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3개 · 1 / 1쪽 · 한 쪽 20개
겟세마네에서 잠든 제자들
설교자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히 고민하며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을 함께 읽으며, 예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돌아와 본 제자들은 마귀가 들린 듯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우시며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예, 주님' 하고는 또 잠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깨워 기도시켜도 다시 자는 모습이 반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땀을 피같이 흘리며 기도하신 예수님과 잠든 제자들의 모습을 강하게 대조하며,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은 위기 앞에서 준비되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두 번째, 또 하나 중요한 원인을 제가 발견했어요. 기도해야 할 때 졸았어요. 기도하지 않았어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원인이에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고민을 하셨는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죠. 예수님이 고민하여 죽게 되는데 너는 왜 자느냐? 이렇게 말씀하시죠.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는 말이 있어요. 예수님이 통곡하며 기도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죠.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고, 예수님도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하고 와서 제자들을 보면 이상해요. 마귀가 들린 듯 잠을 깊이 잡니다. 아주 확실하게 그냥 잤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깨우셨어요. 다 같이 기도 좀 하자. 그런데 베드로가 예, 주님, 그러고 또 잔 거예요. 몇 번씩이나 그랬냐면 세 번씩이나 그랬어요. 예수님은 깨워서 또 가서 기도하고 돌아보면 또 자고, 또 깨워서 기도시키면 또 자고 그렇게 됐어요.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그러셨는데,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땀을 피같이 흘리며 기도하는 것과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이 두 그림이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설교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맞이하신 무서운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이 일이 무엇을 뜻하게 될지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분이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고 고백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그분의 순종이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과정의 절정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순종이 승리를 향한 길이었음을 청중이 기억하도록 권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60–60문단 · 예화 7
본문 발췌 보기
그분은 순종하셨고, 그 순종은 계속 이어집니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동산에서 그 무서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일이 무엇을 뜻하게 될지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으로 가셨습니까?
겟세마네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
설교자는 원하는 것을 구하되 그것을 하나님 뒤에 두는 기도의 모범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듭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기도가 간절히 구하면서도 기도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린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라는 기도의 모습을 함께 제시합니다. 눈물로 구해도 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두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듣는 성도들이 자기 기도의 중심을 점검하기를 권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