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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5개 · 1 / 1쪽 · 한 쪽 20개

목록식 기도 모임의 모습

설교자는 자신이 여러 번 보았던 기도 모임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사람들이 앞에 나와 기도해야 할 제목들을 목록처럼 읽고, 사회자가 기도를 시작하자 줄줄이 일어나 짧은 기도를 한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모임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경배하고 감사하는 예배가 없었다고 비판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며 예배받지 못했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어도 마음은 꿇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담대하게 기도하는 것이 영성의 표시라고 착각하는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1

설교 내 7–7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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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전에 사도들이 전한 위대하고 격려하는 말씀, "그분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접근하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과 함께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표현이 항상 함께 따라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 말씀이 담대함이 곧 대담함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확신이 곧 자기 확신에 넘치는 태도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아셔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서의 담대함은 대담함이 아닙니다. 확신은 무례함이 아닙니다. 왜 이 점을 강조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영성과 구원의 확신을 보여주는 표시가 바로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고 익숙하게 다가가는 태도로 말이죠. 그러나 이는 성경이 여기서 그리고 전체적으로 가르치는 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정말 영적으로 얼마나 깊은 사람인지를 보여주려면 기도가 아주 업무적으로 짧고 간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보처럼 짧은 기도요.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앞에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죠. 그리고 먼저 기도나 예배를 드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자신이 담대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바로 요청을 드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종종 이런 기도 모임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말입니다. 기도 모임이 이런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앞에 나와 기도해야 할 것들을 나열합니다. 기도 요청 목록이죠. 목록을 읽고 사회자가 "자, 이제 기도를 시작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줄줄이 일어나서 이 문제 저 문제에 대한 간단한 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그런 기도 모임에서 아무런 예배도 없었다는 점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배받지 않았습니다. 찬양받지도 않았고, 경배받지도 않았습니다. 감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신 모습으로 예배받지 않았습니다. 무릎을 꿇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실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지만, 그 마음은 꿇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시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바로 그런 잘못된 태도를 극적으로 바로잡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영성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는 성경을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알고 있다면, 바로 이 사도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무릎을 꿇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다가가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는 가볍고 익숙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함과 확신으로 접근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는 경외와 경건한 두려움과 함께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삼키는 불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일요일 우리가 고려했던 그 구절의 올바른 해석은 단순히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상태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근거를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접근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가슴을 펴고 담대하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유스티누스 마르티르가 묘사한 주일 모임

설교자는 2세기의 유스티누스 마르티르가 전한 주일 모임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그는 일요일에 도시에 사는 이들과 시골에 사는 이들이 모두 한 장소에 모인다고 설명합니다. 그곳에서 사도들의 기록과 선지자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읽었다고 합니다. 독자가 낭독을 마치면 인도자가 회중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말씀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설교자는 이 사례를 통해 성경을 공적으로 읽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려 합니다. 그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 이런 대중 낭독이 결여되어 있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먼저 읽은 뒤에야 권면과 가르침이 뒤따라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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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제가 오기 전까지 성경을 대중적으로 읽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성경을 대중적으로 읽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네, 이 말은 2세기의 유스티누스 마르티르가 한 말입니다. 일요일에는 도시에 사는 이들과 시골에 사는 이들이 모두 한 장소에 모여, 사도들의 기록과 선지자의 글들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읽습니다. 그리고 독자가 끝내면 회중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말씀을 합니다.

