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10개 · 1 / 1쪽 · 한 쪽 20개
헤롯의 살해 위협과 열두 살 성전 방문
설교자는 예수님이 평생 싸움 가운데 계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유년기의 사건을 듭니다. 아기였을 때 헤롯 왕이 그분을 죽이려 했으며, 설교자는 마귀가 헤롯을 이용하여 그분을 해치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열두 살 때 성전에 계셨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부모는 그분이 뒤에 남아 계신 줄 모르고 이틀 길을 간 뒤에야 그분을 찾았습니다. 부모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분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답하셨는데,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설교자는 주님이 아버지의 일을 아셨으면서도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순종이 구속을 위한 싸움의 일부라고 풀이하며, 그분의 생애 전체를 싸움과 전투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57–58문단 · 예화 6
본문 발췌 보기
그러나 여러분도 기억하듯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여기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그분은 평생에 걸쳐 참으로 순종하셨지 않습니까? 그분은 싸우러 오셨습니다. 아기였을 때에도 헤롯 왕이 그분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귀가 헤롯 왕을 이용하여 그곳에서 그분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분은 싸움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이 전투입니다. 둘째 아담께서 싸움과 전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 아기에게도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마귀가 그분을 시험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에게 순종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열두 살에 성전에 계셨던 일을 기억하십시오. 부모는 그분이 뒤에 남아 계신 줄 몰랐습니다. 이틀 길을 간 뒤에야 그분이 안 계신 것을 알고 돌아갑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분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아버지의 일을 아셨지만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 싸움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설교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맞이하신 무서운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이 일이 무엇을 뜻하게 될지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분이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고 고백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그분의 순종이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과정의 절정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순종이 승리를 향한 길이었음을 청중이 기억하도록 권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60–60문단 · 예화 7
본문 발췌 보기
그분은 순종하셨고, 그 순종은 계속 이어집니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동산에서 그 무서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일이 무엇을 뜻하게 될지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으로 가셨습니까?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이야기
설교자는 여리고에 살던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 준 이유를 본문 16절의 고백으로 설명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요단 저편의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여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녹았고, 라합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정탐꾼들에게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여리고 백성들이 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라합에게만 그것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졌다고 강조합니다. 이어 히브리서 11장 31절을 인용하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여 순종하지 않은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는 본문을 읽습니다. 설교자는 라합의 순종을 정탐꾼을 영접한 행동으로 보며, 요즘으로 치면 다른 나라의 간첩을 숨겨 주는 일과 같다고 빗대어 설명합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이스라엘이 들어오면 여리고가 멸망하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풀어 줍니다. 설교자는 믿음이 들음에서 나며, 말씀이 마음에 받아들여지면 그것이 실제 삶의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적용합니다. 말씀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순서이고 행위는 그 말씀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 이 예화의 메시지입니다.
김재형 · 2026-10-25
설교 내 16–19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히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자마음이 녹고, 너희의 고로 사람이 아닌 신을 잃었노라. 하나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이건 정탐꾼을 만났을 때 라합이 했던 얘기거든요. 그래서 라합이 그 정탐꾼을 숨겨 준 이유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냥 숨겨 준 게 아니죠.
여리고에서 살던 라합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이스라엘이 어떤 이스라엘인가 하면,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건져내시고,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구원해 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광야에서 여러 나라들과 싸웠는데, 하나님께서 그 왕들을 다 물리치고 이겼다는 얘기입니다. 그 이야기들을 여리고에 있으면서 들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우리가 들었다.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다 녹아 버렸고, 너희의 연고로 우리가 정신을 잃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다 정신이 혼미해졌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뭐예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맞다. 그걸 라합이 그 사람들에게 고백한 거죠. 정탐꾼들에게 고백한 겁니다.
