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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3개 · 1 / 1쪽 · 한 쪽 20개

1970년 미국 갤럽의 '고통의 의미' 설문

설교자는 1970년 미국 갤럽이 종교인과 종교가 없는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던진 질문을 소개합니다. 그 질문은 '고통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였고, 설교자는 이 문항을 만든 사람이 매우 생각이 깊었을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설교자는 우리 삶이 생물학적 삶의 전부라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고통을 없애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공부하고 좋은 직장에 가려는 이유도 결국 앞으로 예상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으며,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묻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전에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던 사람이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게 된다고 적용합니다.

남득현 · 2026-10-28

설교 내 33–3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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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1970년도에 미국 갤럽에서 설문 조사를 했어요. 종교인과 종교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설문조사였죠. 제가 생각할 때 이 질문, 문항을 만든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정말 생각이 깊은 사람이에요. 갤럽의 역사를 잘 모르지만, 갤럽 역사상 가장 좋은 직원 중에 한 명이었을 것 같아요. 1970년도 미국 갤럽에서는 종교인과 종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종교인과 종교인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고통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너무 멋진 질문 같아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분간하기 위해 갤럽에서 만든 질문이,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생물학적 삶의 전부라면, 여러분, 딱 100세까지 살고 모든 생물학적 삶이 끝난다면 우리 삶의 가장 큰 목표는 무엇입니까? 어떻게든 고통을 없애는 거죠. 없애는 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 좋은 직장에 가려는 이유, 우리가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든 이유가 다 무엇입니까? 앞으로 예상될 고통들을 어떻게든 하나라도 줄여 보기 위한 노력들이죠.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빨리 제거해야 되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한 과제죠.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 내가 이 고통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 달려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지가 기대되는 거잖아요. 내가 그동안은 사람에게 위로를 받았다면, 이 고통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거잖아요.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도록 말이죠.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고통에 대한 정의

설교자는 가족을 돌보느라 지친 목회자에게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그 목회자는 중증 질환을 가진 배우자와 여러 가족을 돌보기 위해 교회에서 물러나 부모님 가까이로 이사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부모님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자신과 아내뿐이라 결정했지만,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에게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는 성경이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가 믿지 않는 자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목회자는 이미 말씀의 명령대로 가족을 돌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돌봄 자체가 그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짐을 맡기실 만큼 신뢰하신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고통을 원치 않는 것을 가지고 있고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녀는 그 고통을 주님께 드리며 그것으로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설교자는 그렇게 고통을 주님께 드리라고 권하며,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그 목회자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위로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38–38문단 · 예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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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셨죠. 당신 가족, 아내, 아이들, 이런 것들에 대해요. 저는 내 사역을 하면서 이중직을 해왔습니다. >> 응. >> 제 아내는 다발성 경화증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그걸 함께 견디고 있습니다. >> 알겠네. >> 지금은 아버지가 치매를 가지고 있고, 어머니는 폐섬유증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심각한 정신 장애를 가진 누나도 있습니다. >> 알겠네. >> 몇 년 전 저는 교회에서 물러나서 부모님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는 아주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부모님을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저와 아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내 역시 제한이 있습니다. >> 그렇죠. >> 당연히 우리는 부모님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도, 저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그분들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해하시겠죠? >> 네. 하지만 형제여,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말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자보다 못하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 가족을 돌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말씀이 당신에게 명령한 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엄청난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당신의 사역입니다. 이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당신을 많이 신뢰하고 계시기에 이 많은 짐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능력으로 도우실 거예요. 저는 그 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은 죄책감입니다. 당신이 말한 것들은 제가 평생 겪은 것보다 더 많은 일들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겪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죄책감을 느끼지 마세요. 네. 사실, 그 고통을 주님께 드려보세요.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고통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녀는 고통이란, 당신이 원치 않는 것을 가지고 있고,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어요. 그것은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당신은 원치 않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원하는 것 중 하나는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주님께 드리는 것에 대해 말했어요. "주님, 이걸 당신께 드립니다. 저는 이걸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고 싶어요. 이 고통 속에서도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도와주세요." 저는 당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치고 힘들다고 느껴도, 죄책감을 느끼지 마세요.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걸 올바르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말씀드리고, 말씀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네. 아멘. 아멘.

CS 루이스의 '고통은 확성기' 인용

설교자는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 말은 고통이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젊은 시절 자기 힘을 믿으며 하나님 없이도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를 신문에 몰입해 아내가 식사하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장면에 비유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땅이 전부가 아니라고 계속 말씀하신다고 적용합니다. 영혼이 있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이 땅에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고통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권합니다.

