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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4개 · 2 / 2쪽 · 한 쪽 20개

사도행전 4장의 기도와 성령 충만

설교자는 사도행전 4장의 장면을 통해 성령의 재임재를 설명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등 제자들은 이미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풀려나 회중에게 돌아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자, 모인 곳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시 성령으로 충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일이 편리한 날에 임한 성령이 이후에도 다시 임하신 사례라고 봅니다. 그는 사마리아와 고넬료의 집, 에베소 제자들의 사례도 함께 언급하며 같은 흐름을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 이런 근거에서 그는 성령의 부어 주심을 구하는 기도가 성경에 근거한 정당한 기도라고 적용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19

설교 내 4–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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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항상 제사장의 통제 아래에서 질서 있게 이루어지고, 이는 항상 조용한 방식으로 일어나며, 반드시 그렇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한 학파의 주장이다. 이는 한 학파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학파가 있고, 이 학파는 때때로 복음주의적이다. 이 학파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전한다. "아니, 성령은 편리한 날에 한 번만 주어졌습니다. 그분은 그때 교회에 임하셨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러므로 성령의 부어 주심을 기도로 간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라고 말한다. 성령의 부어 주심은 단 한 번 있었다. 다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그것을 기도로 간구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성령께서 교회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영향과 능력에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성령께서 당신을 채우시고, 같은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채우실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성령의 부어 주심을 간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편리한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다시 보내셔서 부어 주심을 간구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이 교훈이 옳다면, 회개와 부흥이 전혀 자리 잡을 여지가 없고, 우리는 결코 부흥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성경적이지 않다. 사도행전 자체에 보면, 이 교훈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가르침이 있다. 성령께서는 편리한 날에 교회에 임하시고 채우셨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임하셨고 채우셨다. 실제로 이 사도행전 4장에 보면, "그들이 기도할 때, 그들이 모인 곳이 흔들리며,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분명히 편리한 날에 일어난 일을 반복한 것이다. 이 사도들과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고, 편리한 날에 성령이 임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다시 회중으로 돌아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자, 다시 성령이 임하셨다. 벽마저 흔들리며, 모두가 다시 성령으로 충만해져 부활에 대해 담대히 증거했다. 또한 사마리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되어 있다. 코르넬리우스 집안에서도 성령이 그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편리한 날에 임한 것처럼 임하셨다. 이에 대해 페레도는 처음에는 회의적이었고 주저했지만,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졌다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도 부어 주셨던 것처럼" 인정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에 계셨던 제자들에 대해서도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정경을 넘어서, 교회 자체의 놀라운 역사도 있다. 교회의 후속 역사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교회의 역사가 죽은 수준의 성취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니다. 교회의 역사란 수백 년 동안 계속된 상승과 하강, 다시 상승과 하강의 역사이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라고 하면, 거의 부흥과 부흥의 쇠퇴, 그리고 다시 부흥이 오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 역사의 조망을 해보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는 모습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강력한 시작, 흔들리는 일들이 일어난 강력한 능력. 그리고 점차 그 일이 사라지고, 어두운 시대, 중세의 어두운 시대, 교회 역사에서의 무기력과 졸렬함의 시대가 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빛나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이는 부흥이었고, 사도행전의 시대로의 회귀이며, 이 고대적 능력의 회복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시대가 지나가고, 퀘이커 시대가 다시 큰 부흥이었으며, 18세기와 19세기의 부흥이 있었다.

사천 예배당 개척과 할머니들의 예배

설교자는 1977년 7월 10일 신학 공부 중 강사 목사님의 권유로 사천의 작은 예배당에 파송된 경험을 나눈다. 그곳은 26년간 유지되어 왔으나 교역자가 공석인 날이 많았고, 세례 교인이 15명에 못 미쳐 교회에서 기도처로 격하될 위기에 있었다. 교인은 할머니 두 사람과 남자 집사 한 명 정도였고, 교회학교 학생도 몇 명뿐이었다. 설교자가 머문 집은 80세가 넘은 할머니 집이었는데, 벽에서 곰팡이와 흙냄새가 났고 벽지가 떨어져 나왔으며 지네가 자주 나왔다. 음식에는 파리가 꼬였고 냉장고와 전기도 없어 설교자는 자주 금식하며 견뎠다. 온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지만 예배당과 할머니 집에만 전기가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변소간만도 못하다고 비웃었다. 설교자는 그 말 앞에서 전도할 수 없다고 느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강사 목사님은 그저 엎드려 기도하라고 권했고, 얼마 뒤 장로님이 산을 팔아 마련한 돈을 가져와 동네 입구 땅을 계약하게 되었다. 이후 노회에 청원했으나 두 차례 기각되었고, 세 번째 청원에서 블록을 한 장씩 모금하는 방식이 허락되었다. 각 교회의 도움으로 예배당과 사택, 교육관이 지어졌고, 설교자는 이를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 증거로 말한다. 설교자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믿음을 강조한다.

