜 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물건에 대한 올바른 태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함께 기도하자. 하늘의 아버지,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위해 찬양합니다. 우리의 그릇은 가득합니다. 주님의 손은 열려 계시고, 거기서 축복과 축복, 선물과 선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우리가 물건에 종속되지 않고, 그 물건을 다스릴 수 있게 하소서. 우리가 "네 것이 내 것이며, 내가 그것을 빼앗을 것이다" 또는 "내 것이 내 것이며, 내가 그것을 자신을 위해 간직할 것이다"라는 태도를 갖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내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나는 그것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 사용할 것이며, 내 것이 네 것이며, 나는 나누는 데 자비롭고자 한다"라는 시각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주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주님의 성령의 역사로, 복음에 의해 동기부여되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이루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죄수의 십자가 행진

설교자는 당시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직접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철저한 죽음의 행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그런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철학적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을 각오한 걸음임을 보여 주고, 성도 역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따르겠다는 태도를 경계하는 메시지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이 말씀을 쉽게 흘려듣지 않도록 당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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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