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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5개 · 1 / 1쪽 · 한 쪽 20개

아켈라오의 왕위 청원과 유대인 사절단

설교자는 누가복음 19장 비유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연을 설명합니다. 헤롯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습니다. 아켈라오는 성전에서 예배하던 사람 약 3,000명을 죽인 적이 있을 만큼 악한 인물이었다고 설명됩니다. 그가 로마에 가 있는 사이 유대인들은 사절단을 보내 그가 유대인의 왕이 되면 안 된다고 황제에게 간청했습니다. 사절단 50명이 로비를 하며 황제를 설득한 결과, 아켈라오는 왕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다스리는 분봉왕의 권한만 받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당시 유대인들이 다 아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비유 배경에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청중에게는 익숙한 사건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26–26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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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 한 4년 경인데, BC 4년경에, 예수님은 그때, 사, 지금 그 1926년 전에 예수님이 온 게 아니고, 실제는 그보다 조금 전에 왔어요. 우리가 아는 연도는 한 4년 정도 차이가 나 있는 거예요. 그때 헤롯이 이제 죽었잖아요. 어, 헤롯이 죽고, 어, 헤롯의 아들 중에 아켈라오라는 사람이 있어. 아켈라오. 어, 헤롯의 장자였는데, 이 아켈라오가 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로마로 갑니다. 로마로 가서 로마로부터, 어, 유대인의 왕으로 그 인준을 받아와야 돼. 그래 갔는데, 아켈라오가 못 했어요. 어, 자기 아버지는 그래도 못돼도 어, 물러설 때 다가설 때 알고 외교도 하고 뭐 그런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 아주 [콧방귀] 악하지만은 그래도 센스가 있어요. 헤롯 대왕이라는 사람이. 근데 이 아켈라오 녀석은요, 못된 게 도를 넘었어요. 그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을 한 3,000명쯤 때 죽인 적이 있어. 아켈라오가. 그 그런 못된 놈이라. 그런데 어, 로마에 [목을 가다듬음] 가서 황제, 로마 초대 황제 아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서, 어, 왕으로 지명을 받아오려고 간 거라. 갔는데 유대인들이요, 그 뒤에 아켈라오가 떠난 걸 알고 [콧방귀] 유대인 회의에서 그 사절단을 보내요.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 [목을 가다듬음]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를 만나 가지고, 아켈라오 이놈은 천하에 못된 놈이기 때문에 절대 우리 유대인 왕이 되면 안 된다고. 그래서 로비를 하고 해 가지고 사절단을 50명을 보냅니다. 그래서 [콧방귀] 사정을 이야기하고 간청하여, 50명이 가서 황제를 잘 설득해 가지고 왕이 안 됐어. 왕은 안 되고 분봉왕, 통치는 유대와 사마리아, 어,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그 세 지역을 통치하는 분봉왕 권한은 주지만, 왕으로는 책봉이 안 됩니다. 그래 돌아와 가지고, 그 유대인들도 얼마나 포악하게 자기 왕 되지 못하게 사절단 보냈다 해 가지고 어, 난리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실정과 손 씻는 이야기

설교자는 본디오 빌라도의 실정과 최후를 소개합니다. 빌라도는 성전의 돈을 수로 공사에 쓰는 일로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고,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는 사건과 황금방패 사건 등으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산에 모세의 거룩한 기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에 모여들었을 때, 빌라도의 군인들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전합니다.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고발했고, 빌라도는 총독직에서 해임되어 로마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죽을 때까지 자꾸 손을 씻었다고 전해집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누가가 역사적 안목과 관점을 가지고 기록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49–50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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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이 날 것 같다고 하니까, 뭐, 나는 죄가 없다 하면서 손을 씻고 엉터리 재판을 해요. 그리고 그 뒤에, AD 36년경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또 무지막지하게 학살합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들도 문제예요. 그리심산에 모세의 거룩한 기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내 가지고,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너무 많이 몰려가니까, 이것을 무장한 빌라도 군인들이 반란이 나는 것 아닌가 해서 초기에 진압을 해야 한다며 마구 죽여 버렸어요. 그래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당시 시리아 총독, 수리아 지방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라는 사람에게 고발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총독 중에서 더 높은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결국 빌라도를 총독직에서 해임하고 로마로 소환합니다. 이 사람도 어디 갈리아 지방인가 어딘가로 유배를 갔는데, 사람이 좀 이상해졌어요. 빌라도가 아침마다 자꾸 손을 씻는 거예요. 자기 손에 피가 묻었다고 그러면서 씻고 와서 또 닦고, 내 손에 왜 피가 있지 하면서 또 손을 씻고, 그렇게 죽을 때까지 계속 손을 씻다가 죽었다는 거예요.

바울이 농부 비유를 쓴 이유에 대한 설명

설교자는 바울이 평생 농사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오히려 도시 문화의 산물이었고, 도시에서 편안함을 느꼈으며, 그의 서신 대부분도 도시 교회들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농부 비유가 그에게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짚습니다. 로마 제국은 농업을 존중했지만 다른 직업보다 낮은 위치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성경이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좋은 군사, 규칙을 지키는 운동선수와 함께 열심히 일하는 농부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농부의 비유가 세 가지 비유 가운데 가장 인상 깊다고 말하며, 그림이 사역자의 헌신과 수고를 말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농부는 수확의 첫 몫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적용으로 제시합니다.