여리고 성에 있는 모든 백성들이 그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듣고 그들의 간담도 다 녹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누구에게는 없었지만, 라합에게만 그 이야기를 듣고, "아, 그 하나님, 너희 하나님이 정말이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구나"라는 것을 라합이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 보면, 라합의 믿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에 보면,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라합의 믿음을 한 단어로 표현을 하는데, 순종이라고 이야기해요.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순종치 않았기 때문에 다 멸망당했는데, 랍은 순종했다라고 얘기해요. 그런데 그 순종한 게 뭐냐면, 정탐꾼들을 영접했기 때문에 그걸 순종이다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이 라합의 이야기를 보니까, 라합이 그 정탐꾼들을 받아들인 것은, 누구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세상의 신이시구나. 아, 그분만이 참된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라합이 믿었다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 그 들음이 라합 안에 믿음으로 역사하게 된 거예요. 그걸 정탐꾼들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건, 그 순종이라는 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기에 앞서서, 어떤 일이 먼저 있게 되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는 것. 이게 먼저 있게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믿음이다라고 이야기해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제 실제가 되는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고요. 그니까 우리가 자꾸 순서를 바꿔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말씀은 우리 안에 실제의 삶으로 나타나게 돼요. 그걸 순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부은 하인들
설교자는 가나 혼인 잔치의 장면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설명합니다. 잔치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져 난감해졌을 때 예수님이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포도주가 생겼지만, 연회장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이 바로 물을 부었던 하인들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시며, 그 일에 참여한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그는 청중의 일상도 같은 자리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일을 시작할 때 그 일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고 적용합니다. 반면 '지겹다, 힘들다, 언제까지 해야 되나'라는 마음으로 상황에 들어가면 견딜 수 없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순종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는 길이라고 권면합니다.
서동혁 · 2026-10-21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아멘.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고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일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눈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함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신 말씀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지 않겠니라고 지금 마르다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41절 말씀을 보시면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직접 돌을 옮기실 수 있어요. 예수님도 손가락질이 이렇게 팍 하면 돌이 쫙 옮겨질 거예요. 돌을 폭파시키실 수도 있겠죠. '사라져라. 에이.' 그럼 더 퍼포먼스가 더 강력하잖아요. 근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죠. 사람을 통하여서 일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지고 난감할 때 예수님이 종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 그랬더니 그 연회를 주관하던 연회장도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데 누가 알죠? 물을 부었던 하인들이 압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시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일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 오늘도 지겹다. 오늘도 너무 힘들다. 언제까지 해야 되나?' 이 마음으로 그 상황 가운데 들어가면 견딜 수가 없어요. 저는 이제 새 자녀가 있습니다. 막내가 두 돌이 돼요. 내일이 되면 너무 버겁습니다. 너무 버겁습니다. 에너지가 너무 넘치고 때로 한 번씩 너무 잠을 자지 않으면 '빨리 자라. 빨리 자라. 아빠도 삶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계속해 그 마음이 흘러가요. 그러면 정작 괴로운 사람은 제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 '아, 너도 더 놀고 싶구나. 나처럼 야 뭐 하고 놀래' 하고 함께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더라고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또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더욱더 일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자리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마음에 붙잡힐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돌이 있습니까? 그 안에 든 것이 너무 오래되어 냄새가 납니까? 아니면 그 돌이 너무 거대하고 무겁습니까? 여러분 믿음의 눈을 들어서 순종으로 돌을 옮길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실 줄 믿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
