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개 · 1 / 1쪽 · 한 쪽 20개
뜨거운 물에 빠진 사람과 물을 데우는 사람
설교자는 여러 해 전 세례로 중생한다는 가르침을 설교했던 일을 회고합니다. 그때 존경하는 벗 스틴 박사가 그에게 '자네, 뜨거운 물에 들어갔군'이라고 말했습니다. 곤경에 빠졌다는 뜻이었습니다. 설교자는 물이 뜨겁다고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아주 평온하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자신은 불을 때는 사람일 뿐이고,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그들이 기꺼이 뛰쳐나오고 싶어질 만큼 물을 뜨겁게 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화는 논쟁 상황에서 설교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보여 줍니다. 그는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싸움이 벌어진다면 반대자들이 불편을 느낄 만큼 진리를 선명하게 전하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또 비판과 오해를 감수하며 진리를 굳게 붙드는 한 두려워할 자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 예화는 설교자의 강한 확신과 논쟁 속의 태도를 보여 주는 개인적 일화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8
설교 내 84–84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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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제가 세례로 중생한다는 가르침을 두고 설교했을 때, 존경하는 벗 스틴 박사가 제게 말했습니다. ‘자네, 뜨거운 물에 들어갔군.’ 곤경에 빠졌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물이 뜨겁다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저는 아주 평온합니다. 저는 그저 불을 때는 사람일 뿐이고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이 기꺼이 뛰쳐나오고 싶어질 만큼 물을 뜨겁게 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싸움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런 동정이 우리와 맞서는 이들에게 유용하기를 바랍니다.
스코틀랜드 친구의 찬양과 두려움
설교자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친구가 차 안에서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고 전합니다. 그 노래는 '오, 교제가 얼마나 좋은가, 오, 신적인 기쁨이여,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였고, 친구는 '내가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라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설교자는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섬기는 말이었고, 제자인 친구가 스승을 가르치는 듯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 자신은 운전 중에 해야 할 일과 고쳐야 할 것들을 떠올리며 수요일도, 내일 아침도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문제를 눈앞에 쌓아 올렸습니다. 설교자는 그 모습을 271번 도로 남쪽에서 아이거를 눈앞에 쌓아 올리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때 친구의 노래가 들려왔고, 기댈 팔이 없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다른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22–22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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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에 있는 제 친구 한 명이 있습니다. 어제 차를 몰고 가면서 그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오, 교제가 얼마나 좋은가, 오, 신적인 기쁨이여,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습니다. '내가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 그는 제 영혼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제 제자인 그가 저의 스승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내야 할까? 저것은 어떻게 고쳐야 할까? 다음 일은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수요일까지 버틸 수 없어. 나는 절대 수요일까지 가지 못할 거야. 내일 아침까지도 버틸 수 없어.' 그리고 여러분은 눈앞에 그 모든 것을 쌓아 올립니다. 마치 271번 도로 남쪽에서 눈앞에 아이거를 쌓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 그러나 내가 기댈 팔이 없다면, 나에게는 두려워할 모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두려워할 다른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수많은 두려움의 노예가 됩니다.
자전거 위 어깨 사이에 누운 개
설교자는 여행 중 작은 마을 길가에서 본 장면을 전합니다. 머리가 긴 청년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개는 주인의 어깨뼈 사이에 누워 있었고 앞발은 주인의 앞에서 교차되어 있었습니다. 동행한 수는 자전거가 거리를 달리는데도 개가 그렇게 신뢰하는 모습이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개는 한 번도 놀라거나 움직이지 않고 편히 쉬고 있었습니다. 20분쯤 뒤 다른 곳에서 같은 남자와 자전거, 개를 다시 보았는데 똑같은 장면이었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는 산책로에서 그들과 다시 마주쳤고, 남자가 다가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개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습니다. 수가 강아지 때부터 키웠는지 묻자, 남자는 개가 꽤 나이가 들었을 때 보호소에서 구조해 왔고 그때부터 줄곧 자신을 믿고 따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에서 신명기 33장 12절의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그분 안에서 안전히 거하리니'라는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 개가 핏불이었다고 밝히며, 살기를 내뿜고 살인을 일삼던 다소 사람 사울이 구원받아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어깨 위에 안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연결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알기에 완전한 안전 속에서 살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24–27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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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와 제가 지난 몇 주 동안 여행하면서 많은 다른 것들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작은 어느 마을의 길가에 서 있었을 때 둘 다 동시에 이것을 알아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머리가 길었습니다. 그것이 특별히 눈에 띈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결국 눈에 띈 것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띈 것은 개가 있던 위치였습니다. 그는 자전거에 앉아 있었고, 개는 그의 어깨뼈 사이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 사람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제 자전거이고, 여기 제 개가 있고, 그의 머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콧소리] 뒤에서 보면 제 개의 등이 제 어깨뼈 사이에 누워 있고, 뒷발은 이렇게 아래로 내려와 있으며, 꼬리는 그 사이에 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개의 머리 앞쪽에는 발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주인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의 앞발은 이렇게 그의 앞에서 교차되어 있었습니다. 수가 제게 말했습니다. '개가 그렇게 신뢰할 수 있다니 놀랍다. 특히 자전거가 거리를 달리고 있을 때 말이야.' 그 개는 한 번도 놀라거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20분쯤 뒤, 우리가 걷던 다른 곳에서 같은 남자, 같은 자전거, 같은 개를 다시 만났습니다. 똑같은 장면이었죠. 저것 좀 보세요.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 우리는 자전거와 그 남자, 그리고 그 개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계획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우리는 산책로 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오고 있습니까? 바로 그 남자와 개입니다. 그가 다가와서,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다른 사람에게 멈춰 서서 말을 겁니다. 그리고 개는 저렇게 가만히 있습니다.
