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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3개 · 1 / 1쪽 · 한 쪽 20개

천둥 속에서 성 안나에게 드린 루터의 서원

설교자는 루터의 젊은 시절 일화를 소개합니다. 루터가 대학을 다니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숲을 지나게 되었는데, 많은 비와 번개, 천둥이 몰아쳤다고 합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느낀 루터는 성 안나에게 기도하며, 무사히 집에 도착하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설교자는 성 안나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이며,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또 루터가 살던 아이슬라벤은 광산 도시였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다는 배경을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루터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성인에게 기도하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말합니다. 이 일화는 루터가 하나님보다 성인에게 의지하며 수도승이 되는 길로 들어섰음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제시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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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인을 보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그 성인이 쌓아 놓은 잉여 공로가 나에게 오기 때문에, 이 성인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세 번째, 저 빨간색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 상상이 되세요? 바로 아래 턱뼈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아래턱뼈를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분명히 성인의 아래턱뼈죠. 보시면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미린의 성지라고 하는 곳에서 김대건 신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고, 그 김대건 신부에게 기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래턱뼈를 모셔 놓고, 바로 성당 한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아리뼈까지도 그 지하실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게 엄청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성인의 유회가 너무나도 영험하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걸 누구 하나 혼자 갖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눕니다. 보시면 여러분들, 어떤 성당, 어떤 수녀원, 어떤 신부, 어떤 수녀 이렇게 기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척추뼈,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 다 수백 개를 쪼개 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 성인의 어떤 그 영험한 효력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미신과 같은 생각, 즉 우상숭배를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옆에 보시면 번개장 보이시죠?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의 척추뼈를 팝니다. 천만 원에 누가 올렸어요? 저 조그만 뼈조각을. 그래서 얼마 전에 이게 너무나 큰 사건으로 이슈가 터져 가지고, 이 천주교회에서 전수 조사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례나 이러한 어떤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성지를 가야 우리가 성인들의 유회라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성지 순례를 많이 떠났습니다. 이 성지순례야말로 정말 중요한 대사 면벌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중세 때 가장 중요했던 성지는 어디였냐면,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그 다음에 로마.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그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 그 다음에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 이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중세 누군가 8세기쯤에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교황청에서 인정함으로써 성 야고보의 유회가 저기에 있다고 전해지면서,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성지 순례길이 많은 여행자들에게 로망처럼 산티아고 솔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디포스텔라라는 이름으로. 근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죠. 누군가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떤 양측의 목동이 여기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났다. 자기에게 꿈에 나타났다. 봤더니 거기에 묻어 뼈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 여기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구나. 그 정도의 입증 절차였습니다. 중세 많은 사람들이 보시면, 정말 온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저렇게 중세 곳곳에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루트가 지금의 도시들을 만든 루트가 됐어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그 루트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이 성지 순례가 너무 중요하고, 성지 순례주로 지정된 도시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 어떤 축기경 같은 정도의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그 마을 청년 회의에서 난리가 납니다. 누가 대타가 될 것이냐. 그러면 걸린 사람이 그날 밤에 그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순교지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유회가 묻혀 있는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지 순례라고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고, 저 중세 시대 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시면 몇 년 전 일입니다. 보시면 이탈리아 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요청을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너무 크다.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우리 못 살겠다.라고 탄원을 하니까, 교황청에서 아, 그러면 이번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하면 전대사를 주겠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전대사는 뭐냐면, 모든 벌을 다 면해 주겠다. 모든 벌을 다 면해 주는 전대사입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사 대사를 한 번 봤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 내가 구원 얻기에 확신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쌓여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갔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중세 루터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체계 안에서 전혀 자신의 구원의 확신, 죄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실제로 그 루터가 활동했을 당시에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 이름이 요한 태젤입니다. 요한 태젤이 했던 유명한 설교 중 하나가, 돈이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즉시 한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올라가서 천국으로 치행한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면벌부에 써 있는 말이, 모든 성인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그대를 불쌍히 여기며, 나는 그대를 모든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모든 벌을 면제한다. 열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봤자.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하노라. 그럼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자신의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여러 가지 보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석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돈을 전재산을 다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보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중세 로마 가톨릭이 신자들의 양심을 유린하고 있을 때, 그때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보시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고,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경 교수가 됩니다. 참,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한 것도 재밌는 일화인데, 루터가 대학을 다닐 때 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숲을 지나가는데, 그 숲이 너무나도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이 몰아닥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루터가 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누구한테 기도했냐면, 성 안나시여, 혹시나 내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원을 합니다. 여기서 성 안나가 누구냐면,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는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루터가 있던 아이슬라브는 광산 도시였어요.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어릴 때부터 성 안나에게 기도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수도승이 된 것이죠. 그런데 루터는 자기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루터의 고해 신부의 기록인데, 너무나도 루터가 자주 찾아와서,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계속해서 고해 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겠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도 루터는 명석한 두뇌로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루터로 하여금 첫 번째 성경 강의로 시편 강의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로마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강해를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루터로 하여금 이신칭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정확한 경로였습니다. 보시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뭐였을까요? 당연히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심판에 의하겠죠. 이 정도 높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남은 벌을 다 처리해야 되는 그런 의. 나에게 그 높은 고상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심판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시편을 연구한 다음에 강의하려고 한 구절, 한 구절 주의하다 보니까, 시편 3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신다고 한 번에 1차의 의문이 생겼던 거예요. 두 번째로 시편 71편 2절 말씀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쯤 되니까 루터가 너무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절들을 같이 병렬시켜 봤을 때, 루터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신이 배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직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리한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를 이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중세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나는 증오했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실제로는 그분을 증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를 건지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고해 신부를 매일 찾아간 루터

