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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개 · 1 / 1쪽 · 한 쪽 20개

젊은 시절 자기 생각만 했던 실수

설교자는 자신이 젊었을 때의 실수를 꺼냅니다. 당시 그는 교회의 일을 두고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라고 생각했고, 정작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것이 사람을 자기 생각으로 평가하고 이끌려는 육신적인 태도였음을 돌아봅니다. 이어서 사람이 하는 과정과 결과는 부자연스럽기 쉽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을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기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을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여러분도 이런 때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도록 적용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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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존재는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빛을 비춰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한참 젊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결국 결과를 보게 만들어요. 내가 하는 것, 여러분이 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의 결과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깁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았던 그 가론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사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이후에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디에 쉬었습니까?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뭐였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옵니다.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돼 있어요. 사람마다 뭘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3명이나 모여서 같이 성령님의 인도를 맛보고 삶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들어와야 하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의 가르침,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도망가는 것이었죠.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죄라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도망가는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보면, 출애굽하고 나서 그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갑니까? 옛날 생각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었던 옛자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옛날엔 이랬었지, 저했었지.' 그런데 우리는 다 새생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옛자에 속지 말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두려움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를 의심하죠? 주님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의심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단절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소명이 생깁니다. 여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유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코이노니아 얘기했잖아요.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죠? 나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 번째 누굴 나눴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눴고, 두 번째는 간증을 했고, 세 번째는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그러니까 영적으로, 혼적으로 풀리면 무엇이 풀리죠? 물질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다 풀리게 됩니다. 순서가 있더라고요. 근데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이 되고, 혼쪽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막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그것도 주님께 맡기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혼까지도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이루셨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제입니다. 나눔입니다. 그게 영적인 교제든, 육적인 교제든, 아니면 물건을 통한 교제든, 그 코이노니아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합에요. 누구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사람과의 연합이 됩니다. 사람이 연합이 되면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 통해 저변이 확대됩니다. 근데 그게 없으니까 요즘 교회는 다들 힘듭니다. 마음속에서 꺼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뭐를 꺼내 놓으면 그냥 듣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정작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고 계시니까, 그것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듯이 삶 가운데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가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질 때, 주님이 서로 일으켜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면 너희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어요.' 교제.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 누구와 교제가 되죠? 지체들과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거기에서는 기도가 있을 것이고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교제가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같이 교제하다 보면, 아, 내가 내 모양이 이래서, 내 죄성이 이래서 이렇게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일부분이고, 잠시 보여지는 일부분이고, 죄를 꺼내 놓고 좋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다른 것도 같이 꺼내 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무언가 간증을 들어보고 그걸 판단하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고 여겨질 수 있게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때는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떤 간증이 있고, 어떤 죄성이 있어. 그걸 하나님께 고발했더니 이렇게 해 주셨어.' 이게 자부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다가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광야 생활 중에서 제일 감사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런 것도 있지만 매일매일 뭘 내려 주셨습니까? 만나.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근데 그 만나의 양이 많아도 안 됩니다. 딱, 집안에 네 식구라면 네 개만 딱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더 주면 받아야 되나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 양식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보여지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제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 말하기를 더고 뭐라고 얘기하시죠? 듣기를 속해하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음으로써 벌써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한 분이라면, 그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떤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과 더 뛰어난 것을 불러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의 그릇이 있고 저만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점진적으로 단련한 후에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단련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떤 교제를 통해, 어떤 마음을 통해 흔들리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이 수직적인 관계가 해결되면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절.