설교자는 원하는 것을 구하되 그것을 하나님 뒤에 두는 기도의 모범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듭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기도가 간절히 구하면서도 기도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린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라는 기도의 모습을 함께 제시합니다. 눈물로 구해도 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두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듣는 성도들이 자기 기도의 중심을 점검하기를 권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방에서 10살에 사역 부르심을 고백한 일
설교자는 10살 무렵 주님을 믿게 되었고, 그때 이미 사역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방을 찾아가 망설이며 자신이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의 말이 아버지가 목사이기 때문이라고 들릴 수 있다는 걱정도 함께 전했다. 아버지는 그의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주님께서 나중에 모든 것을 분명히 해 주실 것이라고 답하셨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10살 때 부르셨다면 10살 때 그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설교자는 이 말을 평생의 원칙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하는 습관을 들이세요'라는 조언이 10살에게도, 66살의 자신에게도 여전히 좋은 조언이라고 말했다. 또한 주님은 말씀, 열망, 은사, 다른 사람들의 증거, 기회를 통해 부르심을 분명히 하신다고 나누었다. 여기에 더해 삶을 통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기도한다면, 그 삶이 어떻게 쓰임 받을지 주님이 분명히 해 주실 것이라고 권면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4–6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어떻게 보면, 저는 10살 때 주님을 믿게 되었고, 7살 때 주님께서 제 마음에 역사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진심 어린 의심을 한 적이 없습니다. 10살 때 저는 사역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서, 아버지는 목사셨습니다. 저는 망설이며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이 어떤 소리인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 아버지가 제 아버지이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10살짜리가 설교를 부르심받았다고 느낀다는 것이 어리석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께서 제가 설교를 하라고 부르셨다고 느낍니다. 저는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하실지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허셸, "주님께서 나중에 모든 것을 분명히 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10살 때 당신을 부르셨다면, 10살 때 그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음.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이 말은 10살짜리에게는 훌륭한 조언이었고, 66살짜리에게도 훌륭한 조언입니다.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저는 주님께서 분명히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열망을 통해, 은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증거를 통해, 그리고 기회를 통해 분명히 하십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기도할 때, 삶을 통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 삶이 어떻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 분명히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키스 제라트의 고장난 피아노 콘서트
설교자는 1975년 독일 콜론에서 열일곱 살의 베라 브랜디스가 콘서트 프로모터가 되려는 꿈으로 기획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녀는 오페라 하우스를 빌려 오페라가 끝난 뒤 밤 11시 30분에 공연을 열기로 하고, 미국의 젊은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제라트를 초청했습니다. 제라트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보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콘서트 당일 그는 약 8시간을 차로 이동해 도착했지만,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했고 등이 아파 여러 번 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태프가 잘못된 피아노를 가져왔는데,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서 올라온 오래된 연습용 피아노였습니다. 설교자는 이 피아노가 보젠도르퍼이긴 했으나 건반이 고정되고 고음이 약하며 페달마저 고정되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제라트는 이 피아노로는 연주할 수 없다며 홀을 나가 버렸고, 브랜디스는 자신의 미래가 위태로워짐을 느끼고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델리카트슨에서 식사를 하며 그녀는 청중이 기다리고 티켓도 샀으니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제라트는 이 일을 그녀를 위해 한 것임을 기억하라고 말하며 밤 11시 30분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는 고장난 건반을 고려해 즉석에서 연주 스타일을 바꾸었고, 중음역에 집중해 반복적인 음형과 강한 리듬을 왼손으로 연주했으며, 때로는 의자에서 일어나 피아노를 강하게 쳤습니다. 그 콘서트는 녹음되어 ECM 레코즈가 66분 분량의 음반으로 받아들였고, 이 앨범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피아노 앨범이 되었다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가 훌륭한 악기여서가 아니라, 그분이 창조자로서 우리를 무릅쓰고,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적용을 전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3
