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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개 · 1 / 1쪽 · 한 쪽 20개

앞차를 박은 사고에 비유한 보속 설명

설교자는 로마 가톨릭의 보속 개념을 쉽게 전하기 위해 운전 중 앞차를 들이받은 상황을 비유로 듭니다. 앞차 주인이 인자하게 내려와 용서한다고 말해도, 보험사에 차량 피해를 보상하고 병원비도 해결해야 사고가 마무리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를 빌려 가톨릭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죄의 결과로 생긴 피해는 남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피해를 갚기 위한 추가적인 실행이 필요하고, 이를 보속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합니다.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고해 신부가 정하며, 가벼운 죄라면 교회 청소나 선행, 성경 구절 암송 같은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보속 체계의 구조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청중이 이해하도록 돕고, 이 체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부담스러운지를 드러냅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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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 생길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고해 신부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고해 신부에게 자신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고백을 듣고 고해 신부는 "너가 너의 죄가 이러하니,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고 바로 마무리가 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속입니다. 보속이란 보상하는 속죄 같은 개념입니다. 뒤에 PPT가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범죄로 인한 보상하는 선행과 죄책에 따른 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독특한 가톨릭의 죄와 벌에 대한 개념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이 주장하기로는, 용서는 죄는 없애 주지만 그 결과는 바꿔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운전을 하다가 앞차를 박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런데 앞차 주인이 인자하게 내려와서 "괜찮아요, 내가 다 용서해 줄게요"라고 한다면, 사실 그걸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보험사에 전화해서 차량 피해를 보상해 줘야 하고, 병원비도 해결해야 합니다. 바로 이 개념을 빌리는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피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갚기 위해 추가적인 실행이 필요하고, 이를 보속이라고 합니다.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고해 신부가 정해 줍니다. 가벼운 죄라면 교회 청소를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거나 성경 구절을 외우는 식의 보속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심각할수록 보속도 더 무거워집니다. 문제는 보속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순결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오히려 더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이 오히려 작은 흠집들을 더 큰 죄로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니라"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이전에는 큰 죄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양심을 짓누르게 됩니다. 보속을 행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모든 보속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동시에 보속을 이행하는 중에 또 새로운 죄가 마음속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정도 죄를 저지르고 보속을 받았는데, 저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더한 삶을 살면서도 고해 신부를 찾아가지도 않고 보속도 하지 않네"라고 생각하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게 되면, 다시 누군가를 미워했다는 죄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보속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보속이 필요해지면, 결국 보속의 양이 무한대로 쌓이게 됩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이 구조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갚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그래서 다 갚지 못한 벌을 잠벌이라고 합니다. 잠벌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요? 잠벌을 해소하지 못한 신자들은 바로 연옥에 가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독특한 교리 중 하나인 연옥 교리가 필요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잠벌을 해결하고 죽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가톨릭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한 신자가 가톨릭 신부에게 질문한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죽은 뒤 거의 천국은 못 간다고 하시더군요. 왜냐하면 치유해야 할 보속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경건하게 살고 훌륭한 삶을 살았는데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없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신부님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아주 성스러운 사람들조차도 완전하고 경건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치유되지 않은 상처, 슬픔, 아픔, 고통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치유하지 못한다면, 그걸 가져가서 천국에 가는 것이겠습니까?"였습니다. 연옥에서의 시간은 단지 하루 이틀, 1년 2년이 아닙니다. 단체의 신고를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단테의 『신곡』에 잘 나와 있듯이, 일곱 가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연옥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한 확신을 원합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그러한 확신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독특한 교리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공로의 보고 교리입니다. 여기서 로마 가톨릭은 잉여 공로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충분한 공로를 쌓지 못한다고 보지만, 성인들, 순교자들, 사도들, 선지자들처럼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값을 치렀고, 그 외에도 잉여된 공로가 있다고 봅니다. 마치 은행에 예금된 돈처럼, 그 잉여 공로는 보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공로의 보고 교리는 가톨릭에게 매우 중요한 시스템입니다. 교황이 그 보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고, 보속을 다 갚지 못한 신자에게 그 공로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톨릭 사전에 들어가서 '대사'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대사는 바로 면죄부입니다. 면죄부를 줄 때 우리가 공수표를 날릴 수 없듯이, 면죄부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아 놓은 공로의 보고입니다. 교회는 그 공로를 마음껏 나눠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공로의 보고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인들은 천국에 가고도 남을 만큼의 잉여 공로가 있어, 부족한 신자가 성인들에게 매달리면 그 잉여 공로가 내려와 연옥에서의 고통이 줄어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공로의 보고 교리를 살리기 위해 로마 가톨릭은 사도신경을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다르게,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모든 성인들이 공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인들이 쌓은 공로나 지상의 신자나,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공로가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공로가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전달될 수 있고,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벌부를 산다면, 그 영혼은 곧바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공로를 얻기 위해서는 마리아 공경이 가장 큰 부분입니다. 마리아를 공경하고, 수많은 성인들을 공경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성인들이 남긴 성유물을 참배하는 것입니다. 성유물을 참배하려면 성지로 가야 합니다. 성지 순례를 많이 하였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면벌부를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용어는 면벌부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용서받았지만 잠벌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면벌부를 구입함으로써 자신의 벌을 면하게 되는 증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의 유회는 지금도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인들은 너무 거룩해서 죽어도 편히 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유회가 남겨져 교회당 안에 전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해 신부를 매일 찾아간 루터