그때 수가 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개가 당신에게 그렇게 몸을 맡기고 그토록 편안하게 누워 있다니 정말 놀랍네요. 강아지 때부터 키우셨나요?」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이 녀석이 꽤 나이가 들었을 때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보호소에서 구조해 왔더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저를 믿고 따릅니다.」 그 말을 듣고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신명기 33장의 그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아, 제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그 개가 어떤 종류였는지 궁금하시죠?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말씀드리면, 핏불이었습니다. 핏불이요. 제가 핏불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다소 사람 사울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불을 뿜듯 위협과 살기를 내뿜으며 살인을 일삼던 핏불 같은 사람이, 구원받아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신 분의 어깨 위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언니들과의 논쟁
설교자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동네 언니들과 '누가 빠지는가'를 두고 열렬히 논쟁했던 어린 시절의 일을 꺼냅니다. 당시에는 실족시킨 죄의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기보다 누가 빠졌는지에 더 집중했고, 그것은 자기가 이겨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돌아봅니다. 지금은 실족시킨 사람이 빠진다고 답하지만, 어린 시절의 그 질문은 본문의 무게와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 본문이 실족케 하는 죄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드셨는지 함께 살펴보겠다고 방향을 잡습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처참한 죽음보다 실족시키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고하신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라는 뜻이 아니라 강렬한 비유로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짚습니다. 설교자는 위로와 축복을 기대한 청중에게 무거운 주제로 시작해 죄송하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이 일화는 익숙한 질문도 다시 들여다보면 본문의 무게가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출발점으로 쓰입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6절에 보면 연자 몇 도를 그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 거죠? 실족 당한 사람입니까? 실족을 시킨 사람입니까? 뭐 잘 안 들리긴 하지만 여러분들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왜냐면 당연히 실족시킨 사람이 빠진다라고 답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저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아마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였을 것 같은데 그때 동네 언니들과 아주 열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가? 그때는 실족시킨 죄에 대한 그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빠졌는가 여기에 더 집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겨야 했기 때문이죠.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왜 하셨는지를 자세히 한번 같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실족케 하는 죄가 어떤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자 몇 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그 처참한 죽음보다는 실족시키는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지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단순하게 육체적인 죽음의 두려움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그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를 지금 경고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그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라는 말씀은 아니죠. 강렬한 비유를 통해서 죄의 심각성을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기대하고 오신 여러분들에게 이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시작함을 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이미 시작했으니까 연자 몇 돌의 그 큰 것도 한번 보여 드릴게요. 영상이 준비됐으면 한번 보여 주시면 됩니다. 지금 연자 몇 돌을 당나귀가 돌리고 있죠. 여러분들이 그 시골에서 사용했던 그 가정용 몇 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장면도 똑같은 장면인데 이게 실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렇게 당나귀가 몇 돌을 돌렸던 거죠. 변자 몇 돌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제 내려 주셔도 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들며 이렇게 극단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실까요? 성경에서는 이런 표현들을 과장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예들이 몇 가지가 있죠. 그중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는 표현이 있고 또 남의 눈에 튀는 보면서 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들보는 뭐냐면 굉장히 큰 나무가 눈에 있는 거예요. 그니까 정말 현실성이 없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그런 큰 비유를 들고 있죠. 근데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죄의 심각성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떠한 것인가? 또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제는 실족시키는 것이 이렇게 심각하다면 실족이 무엇인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족의 의미는 넘어지게 하다. 또 걸려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인데 구약에서는 원문과 가장 가까운 것이 레위기 19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장애물이나 걸림돌 또는 넘어지게 하는 원인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겠어?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데. 우리의 본문을 좀 연구하고 볼수록 여러분들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죄의 함정에 빠뜨리거나 또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너 때문에 실족했어."라고 말하는 어떤 단순히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죠.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손상시키거나 죄로 넘어지게 하거나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지금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설명하면 여러분이 실족에 대해서 잘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족하게 하는 그 대상이 누군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실족케 하지 말라 하는 대상이 6절에 나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여기서 작은 자를 또 찾아보라면 다시 1절부터 5절의 말씀을 또 봐야 합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교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1절.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 큰 자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여기까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거든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근데 예수님은 거기에 이렇게 응답을 하셨습니다. 한 어린 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리고 3절에 뭐라 했냐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 좀 이상하죠?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천국에 못 들어가. 지금 천국에 들어가는게 문제가 아니야.