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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개 · 1 / 1쪽 · 한 쪽 20개

에리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와 두 편의 시

설교자는 에리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1976년에 출간된 책이며, 고등학교 시절 교회 문고에 꽂혀 있었거나 대학생 형, 누나들이 이 책으로 토론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면서 마음에 새겨졌다고 회고합니다. 나중에 직접 읽어 보니 내용이 복잡하고 설명이 어려웠지만, 주장만큼은 단순했다고 말합니다. 그 주장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소유 방식과 존재 방식의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소유 방식의 삶은 대학 학력, 직업, 재산, 타고 다니는 차처럼 가진 것이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고 보고, 존재 방식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꿈을 가지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오늘날 사회가 사람을 인품보다 옷차림, 연봉, 차로 판단하는 극단적인 소유 중심 사회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소유 중심의 삶이 끊임없이 비교하게 하고, 지위를 잃으면 자기 자신을 잃은 듯 불안하게 만들며, 인간관계를 득실로 바꾸는 문제를 낳는다고 지적합니다. 이어 에리 프롬이 인용한 두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테니슨의 시는 갈라진 벽 틈의 꽃을 뿌리째 뽑아 손에 든 소유의 마음을 보여 주고, 바쇼의 냉이꽃 시는 꺾지 않고 바라보는 기쁨을 보여 준다고 대비합니다. 설교자는 이 대비를 근거로 우리 교회가 꽃을 꺾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눈여겨 살펴야 보이는 초라한 꽃을 존귀하게 여기며 생명을 존중하신다고 적용합니다.