설교자는 루터가 자신의 양심을 매우 민감하게 여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 고민 끝에 고해 신부를 계속 찾아갔다고 전합니다. 고해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와서 신부가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다,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고 매일 찾아갔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모습을 통해 루터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으로 가득했는지를 상상해 보게 합니다. 이후 루터는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가 되지만, 설교자는 이 불안한 내면이 이후 복음을 발견하게 되는 배경이었다고 연결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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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인을 보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그 성인이 쌓아 놓은 잉여 공로가 나에게 오기 때문에, 이 성인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세 번째, 저 빨간색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 상상이 되세요? 바로 아래 턱뼈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아래턱뼈를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분명히 성인의 아래턱뼈죠. 보시면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미린의 성지라고 하는 곳에서 김대건 신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고, 그 김대건 신부에게 기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래턱뼈를 모셔 놓고, 바로 성당 한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아리뼈까지도 그 지하실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게 엄청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성인의 유회가 너무나도 영험하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걸 누구 하나 혼자 갖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눕니다. 보시면 여러분들, 어떤 성당, 어떤 수녀원, 어떤 신부, 어떤 수녀 이렇게 기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척추뼈,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 다 수백 개를 쪼개 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 성인의 어떤 그 영험한 효력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미신과 같은 생각, 즉 우상숭배를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옆에 보시면 번개장 보이시죠?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의 척추뼈를 팝니다. 천만 원에 누가 올렸어요? 저 조그만 뼈조각을. 그래서 얼마 전에 이게 너무나 큰 사건으로 이슈가 터져 가지고, 이 천주교회에서 전수 조사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례나 이러한 어떤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성지를 가야 우리가 성인들의 유회라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성지 순례를 많이 떠났습니다. 이 성지순례야말로 정말 중요한 대사 면벌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중세 때 가장 중요했던 성지는 어디였냐면,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그 다음에 로마.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그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 그 다음에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 이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중세 누군가 8세기쯤에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교황청에서 인정함으로써 성 야고보의 유회가 저기에 있다고 전해지면서,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성지 순례길이 많은 여행자들에게 로망처럼 산티아고 솔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디포스텔라라는 이름으로. 근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죠. 누군가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떤 양측의 목동이 여기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났다. 자기에게 꿈에 나타났다. 봤더니 거기에 묻어 뼈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 여기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구나. 그 정도의 입증 절차였습니다. 중세 많은 사람들이 보시면, 정말 온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저렇게 중세 곳곳에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루트가 지금의 도시들을 만든 루트가 됐어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그 루트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이 성지 순례가 너무 중요하고, 성지 순례주로 지정된 도시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 어떤 축기경 같은 정도의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그 마을 청년 회의에서 난리가 납니다. 누가 대타가 될 것이냐. 그러면 걸린 사람이 그날 밤에 그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순교지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유회가 묻혀 있는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지 순례라고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고, 저 중세 시대 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시면 몇 년 전 일입니다. 보시면 이탈리아 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요청을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너무 크다.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우리 못 살겠다.라고 탄원을 하니까, 교황청에서 아, 그러면 이번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하면 전대사를 주겠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전대사는 뭐냐면, 모든 벌을 다 면해 주겠다. 모든 벌을 다 면해 주는 전대사입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사 대사를 한 번 봤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 내가 구원 얻기에 확신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쌓여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갔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중세 루터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체계 안에서 전혀 자신의 구원의 확신, 죄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실제로 그 루터가 활동했을 당시에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 이름이 요한 태젤입니다. 요한 태젤이 했던 유명한 설교 중 하나가, 돈이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즉시 한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올라가서 천국으로 치행한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면벌부에 써 있는 말이, 모든 성인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그대를 불쌍히 여기며, 나는 그대를 모든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모든 벌을 면제한다. 열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봤자.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하노라. 그럼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자신의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여러 가지 보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석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돈을 전재산을 다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보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중세 로마 가톨릭이 신자들의 양심을 유린하고 있을 때, 그때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보시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고,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경 교수가 됩니다. 참,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한 것도 재밌는 일화인데, 루터가 대학을 다닐 때 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숲을 지나가는데, 그 숲이 너무나도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이 몰아닥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루터가 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누구한테 기도했냐면, 성 안나시여, 혹시나 내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원을 합니다. 여기서 성 안나가 누구냐면,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는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루터가 있던 아이슬라브는 광산 도시였어요.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어릴 때부터 성 안나에게 기도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수도승이 된 것이죠. 그런데 루터는 자기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루터의 고해 신부의 기록인데, 너무나도 루터가 자주 찾아와서,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계속해서 고해 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겠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도 루터는 명석한 두뇌로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루터로 하여금 첫 번째 성경 강의로 시편 강의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로마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강해를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루터로 하여금 이신칭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정확한 경로였습니다. 보시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뭐였을까요? 당연히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심판에 의하겠죠. 이 정도 높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남은 벌을 다 처리해야 되는 그런 의. 나에게 그 높은 고상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심판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시편을 연구한 다음에 강의하려고 한 구절, 한 구절 주의하다 보니까, 시편 3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신다고 한 번에 1차의 의문이 생겼던 거예요. 두 번째로 시편 71편 2절 말씀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쯤 되니까 루터가 너무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절들을 같이 병렬시켜 봤을 때, 루터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신이 배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직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리한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를 이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중세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나는 증오했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실제로는 그분을 증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를 건지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