이찬수 · 2026-10-18

설교 내 6–6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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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점점 매말라가고, 감사가 사라지고, 삶의 의욕은 없어지고, 기쁨도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뭐 있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 주시는데." 이런 원망이 넘쳐나는 여러분들,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혼미하게 하는 그 영역을 벗어나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역으로 들어가려고 어떻게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 아이처럼 가스 배관을 타고 집을 탈출해야 회복이 일어나듯이, 우리의 신앙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그곳을 배회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는 일어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그 생활은 청산하지 않으면서, 제가 돌아보면은요. 목사들인데도 어릴 때 항상 하나님 없어. 하나도 안 도와줘. 그걸 제가 많이 불평한 기억이 나거든요. 도와줄 수 없는 불신앙의 자리에 머물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했다고요. 20대 초반에 시카고로 이민 가서 가장 밑바닥에 있던 그 상황에서 진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때부터 제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은혜를 누리기 시작한 출발이 되는 거예요. 저는 가끔씩요. 저는 3월 15일 날 시카고로 이민을 갔는데, 그 날이 영적으로 내 생일이라고 얘기를 해요. 제가 미국에 안 갔으면, 시카고에 가지 않았으면, 그 절망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절대로 목사가 안 됐습니다. 교회도 안 나갈 수도 있어요. 그때까지 인격적으로 제가 애쓰지도 않았고 만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뭘 강조하고 싶은 겁니까? 여러분, 이런 점에서 저는 기독교 변증가거든요. CS 루이스라는 분. 여러분, 신앙생활 처음 하시거나, 오늘 초대 오신 분들, CS 루이스의 책을 구해서 읽어 보십시오. 어떤 책이라도 괜찮아요. 이분이 정말 대단한 분인데요. 이분이 쓴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그분의 확성기입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그분의 확성기입니다. 우리가 그냥 내 힘을 의지하여 전도해 보면, 그런 분들이 옛날에 많았습니다. "난 주먹을 믿어. 난 내 주먹을 믿지. 난 하나님 없어도 돼." 너무나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려고 바둥바둥 그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리는 거예요. 들리지 않습니다. 옛날에 종이 신문이 있을 때, 신문 보내라고 몰입하고 있으면, 아내가 처음에는 아주 부드러운 소리로 "식사하세요. 밥 먹으라고요." 안 들려요. 신문에 내가 몰입하고 있으면, 밥 먹으라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거거든요. 오늘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풍요로운 삶을 원하세요. 계속 말씀하십니다. "진짜 얘들아, 땅이 다가 아니라고, 왜 그렇게 바둥바둥 그리냐고." 응.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혼이 없다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설명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요. 그 반통만 알고 있기 때문에, 안 그렇던가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건 전부이고, 나는 영혼이 없는 짐승하고 똑같이, 나 우리 강아지를 보면서, 이 강아지가 어떨 때는 나하고 차이가 뭐지? 걔도 모든 흰혈구를 다 갖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동물들하고 저하고의 결정적인 차이는, 저는 영혼이 있어요. 영혼이. 그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는, 하나님 말씀이 안 들려요. 그리고 집에 가서 생각해 보세요. 아, 그러고 보니까 이 땅이 끝이라고 한다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잖아요. 설명이 안 되는 그 많은 일들이, 왜 이후에 연장되는 그 부분을 모르기 때문이거든요. 하나님은 계속 그 말씀을 해 주세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관점으로 보면 참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는데요. 본문에서 "다 배불리 먹고" 이런 결과가 이제 결론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결론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어땠는 줄 아십니까? 자, 15절 다시 한번 보십시오. 마태복음 14장 15절입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두 대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빈 들은 결핍의 상징 아닙니까? 게다가 제자들이 관찰한 그대로, 이미 밤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구할 수 없다. 그 이야기를 지금 고백한 거거든요. 그래서 빈 들이요. 이거가 어떻게 다 배불리 먹고의 재료가 됐나?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결핍의 상징인 빈 들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기에 지금 밤까지 찾아왔는데, 놀라운 건 그게 역설적으로 수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게 된 원인이었다는 거예요. 