설교자는 루터가 자신의 양심을 매우 민감하게 여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 고민 끝에 고해 신부를 계속 찾아갔다고 전합니다. 고해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와서 신부가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다,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고 매일 찾아갔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모습을 통해 루터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으로 가득했는지를 상상해 보게 합니다. 이후 루터는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가 되지만, 설교자는 이 불안한 내면이 이후 복음을 발견하게 되는 배경이었다고 연결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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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인을 보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그 성인이 쌓아 놓은 잉여 공로가 나에게 오기 때문에, 이 성인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세 번째, 저 빨간색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 상상이 되세요? 바로 아래 턱뼈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아래턱뼈를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분명히 성인의 아래턱뼈죠. 보시면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미린의 성지라고 하는 곳에서 김대건 신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고, 그 김대건 신부에게 기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래턱뼈를 모셔 놓고, 바로 성당 한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아리뼈까지도 그 지하실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게 엄청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성인의 유회가 너무나도 영험하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걸 누구 하나 혼자 갖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눕니다. 보시면 여러분들, 어떤 성당, 어떤 수녀원, 어떤 신부, 어떤 수녀 이렇게 기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척추뼈,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 다 수백 개를 쪼개 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 성인의 어떤 그 영험한 효력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미신과 같은 생각, 즉 우상숭배를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옆에 보시면 번개장 보이시죠?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의 척추뼈를 팝니다. 천만 원에 누가 올렸어요? 저 조그만 뼈조각을. 그래서 얼마 전에 이게 너무나 큰 사건으로 이슈가 터져 가지고, 이 천주교회에서 전수 조사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례나 이러한 어떤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성지를 가야 우리가 성인들의 유회라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성지 순례를 많이 떠났습니다. 이 성지순례야말로 정말 중요한 대사 면벌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중세 때 가장 중요했던 성지는 어디였냐면,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그 다음에 로마.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그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 그 다음에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 이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중세 누군가 8세기쯤에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교황청에서 인정함으로써 성 야고보의 유회가 저기에 있다고 전해지면서,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성지 순례길이 많은 여행자들에게 로망처럼 산티아고 솔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디포스텔라라는 이름으로. 근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죠. 누군가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떤 양측의 목동이 여기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났다. 자기에게 꿈에 나타났다. 봤더니 거기에 묻어 뼈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 여기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구나. 그 정도의 입증 절차였습니다. 중세 많은 사람들이 보시면, 정말 온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저렇게 중세 곳곳에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루트가 지금의 도시들을 만든 루트가 됐어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그 루트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이 성지 순례가 너무 중요하고, 성지 순례주로 지정된 도시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 어떤 축기경 같은 정도의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그 마을 청년 회의에서 난리가 납니다. 누가 대타가 될 것이냐. 그러면 걸린 사람이 그날 밤에 그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순교지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유회가 묻혀 있는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지 순례라고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고, 저 중세 시대 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시면 몇 년 전 일입니다. 보시면 이탈리아 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요청을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너무 크다.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우리 못 살겠다.라고 탄원을 하니까, 교황청에서 아, 그러면 이번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하면 전대사를 주겠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전대사는 뭐냐면, 모든 벌을 다 면해 주겠다. 모든 벌을 다 면해 주는 전대사입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사 대사를 한 번 봤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 내가 구원 얻기에 확신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쌓여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갔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중세 루터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체계 안에서 전혀 자신의 구원의 확신, 죄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실제로 그 루터가 활동했을 당시에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 이름이 요한 태젤입니다. 요한 태젤이 했던 유명한 설교 중 하나가, 돈이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즉시 한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올라가서 천국으로 치행한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면벌부에 써 있는 말이, 모든 성인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그대를 불쌍히 여기며, 나는 그대를 모든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모든 벌을 면제한다. 열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봤자.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하노라. 그럼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자신의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여러 가지 보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석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돈을 전재산을 다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보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중세 로마 가톨릭이 신자들의 양심을 유린하고 있을 때, 그때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보시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고,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경 교수가 됩니다. 참,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한 것도 재밌는 일화인데, 루터가 대학을 다닐 때 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숲을 지나가는데, 그 숲이 너무나도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이 몰아닥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루터가 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누구한테 기도했냐면, 성 안나시여, 혹시나 내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원을 합니다. 여기서 성 안나가 누구냐면,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는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루터가 있던 아이슬라브는 광산 도시였어요.