이찬수 · 2026-10-25

설교 내 1–2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에리 프로미슨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책인데요. 1976년도에 출판된 책입니다. 그때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 책이 고등학교 때 제 머릿속에 각인된 것입니다. 그때 우리 교회에 작은 교회 도서관이 있었는데, 그 문고에 이 책이 꽂혀 있었던 것 같고, 또는 그때 우리 대학생 형이나 누나들이 이 책을 갖고 토론하는 걸 옆에서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책이 제게 상당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고 나서 이 책을 구해서 읽어 보니까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하고 설명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방식입니다. 소유 방식의 삶은 내가 뭘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삶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이 자기 존재에 영향을 주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등이 소유 중심의 삶입니다. 반면 존재 방식의 삶은 내가 뭘 추구하는 사람인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 존재가 무엇을 바라보고 추구하는지가 인생을 규정짓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모두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존재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에리 프로미슨의 분석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가 두 가지 방식이 비등비등한 사회일까요? 지금은 극단적인 소유 중심의 삶을 추구하고, 그것을 조장하는 세상입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차가 어떤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에리 프로미슨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이미 그때부터 세상이 소유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유 중심의 삶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만족하며 살다가 친구가 큰 집을 사면 자신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런가요? 사회가 소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주차가 어려운데도 트럭을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호텔에서는 경차 타는 손님을 대접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돈을 쓰지 않는 손님을 대접할 필요가 없다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깔려 있습니다. 외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우리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둘째, 소유 중심의 삶은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듭니다. 내 위치가 곧 내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지위나 신분이 곧 존재가 되므로, 그것을 잃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현실에서도 퇴직하면 퇴물이 되는 듯한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 퇴직은 퇴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 중심의 삶은 우리를 호도하고 악하게 만듭니다. 셋째, 소유 중심의 삶은 다른 사람도 소유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소유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평가하므로 인간관계가 망가집니다. 상대방의 존재가 귀해서 사귀는 것이 아니라, 득이 될 사람을 사귀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이 지위를 잃으면 관계를 끊습니다. 이런 것이 소유 중심의 삶의 부작용입니다. 에리 프로미슨은 이 책에서 시 두 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는 영국의 테니슨 시인의 시입니다. "갈라진 벽 틈새에 피는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채 손 안에 들고 있다." 이 시는 꽃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반면 일본의 바쇼 시인의 시는 "눈 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나." 이 시는 꽃을 소유하지 않고도 그 존재를 바라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는 꽃을 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꽃을 소유하지 않아도 그 존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꽃이 여기 있다고 치고 한 번 보세요. 멀쩡히 그 존재로 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꺾어 가지고 꽃꽂이로 만들어 놓으면 이미 그 꽃은 죽은 꽃이에요. 살아 있던 생명력으로 며칠 연장하는 거지. 이게 에리프롬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에서 맨 앞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눈여겨 살펴보니, 콧마하고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는 뭘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꽃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궁금해요. 눈 여겨 봐야 보이는 꽃이에요. 여러분, 꽃구경 가자, 단풍놀이 가자 해서 버스 대절하고 설상 가는 건, 눈 여겨 봐야 찾을 수 있는 꽃이 아니잖아요.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명한 꽃을 보러 가는 건데, 하나님은 눈 여겨 살펴봐야 하는 초라한 꽃, 존재가 별로 없는 꽃을 보고 계신 거예요. 확 뽑아버려도 되는데, 눈 여겨 살펴본 그 꽃이 너무 아름다운데도 꺾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설교 준비하려고 에리프롬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쭉 읽으면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점이 있었어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천 같아요. 그 책 뒤에 보면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그런 내용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에리프롬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모르겠지만, 마음이 감동이 되었어요. 왜 우리 하나님은 테니슨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의 시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신가요? 