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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3개 · 1 / 1쪽 · 한 쪽 20개

앞문으로 쫓겨난 자기 사랑

설교자는 자기 사랑을 집 안에 들어온 존재처럼 비유합니다. 앞문으로 쫓아내도 그것은 뒷문으로 들어오고, 창문으로 들어오며, 굴뚝으로 내려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기 사랑을 버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며 모든 경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정한 싸움은 자아와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혼자서는 그것을 해낼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위한 자리가 생기기 전에는 들어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자기를 버리고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하며, 사랑은 억지로 끌어올릴 수 없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분이 마음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39–39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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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이 다소 어렵고 힘겹게 느껴진다면, 성령의 능력을 기억하고 그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경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정한 싸움은 자아와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제가 단독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앞문으로 그를 쫓아내면 그는 뒷문으로 들어옵니다. 창문으로 들어옵니다. 굴뚝으로 내려옵니다. 어딘가로 들어옵니다. 아, 자기 사랑을 버리는 일의 어려움이란!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위한 자리가 생기기 전에는 그곳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억지로 사랑을 끌어올리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은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인으로서는 너무도 낯선 이 순수한 사랑을 위해 그분이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소예배실에서 회개의 영을 경험한 설교자의 기억

설교자는 서울역 사랑나눔부와 사회복지법인 헤세드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기보다 정의로운 마음과 막연한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았다고 돌아봅니다. 사역 중 막막하고 가슴 아픈 일을 겪을 때마다 그는 불안과 두려움, 걱정에 사로잡혔고, "너무 억울합니다"라며 하나님께 왜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 묻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던 연약함 속에서, 관계가 틀어져 있는데도 회개가 되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고 나눕니다. 어느 날 그는 소예배실 제일 앞, 어두컴컴한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렸는데,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터져 나왔고, 그는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높아져 열정을 쏟았던 자신을 회개했습니다. 또 교회와 부서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셨고, 그는 너무 기뻤다고 전합니다. 그는 이 회개와 죄 사함의 은혜, 그리고 진리 안의 자유함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지금도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회개는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윤진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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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예. 반갑습니다. 예. 단임 목사님이 아니셔서 여러분들이 좀 마음이 어려우실 수 있을 텐데 저는 누군지 아시죠? 예. 서울역 사랑나눔부 섬기고 있는 윤진수 목사입니다. 어, 서사부라고 하죠. 서사부의 예배가 따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 설교를 하다가 이렇게 또 목사님께서 부르시고 또 하나님께서 세워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또 하나님께서 종에게 깨닫게 해 주신 말씀 그리고 그 은혜를 담백하게 좀 나누고 또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또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한번 인사할 때에 오늘 제목이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입니다. 그래서 오른쪽에 계신 분이 '내가 믿으면' 이렇게 인사하시고 반대쪽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렇게 화답하며 인사하겠습니다. 인사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 이제 한번 바꿔서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시작.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참 큰 상과 같은 그런 어려움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절벽과 같고 또 낭떨어지와 같고 참 막막하고 답답하고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일, 또 도저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고 해결이 되지 않는 그런 어려움들, 큰 고통이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마주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정말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님의 품에 부름을 받으셨다든지, 또는 배신이나 그런 인간관계에 있어서 큰 갈등을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도 있겠고, 이렇게 우리가 사회적으로, 또 학교에서, 또는 집에서, 또 교회에서 여러 가지의 일들로 막막하고 그런 상실감을 느끼면서 큰 고통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만날 때 우리는 낙심이 되고, 또 절망하게 되고, 포기하고 싶고, 마음이 자꾸만 내로운 마인드가 되어서 좁아지고 좁아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또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싫어지겠죠. 기도도 안 되겠죠. 그럴 때는 회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혹시 그런 일들을 지금 겪고 계시는 분들이 계실까요? 아니면 최근에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지나오신 분들이 계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에는 그런 여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시라 간략하게 핵심만 스토리를 말씀드리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자주 들리셨던 그런 관계 속에 있었던 남매들이죠. 마르다가 제일 큰 언니가 되겠고, 그다음에 마리아, 그리고 남동생 나사로가 됩니다. 그렇게 학자들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누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봅니다. 어쨌든 이렇게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있었지만, 갑자기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 살려 주십시오. 빨리 오십시오.'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사랑하시지만, 성경에 보시면 사랑한다고 되어 있어요. 사랑하시지만 미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완전히 사망에 이르렀을 때,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마을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도착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당도했을 때 마르다의 첫 마디가 뭐였죠?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 오라고 할 때 빨리 오셨어야죠. 