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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7개 · 1 / 1쪽 · 한 쪽 20개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고 나아간 믿음

설교자는 본문에 등장하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1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모습을 가져옵니다. 이들은 시간과 장소, 기간, 결과까지 자신이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사람들에게 내일을 알지 못하며 생명은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대목에서 히브리서 11장의 아브라함을 떠올립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나아갔는데, 그 '알지 못했다'는 동사가 본문의 '알지 못할 것이다'와 같은 단어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모르고 나아가고 장사하는 사람은 다 안다고 여기며 나간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습니다. 설교자는 그래서 우리가 내일 일을 아는 것처럼 반드시 이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계획과 준비는 해야 하지만 그 앞에 '주의 뜻이면'이라는 고백이 붙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적용입니다.

양석효 · 2026-10-22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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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런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일을 너희가 알지 못할 것이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알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알지 못한다. 내일을 당장 알지 못한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알지 못했다’는 것이 똑같은 동사입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사람은 알지 못하고 나갑니다. 근데 장사를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나갑니다. 이 아이러니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일의 생명은 너희가 알지 못할 것이다." 내일의 생명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너희 인생은 마치 안개와도 같다. 내일 일을 아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됩니다. 마치 내일 일일 아는 것처럼 이거 안 되면 안 되고, 저거 아니면 큰일 나고, 반드시 저거는 돼야 되고, 저건 반드시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돼야지 우리가 성공할 거야. 그게 돼야지 내 인생이 잘 풀릴 거야.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안개와 같아서 모든 일을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하지만, 우리는 한도 모릅니다. 당장 한 시간 뒤에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한 믿음의 구원 방식

설교자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구약부터 항상 믿음이었다는 점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로 설명합니다. 사도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아브라함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주께서 죄를 돌이키지 않으시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며 같은 원리를 강조했다고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모든 기독교인의 믿음의 아버지라는 바울의 말도 함께 언급합니다. 그래서 구약에 하나의 구원 방식이 있었고 지금은 다른 방식이 생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언제나 믿음이었고, 이 믿음은 하나이며 유일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2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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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적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회개했는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가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았든 간에,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법칙, 믿음의 법칙에 달려 있습니다. 이 믿음은 사도가 이미 우리에게 말해 준 대로 우리 자신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이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이 시점에서 이를 언급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일성이라는 본질적인 원칙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고, 바로 여기서 그 단일성이 드러납니다. 보세요, 이 믿음이 바로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는 이 믿음이 항상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4장을 익숙히 아시는 분들은 사도가 '이것이 새롭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새롭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항상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는 항상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도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되돌아보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죄를 돌이키지 않으시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구약시대에도 적용된 방식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읽어보면 사도가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말하며, 믿음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기독교인의 아버지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이며, 믿음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첫 번째 사례로 설명됩니다. 이는 항상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의 구원 방식이 있었고, 지금은 다른 방식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항상 믿음이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처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게 선언받았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뿐이며, 항상 유일한 믿음이었습니다. 사도는 이 믿음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설명합니다.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바리아인이나 시키아인인지, 노예인지 자유인인지에 상관없이,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바로 믿음이라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닙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죄인입니다. 모두 같은 빈곤한 존재이며, 모두 하나님의 강력한 율법 아래 죄책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다른 모든 구분은 잊어버리십시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로 믿음이라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귀속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귀속되는 방식입니다. 오늘 아침 이 설교를 듣기 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려면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종교적인 집안에서 자랐고 교회에 항상 다녔는지, 아니면 이 삶 동안 처음으로 하나님 집에 들어온 사람인지에 상관없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이며,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처음으로 이곳에 온 사람과 항상 이곳에 온 사람 사이에는 구원의 기회에 차이가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분의 완전한 의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믿음입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 믿음은 유일한 믿음이며, 저는 이에 대해 전혀 이견이 있을 여지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믿음을 깨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 믿음을 보존하라. 평화의 유대 안에서 영의 단일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라.'