노우호 · 2026-10-18

설교 내 15–28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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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중에서 들은 분도 계시겠는데, 오래전 50년 전에 제가 사천이라는 곳에 갔는데, 조그만 예배당을 건축해서 예배를 드리며 한 26년간 유지되다가, 그것도 교역자가 공석으로 있는 날이 절반, 교역자가 있는 날이 절반인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교역자가 와서 살아갈 수 있는 재정이 아예 안 되는 그런 곳인데, 26년간 유지해 오다가 폐쇄한 거라. 안 된다, 이 교회가 안 된다 해 가지고. 교회라고 이름을 붙이려면 세례 교인 15명 이상이 있어야 되고, 그게 떨어진 채 2년, 3년 가면 등급이 격하돼 가지고 교회가 아니고 그냥 기도처, 이렇게 한 급 내려옵니다. 기도처 정도도 안 되고, 할머니 두 사람하고 남자 집사라고 하는 분이 한 분, 서리 집사 되겠고 여자 집사 한둘 있고, 그게 다예요. 교회학교 학생 몇 사람 있고. 그래도 여러분, 세상의 어떤 단체라면 벌써 흐지부지되고 사라지고 할 텐데 교회는 좀 다른 데가 있어요. 그래도 유지가 되는 거예요. 목회자도 없고 해도 어떻게든 거기 모여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때는 할머니 둘만 나와 가지고 예배하는 거야. 그런데 할머니 둘이 성경도, 성경 구절도 몰라. 그러니까 뭘 하면 되겠어요? 모르는 할머니 둘이 주일날 예배하면 뭘 하면 되겠습니까? 생각을 안 해 보신 거지. 사도신경 합시다. 그건 다 외웠거든요. 사도신경하고, 아는 찬송을 하나 꺼내야 돼. 그런데 또 안 맞아. 그걸 모르니까 둘이 하면 이부, 셋이 하면 삼부고 그래. 성경은 모르니까 읽을 수도 없고, 주기도문 합시다. 그럼 끝이라. 예배가 그게 끝인데, 그렇게 교회가 힘이 없어도 기도하고 할머니들이 유지를 하는데, 제가 신학 공부할 때 저를 가르치는 강사 목사님이 나보고 거기 가라는 거예요. 1977년도 7월 10일에 거기로 간 거예요. 가 가지고 어렵사리, 80이 넘은 할머니는 큰방에 자고 나는 작은방에 자는데, 벽에 곰팡이 냄새, 흙내 냄새가 나고, 풀하고 흙벽에다가 벽지를 자꾸 바르니까 벽지가 두껍고 뻣뻣해 가지고 자꾸 떨어져 나와. 서로 내밀어. 바람 불면 벽지가 푹 나왔다가 붙었다가, 풍구질을 해 가지고 얼마나 냄새나는지. 그게 또 대밭 밑에 있어 가지고 걸핏하면 지네가 나와. 그런데 할머니가 밥을 차려 주는데 파리가 먹다가 빨다가, 밥은 소화가 된 것 같아. 파리가 얼마나 빨았던지. 냉장고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갔으니까. 그걸 내놓는데 먹어야 돼요, 안 먹어야 돼요? 지금도 모르겠어. 그래도 전도사가 온다고, 전도사가 없는 게 절반이니까 온다 하니 할머니가 정성이 있어 가지고 갈치를 사다가 구웠는데, 구운 건지 삶은 건지 하여튼 그것도 파리가 얼마나 냄새를 좋아해 가지고. 그걸 갖다 내놓는데 이것도 먹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고민인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제가 금식 중입니다. 금식이 아니고, 금식이죠, 금식. 그러니까 자주 금식을 했어요, 덕분에. 금요일 저녁에 가 가지고 토요일 금식하고, 끓여 먹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거의 밥을 못 먹다시피 하는 거죠. 그때 그걸 내가 어떻게 견뎌 냈는지 지금도요. 그래서 기도를 하는 거예요. 전도한다고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교회에 나오라고 하는데, 온 동네에 다 전기가 들어왔는데 길가에 있는 외딴집, 예배당하고 할머니 집만 전기가 안 들어온 거야. 할머니 혼자, 80세 넘은 분이 혼자 사니까 집을 손볼 수도 없고, 그야말로 기침만 거기 하면 집이 날아갈 것 같아. 무너질 것 같아요. 전도하러 갔더니 뭐라고 하느냐? 야, 우리 화장실만도 못한, 변소간만도 못한 거기에 우리더러 가란 말이냐, 오란 말이냐, 그러더라는 거야. 그 말을 듣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전도하러 못 나가겠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사실이거든요. 당시만 해도 새마을 운동 바람이 불어 가지고 집마다 지붕 개량도 하고 페인트도 칠하고,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로 좀 번질하게 하는데, 온 동네 전기가 들어왔는데 예배당하고 할머니 집에는 전기가 안 들어온 거라. 