왜 내가 제일 힘들 때, 내가 제일 큰 어려움을 마주할 때, 왜 그때 예수님 도와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내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압니다. 부활의 때, 마지막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살려 주실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살려 주셨을 텐데, 지금 죽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거잖아요. 그렇게 낙심하면서 절망하면서 예수님께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다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고, 마리아, 마르다는 그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뭐라도 도와주실지 않을까?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집에 남자, 남자 가장이 죽었기 때문에 경제력의 상실로 굉장히 두려워서 뭐라도 좀 도와주십시오 하면서 예수님께 요청을 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를 못했습니다. 깊이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신앙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만 그렇습니까? 마리아도 마찬가지죠.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 대해서는 다시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곳에 있던 모든 우는 자들, 예루살렘에서 무난 왔던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는지요. 거기 쓰여졌던 단어가 '에분히 여기시고', 과거에 우리 개혁 성경은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이 여기서 개혁 계정에는 '비통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서' 이게 어떤 표현이냐면요. 예수님께서 강한 분노를 드러내신 겁니다. 호흡을 치면서 부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떨고 있는 단어를 요한은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전히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고 짓눌려 있고, 부활과 생명의 주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진리의 자유함 가운데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 여전히 마귀의 속박 가운데 죽음의 권세에 놓여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비통함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에다크리센' 예수님께서 흐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돌을 옮겨 놓아라. 무덤 입구에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아라.' 근데 말하다가 뭐라고 하죠? '죽은지가 벌써 나흘이 되었습니다. 시체에서 냄새가 납니다.' 라면서 예수님을 일축해 버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가 인사 나누었던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이 한 말, 진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고,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갇혀서 두려움에 떨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그 장례 현장 가운데 있던 사람들만 이렇게 믿음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제 삶과 신앙생활을 뒤돌아보면은 마르다, 마리아처럼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제가 서울역 사랑 나눔부를 섬기면서, 또 사회복진 법인 헤세드를 섬겨오면서, 지금은 이제 사무국장이 아니죠. 그렇게 섬겨오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고 그렇게 의지하기보다, 정의로운 저의 마음 또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막연한 열정과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지 않았나? 그렇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역하면서 정말 막막한 어려운 일을 경험하거든요.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걱정하면 하는 제 모습을 얼마 전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데 왜 이런 어려운 시련과 이런 일들이 나에게 닥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의롭게 교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 너무너무 억울합니다. 왜 저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내 옹절한 그런 의로움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고, 그런 연약함 속에 놓여졌던 제 모습을 한번 돌아봅니다. 그러다가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너무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움, 하나님과의 그 관계에서의 뭔가 이상하게 틀어져 있는데 하나님께 회개가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다 죄 죄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언제 해 보셨습니까? 회개를 해보셨겠죠. 회개는 정말 제 힘으로,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소예배실에 어느 날 가서 제일 앞에 어두컴컴한데 무릎 꿇고 딱 이렇게 엎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더라고요. 그 순간 제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이 단어가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하나님, 하나님보다 제가 더 의롭게 더 높아져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했던 것 하나님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다른 사람, 우리 교회 안에 저희 부서 안에 일어난 모든 일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입니다. 하나님,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죄 잘못입니다. 죄 죄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가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기뻤습니다. 회개와 죄사함의 은혜, 그로 인해서 주어지는 그 진리 가운데의 자유함,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큰 은혜였고 지금도 그 은혜의 힘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또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좀 집중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을 맞이하고 염려, 근심, 걱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 믿음의 바닥이 드러났을 때, 시험에 빠져서 혼돈 속에 있을 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찾고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설교자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여겨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을 언급합니다. 설교자는 그 원인이 두려움이었다고 설명하며,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 실제로 두려운 길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처럼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조차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도 죽음을 각오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말로만 따르는 신앙이 아니라 실제 결단이 필요한 신앙임을 적용합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정죄의 대상이라기보다, 성도가 자신의 두려움과 자아를 직면해야 한다는 거울로 제시됩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자신의 두려움과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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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