벤 윌슨이 말한 우르크와 우루의 도시

설교자는 영국 캠브리지 출신 역사학자 벤 윌슨을 소개합니다. 벤 윌슨은 2020년에 인류 도시의 역사를 다룬 두꺼운 책 『메트로폴리스』를 출판했고,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이 책은 기원전 4천년경 인류 역사의 최초의 도시가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그 도시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크라고 전합니다. 벤 윌슨은 우르크가 기원전 4천년경에 생겨나 4천 년을 견뎌내고 기독교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고 소개됩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버틴 도시는 우르크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설교자는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로마도 수백 년밖에 버티지 못했다는 점을 함께 언급하며 우르크의 오랜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이후 우르크를 모방하고 그보다 뛰어난 도시들이 나타났는데, 벤 윌슨이 그중 가장 먼저 언급한 도시가 우루였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창세기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루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간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루는 우르크처럼 유브라테스 강을 끼고 있었고 우르크보다 남부 해안 쪽에 가까워 더 풍요로웠다고 설명됩니다. 설교자는 우루가 견고하고 세련되며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로서 수천 년을 지속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출발한 곳이 당시 가장 발전되고 견고한 도시였음을 보여주어, 그 출발의 무게를 이해하는 배경으로 삼습니다.

남득현 · 2026-10-21

설교 내 6–6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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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 영국에 캠브릿지 출신의 벤 윌슨이라는 역사학자가 있거든요. 그 벤 윌슨이라는 역사학자가 2020년에 인류 도시의 역사를 쓴 『메트로폴리스』라는 아주 두꺼운 책을 출판해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는데, 『메트로폴리스』라는 책을 출판해요. 이 벤 윌슨이 그 책의 내용에 보면, 기원전 4천년경에 인류 역사의 최초의 도시가 나타납니다. 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인류 최초의 도시의 이름이 뭐냐면, 우르크입니다. 우르크. 우르크란 도시예요. 이 우르크란 도시가 얼마나 경고하고 발전된 도시냐면, 그 벤 윌슨이 말하길, 기원전 4천년경에 이 도시가 생겨나고 무려 4천년을 이 도시가 견뎌냅니다. 기독교 시대까지. 벤 윌슨이 인류 역사 안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견뎌낸 도시는 우르크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그니까 로마도 수백 년밖에 못 갔어요. 이 우르크라는 도시가 발생하고, 그 우르크를 모방하고, 우르크보다 더 뛰어난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많은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이 벤 윌슨이 그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도시가 우루입니다. 우루. 여러분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창세기 11장 마지막 부분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루에서 나와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죠. 여러분, 우루란 도시가 어떤 도시냐면, 우르크와 동일하게 유브라테스 강을 끼고 있고, 우르크보다 더 남부 해안 쪽에 인접하고 있어서 훨씬 더 풍요롭고 견고하고 세련되고 견고한 우루란 도시도 수천 년을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루가 발전되고 견고하고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였어요. 우르크보다 더.

갈대아 우루를 떠난 아브라함

설교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되고 견고하며 세련된 도시 우루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당시 우루가 모두가 선망하는 도시였고, 그곳에 머물면 삶이 안전하고 편안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도시를 떠나는 일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도시를 나온 이유는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겠다. 너를 들어서 열방에 복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이 약속 하나를 붙들고, 그 말씀 하나를 믿고 우루에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만들어낸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머리로 믿는 것은 입으로 나오고, 마음으로 믿는 것은 행동으로 나온다는 말을 함께 전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점검하기 위한 말이라고 설교자는 분명히 합니다. 설교자는 내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지식에 머무는지, 살아 있는 믿음인지 점검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오늘 말씀이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겠느냐고 경고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적용합니다.

