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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개 · 1 / 1쪽 · 한 쪽 20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함

설교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뒤 가장 먼저 한 행동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던 관계에 죄로 인한 두려움이 들어와 도망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도망가는 삶이 매우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출애굽 후 광야 생활을 언급하며, 두려움이 있을 때 사람들은 옛 생각, 옛날의 자신에게 치우치게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도는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이므로 옛것에 속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앞서 나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두려움이 올 때 그는 말씀에 머물러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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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존재는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빛을 비춰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한참 젊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결국 결과를 보게 만들어요. 내가 하는 것, 여러분이 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의 결과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깁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았던 그 가론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사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이후에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디에 쉬었습니까?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뭐였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옵니다.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돼 있어요. 사람마다 뭘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3명이나 모여서 같이 성령님의 인도를 맛보고 삶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들어와야 하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의 가르침,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도망가는 것이었죠.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죄라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도망가는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보면, 출애굽하고 나서 그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갑니까? 옛날 생각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었던 옛자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옛날엔 이랬었지, 저했었지.' 그런데 우리는 다 새생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옛자에 속지 말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두려움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를 의심하죠? 주님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의심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단절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소명이 생깁니다. 여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유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코이노니아 얘기했잖아요.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죠? 나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 번째 누굴 나눴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눴고, 두 번째는 간증을 했고, 세 번째는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그러니까 영적으로, 혼적으로 풀리면 무엇이 풀리죠? 물질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다 풀리게 됩니다. 순서가 있더라고요. 근데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이 되고, 혼쪽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막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그것도 주님께 맡기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혼까지도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이루셨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제입니다. 나눔입니다. 그게 영적인 교제든, 육적인 교제든, 아니면 물건을 통한 교제든, 그 코이노니아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합에요. 누구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사람과의 연합이 됩니다. 사람이 연합이 되면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 통해 저변이 확대됩니다. 근데 그게 없으니까 요즘 교회는 다들 힘듭니다. 마음속에서 꺼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뭐를 꺼내 놓으면 그냥 듣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정작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고 계시니까, 그것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듯이 삶 가운데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가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질 때, 주님이 서로 일으켜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면 너희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어요.' 교제.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 누구와 교제가 되죠? 지체들과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거기에서는 기도가 있을 것이고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교제가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같이 교제하다 보면, 아, 내가 내 모양이 이래서, 내 죄성이 이래서 이렇게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일부분이고, 잠시 보여지는 일부분이고, 죄를 꺼내 놓고 좋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다른 것도 같이 꺼내 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무언가 간증을 들어보고 그걸 판단하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고 여겨질 수 있게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때는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떤 간증이 있고, 어떤 죄성이 있어. 그걸 하나님께 고발했더니 이렇게 해 주셨어.' 이게 자부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다가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광야 생활 중에서 제일 감사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런 것도 있지만 매일매일 뭘 내려 주셨습니까? 만나.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근데 그 만나의 양이 많아도 안 됩니다. 딱, 집안에 네 식구라면 네 개만 딱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더 주면 받아야 되나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 양식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보여지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제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 말하기를 더고 뭐라고 얘기하시죠? 듣기를 속해하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음으로써 벌써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한 분이라면, 그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떤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과 더 뛰어난 것을 불러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의 그릇이 있고 저만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점진적으로 단련한 후에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단련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떤 교제를 통해, 어떤 마음을 통해 흔들리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이 수직적인 관계가 해결되면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절.

이삭의 우물 양보와 르호봇

설교자는 창세기의 이삭 이야기를 소유보다 존재를 중시한 모델로 소개합니다. 이삭은 브엘세바 근방에서 양을 치며 거부가 되었는데, 그랄 목자들이 그가 판 우물을 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설교자는 우물이 목축민에게 생명과 직결된 소유이기에, 다투면 우물도 생명도 잃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삭은 싸우지 않고 우물을 넘겨준 뒤 다른 곳에서 다시 팠고, 이런 양보가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세 번째 우물에서는 물이 넉넉히 나와 터가 넓어졌고, 이삭은 그곳을 르호봇이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그랄 목자들이 찾아와 하나님이 이삭의 삶과 함께하시는 것 같다고 말하며 사과하고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는 점을 설교자는 살아 있는 전도지라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가 산상수훈의 양보의 말씀과 이어진다고 덧붙입니다.

