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와 바늘귀 과장법
설교자는 성경에 나타난 과장법의 예를 들면서 낙타 이야기를 꺼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표현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또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도 함께 언급합니다. 들보는 눈에 있는 굉장히 큰 나무라는 점을 설명하며, 두 비유 모두 현실성이 없는 큰 이미지라고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비유에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상황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이라고 정리합니다. 아울러 천국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려는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예화는 연자 맷돌의 극단적 이미지가 과장법이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입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과장된 표현을 통해 청중이 실족의 의미를 더 분명히 붙잡도록 이끕니다.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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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 보면 연자 몇 도를 그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 거죠? 실족 당한 사람입니까? 실족을 시킨 사람입니까? 뭐 잘 안 들리긴 하지만 여러분들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왜냐면 당연히 실족시킨 사람이 빠진다라고 답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저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아마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였을 것 같은데 그때 동네 언니들과 아주 열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가? 그때는 실족시킨 죄에 대한 그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빠졌는가 여기에 더 집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겨야 했기 때문이죠.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왜 하셨는지를 자세히 한번 같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실족케 하는 죄가 어떤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자 몇 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그 처참한 죽음보다는 실족시키는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지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단순하게 육체적인 죽음의 두려움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그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를 지금 경고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그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라는 말씀은 아니죠. 강렬한 비유를 통해서 죄의 심각성을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기대하고 오신 여러분들에게 이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시작함을 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이미 시작했으니까 연자 몇 돌의 그 큰 것도 한번 보여 드릴게요. 영상이 준비됐으면 한번 보여 주시면 됩니다. 지금 연자 몇 돌을 당나귀가 돌리고 있죠. 여러분들이 그 시골에서 사용했던 그 가정용 몇 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장면도 똑같은 장면인데 이게 실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렇게 당나귀가 몇 돌을 돌렸던 거죠. 변자 몇 돌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제 내려 주셔도 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들며 이렇게 극단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실까요? 성경에서는 이런 표현들을 과장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예들이 몇 가지가 있죠. 그중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는 표현이 있고 또 남의 눈에 튀는 보면서 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들보는 뭐냐면 굉장히 큰 나무가 눈에 있는 거예요. 그니까 정말 현실성이 없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그런 큰 비유를 들고 있죠. 근데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죄의 심각성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떠한 것인가? 또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제는 실족시키는 것이 이렇게 심각하다면 실족이 무엇인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족의 의미는 넘어지게 하다. 또 걸려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인데 구약에서는 원문과 가장 가까운 것이 레위기 19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장애물이나 걸림돌 또는 넘어지게 하는 원인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겠어?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데. 우리의 본문을 좀 연구하고 볼수록 여러분들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죄의 함정에 빠뜨리거나 또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너 때문에 실족했어."라고 말하는 어떤 단순히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죠.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손상시키거나 죄로 넘어지게 하거나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지금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설명하면 여러분이 실족에 대해서 잘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족하게 하는 그 대상이 누군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실족케 하지 말라 하는 대상이 6절에 나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여기서 작은 자를 또 찾아보라면 다시 1절부터 5절의 말씀을 또 봐야 합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교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1절.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 큰 자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여기까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거든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근데 예수님은 거기에 이렇게 응답을 하셨습니다. 한 어린 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리고 3절에 뭐라 했냐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 좀 이상하죠?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천국에 못 들어가. 지금 천국에 들어가는게 문제가 아니야.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천국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왜곡된 신앙, 그 왜곡된 사고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계시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큰 것을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작은 것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전제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지금 천국에 입문도 하지 못했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에서의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일까요? 사회적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은 존재들이고 어린아이에게는 사회적 권력이나 명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지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의존했어야만 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힘도 없고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죠. 성인 남자 중심의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존재 가치도 없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거죠. 그럼 작은 자가 어린아이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요. 바로 "나를 믿는"이라는 수식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작은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이 말은 곧 제자 공동체, 여러분들이 속해 있는 팀, 목장 모든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작은 자들. 그들은 자신을 높일 어떤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 내세울게 없는 자들입니다. 존중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럼 이제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인지 여러분 보이십니까? 보인다면 그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그 중대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실족게 한 적이 있나요? 나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 본 적이 없어. 그를 죄에 빠지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7절을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마태복음 18장 7절입니다. 시작.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무슨 말이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라는 거죠. 문장은 단순히 실족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라는 것을 뛰어넘어서 세상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이 피할 수 없다는 지금 필연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필연성이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없을 수는 없다. 이 지금 이중 부정을 하고 있죠. 첫 번째 부정은 실족하게 한 일이 없다. 근데 이것을 다시 부정해서 그러한 일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실족하게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내가 누군가를 실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시죠. 예를 들어서 사람을 실수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표현을 한다면 이 문장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실수를 완전히 피하기는 불가능하다라는 뜻이 되겠죠. 마태복음 18장 10 마태복음 18장 7절에서도 같은 표현으로 방식으로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없을 수는 없으나 이렇게 표현을 하실까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문장의 연결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사실을 대조시키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실족하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는 그렇다고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라고 말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실족에 불가피성을 말하시면서도 그것의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구별은 필연성과 그 당위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도 실족시키고 나도 실족시키고 다른 사람이 모두가 다 실족시킨다면 그래 괜찮아. 이렇게 해야 마땅할 거 같은데 모두가 실족시키지만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책임에서 면하진 못한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은 죄로 가득한 세상에는 이러한 일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한마디로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여러분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