남득현 · 2026-10-21

설교 내 7–7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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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조상의 스토리가 어떻게 시작하냐면, 이 가장 세계에서 발전되고 견고하고 세련된 도시에서 나오는 것부터, 이 모든 믿음의 조상의 이야기가 시작하죠. 여러분,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그 당시에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이잖아요. 우루는 모두가 선망하는 도시에 거기 있으면 모든 것이 안전되고, 자신의 자녀는 물론, 자녀가 없지만, 자신의 모든 삶이 거기서 모든 것이 편안하고,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도시를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겠다. 너를 들어서 열방에 복이 되게 하겠다'는 그 약속 하나 붙들고, 그 말씀 하나 믿고 나와요. 그 도시에서. 여러분,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제가 몇 번 저희 교구에서도 말씀드리고 말씀드렸잖아요. 여러분, 머리로 믿는 건 입으로 나오고, 마음으로 믿는 건 행동으로 나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게 다른 어떤 사람들을 평가하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점검할 때 꼭 이 말을 쓰셔야 돼요. 여러분, 머리로 믿는 건 입으로 나오고, 마음으로 믿는 건 행동으로 나옵니다. 내 믿음이 내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정말로 살아 있는 믿음인지를 점검하셔야 돼요. 오늘 말씀에 분명하게 경고하잖아요.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겠느냐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제단

설교자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믿음을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흘러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태가 죽은 자신의 몸과 사라의 몸에서 기적처럼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믿음이 계속 일하여 나중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을 때에도 순종하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즉 '아들을 바쳐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믿음에 이르렀고, 그 믿음이 결국 아들을 바치는 행위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믿음이 온전해진 모습으로 보며,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순종이 가능해진다고 적용합니다. 결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자라갈 때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임만세 · 2026-10-21

설교 내 2–2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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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일을 하지 않으니까 헛되고 무익하고 소용 없는 이런 뜻을 갖게 됩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 헛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가 믿음을 받아서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해야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는데, 우리 안에 받은 그 믿음이 일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 게으른 믿음을 가지고 진정성 없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일하기 싫어하는 이 믿음, 게으른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그리고 저의 믿음이 행위로 온전하게 자라가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고 정말 결심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주께서 주신 그 믿음이라는 선물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그 믿음이 점점 더 잘 작동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예요. 그래서 두 가지 예를 보여 주는데 하나의 예가 아브라함이고 또 다른 예가 라합입니다. 아브라함을 먼저 보실까요?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원인을 뭐라고 얘기하는지 한번 보시죠. 22절입니다. 우리 22절 한번 읽어 볼까요?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됐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어요. 그리고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태가 다 죽은 자신의 몸 그리고 사라의 몸에서 기적처럼 성령으로 이삭 아들을 주셨죠. 그 믿음이 계속해서 이랬더니 나중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요구, 너의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 일하던 믿음이 "아들 바쳐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믿음으로 이르게 했고, 그 믿음이 결국은 아들을 바치게 했던 거죠. 어, 믿음이 온전해진 겁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순종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갖게 되는 거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결심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어떤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자라갈 때 그 일이 일어납니다. 라합도 마찬가지예요. 라합은 들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애굽 군대를 물리치신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시고 홍해를 가르신 여호와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이스라엘 군대가 왔을 때 그 정탐꾼이 왔을 때 그 믿음이 계속 일하니,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그런 아주 위험천만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정탐꾼들을 숨기고 자신의 그 고백이 행위로 온전하게 되는 일을 보여 주었죠. 그리고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로 그렇게 들어가게 된 영광을 누리게 되었죠. 저와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우리가 강하게 하고자 이런저런 일을 하고 어떤 노력과 애를 쓴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일하기 시작할 때 그 믿음이 게으르지 않고 꾸준히 꾸준히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순종하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저와 여러분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오늘이 밤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삶에서 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 신기하게요. 말씀을 들을 때는 알 것 같은데 일상을 살다 보면 그 믿음이 다 어디로 갔는지, 세상의 논리로, 우리의 경험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살아가죠. 저도 똑같습니다. 너무너무 똑같습니다. 저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참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진실함이 회복되는 것이죠. 진실함이. 오전에 우리 남득현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하셨더라고요. 머리로 하는 믿음은 입술로 나오지만, 마음으로 하는 신앙은 삶의 행동으로 나온다.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웃음] 여러분,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이 진실함을 회복하게 해 달라는 그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그 믿음이 진실해지도록 정말 믿도록, 정말 믿도록,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결코 잃는 것이 아니라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때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남들도 살리고 나도 살고, 부요한 그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정말 믿어야 하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믿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서, 정말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부활의 소망이 우리 눈에 보일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되는 거 아닙니까? 정말 중요한 건 우리의 믿음이 진짜여야 하는 거예요. 정말 우리 마음에 진실함이 묻어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드리는 기도와 예배가 우리의 말이 행동이 누군가를 상처,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도구로 믿음이 있노라. 우리는 정말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정말 확인하게 될 거예요. 그 믿음이 우리를 온전케 하고, 우리를 정말 의롭다하게 하는 그런 복됨을 우린 누리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남서울교회 성도 여러분, 이 우리 주님 앞에 머리 숙이고 기도합시다. 번지르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 진짜 믿음을 좀 주십시오. 정말 우리 자녀를 기를 때, 믿음으로 기르는 믿음으로 기른다고 하고서 똑같이 하는 거 말고, 정말 믿음으로 길러내는 교회를 섬길 때, 정말 믿음으로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믿음으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진실한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는 귀한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라서의 아브라함 찬양

