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설교자는 요한복음 13장의 최후의 만찬 장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똑같이 씻어 주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발을 씻는 일이 단순히 죄를 씻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위치로 내려가 눈높이에서 들어주고 교제하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에 누가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경지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과의 기준 안에서 낮아진 상태로 서로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제를 단계나 급으로 나누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성도는 서로 높여 주고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5
본문 발췌 보기
46절은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 함께 46절을 읽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는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마지막 만찬, 즉 최후의 만찬이 나와요. 거기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똑같이 씻어 줘라'고 말씀하십니다. 발을 씻는다는 건 죄를 같이 씻어 주는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사람의 눈높이에 가서 들어주고 교제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생각이나 의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목적은 그 사람의 위치에 들어가서 같이 하는 거예요. 동일한 선상에서 그 사람을 통해 교제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죠? '이 사람이 낮아'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다 죄인이기 때문에 누가 높고 낫고 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A를 깨달았고, 어떤 사람이 B를 깨달았어요. 그들이 만나서 교제하면, 풍요롭고 좋겠죠.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누가 있나요? 예수님이 있으니까요. 좋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경지와 이 사람의 경지는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람의 경지를 향해서 가야 합니까? 아니요.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기준이 있어요. 하나님과 여러분의 만남의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기준 안에서 낮아진 상태에서 서로 교제하면, 주님의 은혜가 있고, 서로 오해가 아니라 높고 낮음이 없는 교제가 됩니다. 교제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얘기한 걸 들어주고,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해야 돼'라는 명령이 아니라, 서로 은혜 나누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교제, 코인노니아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교제에 대해 도시락을 만드는 거예요. 원 스텝, 투 스텝, 쓰리 스텝, 4단계 이런 게 아니에요. 교제는 주님 안에서 하나면 돼요. 거기에 그레이드를 나누거나, 어떤 급을 나누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만한 존재가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걸 사랑하고 서로 높여 주는 게 맞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방법은 내려가서 씻어 주고,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주셨어요. 그게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과 제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만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믿음을 가지고 누구를 권면하고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아까 처음에 나온 내용은 그런 거예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돼 있어요. 그 가르침을 받으면, 위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에요. 당시의 초대교회는 그렇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성령의 은혜로 여러분 개개인이 교회예요. 교회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역할의 본질은, 서로 낮아진 상태에서 죽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봐야 한다는 거예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돼 있어요. 이건 성만찬이죠. 떡은 말씀이죠. 누가복음 22장 19절을 보겠습니다. '또 떡을 가져다가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고 돼 있어요. 떡은 몸,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기념해야 하는 거예요. 공동체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는 건,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서예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교제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교제하면서 내가 높아지거나, 여러분이 높아지면 안 돼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높아져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자리에서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그 역할들이 안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이 안 돼요. 그걸 기념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라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얘기합니다.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거예요. 육적인 건 제사상의 음식을 먹는 건 맞지만, 서로 교제하면서 음식을 나누고, 떡을 떼고 음료를 마시는 건 맞지만,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건 영적인 삶, 영적인 풍요로움을 얘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5절에서 58절을 보겠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돼 있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먹은 사람들인 거예요. 그럼 그 안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리고 얘기합니다. '이 떡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해요. 영원히 산다. 이 떡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 사람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렇죠? 우리 천국 백성이잖아요. 이미 하늘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이요. 그런데도 여기서 우리가 '높다, 낮다'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그 목적을 만들려고 하는 사탄에게 속는 게 문제예요. 그것들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시고, 주님께 가져가시면, 주님께서 다 흠량하시고 다 해결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미 해결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몸이고 참된 피라. 이것을 먹는 자는 영원하다. 이 말씀이 성만찬의 의미예요. 우리가 이미 성만찬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주님을 기념해야 해요. 계속해서 성령님과 함께 기념하는 삶이 되면, 어떠한 교제든 풍성하게 누릴 수 있고, 먹고 마실 수 있어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은 초교의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서로 주님 안에서 기꺼이 주님을 꺼내 놓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돼 있어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고,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해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사건을 우리가 알고 있어요. 세상 가운데 주님과 없을 때,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거예요. 그 사실들, 그 영적인 교제들이 있을 거예요. 그 하나됨을 왜 바울이 강조하겠어요? 그동안 바울 서신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요. 결국 예수님을 다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힘든 상황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예수 안에 하나라는 걸 반증하려는 거예요. 성령이 너희로 하나되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교제 속에서 분열을 일으킬 수 있겠어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갇힌 자들이기 때문에, 절대 분열이 없어요. 분열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문제인 거예요. 내가 문제인 거지,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을 발견해서 서로 주님과 사귐이 있을 수 있게끔, 계속해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 초대교회도 이러한 문제가 없었을까? 있었어요.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로 버텼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