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와 두 편의 시
설교자는 에리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1976년에 출간된 책이며, 고등학교 시절 교회 문고에 꽂혀 있었거나 대학생 형, 누나들이 이 책으로 토론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면서 마음에 새겨졌다고 회고합니다. 나중에 직접 읽어 보니 내용이 복잡하고 설명이 어려웠지만, 주장만큼은 단순했다고 말합니다. 그 주장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소유 방식과 존재 방식의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소유 방식의 삶은 대학 학력, 직업, 재산, 타고 다니는 차처럼 가진 것이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고 보고, 존재 방식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꿈을 가지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오늘날 사회가 사람을 인품보다 옷차림, 연봉, 차로 판단하는 극단적인 소유 중심 사회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소유 중심의 삶이 끊임없이 비교하게 하고, 지위를 잃으면 자기 자신을 잃은 듯 불안하게 만들며, 인간관계를 득실로 바꾸는 문제를 낳는다고 지적합니다. 이어 에리 프롬이 인용한 두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테니슨의 시는 갈라진 벽 틈의 꽃을 뿌리째 뽑아 손에 든 소유의 마음을 보여 주고, 바쇼의 냉이꽃 시는 꺾지 않고 바라보는 기쁨을 보여 준다고 대비합니다. 설교자는 이 대비를 근거로 우리 교회가 꽃을 꺾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눈여겨 살펴야 보이는 초라한 꽃을 존귀하게 여기며 생명을 존중하신다고 적용합니다.
설교 내 1–2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에리 프로미슨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책인데요. 1976년도에 출판된 책입니다. 그때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 책이 고등학교 때 제 머릿속에 각인된 것입니다. 그때 우리 교회에 작은 교회 도서관이 있었는데, 그 문고에 이 책이 꽂혀 있었던 것 같고, 또는 그때 우리 대학생 형이나 누나들이 이 책을 갖고 토론하는 걸 옆에서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책이 제게 상당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고 나서 이 책을 구해서 읽어 보니까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하고 설명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방식입니다. 소유 방식의 삶은 내가 뭘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삶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이 자기 존재에 영향을 주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등이 소유 중심의 삶입니다. 반면 존재 방식의 삶은 내가 뭘 추구하는 사람인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 존재가 무엇을 바라보고 추구하는지가 인생을 규정짓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모두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존재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에리 프로미슨의 분석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가 두 가지 방식이 비등비등한 사회일까요? 지금은 극단적인 소유 중심의 삶을 추구하고, 그것을 조장하는 세상입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차가 어떤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에리 프로미슨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이미 그때부터 세상이 소유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유 중심의 삶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만족하며 살다가 친구가 큰 집을 사면 자신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런가요? 사회가 소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주차가 어려운데도 트럭을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호텔에서는 경차 타는 손님을 대접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돈을 쓰지 않는 손님을 대접할 필요가 없다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깔려 있습니다. 외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우리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둘째, 소유 중심의 삶은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듭니다. 내 위치가 곧 내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지위나 신분이 곧 존재가 되므로, 그것을 잃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현실에서도 퇴직하면 퇴물이 되는 듯한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 퇴직은 퇴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 중심의 삶은 우리를 호도하고 악하게 만듭니다. 셋째, 소유 중심의 삶은 다른 사람도 소유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소유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평가하므로 인간관계가 망가집니다. 상대방의 존재가 귀해서 사귀는 것이 아니라, 득이 될 사람을 사귀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이 지위를 잃으면 관계를 끊습니다. 이런 것이 소유 중심의 삶의 부작용입니다. 에리 프로미슨은 이 책에서 시 두 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는 영국의 테니슨 시인의 시입니다. "갈라진 벽 틈새에 피는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채 손 안에 들고 있다." 이 시는 꽃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반면 일본의 바쇼 시인의 시는 "눈 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나." 이 시는 꽃을 소유하지 않고도 그 존재를 바라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는 꽃을 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꽃을 소유하지 않아도 그 존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꽃이 여기 있다고 치고 한 번 보세요. 멀쩡히 그 존재로 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꺾어 가지고 꽃꽂이로 만들어 놓으면 이미 그 꽃은 죽은 꽃이에요. 살아 있던 생명력으로 며칠 연장하는 거지. 이게 에리프롬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에서 맨 앞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눈여겨 살펴보니, 콧마하고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는 뭘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꽃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궁금해요. 눈 여겨 봐야 보이는 꽃이에요. 여러분, 꽃구경 가자, 단풍놀이 가자 해서 버스 대절하고 설상 가는 건, 눈 여겨 봐야 찾을 수 있는 꽃이 아니잖아요.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명한 꽃을 보러 가는 건데, 하나님은 눈 여겨 살펴봐야 하는 초라한 꽃, 존재가 별로 없는 꽃을 보고 계신 거예요. 