설교자는 약 200년 전에 쓰인 지혜서 시라서 44장을 인용합니다. 이 본문은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위대한 아버지로 찬양하며, 그가 가장 높으신 분의 율법을 지키고 언약을 맺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시험을 받았을 때 충성스러운 자로 입증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설교자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기인 간성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위대한 본보기로 여겼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율법을 지킨 선구자이자 충성의 모범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행위와 충성을 강조하는 방향이었다고 설교자는 짚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을 율법을 지키고 충성으로 축복받은 좋은 유대인의 본보기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대신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불신앙스러운 죄인과 연관지었다고 적용합니다.

케빈 드영 · 2026-10-19

설교 내 9–9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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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주며,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잔치를 나타냅니다. 작은 요리법을 기억해 보세요. 의롭다 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며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바라보실 때, 당신의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자, 눈을 감고 거기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꾸미겠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 보이지 않네. 들리지도 않네. 좋아, 좋아, 좋아, 천국에 가겠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바라보시는 긍정적인 시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롭게 여기시며 받아들이십니다. 이는 제하야 3장에서 천사가 대제사장 예수의 더럽힌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히는 장면처럼,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더럽힌 옷을 입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잠깐은 그냥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게”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영적 상황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불신앙스러운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복된 아름다운 의로 덮여 있다고 계산하신다는 교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얼마나 좋아하는 찬송가의 내용입니까? “이제 저는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네. 예수님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는 살아 계신 머리, 신앙의 의로 덮인 자입니다. 그가 나팔 소리로 오실 때, 저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의로만 덮여져서, 책망 없는 자로 보좌 앞에 설 것입니다. 저는 제 구속자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나니, 그분께서 죄와 죽음의 능력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제 의로 되신 성결한 재판장님 앞에서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의 피와 의는 제 아름다움과 영광의 옷입니다. 타오르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자들 속에서도 저는 기꺼이 머리를 들고 있습니다. 죽음의 흙에서 일어나 하늘의 거처를 받을 때, 그때도 제 의롭다 하심은 예수님께서 제 대신 살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재판장님 앞에 설 때, “당신의 변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오직 한 가지 변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대신 살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기억해 보세요. 지난 주에 우리가 말했듯이, 간성기(간성기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위대한 본보기로 여겼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기억해 보세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200년 전에 쓰인 지혜서인 시라 44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위대한 아버지였다.”라고 합니다. 그의 영광은 누구도 같지 않았으며, 그는 가장 높으신 분의 율법을 지키고 그분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는 육체로 언약을 세웠고, 시험을 받았을 때 충성스러운 자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문헌인 시라서가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해 무엇을 알아차렸는지 기억하세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고, 충성스러운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그들의 민족의 선구자로 보았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율법을 지켰던 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영웅이었고, 그는 좋은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지키고 충성의 본보기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먼저 신학을 설명했고, 그 부분이 길었습니다. 이제 본문을 보고 바울의 논리를 따라가 보세요. 3절에서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개발한 다른 견해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리고 4절로 이어집니다. 그는 비유를 제시합니다. “임금에 대해 말해 보자”고 합니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임금은 선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기억하세요. 3장 초반에 바울은 구원이 선물이라는 것을 이미 확립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이 사실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선물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약간 어색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을 제거합니다. 구원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묻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그것이 선물이라면, 그 선물은 무엇을 포함합니까?” 왜냐하면 임금은 당신이 정당하게 받을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임금은 선물이 아니라, 그가 일한 대가입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한 달 말에 고용주는 당신에게 돈을 빚지고 있습니다. 계약서에 서명했고, 계약이 있습니다. 고용주는 당신에게 시간당 20달러나 연간 10만 달러를 동일한 분할금으로 지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받지 못한다면, 법원에 가는 법적 권리도 있습니다. 이미 제공된 서비스에 대한 지급을 하지 않는 것은 계약 위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그것은 임금입니다. 당신은 “나는 당신을 위해 일했습니다. 당신은 돈을 빚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일과 임금에 감사하지만, “오, 대단하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직접 입금을 받을 때마다 감사의 편지를 보내나요? “이 선물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나요? 