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던 제자들
설교자는 마가복음 9장을 인용하며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었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성경이 다툼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의 사건에서 그 배경을 유추해 봅니다. 베드로가 신앙 고백 후 천국의 열쇠를 받았고, 변화산에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만 영광스러운 변모를 목도했다는 점을 짚습니다. 이런 일들이 제자들 사이에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이 높은 자리에 관심을 두었던 점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믿었지만, 익숙한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 나라를 이해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교만이 그런 질문을 이끌었다는 것이 설교자의 해석입니다. 이 예화는 천국의 큼이 세상의 서열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배경으로 쓰입니다.
설교 내 2–2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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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는 이미 죄악이 가득하고, 실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놓여 있는데, 화를 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실족시키는 일을 내가 멈출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은 가능할까요?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서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니구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죠.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의 본문, "그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비슷한 문장이죠.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또 남을 없신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자기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 낮출 수도 없고, 교만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작은 자가 중요합니다. 왜냐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자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그다음 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10절을 제가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자 중에 하나도 없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옵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돌보시고 있는지 지금 말씀하고 계시죠. 그들의 천사가 하나님을 항상 보고 있고, 그리고 보고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는 작은 자 개개인의 수천사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의 천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천사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니까 그들의 천사, 그들에게 속한 천사, 이것을 설명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혼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네. 이 말씀을 보니까, 그들을 위해 섬기는 천사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보고를 합니다. 누군가 그 작은 자들을 보고, 그들을 돕고, 그리고 하나님께 보고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보고가 된다는 거죠. 특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없신 여기면 보고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그다음 9절에 나옵니다. 이른 양의 비유.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비유죠. 100마리의 양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을 때, 그 목자는 아홉 아홉 마리를 그냥 산에 놔두고,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그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찾았을 때, 길을 잃지 아니한 아홉 마리의 양보다 그 찾은 길 잃었던 그 양을 찾은 것을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작은 자, 단 한 명이라도 실족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거죠.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같은 양이며, 쥐가 높거나 낮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소중한 한 마리 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자가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을 잃은 그 양이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선을 좀 바꿔서 제자들에게로 한번 관심을 가져 보겠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과 34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가보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니라." 네.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이렇게 다투었다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죠. 근데 왜 이런 다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사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을 통해서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 고백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겠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죄송합니다.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17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있죠. 이때도 예수님은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이 세 제자만 목도하게 됩니다. 이 또한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죠. 다른 아홉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예수님에게 소중하게 되어지는가라는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 시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제자들이 질문하기 전에 두 번 정도 예수님이 고난받을 것과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을 거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는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누가 크냐? 나는 어떤 위치에, 누가 어디에 서열에, 누가 클 것인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죠.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이 조금 다르다는 거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과 선지자의 그 선지서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성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그 개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죠? 제자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왕이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는 지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명기 17장 20절을 보면, 왕이 마음을 높여서 자기 형제를 위해 교만하게 굴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 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 18장의 그 말씀과 매우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조차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이미 모세의 오경을 알고 있는 이 제자들은 천국에서 더 누가 높은 것인가 여기에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제자들의 마음속에 교만이 지금 예수님에게 질문하도록 이끌었단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그 사회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이들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가 오시고,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실 거다.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부활 이후에도 남아 있던 기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을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죽음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이들은 고난 당하는 메시아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순한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신들이 익숙했던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의 방향 자체를 사실 바꾸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생각에서 돌이켜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그 태도는 남을 낮추려는 것이고, 남을 무시하거나 없신 여기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반대되는 행동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더 큰가 관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오히려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천국의 개념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바로 나의 삶에서 그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이 공동체에서 낮은 자가 돼야 됩니다. 그리고 남을 없신 여기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