눈 여겨 봐야 볼 수 있는, 보살 것 없는 초라한 작은 꽃도 인간의 평가긴 하지만, 그걸 존귀하게 보고 눈여겨 보고, 감상하되 생명력을 존중해서 꺾지 않는 게 우리 하나님 성품이구나. 왜 제가 유난히 그게 은혜가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저는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철이 들수록 제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양식의 삶의 기준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식했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걸 사춘기 때부터 느꼈어요. 너무나 가난했고요.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 집에서 중학생 때 충격을 받았어요. 뽀빠이라는 과자를 박스로 사 놓고 먹더라고요. 선반에 올려 놓고, 누나가 매일 놀러갔잖아요. 하나씩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 가난이 제게 결핍이었어요. 외모나 소유물도 부족했고요.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어요. 결핍이 많았습니다. 제 결핍의 정점은 이민 초기예요. 정말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밥벌지'였어요. 20대 초반에요. '밥이나 춥네요'라는 뜻이었죠.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었어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 살기 전에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형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비웃겠나 싶었죠. 막노동하고 살고, 영어도 못 하니까요. 83년도는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도 심했어요. 길 가면 지들끼리 '하이, how are you, fine, thank you' 하는데, 육사람 지나가는데 '하이' 하면 고개를 돌려요.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어요. 제 존재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요. 일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그렇게 살았어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그때 저를 살려 준 건 교회예요. 교회는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어요.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께 이걸 전하고 싶어요. 교회는 그런 기준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고, 막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 중에는 영어 못 하는 걸 대놓고 무시하거든요. 비웃고 그러면 너무 리얼했나? 교회만 가면 그런 걸로 저를 대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어릴 때부터 격려해 주었어요. '너 걱정도 하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되? 네 아버지가 교회를 위해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축복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우리 청년들이, 기성 세대, 은퇴하신 분들이, 세상은 퇴직하면 퇴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눈 여겨 봐야 보이는, 조그만한 꽃을 그냥 작은 꽃이라고 보세요. 자기 틈새에 있는 귀한 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고 난 이후로는 열정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있으면 바로바로 하루 이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없애 주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왜 지난주 설교로 끝내지 않고, 이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나누고 싶었어요. 지난주와는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자는 거예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대답하길,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가 방송실에 요청했더니, 직원이 어색하다고 했어요. '목사님, 이거 어디 그 어색하잖아요. 뿐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썼어요. 왜 '뿐인이다'라고 썼겠냐고요. 제자들 입장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린아이 도시락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출처가 어린아이 도시락이라고 나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장난치나? 예배 풀치를 하려고 이걸 갖고 왔냐?' 그런데 놀라운 건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죠.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은밀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이 보잘이 뿐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갖고 왔는데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꽃이 너무 존귀하고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뿐인이다' 인생을 '충분하다'로 바꾸어 주세요. 저는 주님 만나기 전에 '뿐인이다' 인생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고 죽고 싶다고 미시간 호수까지 가봤지만, 실제로 시도한 건 아니에요.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우울하고 밥이나 춥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충분하다'의 인생이 되었어요. 주님 앞에 너무나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어요.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20대 때 제가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20대, 30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뿐인이다' 인생은 누구나 겪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비하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저를 비하하기를 원해요.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저를 만나서 득담하시느라고 '목사님은 뭘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사업하면 잘하셨을 거예요'라고 하시면, 그런 칭찬으로 기분이 나빠요. 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 어디 시느냐고요? 뭘 해도 다 잘하는 사람이면요. 그래서 저는 저를 피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비하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비하가 충분치 못하니까요. 더 비하하고 더 비하해도 '뿐인이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가지예요.