당신은 선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당신은 계약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아브라함, 만약 구원이 선물이라면, 그것은 행위에 의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했는지 주목해 보세요. 바울은 아브라함을 율법을 지키고 충성으로 축복받은 좋은 유대인의 본보기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바울은 아브라함을 신앙을 통해 의롭게 된 불신앙스러운 죄인과 연관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신앙을 강조할 때, 신앙은 임금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계산을 넘어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완성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이는 그의 믿음이 연약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 23절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믿음이 창세기 22장에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함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합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백 세가 넘어 얻은 외아들을 드릴 수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그 답으로 히브리서 11장 19절을 함께 읽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잃는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자신의 계산을 넘어 역사하실 하나님을 신뢰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예를 통해 우리도 계산을 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구하라고 권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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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을 끌어앉는 그런 행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서 세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하나님이 살리시는 믿음입니다. 오늘 21절부터의 말씀을 쭉 보면요. 야고보서는 두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요.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고요. 두 번째는 라합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너무나 유명한 두 인물이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었고, 언약의 약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반면에 라합은 여리코 성에 살던 이방 여인이었고, 기생이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아가던 두 인물을 야고보서는 같은 원리 아래 뒀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살펴볼까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완성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죠. 일례로,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였던 사라를 어떻게 합니까?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 23절을 한번 볼까요?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드러내십니까? 창세기 22장의 말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이었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장면을 통하여서 그 행함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의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어서 신이 얻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9절의 말씀인데요. 이 말씀 우리 한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웃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아브라함은 계산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으면 얼마나 슬플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지 않습니다. 숨겨주지 않습니까? 그 숨겨준 사실을 걸리면 죽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이유에 대해서 라합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요. 여호수아 2장 10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것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온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아멘. 라합이 고백합니다. 모든 일들을 다 본 겁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정탐꾼들에게 합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의 행함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게 되죠.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자신의 누를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족보, 그리스도의 족보에 하나님께서 올려두게 됩니다. 이 모든 스토리에 대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 뒤에 우리가 이 믿음이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먼저 행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우리 함께 다 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행함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향한 큰 행함과 순종을 행할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나의 믿음이 살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믿음이 죽어 있는 것 같다'라는 주저함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 오늘도 무릎 꿇고 나아가며 기도하는 그 복된 걸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기꺼이 순종할 때에 그 순종하는 삶 위에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2장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요. 그러나 그 공기와 산소 역시도 외부로부터 들어올 때에 숨을 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에,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던 것처럼,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에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시간, 그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모든 이의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어제 또 많은 순간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시면서, 전심으로 한 명, 한 명, 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이미 나에게 주신 그 부요함을 베풀어내는 은혜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같이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 믿음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 제목 가지고, 또 우리가 가지고 온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다가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복된 예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