본문 발췌 보기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지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만족감은 목자로 사역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제공되며, 그것은 월급만큼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그보다 더 부패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부끄러움 속에서도 이익을 얻기 위해 사역하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적극적으로 사역합니다. 이 단어는 영의 적극성과 우리의 육체적 약함 사이의 뿌리를 공유합니다. 마가복음 26장 41절에서 베드로는 여기서 영적 갈망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성격 유형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이 점에서 쉽게 혼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님들을 자주 듣습니다. 특히 설교 수업에서 제가 '당신은 몇 가지를 바꾸어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그게 그냥 저의 성격이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제 말을 듣게 됩니다. 이제 제 말을 들어보세요. 성격은 어떤 문제에도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성격은 문제입니다. 성화는 성령이 당신의 성격을 이기고 극복하는 과정입니다. 저는 말입니다, 성격은 당신의 직장에서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월급을 시간에 맞춰 지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미안합니다. 저는 그냥 늦게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 그렇군요. 그게 당신이니까요.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아내에게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항상 바닥에 속옷을 떨어뜨리는데, 그게 그냥 저의 성격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아, 저는 그게 귀여워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목양은 하나님의 영이 당신을 변화시키고 내면에서 당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형성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숨겨진 마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이 사역하는 방식, 방법, 동기—이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양떼는 당신에게 의미, 차이, 그리고 청중을 조용히 제공합니다. 이는 당신이 그들에게서 얻는 것이 당신의 동기라는 것을 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행동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당신을 통해, 그리고 당신과 상관없이 일하시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우리의 능력이나 성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문제입니다. 1975년 독일 콜롱에서 17세 소녀 베라 브랜디스는 콘서트 프로모터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가 끝난 후 밤 늦게까지 시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녀는 오페라가 끝난 후 11시 30분에 콘서트를 열기로 하고, 미국의 유명 젊은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제라트를 예약했습니다. 제라트는 이 특이한 밤 늦은 콘서트에 동의했지만, 계약서와 함께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가 반드시 보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몇 가지 조건도 모두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콘서트 당일, 제라트와 그의 매니저는 약 8시간의 차량 이동을 했습니다. 그는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했고, 등이 아파서 차에서 여러 번 내려 쉬어야 했습니다. 그는 그 밤 콘서트를 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도착했을 때, 오페라가 끝난 후 피아노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은 스태프가 잘못된 피아노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서 올라온 오래된 연습용 피아노를 가져와 놓았습니다. 콘서트 시간이 되었고, 그는 준비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 보았지만, 피아노 상태가 엄청나게 나빴습니다. 피아노는 보젠도르퍼이긴 했지만, 건반은 고정되어 있었고, 고음은 약했으며, 페달도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 피아노에서는 연주할 수 없다'고 말하며 홀에서 나가 버렸습니다. 베라 브랜디스는 자신의 미래가 위태로운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겨우 17세였고, 그녀는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델리카트슨에서 식사를 하며 그녀는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와주셨는데, 청중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티켓도 샀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알겠습니다. 제가 이 일을 당신을 위해 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라고 말하며 밤 11시 30분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는 고장난 건반을 고려하면서 즉석에서 연주 스타일을 바꾸었습니다. 중음역에 집중하며 반복적인, 홀리스토릭한 반복 음형과 강한 리듬을 왼손으로 연주했습니다. 때로는 의자에서 일어나 피아노를 강하게 치며 소리를 냈습니다. 그날 밤 콘서트는 녹음되었고, ECM 레코즈는 66분 분량의 음반을 받아들여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피아노 앨범이 되었습니다. 이 음반을 들어보면, 키스 제라트가 고장난 건반과 고정된 페달을 무시하고 66분 동안 쉬지 않고 즉흥 연주를 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예술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악기인지 때문이 아닙니다.
엘리사와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설교
