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개 · 1 / 1쪽 · 한 쪽 20개
영화 속 폭군 앞에서 열광하는 백성의 찬양
설교자는 영화 속 폭군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 폭군은 자기를 섬기는 하녀든 백성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칼로 찔러 죽입니다. 그가 나오는 전투장에서 수많은 백성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열광하며 찬양합니다. 설교자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두 가지 보기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왕을 너무 좋아해서 즐거워 찬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두려워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당연히 후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도 이런 예배를 원하실지 묻습니다. 주일 찬양 인도 중 손을 들자고 했는데 손도 입도 열지 않는 성도를 떠올리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우는 식으로 억지 예배를 얻을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공포와 의무로 드린 예배로는 영화롭지 않으시고, 백성이 그분으로 인해 너무 즐거워서 찬양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즐거움이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며, 즐거움에는 강제가 들어설 수 없다고 적용합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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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그리고 이게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다. 그렇다면 그 설계 목적인 그 찬송과 예배라는 것도 반드시 주를 즐거워함으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 '윤하'를 보신 분 계십니까? 거기에 하콘 앤 가물에 엄청난 폭군이요, 독재자가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섬기는 하녀든 백성이든 마음에 안 들면 그대로 칼로 그냥 축 찔러 죽입니다. 그 폭군 독재자가 거기서 어떤 인간 가문과 콜로세움 같은 전투장에서 전투를 납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그 전투장에서 회중석에서 학권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열광하며 응원하며 찬양합니다. 이들은 왜 그럴까요? 1번. 핫콘의 우리 왕을 내가 너무 좋아해서, 난 그를 즐거워서 찾는 찬양이다. 2번. 이렇게 안 하면 죄다 죽으니까, 공포다. 몇 번이죠? 당연히 2번이겠죠. 하나님께서 이런 예배와 찬양을 원하실까요? 주일 찬양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실 뒤보다 앞이 편합니다. 제가 주일 찬양 인도하는데 손 들자고 했어요. 근데 어떤 성도께서 손을 안 들고 입도 끝 안 해요.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태웁니다. 그렇게 매주 딱 두 분씩만 주님이 데려가 주시면 그 다음 주에 부흥 일어날 겁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이거 원하실까요? 주님이 우리 주님 원하시기만 한다면, 이 세상 모든 만민이 그분께 두 손 들고 찬송토록 만들 능력 되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우리 주 여호와는 이런 공포와 의무에 의해 드린 예배로는 영화롭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실로 그분으로 인하여 너무 즐거워서 찬양 드릴 때 영화롭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묵은지 김치찜을 아는 사람만 즐거워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묵은지 김치찜을 예로 듭니다. 잘 익은 묵은지를 돼지 수육과 함께 뚝배기에 넣고 오랜 시간 끓여 김치가 황금빛으로 투명해지면, 김이 나는 흰밥 위에 큼지막하게 찢어 올립니다. 그 위에 부드럽게 익은 수육을 얹어 한 입 베어 무는 순간을 묘사하며, 입에 침이 고이는 사람이 바로 김치찜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맛을 직접 알아야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시편 기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호세아 6장 6절을 함께 읽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이고 그분을 기뻐하지 않는 제사는 의미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한때 뜨거웠던 신앙 열정이 식는 이유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직접 맛보아 아는 경험이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적용합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맛본 이들의 즐거움은 찬양과 경배와 헌신으로 터져 나온다고 말합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8–8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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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생 최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묵은지 김치찜입니다. 전라도 주신 어 김치찜 맛있게 먹는 법이 있습니다. 깊고 거룩하게 무릎 익은 묵은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돼지 수육과 함께 두꺼운 뚝배기에 넣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팔팔 끓립니다. 언제까지? 그 김치가 황금빛으로 변하고 투명해질 때까지요. 그리고 김이 모랑모랑 나는 그 흰살밥 한 수를 탁 뜹니다. 그리고 그 황금 김치를 큼지막하게 찢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불을 대듯이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야들야들하게 익은 돼지 수육을 딱 들었을 때 파르 떨어야 됩니다. 이 파르를 떠는 돼지 수육을 그 김치찜 위에 올려서 입을 크게 벌리고 한 입을 확 무는 순간, 지금 입에 침이 고이신 이분들, 이분들이 바로 김치찜을 아는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묵은지 김치찜을 실제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아멘. 왜요? 알아야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래야 그분이 영화롭는 까닭입니다. 호사야 6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게 아니라, 네가 만약 나 여호와 아는 것이 먼저이지 않는다면 그 제사 의미 없다. 왜? 네가 나를 알지 못하면 나를 기뻐할 수 없고, 기쁨이 없는 제사는 내게 의미 없다. 왜 한 때 뜨거웠던 우리 신앙 열정이 곧잘 식어가는 걸까요? 선교에 대한 긴급성이 좀 떨어져서, 세상가 좀 많이 힘들어서가 아닐지 모릅니다. 사실상 그 사랑스러운 하나님을 직접 맛보아 아는 경험이 점점 사라지면, 자연히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에게 뜨거웠던 예배도 헌신도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이들의 즐거움은 반드시 찬양과 경배와 헌신으로 터져 나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의 글인데요. 제가 한번 읽어 드리죠. 사람들은 어떤 것을 참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면 자연히 그것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녀는 참 사랑스럽지 않니? 그거 참 영광스럽지 않았니? 묵은지 김치찜 참 맛있지 않니? 찬양은 이건 제가 한 겁니다. 찬양은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기쁨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