노우호 · 2026-10-21

설교 내 25–33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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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문제를 가지고 성경은 진작부터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사람이 누구 같아요? 이 사람. 왜 이삭이요, 이삭. 이삭이 브엘세바 근방에서 양을 치는데 우물을 가지고 그랄 목자들이 와서 시비를 거는 거야. 이게 그랄 목자들이고 이거 이삭인데, 이삭이 거부가 됐거든. 그해에 “애굽에 가지 말고 이 땅에 거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걸핏하면 미국 가려고 그러죠? 그때 미국이 뭐냐? 그때 미국이 애굽이야. 나일강 물이 넘치고 비옥한 토양에 양식 걱정 없고, 아무 외적의 침입이 없고, 최고 좋은 곳이 애굽인 거라. 전부 다 그렇게 가는데, 심지어 아브라함도 갔다가 물론 혼나고 왔지만, 이삭도 어렵고 하면 또 갈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미리 “너 애굽에 가지 말고 여기 유하라. 그러면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그랬더니 이삭이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애굽에 가지 않고 거기 머물렀더니 정말 백 배나 주신 거야. 마침내 거부가 됐어요. 거부가 되면 집에서 같이 일하는 청지기, 노예, 이런 사람도 있고 가족도 있고, 이렇게 하다 보면 거부가 뭐냐? 목축하는 사람이니까 양 떼가 많아. 양 떼가 많으면 풀밭이 좀 넓어야 되고, 그다음에 중요한 게 우물이야. 양이나 염소는 풀 속에 일정량의 수분이 있기 때문에 물을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양들도 물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우물을 파야 되는데, 요즘처럼 우물을 파는 기계가 발달된 게 아니고 어디 산을 딱 봐 가지고 ‘여기쯤 파면 물이 나겠다’ 하고 경험상 알아서 파는데, 상당히 깊이 파요. 우리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깊이 파야 물이 있습니다. 또 깊이 파는데 흙으로 된 땅이라면 시간이 가면 파낼 수 있지. 그런데 돌이 나와 버렸어. 그럼 발파도 못 하는데 어떻게 해요? 그런 면에서 우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명수, 생명과 직결돼 있어요. 그래서 소유 중에서 굉장히 소중한 소유가 우물입니다. 어떤 데는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물줄기가 바위틈에서 졸졸 나오는데, 아인 카렘이라고 세례 요한의 본가, 엘리사벳이 있던 그 본가, 그 동네 입구에 가면 진짜 바위틈에서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물이 졸졸 나와요.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물줄기 하나 때문에 한 동네가 삽니다. 그게 없으면 못 사는 거예요. 우물은 생명과 같은데 그 목자들이 와서 다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삭이 ‘이걸 다투네. 다투면 싸움 나지. 싸움 나면 싸워서 이겨도 누군가는 죽어야 돼.’ 이 목자들이 우물이 탐나서 우물만 빼앗으러 온 게 아니고, 우물이 생명과 같은데 그걸 내놓으라 하면 순순히 내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바로 싸움 나죠. 싸움 나면 우물만 빼앗는 게 아니고 다 죽여 버리고 빼앗는 거거든, 그게. 그러니까 이삭이 소유냐 존재냐, 우물 안 뺏기려고 하다가는 우물도 뺏기고 생명도 뺏기고 그럴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래서 존재를 생각해 가지고 소유, 우물을 깨끗이 안 싸우고 흔쾌하게 “가지시라” 하고 그렇게 한 거예요. 다른 그림을 봐요. 다른 데 가서 또 파요. 우물을 팠는데 더 좋게, 아까는 막대기 들고 일어났잖아요. 이건 더 좋게 했다니까요. 더 좋은 걸 팠는데 물도 좋게 나와요. 많이 나와. 그랬더니 또 와서, 싯나라 그랬어. 싯나가 뭐냐? 아예 그냥 이것들이 대적하겠다는 거네. 우물을 줬잖아요. 줬으면 그걸 가지고 있으면 되지 왜 또 와서 애먹이냐? 완전히 대적이 되겠다는 거예요. 그때 이삭은 그래도 소유보다는 존재가 더 소중하니까 ‘그래, 대적하겠다니까 내가 또 줘야지.’ 또 주고 양보하고 다른 데 가서 또 팠어. 이번에는 좀 더 근사하게 우물을 팠는데, 가 봤더니 아까보다 훨씬 풀밭도 넓고 양 떼도 더 많이 불어났고 우물도 더 멋지고, 평화롭게 우물을 길었는데 여기 여자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와서 우물을 긷잖아요. 두 번 양보하고 세 번째 가서 우물을 파서 또 물이 나니까 이걸 그랄 목자들이 다 본 거야. 딱 보니까 ‘희한하네, 저 사람이.’ 그래서 그랄 목자들이 찾아와요. ‘이삭이 하는 것마다 왜 저 사람들은 손만 대면 우물이 나오지? 왜 자꾸 더 좋아지지?’ 우물 이름을, 이삭은 확장됐잖아. 더 잘됐잖아. 여러분, 양보하고 양보하고 왔는데 세 번째 와서 더 확장됐다. “하나님이 내 장막의 터를 넓히셨도다” 하면서 이름을 확장됐다, 르호봇이라고 지었다는 거예요. 얼마 있었는데 아까 그 그랄 목자들이 찾아왔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삭 어르신, 우리가 어르신의 삶을 멀찍이서 유심히 살펴봤는데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당신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도지 이런 거 안 줬어. 전도지고 사영리고 그런 것도 안 줬는데, 이삭의 삶이 살아 있는 전도지야. 양보하고 또 양보하고 안 싸우고, 또 말없이 가서 우물을 팠더니 물이 나고 하는 걸 보고 ‘저 사람들은 믿는 신이 있는데 그 신이 진짜 같다.’ 찾아와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앞으로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불가침 조약을 맺고, 이삭이 “잘 들어오셔서 앞으로 잘 지내 봅시다” 하고 대접해서 보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