거기다가 비포장도로 큰길가에, 진주하고 고성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직행버스가 지나가는 길가에 있었으니까,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를 덮어씌우고 하니까 정말 가서 보니 눈물 나는 거예요. 지금도 내가 믿음이 있어서 그런지 멍청해서 그런지, 그걸 무시하지 못하고. 전도하려고 했는데 마을 사람들 반응이 그렇다는 거야. 그때 기도하기 시작한 거예요. 하나님, 전도하려고 하니까 예배당이나 전도사 꼴이 이래 가지고 어떻게 전도하겠습니까? 차라리 없으면 모르겠는데 있다는 게 온 마을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밖에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지어야 되겠는데, 예배당을 지으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땅을 사야 되고, 또 어디서 건축비를 마련해 가지고. 돈 이야기를 어떻게 해요? 저는 늦게 믿어 가지고 인맥이 없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아무도 저에게 손잡아 주고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도 기도해야 돼.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그 예배당에 사람 나오라고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봐도. 그때부터 전도를 못 하겠더라고.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창피하게 들리는지. 그래서 학교에 와 가지고 나를 보낸 강사 목사님에게 도저히 이래 갖고 못 하겠다고 하니까, 무슨 소리냐며 그냥 엎드려 있으라, 기도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엎드려 있어도 하늘에서 벽돌이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눈앞이 캄캄하고 그래요. 그런데 얼마 있었더니 한 장로님이, 나를 가라고 한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 장로님인데, 강월상이라는 장로님이 산을 하나 팔아 가지고 돈을 싸 들고 온 거야. 그러니까 나를 보낸 분은 나름대로 도우려고 이리저리 알아보고 했던 것 같아요. 나는 순종해서 간 것뿐인데. 그걸 가지고 동네 제일 입구의 반듯한 땅 하나를 계약하고. 그런데 땅만 가지고 예배당이 됩니까? 기초를 해 가지고 벽돌을 올려야 될 거 아니야. 뭐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기도도 하지만 노회에 청원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50년 전이니까 진주노회 안의 교회가 한 60, 70개 됐을 텐데, 재정적으로 목회자 생활비라도 줄 수 있는 교회가 아마 열 교회도 안 될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노회에 청원서를 내는데 노회 재정이 없는 건 상식적으로 아니까, 경남 진주노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한 사람당 블록, 우리 여기 말로 블록 한 장씩을 보내 주시면 제가 목수 일 한 경험이 있으니까 제 손으로 지어 보겠습니다. 기도하고 그걸 보냈어요. 그런데 노회에서 보더니 이런 청원이 다 있느냐면서 그냥 기각시켜 버린 거예요. 6개월 있다가 또 보냈어. 날짜만 고쳐 가지고 똑같은 문구 그대로, 안 고치고 보냈어. 이 사람이 이거 또 보내? 또 기각. 오기가 생기더라고. 내가 번거롭게 하리라, 이 과부처럼 내가 번거롭게 하리라. 세 번째 보내니까 노회 임원들이 이 사람 또 보냈네, 계속 보낼 모양인데, 그래서 상정해 가지고 노회에서 결의한 거예요. 정치하는 목사, 장로들이 얼마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그렇게 모아서 모금해 주는 게 아니고 그런 방식으로 모금하는 걸 허락하기로. 자기들은 책임 안 지는 거야. 그런 방식으로 모금하는 걸 허락하기로 결의해서 통과됐어. 그래 가지고 허락받았다 하면서 각 교회에, 노회 안에 교회 주소가 있으니까 다 보내 가지고, 노회에서 허락받았다, 예배당은 내 손으로 지을 테니까, 내가 건축 경험이 있으니까 벽돌만 보내 주면 내가 쌓아 올리겠다. 그 간단한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해 가지고, 그렇게 모인 돈으로 예배당을 다 짓고 사택 다 짓고 교육관 짓고, 제가 그 교회에 5년 있다가 떠나오는데 그때 돈으로 100만 원 정도 남겨 놓고 왔다고. 예산을 남겨 놓고.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아,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들으신다.