젊은 관원과 예수님의 대화

설교자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한 관원이 예수님께 찾아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장면을 봉독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말씀하시자 관원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며,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자신을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설교자는 이 관원이 젊은 나이에 관원이 되어 세상적 부귀와 권세를 가졌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다고 풀어 줍니다. 그러나 그가 큰 부자였기에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했다는 결말을 전하며, 세상의 소유보다 영생의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적용을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관원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가져왔다는 점도 짚으며, 신앙은 질문의 크기만큼 자란다는 말로 청중에게 질문하는 신앙을 권합니다.

노우호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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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아멘.

에리히 프롬과 『소유냐 존재냐』

설교자는 유대인 혈통의 독일계 철학자 에리히 프롬과 그의 대표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소개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소유 중심의 삶은 사물, 명예, 지식, 인간관계까지 내 것으로 삼아 잃을까 두려워하며 존재가 소유에 예속되는 방식입니다. 반면 존재 양식은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사랑하고 나누는 과정 자체에 가치를 둡니다. 설교자는 프롬의 통찰이 깊지만 그 생각이 하나님께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고 평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이 문제를 성경이 오래전부터 말해 왔다며 이삭의 이야기를 다음 대목으로 연결합니다.

노우호 · 2026-10-23

설교 내 22–2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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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보세요. 여러분, 에리히 프롬이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 유대인 혈통이에요. 이 사람이 쓴 책 중에 『소유냐 존재냐』, 아주 유명하죠. 프롬이 쓴 책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아마 대표적인 저서가 『소유냐 존재냐』예요. 소유가 소중하냐, 존재가 소중하냐? 사실은 물어보나 마나죠. 그런데도 이것이 왜 명제가 되어 세상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느냐? 사물, 명예, 지식, 심지어 인간관계나 자아까지도 자기가 가져야 하는 소유로 생각하는 삶의 방식인데, 내가 가진 것하고 내가 하나가 되어 소유물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거예요. 소유 중심의 인간 정체성은 그런 거예요. 사물과 지식과 명예와 이런 모든 것까지 자기 것, 내 것이라고 해요. 그것이 손상받지 않으려고 하고 더 가지려 하고 잃을까 싶어 두려워하고, 온통 존재가 소유에 함몰되어 버린, 소유에 예속되어 버린 존재인 거예요. 그다음에 소유 양식 말고 두 번째, 존재 양식이에요. 무언가를 소유하려고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경험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방식인데, 내면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사랑하고 타인과 깊이 공감하고 나누는 과정 그 자체에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존재 양식에는 나 자신이 나의 주인이 되므로 외부의 조건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소유보다 존재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프롬이 그렇게 유명한 현대 철학자라고 할지라도 생각이 거기까지 가고 말더라고요. 하나님에게까지 안 간 거야.