설교자는 스무 살 무렵 켄터키 주 렉싱턴의 애슐랜드 애비뉴 감리교회에서 음악과 청소년 사역을 맡게 된 경험을 들려줍니다. 미시간 주립대학 2학년을 마친 뒤 아버지와 대화했을 때 아버지는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격려하셨고, 설교자는 스무 살이 그런 일을 맡을 리 없다고 여겼습니다. 아버지의 권면대로 그는 목사에게 연락해 지원을 허락받았고, 목사는 이력서를 보내는 데는 해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결국 그 일을 얻었으며, 스무 살에게 맡기는 것은 괴이한 일이었지만 그 일로 자신의 삶 전체가 시작되었다고 회고합니다. 그 교회에서 첫날 그는 아내 타냐를 만났고, 13일 뒤에 반지를 샀으며, 이후 45년의 결혼 생활로 이어졌다고 말합니다. 당시 로스 레인지 목사 아래에서 일하며 설교자는 로이 풀럼이라는 시골 설교자가 엘리사가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었던 이야기를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엘리사가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결국 엘리야의 영광의 두 배를 받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설교를 믿고 목사님을 섬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목사님을 7년간 도왔습니다. 이후 신학교에 다녀온 뒤 목사님이 은퇴하며 교회가 설교자를 다시 청빙했고, 그는 그 교회를 목양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제자였던 젊은 남자를 직원으로 뽑아 같은 권면을 전했는데, 그는 지금 설교자의 목사가 되어 여행과 일정을 돕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교회가 그의 리더십 아래 더 성장했다고 기뻐하며, 겸손한 섬김이 하나님의 은혜와 지도력으로 이어진다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18–19문단 · 예화 7
본문 발췌 보기
이제 이 모든 것—그 무리가 누구 것인지,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게 하며, 무엇을 추구하는지—이것은 당신의 의지력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무리를 누가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는지를 기억함으로써만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을 해야 할까요?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인도하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버리기를 원하셨고,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데 열심이 되셨으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의 예가 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플랫폼과 팔로워를 거래하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사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페레가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성경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단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르히포이멘’ 즉 ‘대목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위엄이 기존의 목자에 대한 표현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새로운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에제키엘 34장에 언급된 약속된 목자, 요한복음 10장에 등장한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좋은 목자,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라고 다시 임명하신 예수님. 페레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하고 "그분이 바로 대목자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분의 무리를 목양할 때, 이러한 방식으로 행할 때, 당신의 보상은 쇠퇴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이는 이 생애에서 얻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는 페레가 이 면류관을 의도적으로 폴의 시대에 올림픽 경기를 이긴 사람에게 주어졌던 라우렐 왕관과 대조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라우렐 왕관은 마르고 부서지며 바람에 날려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쇠퇴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면류관은 머리에 씌는 순간 이미 쇠퇴하기 시작하지만, 이 면류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로 낮아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복종의 상징으로, 단단히 묶인 종의 앞치마를 묘사합니다. 아마도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묶으신 수건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낮은 자세는 감정이 아닌 의식적인 선택입니다. 그것은 순간이 아닌 의식적으로 입히고 단단히 묶어진 옷차림이며, 압박 속에서도 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도서 3장 34절을 인용합니다.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반대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시험—무리가 누구 것인지, 당신의 동기, 당신의 욕망, 사용하는 방법—이는 사실 하나의 시험이 네 가지 다른 모습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일을 교만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겸손으로 할 것인가? 모든 권위를 가진 목자는 면류관 대신 수건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잡고 계신 면류관을 원하는 모든 부목자도 먼저 수건을 택해야 합니다. 저는 20대 초반, 20살 때 켄터키 주 렉싱턴에 있는 애슐랜드 애비뉴 감리교회에서 음악과 청소년 사역을 맡는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는 미시간 주립대학 2학년을 마치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20살짜리가 그런 일을 맡을 리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할 수 있다"고 하셨고, 저를 그 교회 목사에게 전화해서 지원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목사는 "그렇지, 당신이 이력서를 보내는 데는 해가 없겠지"라고 말했습니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저는 그 일을 얻었습니다. 20살짜리에게 그 일을 맡기는 것은 괴이한 일이었지만, 저는 얻었습니다. 그리고 제 삶의 모든 것이 그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그 대화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에, 제 삶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애슐랜드 애비뉴에서 첫날, 저는 타냐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데이트를 했고, 13일 뒤에 반지를 샀습니다. 