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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개 · 1 / 1쪽 · 한 쪽 20개

길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던 제자들

설교자는 마가복음 9장을 인용하며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었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성경이 다툼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의 사건에서 그 배경을 유추해 봅니다. 베드로가 신앙 고백 후 천국의 열쇠를 받았고, 변화산에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만 영광스러운 변모를 목도했다는 점을 짚습니다. 이런 일들이 제자들 사이에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이 높은 자리에 관심을 두었던 점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믿었지만, 익숙한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 나라를 이해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교만이 그런 질문을 이끌었다는 것이 설교자의 해석입니다. 이 예화는 천국의 큼이 세상의 서열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배경으로 쓰입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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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는 이미 죄악이 가득하고, 실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놓여 있는데, 화를 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실족시키는 일을 내가 멈출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은 가능할까요?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서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니구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죠.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의 본문, "그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비슷한 문장이죠.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또 남을 없신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자기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 낮출 수도 없고, 교만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작은 자가 중요합니다. 왜냐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자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그다음 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10절을 제가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자 중에 하나도 없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옵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돌보시고 있는지 지금 말씀하고 계시죠. 그들의 천사가 하나님을 항상 보고 있고, 그리고 보고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는 작은 자 개개인의 수천사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의 천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천사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니까 그들의 천사, 그들에게 속한 천사, 이것을 설명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혼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네. 이 말씀을 보니까, 그들을 위해 섬기는 천사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보고를 합니다. 누군가 그 작은 자들을 보고, 그들을 돕고, 그리고 하나님께 보고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보고가 된다는 거죠. 특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없신 여기면 보고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그다음 9절에 나옵니다. 이른 양의 비유.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비유죠. 100마리의 양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을 때, 그 목자는 아홉 아홉 마리를 그냥 산에 놔두고,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그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찾았을 때, 길을 잃지 아니한 아홉 마리의 양보다 그 찾은 길 잃었던 그 양을 찾은 것을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작은 자, 단 한 명이라도 실족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거죠.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같은 양이며, 쥐가 높거나 낮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소중한 한 마리 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자가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을 잃은 그 양이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선을 좀 바꿔서 제자들에게로 한번 관심을 가져 보겠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과 34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가보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니라." 네.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이렇게 다투었다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죠. 근데 왜 이런 다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사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을 통해서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 고백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겠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죄송합니다.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17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있죠. 이때도 예수님은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이 세 제자만 목도하게 됩니다. 이 또한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죠. 다른 아홉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예수님에게 소중하게 되어지는가라는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 시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제자들이 질문하기 전에 두 번 정도 예수님이 고난받을 것과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을 거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는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누가 크냐? 나는 어떤 위치에, 누가 어디에 서열에, 누가 클 것인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죠.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이 조금 다르다는 거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과 선지자의 그 선지서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성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그 개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죠? 제자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왕이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는 지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명기 17장 20절을 보면, 왕이 마음을 높여서 자기 형제를 위해 교만하게 굴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 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 18장의 그 말씀과 매우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조차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이미 모세의 오경을 알고 있는 이 제자들은 천국에서 더 누가 높은 것인가 여기에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제자들의 마음속에 교만이 지금 예수님에게 질문하도록 이끌었단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그 사회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이들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가 오시고,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실 거다.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부활 이후에도 남아 있던 기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을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죽음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이들은 고난 당하는 메시아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순한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신들이 익숙했던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의 방향 자체를 사실 바꾸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생각에서 돌이켜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그 태도는 남을 낮추려는 것이고, 남을 무시하거나 없신 여기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반대되는 행동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더 큰가 관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오히려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천국의 개념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바로 나의 삶에서 그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이 공동체에서 낮은 자가 돼야 됩니다. 그리고 남을 없신 여기면 안 됩니다.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한 제자들

설교자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제자들은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했습니다. 설교자는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들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으로 설명합니다. 제자들은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 놓고, 주님이 그와 다른 길을 가시자 그 길을 가로막았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이 오늘 여러분과 자신의 모습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는 태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신앙을 고집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라고 적용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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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듯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사기치듯 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심과 동시에, 그분을 따를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끊임없이 무리들과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무리 안에는 훗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제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하자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합니다.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놓고, 주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을 가시자 움직여 주지 않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꾸 우리는 그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말씀이 무겁게만 들린다면, 왜 무겁게만 들릴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에 천국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함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지고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비용 계산이 끝났습니다.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는 거저받은 것이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사실 간음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인 무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따르는 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유익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용 계산 없이 제자인 척하는 자들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 자꾸 세상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세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억울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유익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재정이 아까워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고를 뛰어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밤에 한 번, 저를 향해 질문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임정태 목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 안수식을 보면서, 임정태 목사님은 안 보고 저의 10년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 수품 받은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목회 벌써 40년 하셨다고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조금 배운 쪼물레기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전에 목사 수품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비용 계산을 다 끝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비용 계산하는 저를 보면서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내가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비용 계산을 했더라면 선택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이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랑만 생각하고, 그냥 그것이 좋아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한테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니까, 너를 재미있게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솔직하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저희 아내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감사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고 사실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냥 주님의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담임 목사님 지금 40년 목회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만약이란 없지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질문은 안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볼 때,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복음을 증언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귀해서, 매일 강단에서 표현하시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을 써 주시는 거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뚜벅뚜벅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어떠하십니까? 신앙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그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세상에 작은 것 좀 반짝여 보이는 그런 것들의 눈이 멀고, 여전히 주님과 저울질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거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해 두라고. 너를 부인하고, 너보다 더 그 너의 삶의 참 주인 되신 주님을 따르라고. 네가 움켜지고 있는 그 소유를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붙잡고 따르기로 결단하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그 비용 계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 그 영광스러움 앞에, 아까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보고 따르실 수 있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