영화 속 폭군 앞에서 열광하는 백성의 찬양

설교자는 영화 속 폭군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 폭군은 자기를 섬기는 하녀든 백성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칼로 찔러 죽입니다. 그가 나오는 전투장에서 수많은 백성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열광하며 찬양합니다. 설교자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두 가지 보기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왕을 너무 좋아해서 즐거워 찬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두려워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당연히 후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도 이런 예배를 원하실지 묻습니다. 주일 찬양 인도 중 손을 들자고 했는데 손도 입도 열지 않는 성도를 떠올리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우는 식으로 억지 예배를 얻을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공포와 의무로 드린 예배로는 영화롭지 않으시고, 백성이 그분으로 인해 너무 즐거워서 찬양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즐거움이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며, 즐거움에는 강제가 들어설 수 없다고 적용합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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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그리고 이게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다. 그렇다면 그 설계 목적인 그 찬송과 예배라는 것도 반드시 주를 즐거워함으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 '윤하'를 보신 분 계십니까? 거기에 하콘 앤 가물에 엄청난 폭군이요, 독재자가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섬기는 하녀든 백성이든 마음에 안 들면 그대로 칼로 그냥 축 찔러 죽입니다. 그 폭군 독재자가 거기서 어떤 인간 가문과 콜로세움 같은 전투장에서 전투를 납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그 전투장에서 회중석에서 학권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열광하며 응원하며 찬양합니다. 이들은 왜 그럴까요? 1번. 핫콘의 우리 왕을 내가 너무 좋아해서, 난 그를 즐거워서 찾는 찬양이다. 2번. 이렇게 안 하면 죄다 죽으니까, 공포다. 몇 번이죠? 당연히 2번이겠죠. 하나님께서 이런 예배와 찬양을 원하실까요? 주일 찬양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실 뒤보다 앞이 편합니다. 제가 주일 찬양 인도하는데 손 들자고 했어요. 근데 어떤 성도께서 손을 안 들고 입도 끝 안 해요.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태웁니다. 그렇게 매주 딱 두 분씩만 주님이 데려가 주시면 그 다음 주에 부흥 일어날 겁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이거 원하실까요? 주님이 우리 주님 원하시기만 한다면, 이 세상 모든 만민이 그분께 두 손 들고 찬송토록 만들 능력 되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우리 주 여호와는 이런 공포와 의무에 의해 드린 예배로는 영화롭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실로 그분으로 인하여 너무 즐거워서 찬양 드릴 때 영화롭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묵은지 김치찜을 아는 사람만 즐거워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묵은지 김치찜을 예로 듭니다. 잘 익은 묵은지를 돼지 수육과 함께 뚝배기에 넣고 오랜 시간 끓여 김치가 황금빛으로 투명해지면, 김이 나는 흰밥 위에 큼지막하게 찢어 올립니다. 그 위에 부드럽게 익은 수육을 얹어 한 입 베어 무는 순간을 묘사하며, 입에 침이 고이는 사람이 바로 김치찜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맛을 직접 알아야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시편 기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호세아 6장 6절을 함께 읽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이고 그분을 기뻐하지 않는 제사는 의미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한때 뜨거웠던 신앙 열정이 식는 이유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직접 맛보아 아는 경험이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적용합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맛본 이들의 즐거움은 찬양과 경배와 헌신으로 터져 나온다고 말합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8–8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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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생 최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묵은지 김치찜입니다. 전라도 주신 어 김치찜 맛있게 먹는 법이 있습니다. 깊고 거룩하게 무릎 익은 묵은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돼지 수육과 함께 두꺼운 뚝배기에 넣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팔팔 끓립니다. 언제까지? 그 김치가 황금빛으로 변하고 투명해질 때까지요. 그리고 김이 모랑모랑 나는 그 흰살밥 한 수를 탁 뜹니다. 그리고 그 황금 김치를 큼지막하게 찢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불을 대듯이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야들야들하게 익은 돼지 수육을 딱 들었을 때 파르 떨어야 됩니다. 이 파르를 떠는 돼지 수육을 그 김치찜 위에 올려서 입을 크게 벌리고 한 입을 확 무는 순간, 지금 입에 침이 고이신 이분들, 이분들이 바로 김치찜을 아는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묵은지 김치찜을 실제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아멘. 왜요? 알아야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래야 그분이 영화롭는 까닭입니다. 호사야 6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게 아니라, 네가 만약 나 여호와 아는 것이 먼저이지 않는다면 그 제사 의미 없다. 왜? 네가 나를 알지 못하면 나를 기뻐할 수 없고, 기쁨이 없는 제사는 내게 의미 없다. 왜 한 때 뜨거웠던 우리 신앙 열정이 곧잘 식어가는 걸까요? 선교에 대한 긴급성이 좀 떨어져서, 세상가 좀 많이 힘들어서가 아닐지 모릅니다. 사실상 그 사랑스러운 하나님을 직접 맛보아 아는 경험이 점점 사라지면, 자연히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에게 뜨거웠던 예배도 헌신도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이들의 즐거움은 반드시 찬양과 경배와 헌신으로 터져 나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의 글인데요. 제가 한번 읽어 드리죠. 사람들은 어떤 것을 참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면 자연히 그것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녀는 참 사랑스럽지 않니? 그거 참 영광스럽지 않았니? 묵은지 김치찜 참 맛있지 않니? 찬양은 이건 제가 한 겁니다. 찬양은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기쁨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하나님을 보는 기쁨

설교자는 미국이 낳은 대표적 신학자로 불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줍니다. 그 글의 요지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더 고상한 어떤 것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 자체가 구속받은 목적이고 구속의 정점이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피조물이 보고 누리고 즐거워하도록 모든 것을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혀 자신을 완전히 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을 옥합 여인의 행동에 적용합니다.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에 이끌려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헌신의 출발점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35–35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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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나온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죠. ‘하나님을 보는 것은 더 고상한 어떤 것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우리가 구속받은 목적이고 우리 구속의 정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피조물이 보고 알고 누리고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지으셨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달콤함에 매료되어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예. 이 여인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그토록 아름다우심에 이끌려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