그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45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누군지 모릅니다. 20살의 젊은이로서 애슐랜드 애비뉴에서 로스 레인지 목사님의 직원이 되었을 때, 로이 풀럼이라는 시골 설교자가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는 이야기를 설교했습니다. 당신은 엘리야가 하늘로 끌려 올라가고, 엘리사가 그 뒤를 따라온 후, 선지자들의 아들들이 "엘리사가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그 사람이 왔네"라고 말하는 구절을 읽었을 것입니다. 로이 풀럼은 엘리사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종이었지만 엘리야의 영광의 두 배를 받았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라. 겸손으로 주님을 신뢰하라. 주님을 섬기면 때가 되면 주님께서 당신을 돌보시고, 당신에게 지도력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0대 초반의 저는 그 설교를 믿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을 섬기고 그분에게 은혜를 드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이미 60대였고, 저는 그분이 사역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그분과 함께 일곱 년을 주셨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가기 위해 그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세 년의 신학교 생활 후, 로스 레인지 목사님은 은퇴하셨습니다. 교회에 사임장을 제출하면서, 그분은 교회에 제가 목사로 부르심을 받기를 권고하셨고, 교회는 저를 다시 불러 주셨습니다. 저는 애슐랜드 애비뉴 감리교회를 목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곱 년을 사역한 후, 저는 남부 신학교로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겸손하게 섬기는 일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지켜 주셨습니다. 2015년에 저는 뱃런 교회에서 젊은 남자를 직원으로 뽑았습니다. 그는 남부 신학교에서 제 학생이었고, 저는 제가 가는 일정을 도와줄 보조 인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여행 일정을 처리하거나, 차량 정비 같은 일들을 제가 직접 하기에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그런 일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젊은 남자를 뽑았고,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20살 때, 한 늙은 시골 목사가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는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듣고 실제로 그렇게 했고, 주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세요. 그런 삶을 살라고 말입니다. 믿으세요, 주님께서 당신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는 지금은 제 목사님이 되었고, 이 컨퍼런스에도 함께 있습니다. 몇 주 전에 그가 저에게 문자를 보내더군요. "저는 기본적인 일들을 처리하러 갑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가 당신의 보디가드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번 주에는 제 목사님이지만, 어제 저녁에 그가 문자를 보내더군요. "저는 가게에 갈게요. 필요하신 게 있나요?" 저는 "네, 펩시 제로 좀 가져와."라고 했고, 그는 아침에 펩시 제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목사직에서 물러난 이후로 교회가 그의 리더십 아래 성장했습니다. 제가 목사였을 때보다 교회가 더 커졌습니다. 저는 그 사실에 매우 기쁩니다. 그는 제 목자입니다. 저는 그의 아래에서 목자되심을 받았던 자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말합니다. 겸손을 입으세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저항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당신의 사역 중에서 당신보다 낮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런 일을 하세요. 그런 일을 하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의 영광을 떠나 고난을 받으신 구주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광은 드러날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시고 모든 이름보다 높은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범입니다. 여러분도 이 모범을 따르세요. 아버지, 우리가 드리는 간단한 기도가 주님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영의 능력으로 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멘. 이 설교는 트루스 포 라이프(Truth for Life)에서 제공되었습니다. 트루스 포 라이프는 삶을 위한 학습을 제공합니다. 알리스터 베그 목사와 함께하는 트루스 포 라이프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웹사이트 truthforlife.org를 방문해 주세요.
선교지로 떠난 의사 선생님을 향한 주변의 반대
설교자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선교사님 한 분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10년 전 한 의사 선생님이 모처 선교지로 떠나려 하자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하필 당신이 가야 하느냐", "의사로서 돈 많이 벌어 교회 장로로 섬기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하며 그를 핍박했습니다. 또 "편하고 쉬운 길도 얼마 있지 않느냐", "좀 폼나게 믿으면 안 좋겠느냐"라는 말도 들었다고 설교자는 전했습니다. 설교자는 이런 만류가 특히 부모에게서 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자식이 고생하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없기에 못 가게 막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설교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이 십자가를 피할 방법은 없습니까?"라고 기도하신 모습과 연결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쉽고 편하지 않으며, 욕을 먹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우리도 십자가를 내려놓고 피해 가려는 유혹을 받는다고 적용했습니다.
