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는 서울역 사랑나눔부와 사회복지법인 헤세드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기보다 정의로운 마음과 막연한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았다고 돌아봅니다. 사역 중 막막하고 가슴 아픈 일을 겪을 때마다 그는 불안과 두려움, 걱정에 사로잡혔고, "너무 억울합니다"라며 하나님께 왜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 묻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던 연약함 속에서, 관계가 틀어져 있는데도 회개가 되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고 나눕니다.
어느 날 그는 소예배실 제일 앞, 어두컴컴한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렸는데,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터져 나왔고, 그는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높아져 열정을 쏟았던 자신을 회개했습니다. 또 교회와 부서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셨고, 그는 너무 기뻤다고 전합니다. 그는 이 회개와 죄 사함의 은혜, 그리고 진리 안의 자유함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지금도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회개는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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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예. 반갑습니다. 예. 단임 목사님이 아니셔서 여러분들이 좀 마음이 어려우실 수 있을 텐데 저는 누군지 아시죠? 예. 서울역 사랑나눔부 섬기고 있는 윤진수 목사입니다. 어, 서사부라고 하죠. 서사부의 예배가 따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 설교를 하다가 이렇게 또 목사님께서 부르시고 또 하나님께서 세워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또 하나님께서 종에게 깨닫게 해 주신 말씀 그리고 그 은혜를 담백하게 좀 나누고 또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또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한번 인사할 때에 오늘 제목이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입니다. 그래서 오른쪽에 계신 분이 '내가 믿으면' 이렇게 인사하시고 반대쪽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렇게 화답하며 인사하겠습니다. 인사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 이제 한번 바꿔서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시작.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참 큰 상과 같은 그런 어려움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절벽과 같고 또 낭떨어지와 같고 참 막막하고 답답하고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일, 또 도저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고 해결이 되지 않는 그런 어려움들, 큰 고통이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마주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정말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님의 품에 부름을 받으셨다든지, 또는 배신이나 그런 인간관계에 있어서 큰 갈등을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도 있겠고, 이렇게 우리가 사회적으로, 또 학교에서, 또는 집에서, 또 교회에서 여러 가지의 일들로 막막하고 그런 상실감을 느끼면서 큰 고통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만날 때 우리는 낙심이 되고, 또 절망하게 되고, 포기하고 싶고, 마음이 자꾸만 내로운 마인드가 되어서 좁아지고 좁아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또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싫어지겠죠. 기도도 안 되겠죠. 그럴 때는 회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혹시 그런 일들을 지금 겪고 계시는 분들이 계실까요? 아니면 최근에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지나오신 분들이 계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에는 그런 여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시라 간략하게 핵심만 스토리를 말씀드리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자주 들리셨던 그런 관계 속에 있었던 남매들이죠. 마르다가 제일 큰 언니가 되겠고, 그다음에 마리아, 그리고 남동생 나사로가 됩니다. 그렇게 학자들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누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봅니다. 어쨌든 이렇게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있었지만, 갑자기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 살려 주십시오. 빨리 오십시오.'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사랑하시지만, 성경에 보시면 사랑한다고 되어 있어요. 사랑하시지만 미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완전히 사망에 이르렀을 때,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마을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도착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당도했을 때 마르다의 첫 마디가 뭐였죠?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 오라고 할 때 빨리 오셨어야죠. 왜 내가 제일 힘들 때, 내가 제일 큰 어려움을 마주할 때, 왜 그때 예수님 도와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내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압니다. 부활의 때, 마지막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살려 주실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살려 주셨을 텐데, 지금 죽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거잖아요. 그렇게 낙심하면서 절망하면서 예수님께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다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고, 마리아, 마르다는 그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뭐라도 도와주실지 않을까?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집에 남자, 남자 가장이 죽었기 때문에 경제력의 상실로 굉장히 두려워서 뭐라도 좀 도와주십시오 하면서 예수님께 요청을 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를 못했습니다. 깊이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신앙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만 그렇습니까? 마리아도 마찬가지죠.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 대해서는 다시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곳에 있던 모든 우는 자들, 예루살렘에서 무난 왔던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는지요. 거기 쓰여졌던 단어가 '에분히 여기시고', 과거에 우리 개혁 성경은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이 여기서 개혁 계정에는 '비통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서' 이게 어떤 표현이냐면요. 예수님께서 강한 분노를 드러내신 겁니다. 호흡을 치면서 부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떨고 있는 단어를 요한은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전히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고 짓눌려 있고, 부활과 생명의 주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진리의 자유함 가운데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 여전히 마귀의 속박 가운데 죽음의 권세에 놓여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비통함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에다크리센' 예수님께서 흐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돌을 옮겨 놓아라. 무덤 입구에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아라.' 근데 말하다가 뭐라고 하죠? '죽은지가 벌써 나흘이 되었습니다. 시체에서 냄새가 납니다.' 라면서 예수님을 일축해 버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가 인사 나누었던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이 한 말, 진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고,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갇혀서 두려움에 떨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그 장례 현장 가운데 있던 사람들만 이렇게 믿음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제 삶과 신앙생활을 뒤돌아보면은 마르다, 마리아처럼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제가 서울역 사랑 나눔부를 섬기면서, 또 사회복진 법인 헤세드를 섬겨오면서, 지금은 이제 사무국장이 아니죠. 그렇게 섬겨오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고 그렇게 의지하기보다, 정의로운 저의 마음 또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막연한 열정과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지 않았나? 그렇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역하면서 정말 막막한 어려운 일을 경험하거든요.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걱정하면 하는 제 모습을 얼마 전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데 왜 이런 어려운 시련과 이런 일들이 나에게 닥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의롭게 교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 너무너무 억울합니다. 왜 저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내 옹절한 그런 의로움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고, 그런 연약함 속에 놓여졌던 제 모습을 한번 돌아봅니다. 그러다가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너무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움, 하나님과의 그 관계에서의 뭔가 이상하게 틀어져 있는데 하나님께 회개가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다 죄 죄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언제 해 보셨습니까? 회개를 해보셨겠죠. 회개는 정말 제 힘으로,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소예배실에 어느 날 가서 제일 앞에 어두컴컴한데 무릎 꿇고 딱 이렇게 엎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더라고요. 그 순간 제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이 단어가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하나님, 하나님보다 제가 더 의롭게 더 높아져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했던 것 하나님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다른 사람, 우리 교회 안에 저희 부서 안에 일어난 모든 일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입니다. 하나님,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죄 잘못입니다. 죄 죄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가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기뻤습니다. 회개와 죄사함의 은혜, 그로 인해서 주어지는 그 진리 가운데의 자유함,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큰 은혜였고 지금도 그 은혜의 힘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또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좀 집중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을 맞이하고 염려, 근심, 걱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 믿음의 바닥이 드러났을 때, 시험에 빠져서 혼돈 속에 있을 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찾고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