확 뽑아버려도 되는데, 눈 여겨 살펴본 그 꽃이 너무 아름다운데도 꺾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설교 준비하려고 에리프롬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쭉 읽으면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점이 있었어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천 같아요. 그 책 뒤에 보면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그런 내용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에리프롬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모르겠지만, 마음이 감동이 되었어요. 왜 우리 하나님은 테니슨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의 시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신가요? 눈 여겨 봐야 볼 수 있는, 보살 것 없는 초라한 작은 꽃도 인간의 평가긴 하지만, 그걸 존귀하게 보고 눈여겨 보고, 감상하되 생명력을 존중해서 꺾지 않는 게 우리 하나님 성품이구나. 왜 제가 유난히 그게 은혜가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저는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철이 들수록 제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양식의 삶의 기준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식했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걸 사춘기 때부터 느꼈어요. 너무나 가난했고요.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 집에서 중학생 때 충격을 받았어요. 뽀빠이라는 과자를 박스로 사 놓고 먹더라고요. 선반에 올려 놓고, 누나가 매일 놀러갔잖아요. 하나씩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 가난이 제게 결핍이었어요. 외모나 소유물도 부족했고요.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어요. 결핍이 많았습니다. 제 결핍의 정점은 이민 초기예요. 정말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밥벌지'였어요. 20대 초반에요. '밥이나 춥네요'라는 뜻이었죠.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었어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 살기 전에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형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비웃겠나 싶었죠. 막노동하고 살고, 영어도 못 하니까요. 83년도는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도 심했어요. 길 가면 지들끼리 '하이, how are you, fine, thank you' 하는데, 육사람 지나가는데 '하이' 하면 고개를 돌려요.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어요. 제 존재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요. 일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그렇게 살았어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그때 저를 살려 준 건 교회예요. 교회는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어요.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께 이걸 전하고 싶어요. 교회는 그런 기준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고, 막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 중에는 영어 못 하는 걸 대놓고 무시하거든요. 비웃고 그러면 너무 리얼했나? 교회만 가면 그런 걸로 저를 대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어릴 때부터 격려해 주었어요. '너 걱정도 하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되? 네 아버지가 교회를 위해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축복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우리 청년들이, 기성 세대, 은퇴하신 분들이, 세상은 퇴직하면 퇴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눈 여겨 봐야 보이는, 조그만한 꽃을 그냥 작은 꽃이라고 보세요. 자기 틈새에 있는 귀한 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고 난 이후로는 열정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있으면 바로바로 하루 이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없애 주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왜 지난주 설교로 끝내지 않고, 이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나누고 싶었어요. 지난주와는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자는 거예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대답하길,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가 방송실에 요청했더니, 직원이 어색하다고 했어요. '목사님, 이거 어디 그 어색하잖아요. 뿐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썼어요. 왜 '뿐인이다'라고 썼겠냐고요. 제자들 입장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린아이 도시락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출처가 어린아이 도시락이라고 나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장난치나? 예배 풀치를 하려고 이걸 갖고 왔냐?' 그런데 놀라운 건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죠.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은밀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이 보잘이 뿐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갖고 왔는데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꽃이 너무 존귀하고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뿐인이다' 인생을 '충분하다'로 바꾸어 주세요. 저는 주님 만나기 전에 '뿐인이다' 인생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고 죽고 싶다고 미시간 호수까지 가봤지만, 실제로 시도한 건 아니에요.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우울하고 밥이나 춥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충분하다'의 인생이 되었어요. 주님 앞에 너무나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어요.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20대 때 제가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20대, 30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뿐인이다' 인생은 누구나 겪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비하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저를 비하하기를 원해요.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저를 만나서 득담하시느라고 '목사님은 뭘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사업하면 잘하셨을 거예요'라고 하시면, 그런 칭찬으로 기분이 나빠요. 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 어디 시느냐고요? 뭘 해도 다 잘하는 사람이면요. 그래서 저는 저를 피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비하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비하가 충분치 못하니까요. 더 비하하고 더 비하해도 '뿐인이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가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