하용조 · 2026-10-19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예수님께서 중보 기도를 하셨는데, 제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중보 기도의 하나의 특징입니다. 사실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병든 사람을 도울 수 없고, 내가 은혜를 받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어떻게 끼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먼저 여러분들이 은혜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차고 넘쳐야 남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다른 사람한테 신세지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십자가가 내 앞에 있는데,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이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영화롭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중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1절과 5절에 두 번 나타나는데, "하나님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주시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5절에서 좀 더 발전된 기도를 하십니다.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누렸던 그 영화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 하늘의 권세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셨는데, 그 권세로 자기 이익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데 사용하게 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믿음이 생겨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고 편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좁은 길입니다. 욕 먹는 길이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길입니다. 선교사로 사람들이 떠날 때, "왜 그 좋은 직장을 놔두고, 왜 그 편한 생활을 놔두고 그렇게 고생스러운 길을 스스로 가느냐?"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부모님들은 그렇습니다. 자기 자식이 고생하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못 가게 합니다. 저희 교회 선교사님 한 분이 10년 전에 의사 선생님이 모처 선교지로 갔을 때, 주변에서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왜 하필 당신이 가야 되냐? 당신이 의사로서 돈 많이 벌어서 교회 장로로 섬기면 됐지, 왜 당신이 거길 가야 하느냐?"라고 말하며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꼭 이렇게 예수를 믿어야 되느냐?" "편하고 쉬운 길도 얼마 있지 않느냐?" "예수 믿지 말자는 게 아니다. 좀 폼나게 믿으면 안 좋겠는가?" "명생을 내고 믿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이런 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에서 보면 알 거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꾸 십자가를 피해 가려고 합니다. 십자가를 내려놓고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이런 마음이 있으셨어요. "이 십자가를 내가 꼭 져야 합니까?" 다 지기로 해 놓고 기도까지 다 끝나놓고도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피할 방법은 없습니까?" 얼마나 그 기도가 힘이 들었든지, 땀이 피가 될 정도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해 주십시오." "이 길을 계속 가게 해 주십시오." 고통스러운 길, 어려운 길, 힘든 길이지만, 이 길을 계속 가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는 것은, 유혹과 시험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을 피하지 않고 계속 이 길을 가도록 요청하는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이런 시험이 있는 걸 압니다. 이런 유혹이 있어요. 좀 쉬운 길을 가고, 편한 길을 가고, 어 좀 예수를 믿어도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꼭 찬물 산물에 내 손을 담궈야 되느냐, 시공창에 내 발을 넣어야 되느냐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셨어요. 그리고 그 기도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두 번째,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또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아주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준을 따라오지를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깨달음이 없는 미숙한 사람들이었고, 실수 투성이었고, 허점 투성이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할 때까지도 철이 안 났습니다. 참 어려운 건, 철 안난 사람하고 사는 게 참 어렵습니다. 부부도요. 철 안난 남편, 또 철 안난 아내하고 사는 게 참 어렵고요. 철 안난 자녀들하고 사는 거 참 쉽지 않습니다. 버릴 수도 없고, 그만둘 수도 없고,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열심히 따라다니고, 죽기까지 하겠다고 하지만은, 보면 아직도 미숙하고, 뭘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제자들을 끼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철 안난 사람하고 끼고 사는 사람은 용기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들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그들이 변하고 새로워지고 알아듣기를 원했습니다. 설명을 또 하고 설명을 또 하고,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또 하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6절에 보면, 신통치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대체 어떤 존재냐,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 먼저 예수님이 이 내용을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6절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내가 아버지와 아들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소위 말하면 철라지 않은, 신통치 않은, 항상 이상한 짓들만 하는 그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6절에 보면, 첫째, 제자란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제자들이에요. 여기 보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안 들지만, 이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내 사람이다. 이 자식이 마음에 안 들지만, 내 자식이라는 걸 알 때, 우리는 자식을 위해서 눈물도 흘리고 고통을 겪지만, 이 자식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의 첫 번째 생각은,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라고 했던 것이죠. 두 번째,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람이지만, 내게 속하기 전에 하나님이 택해서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었다라고 예수님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 온데 내게 주셨으며" 이렇게 됐습니다. 이 내게 주셨는데, 나하고 같이 사는데, 근데 사실은 이 사람이 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사람을 선택해서 나한테 보내 준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이게 결혼입니다, 여러분. 남편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에요. 현재는 나하고 같이 사는데, 사실은 이 사람이 하나님이 택해서 나한테 보내 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게 결혼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에 속해 있지만, 이 자녀는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불러서 나한테 맡겨 주셨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게 예수님의 사고 방식이에요. 이 제자들은 내 것인데, 나한테 보내 주었는데,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고,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었는데, 나한테 이 사람을 맡겨 주신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정체성이 정의를 먼저 확실하게 하면, 시험 안 받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 제자들이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 주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깨우쳤다는 것입니다. 