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개 · 1 / 1쪽 · 한 쪽 20개
담임목사님께 로마서 한 주를 더 부탁하고 싶었던 주간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을 준비하면서 솔직히 마음이 무거웠던 한 주를 떠올립니다. 이 장은 낯선 이름과 '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건축했다'는 기록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서, 이것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말합니다. 본문을 읽는 청중도 같은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짚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담임목사님께 전화를 드려 로마서를 한 주만 더 해 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몇 번이라도 여쭙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장을 전부 다루어야 하는 부담 앞에서 웃음 섞인 어려움을 나눕니다. 이 이야기는 본문 자체가 재미없게 느껴지는 순간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이어지는 설교의 출발점이 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5–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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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러분, 3장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장이 참 당황스럽습니다. 일단 이름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들이 너무 많이 나와요. 게다가 더 당황스러운 것은 내용입니다. 3장은 다 그냥 이런 내용들입니다. 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건축했고, 그다음은 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중수했고, 그다음은 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중수했고. 저희는 시간상 5절까지만 읽었고 제가 오늘 3장을 전부 다 다룰 텐데, 5절 이후도 지금 잠깐 눈으로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다 그런 내용입니다. ‘이거 어떻게 설교하지?’ 담임목사님께 전화드려서 “진짜 로마서 한 주만 더 해 주시면 안 되냐”고 제가 몇 번이라도 여쭙고 싶었던 한 주였습니다.
제사장들이 낯선 성벽 공사에 나서다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1절에 나오는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제사장들이 양문과 근처 성벽을 건축했다는 기록에 주목합니다. 제사장들은 평소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데 익숙했고, 성벽을 쌓고 성문을 만드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설프고 낯설었을 것이며, 서로 웃으면서 일을 했을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럼에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던 그들이 이 일을 피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나중에 제사장복을 입고 성문과 성벽을 성별할 때는 그 위엄이 드러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먼저 나서는 섬김의 자세를 적용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7–7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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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1절을 보십시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이 양문, 제사에 쓰이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양문과 근처 성벽을 건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제사장들이 평소에 성문을 만들거나 성벽 쌓는 사람들은 아니었죠. 제사장이라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성벽을 쌓고 성문을 만드니까 얼마나 처음에는 어설펐겠어요? 낯설었겠어요. 그런 일에는 다들 젬병이었겠죠. 모범을 보이기 위해 팔은 걷어붙였지만 어쩔 수 없이 서투니까 자기들도 웃고 다른 사람들도 웃고 그렇게 했겠죠. 그래도 나중에 제사장복을 입고 성문과 성벽을 성별할 때는 또 얼마나 위엄이 있었겠습니까?
살룸과 그의 딸들이 함께 성벽을 중수하다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9절과 12절에 나오는 예루살렘 지방의 행정관들을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던 르바야와, 다른 절반을 다스리던 살룸이 자기 도시의 성벽을 맡았다고 설명합니다. 그중 살룸은 자기 딸들과 함께 성벽을 중수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눈에 띕니다. 설교자는 무너진 성벽을 쌓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떠올리며, 딸들이 무거운 돌을 옮기다 여린 손을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딸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자녀를 단기 선교사로 보낸 부모의 마음에 빗대어 적용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9–9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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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살룸의 이야기는 더욱더 아름다운 면이 있어요. 12절 보십시오. 살룸이 누구와 함께 성벽을 중수했다고 되어 있습니까? 자기 딸들과 함께. 여러분, 무너진 성벽 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저도 딸 가진 아빠로서 그런 생각을 한번 해 봅니다. ‘이 딸이 무거운 돌을 옮기다가 그 여린 손에 상처라도 나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 아버지는 딸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던 거죠. 마치 자녀를 단기 선교사로 보낸 부모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다른 도시에서 찾아온 지도자들과 주민들
설교자는 예루살렘 성벽 공사에 주변 도시의 지도자들도 함께 참여했다고 소개합니다. 벧학게렘, 미스바, 벧술, 그일라 같은 유다 지방의 작은 도시들이 언급되며, 특히 벧술과 그일라는 예루살렘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리고, 기브온, 사노아 사람들은 지도자 없이도 공사에 나왔다는 점도 함께 짚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고 해서 자기 도시의 성벽이 무너진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참여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이유를 그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아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교회를 돕는 모습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실 것이라고 적용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10–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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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예루살렘 행정관들뿐만 아니라 주변 도시의 행정관들도 와서 이 성벽 쌓는 일을 도왔습니다. 다 유다 지방의 도시들이었는데 다 작은 소도시입니다. 14절에 벧학게렘, 15절과 19절에 나오는 미스바, 16절에 나오는 벧술. 참고로 이 벧술 지방에서 온 16절의 느헤미야는 우리가 아는 느헤미야와 동명이인입니다. 그리고 17절과 18절에 그일라, 다 유다 지방의 도시들이었어요. 특히 벧술과 그일라는 예루살렘에서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였습니다. 거기서부터 지도자들이 사람들과 함께 온 거죠. 심지어 2절에 여리고 사람들, 7절에 기브온 사람들, 13절에 사노아 사람들은 지도자가 없이도 참석했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이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들이 사는 도시의 성벽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일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왜요?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았지만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일이면 함께하겠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보셨을까요?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교회가 교회를 도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게 보실까요?