다른 데서 그날 군중들 먹일 수 있는 양식을 구해 왔으면, 예수님의 기적에 음식은 나오지 않았을 거 아니냐고요. 결핍이 기적을 만든 재료가 된 거거든요. 빈 들이 다 배불리 먹고, 이 풍요로움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누가 저한테, "아니 그 장소가 빈 들이었는데, 거기는 결핍이었는데,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걸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저한테 물으시면, 저는 대답 간단하게 다 그거요. 정답은요,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결핍이 재료가 된 겁니다.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과 우리 교회 오래 다니지만 복음이 뭔지 모르는 분에게 드리고 싶은 핵심이 이거거든요. 여러분, 살다 보면 빈 들이 오지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차원의 빈 들이 오고, 관계적으로 배신당해서 상처받는 빈 들이 오고,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마음을 나눌 길이 없어 가지고 막 절망하고, 이게 인생 아닙니까? 저는 하나님이 그때 이미 분당 우리 교회 만 명에 단임 목사로 딱 계획을 하고 계셔 가지고, 저희에게 빈 들을 좀 빨리 보내 주셨어요. 저는 20대 초에 인생의 빈 들, 인생의 쓴맛을 본 거거든요. 지금도 기억해요. 절망적인 제 상황, 환경은요. 아니, 내가 한국 살다가 미국 갔는데, 그때 경제 격차가 미국하고 한국은 비교할 수 없이만큼 우리나라가 낙후가 됐는데, 세상에, 난 미국이라고 갔는데, 미국에서 저 화장실 가는데 새벽에 불을 켜면은 바퀴벌레들이 막 놀라가고, 이것 왜 일찍 일어나서 그러면서 막 바퀴벌레가 도망가는 그 그거, 아, 내가 한국에도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요. 이 목조 건물, 막 미국에 낡아 빠진 100년된 목조 건물에 제가 사는데, 하여튼 한심했어요. 그리고 아버지셨죠. 온 남매 중에 뚝 떨어지는 막내죠. 대학교 2학년 맞추고 이민을 갔는데, 거기서 다시 공부를 해야 되는데, 학비를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이게 절망이 온 거죠. 빈 들이 찾아왔죠. 자꾸 좌절이 겹치니까, 그냥 죽고 싶더라고요. 조금만 더 제가 용감했으면, 뭐 도전했을지 모르죠. 무서워서 못 죽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에요. 그 빈 들들이 저로 하여금 놀랍게도 배불리 먹고, 이 인생을 만들어 준 거 아닙니까? 배불리 먹고. 저는 오늘 여러분들한테, 아 참, 저희 교회가요, 지금도 자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너무 힘듭니다. 그 오연을 하지 말아 주세요. 얼마나 주 목사가 욕심이 많아 가지고, 나까지 신도 만들려고 그냥 저렇게 쓴다고 그러는데, 진짜 오해하세요. 저희는요, 일만 소도 파송 운동으로 만 명 이상을 다 파송한 교회예요. 이 오해만 가지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왜 그 영화 한편 참 재밌는 거 보고 나면, 막 진짜 우리에 보고, 너 그거 봐야 된다. 말 안 들어, 너 진짜 이 영화는 봐야 된다. 아직도 안 봤니? 같이 가져 나오고, 이런 영화가 있잖아요. 최근에도 그런 영화가 있었는데, 이 심정으로 여러분을 초대한 거예요. 여러분이 마음 말고는 다른 거 없습니다. 바로 어제인데요.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 마음을 울린 찬양, 이게 참, 원래부터 잘 아는 곡인데, 하나님은 때에 따라 새롭게 은혜를 주세요. 광야를 지나며, 이런 제목의 찬양인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써 있네." 제가 이 가사가 너무 어제 와닿 가지고요. 왜 시카고에 만 명 때 저를 보는 거 같으니까요. "왜 나를 깊은 어둠에 가두어 두느냐고, 막 떼지를하고, 당신이 신이냐고, 막 이렇게 무능한 시기냐고, 막 되들고 그랬거든요." 그때 땅이 가사 그대로예요.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요." 과거형이에요. 과거를 돌아보니까, 그 광야가 내게,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광야가 어떤 곳이냐?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제가 이 곡을 선분 검색을 해 보니까요, 여성분인데요, 저하고 좀 환경이 비슷하더라고요.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 그것도 비슷해요. 그리고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아직 그 어린 학생인데, 자기가 벌어서 생활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 얼마나 그 광야 그 길이 심했겠냐고요. 그 고백을 쭉 하면서, 아까 여기에 저는 과거형으로 썼는데, 저는 단수로 여러분께 설명했던 게 뭐였죠? 왜 나를 다시 한번 보세요.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요." 과거형이에요. 과거를 돌아보니까, 그 광야가 내게,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그리고 결론에 있는 그다음 가사가 너무 중요합니다. "주께서 나를 사,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고,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신 곳, 그 광야에 내가 서 있네." 이 찬양 아닙니까? 이 부분은 다음 주일 날 제가 또 설명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제가 결심한 게 하나 있는데요. 오늘은 설교를 끝내지 않고 마치리라. 요렇게 설교를 끝내려고요. 지금 여러분 생각에, 우리 목사님 스타일을 보니까, 아직 서론하고 있는데, 폴로는 도대체 언제 하는 거야? 두려워하고 있는데, 폴로는 다음 주일 할 거예요. 이 설교 끝났습니다. 요렇게 설교를 제가 끝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