이삭의 우물 이야기

설교자는 창세기의 이삭이 브엘세바 근방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께서 애굽에 가지 말고 이 땅에 머물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해 거부가 된 이야기를 전합니다. 목축에 우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한 뒤, 이삭이 우물을 팠지만 그랄 목자들이 와서 다투자 싸움을 피하기 위해 우물을 내주었다고 말합니다.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을 때 그랄 목자들이 다시 대적하려 하자 이삭은 또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세 번째 우물에서는 물이 넉넉히 나와 풀밭과 양 떼가 불어나고 평화롭게 우물을 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그랄 목자들은 이삭에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는 것 같다고 말하며 사과하고 서로 침략하지 않는 약속을 맺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가 소유보다 존재를 중시한 삶의 모범이며, 예수님께서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하신 말씀과 맞닿아 있다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3

설교 내 25–33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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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문제를 가지고 성경은 진작부터 이야기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 같아요? 이삭이에요. 이삭이 브엘세바 근방에서 양을 치는데 우물을 가지고 그랄 목자들이 와서 시비를 거는 거예요. 이삭이 거부가 됐거든요. “애굽에 가지 말고 이 땅에 거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걸핏하면 미국 가려고 그래, 그렇죠? 그때 미국이 뭐냐? 그때 미국이 애굽이야. 나일강 물이 넘치고 비옥한 토양에 양식 걱정 없고 외적의 침입도 없고, 최고로 좋은 곳이 애굽인 거라. 전부 다 그렇게 가는데 심지어 아브라함도 갔다가, 물론 혼나고 왔지만, 이삭도 좀 어려우면 또 갈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미리 “너 애굽 가지 말고 여기 유하라. 그러면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그랬더니 이삭이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애굽에 가지 않고 거기 머물렀더니 정말 백 배나 주신 거야. 거부가 됐어요. 여러분, 거부가 되면 집에서 같이 일하는 청지기나 노예도 있고 가족도 있고, 목축하는 사람이 거부라는 것은 양 떼가 많다는 거예요. 양 떼가 많으면 풀밭이 좀 넓어야 하고, 그다음에 중요한 게 우물이에요. 양이나 염소는 풀 속에 일정량의 수분이 있기 때문에 물을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양들도 물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우물을 파야 하는데 요즘처럼 우물 파는 기계가 발달한 게 아니고, 어디 산을 딱 둘러봐서 여기쯤 파면 물이 나겠다는 것을 경험상 알아서 파는데, 상당히 깊이 파요. 우리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깊이 파야 물이 있습니다. 또 깊이 파는데 흙으로 된 땅이라면 시간만 가면 파낼 수 있지. 그런데 돌이 나와 버렸어요. 그럼 발파도 못 하는데 어떻게 해요? 그런 면에서 우물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수, 생명과 직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소유 중에서 굉장히 소중한 소유가 우물입니다. 어떤 데는 우리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물줄기가 바위틈에서 졸졸 나오는데, 아인 카렘이라고 세례 요한의 본가, 엘리사벳이 있던 그 본가 동네 입구에 가면 진짜 바위틈에서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물이 졸졸 나와요. 이것 하나밖에 없는데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물줄기 하나 때문에 한 동네가 삽니다. 그것이 없으면 못 사는 거예요. 우물은 생명과 같아요. 그런데 목자들이 와서 다투니까 이삭이 ‘이걸 다투네. 다투면 싸움 나지’ 하는 거예요. 싸움이 나면 싸워서 이겨도 누군가는 죽어야 돼. 그런 목자들이 우물이 탐나서 우물만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우물이 생명과 같은데 그것을 내놓으라 하면 순순히 내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바로 싸움 나죠. 싸움이 나면 우물만 빼앗는 게 아니고 다 죽여 버리고 빼앗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삭이 ‘소유냐 존재냐? 우물을 안 뺏기려고 하다가는 우물도 뺏기고 생명도 뺏길 것 아니냐.’ 그렇죠? 그래서 존재를 생각해서 소유, 우물을 깨끗이, 안 싸우고 흔쾌하게 “가지시라” 그렇게 한 거예요. 다른 그림을 봐요. 다른 데 가서 또 우물을 파요. 팠는데 더 좋게, 아까는 말다툼이 일어났잖아요. 이것은 더 좋게 했더니 더 좋은 물을 팠는데 물이 더 좋게, 많이 나와요. 그랬더니 또 와서 그러자 ‘싯나’라고 했어요. 싯나가 뭐냐? 아예 대적하겠다는 거네. 우물을 줬잖아요. 줬으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되지 왜 또 와서 애먹이느냐? 완전히 대적이 되겠다는 거예요. 그때 이삭은 그래도 소유보다 존재가 더 소중하니까 ‘대적하겠다니까 내가 또 줘야지.’ 또 주고 양보하고 다른 데 가서 팠어요. 이번에는 좀 더 근사하게 우물을 팠는데, 가서 보니까 아까보다 훨씬 풀밭도 넓고 양 떼도 더 많이 불어났고 우물도 더 멋지고, 평화롭게 우물을 길어요. 여기 여자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와서 우물을 긷잖아요. 두 번 양보하고 세 번째 가서 우물을 파니 또 물이 나와요. 그러니까 이것을 그랄 목자들이 다 본 거야. 딱 보니까 ‘희한하네, 저 사람이.’ 그래서 그랄 목자들이 찾아와요. 이삭이 하는 것마다, ‘왜 저 사람들은 손만 대면 우물이 나오지? 왜 자꾸 더 좋아지지?’ 여기에 우물을 파고 이름을, 이삭은 확장됐잖아요. 확장된 거야. 더 잘됐잖아요. 여러분, 양보하고 양보하고 왔는데 세 번째 와서 더 확장됐어요. “하나님이 내 장막의 터를 넓히셨도다” 하면서 확장됐다는 뜻으로 ‘르호봇’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거예요. 얼마 있다가 아까 그 그랄 목자들이 찾아왔어요. 와서 하는 말이 “이삭 어르신, 우리가 어르신의 삶을 멀찌감치서 유심히 살펴봤는데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당신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도지 같은 것은 안 줬어요. 전도지도 사영리도 안 줬는데 이삭의 삶이 살아 있는 전도지야. 양보하고 또 양보하고 안 싸우고, 또 말없이 가서 우물을 팠더니 물이 나는 것을 보고 ‘저 사람들은 믿는 신이 있는데 그 신이 진짜 같다.’ 찾아와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앞으로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불가침 조약을 맺고, 이삭이 “잘 들어오셔서 앞으로 잘 지내 봅시다” 하고 대접해서 보냈다는 거예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설교자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소개하며, 이 책이 소유 중심의 인간 정체성과 존재 중심의 삶을 구분했다고 설명합니다. 사물, 명예, 지식, 심지어 인간관계와 자아까지 자기 것으로 여겨 잃을까 두려워하는 소유 중심의 삶은 존재가 소유에 예속된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존재 양식은 무언가를 움켜쥐지 않고 내면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사랑하고 나누는 과정 자체에 가치를 둔다고 풀이합니다. 설교자는 프롬이 유명한 현대 철학자였지만 생각이 하나님께까지는 가지 못했다고 평합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를 성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말해 왔다며 창세기의 이삭 이야기로 연결합니다.