말기야가 맡은 분문 수리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14절에 나오는 벧학게렘 지방의 지도자 말기야를 소개합니다. 말기야는 예루살렘의 쓰레기와 배설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분문을 중수했습니다. 설교자는 '분'이 오물이나 배설물을 뜻한다고 설명하며, 이 문이 똥문이라 불릴 만큼 궂은 자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리에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팻말을 세우기는 어색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데도 말기야는 이 자리를 기꺼이 맡았습니다. 설교자는 남들이 꺼리는 일을 맡은 그의 모습을 보며, 그런 사람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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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도 14절,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다 온 말기야의 이야기는 또 더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14절을 자세히 보시면 그는 분문을 중수합니다. 한글로 분문 하니까 멋있어 보이죠? 여기서 ‘분’은 오물, 배설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덩 게이트’입니다. 예루살렘의 쓰레기와 배설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문입니다. 똥문입니다, 똥문. 그거 지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여기 내가 지었음’이라고 팻말 하기 이상하잖아요. 그런데도 말기야는 여길 맡은 것이죠. 나중에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드고아 귀족들의 거부와 드고아 사람들의 두 구간 수고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5절에 나오는 드고아 귀족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의 작은 성읍이었고, 귀족들은 공사를 돕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원문이 멍에를 매려 하지 않았다는 강한 거부의 표현을 쓴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다고 말하며, 교만이나 느헤미야에 대한 적대감 등을 가능성으로만 언급합니다. 반면 귀족이 아닌 드고아 사람들은 오히려 두 구간을 중수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대비를 통해 성벽 공사에 참여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은 헌신이었음을 적용합니다. 귀족들은 함께 세워지는 성벽을 보는 기쁨을 놓쳤다고 말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13–16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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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든 소도시 지도자들이 혹은 그 도시 귀족들이 이렇게 성벽 재건에 헌신했던 것은 아닙니다. 5절에 드고아라는 지역의 귀족들이 나오는데요.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던 유다의 작은 성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모스라는 선지자가 바로 이 드고아 도시 출신이에요. 그런데 그 드고아 귀족들은 공사를 전혀 돕지 않았습니다. 한글 성경은 그저 분담하지 않았다 정도로 되어 있지만 원문으로 보면 훨씬 더 강력한 거부의 표현을 써요. 자기 목에 멍에를 매려고 하지 않았다, 멍에를 매고 일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표현입니다.
드고아의 일부 고위층은 성벽 건축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왜 그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교만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강 건너 페르시아에서 총독으로 온 느헤미야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죠. 아무리 그가 자기 동족이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 드고아 귀족들의 행동 덕분에 우리는 이 성벽 재건 공사에 참여하는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헌신이요 섬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었겠습니까? 무거운 돌을 옮겨야 했고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려야 했을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직업이 있었고 돌봐야 할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처럼 참여하지 않을 이유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이유들을 모두 작게 여긴 것이죠. 누군가는 목을 빼고 뒤로 물러섰지만 누군가는 기꺼이 자기 목에 멍에를 매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일을 남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했습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드고아의 사람들은 오히려 5절과 27절에서 두 구간을 중수합니다. 므레못이라는 사람도 4절과 21절에서 두 구간을 중수하고요. 므술람이라는 사람도 4절과 30절에서 두 구간을 중수합니다. 20절에 나오는 바룩이라는 사람은 한 구간을 중수했지만 성경은 그가 그것을 힘써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만 ‘힘써’라는 말이 나와요. 아마도 제일 어려운 구간을 공사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