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어릴 때부터 성 안나에게 기도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수도승이 된 것이죠. 그런데 루터는 자기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루터의 고해 신부의 기록인데, 너무나도 루터가 자주 찾아와서,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계속해서 고해 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겠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도 루터는 명석한 두뇌로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루터로 하여금 첫 번째 성경 강의로 시편 강의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로마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강해를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루터로 하여금 이신칭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정확한 경로였습니다. 보시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뭐였을까요? 당연히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심판에 의하겠죠. 이 정도 높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남은 벌을 다 처리해야 되는 그런 의. 나에게 그 높은 고상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심판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시편을 연구한 다음에 강의하려고 한 구절, 한 구절 주의하다 보니까, 시편 3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신다고 한 번에 1차의 의문이 생겼던 거예요. 두 번째로 시편 71편 2절 말씀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쯤 되니까 루터가 너무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절들을 같이 병렬시켜 봤을 때, 루터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신이 배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직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리한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를 이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중세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나는 증오했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실제로는 그분을 증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를 건지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루터가 자신을 고백한 말

설교자는 루터가 스스로를 돌아본 고백을 인용하며 그의 내면을 소개합니다. 루터는 자신이 훌륭한 수도사였고 규칙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기에, 규율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는 수도사가 있다면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늘 스스로를 의심했고,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다, 고해에서 빠뜨렸다는 생각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처럼 불확실하고 약하며 고통받는 양심을 인간의 전통으로 치유하려는 노력은 노력할수록 더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을 루터가 매일 깨달았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깨달음이 바로 루터가 로마서 말씀을 붙들고 새로운 진리를 찾게 된 출발점이었다고 적용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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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직접 고백인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훌륭한 수도사였으며 규칙을 너무나 엄격하게 잘 지켜서, 만일 어떤 수도사가 규율들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내가 바로 그 수도사일 것이다." 그는 항상 의심하며 말했다. "너는 그 일을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 너는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다. 너는 그것을 고해에서 빠뜨렸다." 불확실하고 약하며 고통받는 양심을 인간의 전통으로 치유하려는 노력은, 노력할수록 더 불확실하고 약하며 고통받는다는 것을 매일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붙들고, 루터가 비텐베르크 수도원에서 엄청나게 고민하고 기도하며 영적 법민으로 지내던 그 시절에,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루터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느 날, 로마서 1장 17절, 오늘 함께 읽으신 그 구절을 읽을 때, 갑자기 루터에게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이걸 바로 '탑속의 체험'이라고 부르는데요. 실제로 비텐베르크에 가면, 어거스틴 수도원 안에 루터가 체험했던 그 장소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직접 아이폰으로 찍어온 사진이거든요. 그때 루터의 고백을 보시면, "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이 말씀의 의미를 밤낮 묵상하던 중에, 마침내 믿음으로 인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수동적 의를 깨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내가 새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에 증오했었던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바울 서신의 이 구절은 내게 바로 낙원의 문이 되었다. 바로 루터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로마서 1장 17절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가 왜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고백하는 이신칭의의 교리입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해진다는 성경의 진리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오랫동안 가리워져 있다가 다시금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배경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라고 하는 생각을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생각을 당연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가치들을, 세상의 원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아무런 노력이나 공로 없이 무엇인가를 얻는 경우가 우리에게 얼마나 있습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든, 일을 열심히 하든,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노력합니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는다는 원리를 배워 왔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중요하죠. 다른 모든 문제들은 이 세상 살다가 사라질 문제들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영혼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공로 없이, 자신의 어떤 의로운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복락을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장담하고 확신하고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 앞에서 철저히 무너져 본 사람. 그래서 자신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의를 도저히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어떤 고상한 행위나 선행으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루터가 발견한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로마서 말씀을 붙들고 밤낮 주로 묵상하던 중에, 루터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의가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그 의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믿음으로 인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수동적 의를 지시하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수하고 죄를 범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만한 선행을 쌓아올 수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획득하신 그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그 옷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가리워지고, 이제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복음이며, 우리에게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바로 이러한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합니다. 시편 32편 1절 말씀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자신의 죄된 본성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된 본성이 가리워져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이며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평생 자신의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루터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 순간 즉각적으로 내가 새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진짜 낙원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며 계십니까? 우린 때때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차고 넘쳐서, 그 존재도 의식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매 순간 우리가 공기를 들이마시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인데, 항상 우리 주변에 있기 때문에 공기가 공짜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거저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의와 그로 인해 그분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들을 마치 값이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획득해 내신 그 하나님의 의를 마치 자신들이 보관하고 마음대로 나눠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인 것처럼 변질시킨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자들이 피흘리며 싸웠기 때문에 이신칭의의 교리가 재발견되었고, 이 새로운 진리를 시대마다 지켜내고 간직해온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종교 개혁의 신앙을 고백하고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 기념주일을 맞아서, 다시 한번 우리 개신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이 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을 이번 주간 깊이 묵상해 보시면서, 의인된 확신을 가지시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