노우호 · 2026-10-21

설교 내 22–2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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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에리히 프롬이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 유대인 혈통이에요. 이 사람이 쓴 책 중에 『소유냐 존재냐』,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프롬이 쓴 책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아마 대표적인 저서가 『소유냐 존재냐』. 소유가 소중하냐, 존재가 소중하냐? 물어보나 마나죠, 사실은. 그런데도 이게 왜 명제가 돼 가지고 세상 모든 사람 입에 오르내렸느냐? 사물, 명예, 지식, 심지어 인간관계나 자아까지도 자기가 가져야 되는 소유로 생각하는 삶의 방식인데, 내가 가진 것하고 내가 하나가 돼서 소유물처럼 이렇게 돼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소유 중심의 인간 정체성은 그런 거예요. 사물과 지식과 명예, 이런 모든 것까지 자기 것, 내 것이다. 그것이 손상받지 않으려고 하고, 그걸 추가로 가지려 하고, 잃을까 싶어 두려워하고, 온통 존재가 소유에 함몰돼 버린, 소유에 예속돼 버린 그런 존재인 거예요. 그다음에 소유 양식 말고 두 번째, 존재 양식. 무언가를 소유하려고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경험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방식인데, 내면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사랑하고 타인과 깊이 공감하고 나누는 과정 그 자체에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존재 양식에는 나 자신이 나의 주인이 되므로 외부의 조건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소유보다 존재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프롬이 그렇게 유명한 현대 철학자라고 한다 할지라도 거기까지 가고 말더라고. 생각이 하나님께까지 안 간 거야.

이삭의 우물 양보와 르호봇

설교자는 창세기의 이삭 이야기를 소유보다 존재를 중시한 모델로 소개합니다. 이삭은 브엘세바 근방에서 양을 치며 거부가 되었는데, 그랄 목자들이 그가 판 우물을 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설교자는 우물이 목축민에게 생명과 직결된 소유이기에, 다투면 우물도 생명도 잃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삭은 싸우지 않고 우물을 넘겨준 뒤 다른 곳에서 다시 팠고, 이런 양보가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세 번째 우물에서는 물이 넉넉히 나와 터가 넓어졌고, 이삭은 그곳을 르호봇이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그랄 목자들이 찾아와 하나님이 이삭의 삶과 함께하시는 것 같다고 말하며 사과하고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는 점을 설교자는 살아 있는 전도지라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가 산상수훈의 양보의 말씀과 이어진다고 덧붙입니다.