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설교자는 요한복음 13장의 최후의 만찬 장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똑같이 씻어 주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발을 씻는 일이 단순히 죄를 씻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위치로 내려가 눈높이에서 들어주고 교제하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에 누가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경지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과의 기준 안에서 낮아진 상태로 서로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제를 단계나 급으로 나누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성도는 서로 높여 주고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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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절은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 함께 46절을 읽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는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마지막 만찬, 즉 최후의 만찬이 나와요. 거기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똑같이 씻어 줘라'고 말씀하십니다. 발을 씻는다는 건 죄를 같이 씻어 주는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사람의 눈높이에 가서 들어주고 교제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생각이나 의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목적은 그 사람의 위치에 들어가서 같이 하는 거예요. 동일한 선상에서 그 사람을 통해 교제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죠? '이 사람이 낮아'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다 죄인이기 때문에 누가 높고 낫고 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A를 깨달았고, 어떤 사람이 B를 깨달았어요. 그들이 만나서 교제하면, 풍요롭고 좋겠죠.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누가 있나요? 예수님이 있으니까요. 좋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경지와 이 사람의 경지는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람의 경지를 향해서 가야 합니까? 아니요.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기준이 있어요. 하나님과 여러분의 만남의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기준 안에서 낮아진 상태에서 서로 교제하면, 주님의 은혜가 있고, 서로 오해가 아니라 높고 낮음이 없는 교제가 됩니다. 교제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얘기한 걸 들어주고,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해야 돼'라는 명령이 아니라, 서로 은혜 나누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교제, 코인노니아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교제에 대해 도시락을 만드는 거예요. 원 스텝, 투 스텝, 쓰리 스텝, 4단계 이런 게 아니에요. 교제는 주님 안에서 하나면 돼요. 거기에 그레이드를 나누거나, 어떤 급을 나누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만한 존재가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걸 사랑하고 서로 높여 주는 게 맞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방법은 내려가서 씻어 주고,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주셨어요. 그게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과 제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만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믿음을 가지고 누구를 권면하고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아까 처음에 나온 내용은 그런 거예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돼 있어요. 그 가르침을 받으면, 위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에요. 당시의 초대교회는 그렇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성령의 은혜로 여러분 개개인이 교회예요. 교회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역할의 본질은, 서로 낮아진 상태에서 죽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봐야 한다는 거예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돼 있어요. 이건 성만찬이죠. 떡은 말씀이죠. 누가복음 22장 19절을 보겠습니다. '또 떡을 가져다가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고 돼 있어요. 떡은 몸,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기념해야 하는 거예요. 공동체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는 건,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서예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교제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교제하면서 내가 높아지거나, 여러분이 높아지면 안 돼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높아져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자리에서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그 역할들이 안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이 안 돼요. 그걸 기념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라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얘기합니다.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거예요. 육적인 건 제사상의 음식을 먹는 건 맞지만, 서로 교제하면서 음식을 나누고, 떡을 떼고 음료를 마시는 건 맞지만,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건 영적인 삶, 영적인 풍요로움을 얘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5절에서 58절을 보겠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돼 있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먹은 사람들인 거예요. 그럼 그 안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리고 얘기합니다. '이 떡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해요. 영원히 산다. 이 떡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 사람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렇죠? 우리 천국 백성이잖아요. 이미 하늘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이요. 그런데도 여기서 우리가 '높다, 낮다'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그 목적을 만들려고 하는 사탄에게 속는 게 문제예요. 그것들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시고, 주님께 가져가시면, 주님께서 다 흠량하시고 다 해결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미 해결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몸이고 참된 피라. 이것을 먹는 자는 영원하다. 이 말씀이 성만찬의 의미예요. 우리가 이미 성만찬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주님을 기념해야 해요. 계속해서 성령님과 함께 기념하는 삶이 되면, 어떠한 교제든 풍성하게 누릴 수 있고, 먹고 마실 수 있어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은 초교의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서로 주님 안에서 기꺼이 주님을 꺼내 놓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돼 있어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고,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해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사건을 우리가 알고 있어요. 세상 가운데 주님과 없을 때,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거예요. 그 사실들, 그 영적인 교제들이 있을 거예요. 그 하나됨을 왜 바울이 강조하겠어요? 그동안 바울 서신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요. 결국 예수님을 다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힘든 상황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예수 안에 하나라는 걸 반증하려는 거예요. 성령이 너희로 하나되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교제 속에서 분열을 일으킬 수 있겠어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갇힌 자들이기 때문에, 절대 분열이 없어요. 분열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문제인 거예요. 내가 문제인 거지,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을 발견해서 서로 주님과 사귐이 있을 수 있게끔, 계속해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 초대교회도 이러한 문제가 없었을까? 있었어요.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로 버텼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