앨버트 몰러 · 2026-10-22

설교 내 17–17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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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은 이 세 가지 비유, 세 가지 그림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 번째는 전사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군인도 민간 사무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는 뽑아 준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리스도인 군사처럼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군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군중 속에서 누가 군인이고 누가 아닌지 알아보는 일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군인처럼 입고 있었고,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항상 모든 상황에 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제국의 이름으로 정복하는 힘의 주체였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는지 분명히 보였습니다.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거의 지루할 정도로 평범하지만, 가끔은 전혀 지루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제국의 상징이 되는 군인의 이미지를 선택한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는 군인의 비유를 선택함으로써 이 세상의 군인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비유는 운동선수입니다. 올림픽의 유래가 분명히 드러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하지 않으면 관을 얻지 못한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즌에도, 제가 얼마나 뛰어난 스포츠 팬인지 아실 것입니다.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것이 참으로 설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규칙을 어긴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 벌이 결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관을 얻으려면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사상적으로 군인과 운동선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세 번째 비유는 농부입니다. 이 비유는 가장 인상 깊은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농부는 수확물의 첫 번째 분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서신은 짧은 편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평생 농사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도시 문화의 산물이었고, 도시 문화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그의 서신들은 대부분 도시 교회들에 보내졌습니다. 로마 제국은 농업을 존중했지만, 다른 직업보다 낮은 위치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군사가 되어라.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하는 운동선수가 되어라. 열심히 일하는 농부를 본받아라."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이 내용은 2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복음의 진술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기사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억하여라. 다윗의 자손이신 분이시며, 나의 복음에 따라 내가 고난을 받고 죄인처럼 쇠사슬에 묶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묶이지 않았노라.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모든 일을 참고 견디노라.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영광과 함께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서신의 1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로 자신을 온전히 드리려고 최선을 다하여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일꾼이 되어라.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다루어라." 이 말씀은 바로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올바르게 나누어라"는 고린도전서 14장 6절의 킹제임스 성경 표현에서 나는 기억입니다. 올바른 해석입니다. 따라서 운동선수가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해야 하듯이, 성경 해석자는 해석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운동에서 실패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성경 해석에서의 실패는 훨씬 더 심각하고 중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디모데에게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22절부터 젊은 시절의 열망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어리석고 무지한 논쟁에는 끼지 말라. 그 논쟁은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다투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며, 가르칠 줄 아는 자가 되어 악을 참아내며, 온유하게 반박해야 한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셔서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하시고, 그들이 깨달아 악마의 덫에서 벗어나 악마의 뜻대로 행동하던 채로 있던 것을 벗어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3장에서 말하려는 내용으로 나아가는 전제입니다. 그리고 3장은 올바른 영어 번역으로 시작되지만, "이것을 이해하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즉,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벤 윌슨이 말한 우르크와 우루의 도시

설교자는 영국 캠브리지 출신 역사학자 벤 윌슨을 소개합니다. 벤 윌슨은 2020년에 인류 도시의 역사를 다룬 두꺼운 책 『메트로폴리스』를 출판했고,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이 책은 기원전 4천년경 인류 역사의 최초의 도시가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그 도시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크라고 전합니다. 벤 윌슨은 우르크가 기원전 4천년경에 생겨나 4천 년을 견뎌내고 기독교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고 소개됩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버틴 도시는 우르크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설교자는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로마도 수백 년밖에 버티지 못했다는 점을 함께 언급하며 우르크의 오랜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이후 우르크를 모방하고 그보다 뛰어난 도시들이 나타났는데, 벤 윌슨이 그중 가장 먼저 언급한 도시가 우루였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창세기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루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간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루는 우르크처럼 유브라테스 강을 끼고 있었고 우르크보다 남부 해안 쪽에 가까워 더 풍요로웠다고 설명됩니다. 설교자는 우루가 견고하고 세련되며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로서 수천 년을 지속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출발한 곳이 당시 가장 발전되고 견고한 도시였음을 보여주어, 그 출발의 무게를 이해하는 배경으로 삼습니다.

남득현 · 2026-10-21

설교 내 6–6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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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 영국에 캠브릿지 출신의 벤 윌슨이라는 역사학자가 있거든요. 그 벤 윌슨이라는 역사학자가 2020년에 인류 도시의 역사를 쓴 『메트로폴리스』라는 아주 두꺼운 책을 출판해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는데, 『메트로폴리스』라는 책을 출판해요. 이 벤 윌슨이 그 책의 내용에 보면, 기원전 4천년경에 인류 역사의 최초의 도시가 나타납니다. 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인류 최초의 도시의 이름이 뭐냐면, 우르크입니다. 우르크. 우르크란 도시예요. 이 우르크란 도시가 얼마나 경고하고 발전된 도시냐면, 그 벤 윌슨이 말하길, 기원전 4천년경에 이 도시가 생겨나고 무려 4천년을 이 도시가 견뎌냅니다. 기독교 시대까지. 벤 윌슨이 인류 역사 안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견뎌낸 도시는 우르크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그니까 로마도 수백 년밖에 못 갔어요. 이 우르크라는 도시가 발생하고, 그 우르크를 모방하고, 우르크보다 더 뛰어난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많은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이 벤 윌슨이 그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도시가 우루입니다. 우루. 여러분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창세기 11장 마지막 부분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루에서 나와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죠. 여러분, 우루란 도시가 어떤 도시냐면, 우르크와 동일하게 유브라테스 강을 끼고 있고, 우르크보다 더 남부 해안 쪽에 인접하고 있어서 훨씬 더 풍요롭고 견고하고 세련되고 견고한 우루란 도시도 수천 년을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루가 발전되고 견고하고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였어요. 우르크보다 더.

죄수의 십자가 행진

설교자는 당시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직접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철저한 죽음의 행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그런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철학적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을 각오한 걸음임을 보여 주고, 성도 역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따르겠다는 태도를 경계하는 메시지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이 말씀을 쉽게 흘려듣지 않도록 당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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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