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천국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왜곡된 신앙, 그 왜곡된 사고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계시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큰 것을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작은 것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전제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지금 천국에 입문도 하지 못했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에서의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일까요? 사회적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은 존재들이고 어린아이에게는 사회적 권력이나 명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지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의존했어야만 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힘도 없고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죠. 성인 남자 중심의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존재 가치도 없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거죠. 그럼 작은 자가 어린아이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요. 바로 "나를 믿는"이라는 수식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작은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이 말은 곧 제자 공동체, 여러분들이 속해 있는 팀, 목장 모든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작은 자들. 그들은 자신을 높일 어떤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 내세울게 없는 자들입니다. 존중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럼 이제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인지 여러분 보이십니까? 보인다면 그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그 중대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실족게 한 적이 있나요? 나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 본 적이 없어. 그를 죄에 빠지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7절을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마태복음 18장 7절입니다. 시작.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무슨 말이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라는 거죠. 문장은 단순히 실족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라는 것을 뛰어넘어서 세상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이 피할 수 없다는 지금 필연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필연성이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없을 수는 없다. 이 지금 이중 부정을 하고 있죠. 첫 번째 부정은 실족하게 한 일이 없다. 근데 이것을 다시 부정해서 그러한 일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실족하게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내가 누군가를 실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시죠. 예를 들어서 사람을 실수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표현을 한다면 이 문장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실수를 완전히 피하기는 불가능하다라는 뜻이 되겠죠. 마태복음 18장 10 마태복음 18장 7절에서도 같은 표현으로 방식으로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없을 수는 없으나 이렇게 표현을 하실까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문장의 연결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사실을 대조시키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실족하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는 그렇다고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라고 말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실족에 불가피성을 말하시면서도 그것의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구별은 필연성과 그 당위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도 실족시키고 나도 실족시키고 다른 사람이 모두가 다 실족시킨다면 그래 괜찮아. 이렇게 해야 마땅할 거 같은데 모두가 실족시키지만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책임에서 면하진 못한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은 죄로 가득한 세상에는 이러한 일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한마디로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여러분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크리스마스 사진을 떠올리는 나이 든 설교자의 기억
설교자는 나이가 들수록 축제와 일상의 기억이 흐려진다고 말합니다. 크리스마스 사진을 보면 아내 마리는 언제 찍었는지 늘 알지만, 자신은 물어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고 어디서 찍었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이 전혀 흐려지지 않은 일도 있으며, 그런 기억들이 자신의 인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그중 하나는 이 캠퍼스에 처음 발을 디딘 날입니다. 그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매우 강하게 느꼈고, 그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머무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고 회고합니다. 이곳에 돌아와 총장이 되어 평생을 보내리라고, 마리와 함께 삶을 드리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과거에 배운 것을 희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쌓인 지혜와 격려를 바탕으로 계속 나아간다고 적용합니다.
앨버트 몰러 · 2026-10-22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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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물론, 기독교 전통에서 서양 문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일 년 전체가 12월의 탄생 축제와 봄의 주님 부활 축제를 중심으로 회전했으며, 다양한 감사절 등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축제들이 쌓인다는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 사진을 보고 언제 찍었는지 묻는다면, 마리는 항상 알고 있지만 저는 물어봐야 합니다. 어디서 찍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기억이 흐릿해지기도 합니다. 어디였는지,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에미넴이 다녔던 디트로이트 학교
설교자는 자신이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목회와 관련된 삶을 살아왔다고 가볍게 소개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웨스트 켄터키의 시골 목사관에서 15살까지 자랐고, 이후 가족이 디트로이트의 8마일과 반디크로 이사했다고 회상합니다. 그곳에서 설교자는 힙합 가수 에미넴이 다녔던 학교에 실제로 다녔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은 그 학교를 졸업했지만 에미넴은 졸업하지 않았다고 덧붙여 청중의 웃음을 이끌어냅니다. 이 일화는 설교 본문의 교훈을 여는 장치라기보다, 설교자가 자신의 배경을 편안하게 나누는 대목입니다. 설교자는 이어서 남부와 북부, 시골과 도시,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 모두 자랐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렇게 다양한 환경을 거치면서도 주님께서 얼마나 충성되셨는지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는 목회자의 삶을 원망하지 않았고, 목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회상은 설교자가 청중과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나누며 시작하는 자리임을 보여줍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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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우리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15살까지 웨스트 켄터키의 시골 목사 집안에서 자랐고, 이후 디트로이트의 8마일과 반디크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에미넴이 다녔던 학교에 실제로 다녔습니다. 저는 졸업했지만, 그는 졸업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