여기 제자 훈련의 요체입니다. 제자 훈련이란 뭐냐면,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사람을 양육시키는 것을 제자 훈련이라고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7절 시작.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신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사복음서를 다 보시고, 신약을 다 보시고,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분이 연구를 다 해 보세요. 자기를 위해서 말하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능력은 전부 하나님에게로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뭐냐면, 예수 믿으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하느냐? 우리들의 문제는 모든 초점이 나에게로 집중돼 있어요. 내 생각, 내 주장, 내 의견, 내 비전, 내 문제예요. 이게 내니까 갈등이 많은 겁니다. 예수 믿고 거듭났다고 하는 뜻은 뭐냐? 옛사람인 나는 죽고, 새 사람인 내가 다시 태어난 것을 거듭났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게 어떤 사람이 죽긴 죽었는데, 아직 덜 죽었으면 문제예요. 예. 죽지 않고 기절했어요. 애들. 그래서 깨어나면 또 내가 있는 거예요. 또 내가 옛 사람이 또 있는 거예요. 이게 죽으면 간단한 문제를, 이게 살아 있어서 내가 자꾸 살아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가 느낀 건 뭐냐면, 내 안에 있는 옛사람 내가 빠졌다는 거예요. 죽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하는 거예요.
계산을 넘어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완성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이는 그의 믿음이 연약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 23절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믿음이 창세기 22장에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함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합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백 세가 넘어 얻은 외아들을 드릴 수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그 답으로 히브리서 11장 19절을 함께 읽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잃는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자신의 계산을 넘어 역사하실 하나님을 신뢰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예를 통해 우리도 계산을 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구하라고 권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3
본문 발췌 보기
또한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을 끌어앉는 그런 행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서 세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하나님이 살리시는 믿음입니다. 오늘 21절부터의 말씀을 쭉 보면요. 야고보서는 두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요.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고요. 두 번째는 라합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너무나 유명한 두 인물이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었고, 언약의 약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반면에 라합은 여리코 성에 살던 이방 여인이었고, 기생이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아가던 두 인물을 야고보서는 같은 원리 아래 뒀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살펴볼까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완성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죠. 일례로,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였던 사라를 어떻게 합니까?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 23절을 한번 볼까요?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드러내십니까? 창세기 22장의 말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이었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장면을 통하여서 그 행함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의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어서 신이 얻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9절의 말씀인데요. 이 말씀 우리 한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웃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아브라함은 계산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으면 얼마나 슬플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지 않습니다. 숨겨주지 않습니까? 그 숨겨준 사실을 걸리면 죽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이유에 대해서 라합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요. 여호수아 2장 10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것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온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아멘. 라합이 고백합니다. 모든 일들을 다 본 겁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정탐꾼들에게 합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의 행함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게 되죠.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자신의 누를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족보, 그리스도의 족보에 하나님께서 올려두게 됩니다. 이 모든 스토리에 대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 뒤에 우리가 이 믿음이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먼저 행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우리 함께 다 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행함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향한 큰 행함과 순종을 행할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나의 믿음이 살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믿음이 죽어 있는 것 같다'라는 주저함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 오늘도 무릎 꿇고 나아가며 기도하는 그 복된 걸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기꺼이 순종할 때에 그 순종하는 삶 위에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2장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요. 그러나 그 공기와 산소 역시도 외부로부터 들어올 때에 숨을 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에,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던 것처럼,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에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시간, 그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모든 이의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어제 또 많은 순간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시면서, 전심으로 한 명, 한 명, 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이미 나에게 주신 그 부요함을 베풀어내는 은혜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같이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 믿음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 제목 가지고, 또 우리가 가지고 온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다가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복된 예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