노우호 · 2026-10-21

설교 내 25–33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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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문제를 가지고 성경은 진작부터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사람이 누구 같아요? 이 사람. 왜 이삭이요, 이삭. 이삭이 브엘세바 근방에서 양을 치는데 우물을 가지고 그랄 목자들이 와서 시비를 거는 거야. 이게 그랄 목자들이고 이거 이삭인데, 이삭이 거부가 됐거든. 그해에 “애굽에 가지 말고 이 땅에 거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걸핏하면 미국 가려고 그러죠? 그때 미국이 뭐냐? 그때 미국이 애굽이야. 나일강 물이 넘치고 비옥한 토양에 양식 걱정 없고, 아무 외적의 침입이 없고, 최고 좋은 곳이 애굽인 거라. 전부 다 그렇게 가는데, 심지어 아브라함도 갔다가 물론 혼나고 왔지만, 이삭도 어렵고 하면 또 갈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미리 “너 애굽에 가지 말고 여기 유하라. 그러면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그랬더니 이삭이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애굽에 가지 않고 거기 머물렀더니 정말 백 배나 주신 거야. 마침내 거부가 됐어요. 거부가 되면 집에서 같이 일하는 청지기, 노예, 이런 사람도 있고 가족도 있고, 이렇게 하다 보면 거부가 뭐냐? 목축하는 사람이니까 양 떼가 많아. 양 떼가 많으면 풀밭이 좀 넓어야 되고, 그다음에 중요한 게 우물이야. 양이나 염소는 풀 속에 일정량의 수분이 있기 때문에 물을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양들도 물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우물을 파야 되는데, 요즘처럼 우물을 파는 기계가 발달된 게 아니고 어디 산을 딱 봐 가지고 ‘여기쯤 파면 물이 나겠다’ 하고 경험상 알아서 파는데, 상당히 깊이 파요. 우리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깊이 파야 물이 있습니다. 또 깊이 파는데 흙으로 된 땅이라면 시간이 가면 파낼 수 있지. 그런데 돌이 나와 버렸어. 그럼 발파도 못 하는데 어떻게 해요? 그런 면에서 우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명수, 생명과 직결돼 있어요. 그래서 소유 중에서 굉장히 소중한 소유가 우물입니다. 어떤 데는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물줄기가 바위틈에서 졸졸 나오는데, 아인 카렘이라고 세례 요한의 본가, 엘리사벳이 있던 그 본가, 그 동네 입구에 가면 진짜 바위틈에서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물이 졸졸 나와요.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물줄기 하나 때문에 한 동네가 삽니다. 그게 없으면 못 사는 거예요. 우물은 생명과 같은데 그 목자들이 와서 다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삭이 ‘이걸 다투네. 다투면 싸움 나지. 싸움 나면 싸워서 이겨도 누군가는 죽어야 돼.’ 이 목자들이 우물이 탐나서 우물만 빼앗으러 온 게 아니고, 우물이 생명과 같은데 그걸 내놓으라 하면 순순히 내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바로 싸움 나죠. 싸움 나면 우물만 빼앗는 게 아니고 다 죽여 버리고 빼앗는 거거든, 그게. 그러니까 이삭이 소유냐 존재냐, 우물 안 뺏기려고 하다가는 우물도 뺏기고 생명도 뺏기고 그럴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래서 존재를 생각해 가지고 소유, 우물을 깨끗이 안 싸우고 흔쾌하게 “가지시라” 하고 그렇게 한 거예요. 다른 그림을 봐요. 다른 데 가서 또 파요. 우물을 팠는데 더 좋게, 아까는 막대기 들고 일어났잖아요. 이건 더 좋게 했다니까요. 더 좋은 걸 팠는데 물도 좋게 나와요. 많이 나와. 그랬더니 또 와서, 싯나라 그랬어. 싯나가 뭐냐? 아예 그냥 이것들이 대적하겠다는 거네. 우물을 줬잖아요. 줬으면 그걸 가지고 있으면 되지 왜 또 와서 애먹이냐? 완전히 대적이 되겠다는 거예요. 그때 이삭은 그래도 소유보다는 존재가 더 소중하니까 ‘그래, 대적하겠다니까 내가 또 줘야지.’ 또 주고 양보하고 다른 데 가서 또 팠어. 이번에는 좀 더 근사하게 우물을 팠는데, 가 봤더니 아까보다 훨씬 풀밭도 넓고 양 떼도 더 많이 불어났고 우물도 더 멋지고, 평화롭게 우물을 길었는데 여기 여자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와서 우물을 긷잖아요. 두 번 양보하고 세 번째 가서 우물을 파서 또 물이 나니까 이걸 그랄 목자들이 다 본 거야. 딱 보니까 ‘희한하네, 저 사람이.’ 그래서 그랄 목자들이 찾아와요. ‘이삭이 하는 것마다 왜 저 사람들은 손만 대면 우물이 나오지? 왜 자꾸 더 좋아지지?’ 우물 이름을, 이삭은 확장됐잖아. 더 잘됐잖아. 여러분, 양보하고 양보하고 왔는데 세 번째 와서 더 확장됐다. “하나님이 내 장막의 터를 넓히셨도다” 하면서 이름을 확장됐다, 르호봇이라고 지었다는 거예요. 얼마 있었는데 아까 그 그랄 목자들이 찾아왔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삭 어르신, 우리가 어르신의 삶을 멀찍이서 유심히 살펴봤는데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당신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도지 이런 거 안 줬어. 전도지고 사영리고 그런 것도 안 줬는데, 이삭의 삶이 살아 있는 전도지야. 양보하고 또 양보하고 안 싸우고, 또 말없이 가서 우물을 팠더니 물이 나고 하는 걸 보고 ‘저 사람들은 믿는 신이 있는데 그 신이 진짜 같다.’ 찾아와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앞으로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불가침 조약을 맺고, 이삭이 “잘 들어오셔서 앞으로 잘 지내 봅시다” 하고 대접해서 보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