조지 뮬러의 5만 번 기도와 고아원

설교자는 영국의 목회자 조지 뮬러를 소개한다. 그는 독일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기도회에 참여해 회심했고, 젊은 시절의 도둑질과 도박 같은 방탕한 삶에서 돌아섰다. 이후 영국 브리스톨에서 기드온 채플과 베데스다 채플을 운영하며 버려진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는 누구에게도 재정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다렸고, 기도한 내용과 응답을 일기로 기록했다. 설교자는 그 기록에 따라 5만 번의 응답을 받았다고 전한다. 한번은 고아들이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빵이 없었지만 뮬러는 빵 주심을 감사한다고 기도했다. 그때 빵을 실은 차가 도착했는데, 사고로 배달될 곳에 가지 못해 가져온 것이었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교통사고를 내신 것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뮬러는 자신은 검소하게 살았고, 70세가 넘어 40개국을 다니며 300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설교자는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적용한다.

노우호 · 2026-10-18

설교 내 50–54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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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림을 보셨죠? 이 그림 누구인지 아세요? 보통 식당이라든지 붙어 있을 텐데, 조지 뮬러라고 하는 영국의 목회자예요. 독일에 가서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그때까지는 도둑질하고 못된 짓 하고 그렇게 살던 사람인데, 독일의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누가 권해 가지고 기도회에 한번 같이 가 보겠느냐? 가자 하니까 갔대요. 여기 보면 성경책과 돋보기 같은 것, 입에 풀칠한다고 수프 한 잔하고 빵 한 개, 참 소박한 것 같아.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데 얼마나 기도해서 얼마나 응답받았어요? 5만 번 기도해서 응답받은 사람, 조지 뮬러. 어떻게 이분이 5만 번이나 응답받았느냐? 1805년에 태어나 가지고 1898년까지, 영국의 목회자인데 고아의 아버지라고. 이분이 왜 그렇게 기도하게 됐느냐 하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영국에서 어떤 사람들은 떼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해져 가지고 버려진 아이, 부모 없는 아이가 너무 많아. 그런 아이들 중에서 여자아이 한 30명을 거두어 가지고 먹이고 입혀야 되는데 자기가 목사로 가진 게 뭐 있어요. 그런데 이분의 경험이 뭐냐 하면 한 번도 누구를 찾아가서 내가 고아원을 하고 있으니까 재정적으로 좀 도와 달라고 말해 본 적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냥 기다리고 있어. 더 놀라운 것은 왜 이분이 5만 번이라고 쓰고 있느냐? 기도한 것마다 일기를 써요. 기도 일기를. 몇 년도 몇 월 며칠 몇 시에 무슨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응답되면 응답된 기도를 다 쓰고 그렇게 한 거예요. 젊은 시절에 도둑질, 거짓말, 도박, 사기 등으로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던 방탕아 중의 방탕아인데, 할레 대학에서 기도회에 참여해 가지고 회심하게 돼요. 신학 공부를 해서 전도자로 살았는데 영국으로 건너가 브리스톨 지역에서 기드온 채플하고 베데스다 채플이라고 하는 교회를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거두고 챙기고 섬기는데, 5만 번이나 응답받은 거예요. 어떤 때는 때가 돼 가지고 고아들이 다 식탁에 앉아 있어. 빵이 없어, 지금. 먹으려고 침을 삼키면서 김칫국 마시고 있는데 빵이 없어.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거예요. 빵이 없는데 감사를 해요. 빵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입장이 곤란해요. 빵이 없는데 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기도하는데 빵차가 들어온 거야, 빵 실은 차가. 그 내용을 다 이야기할 수 없고, 어떤 경우는 사고가 나 가지고 빵을 가져갈 수가 없어, 배달될 곳에 못 가는 거야. 갖다 내버릴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가져왔다고 하면서 가져온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렇다고 하나님이 교통사고를 내신 건 아닙니다. 자칫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5만 번 중에는 그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란 말이야. 그래서 고아들을 챙기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되는데, 하나님이 직접 하지 않으니까 누군가 하나님 대신 해야 될 일이고, 뮬러 목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 보실 때 하나님의 일인 거예요. 뮬러가 자기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 아까 봤죠. 빵하고 수프 하나 하고 그렇게 검소하게 살고, 70세가 넘어서 40개국을 다니면서 전도해 가지고 300만 명에게 하나님을 전했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온 내 삶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에 빗댄 말뿐인 기도

설교자는 한국 사람들이 대화를 마무리할 때 습관처럼 '밥 한번 먹자'고 인사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본문을 풀어 갑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대화를 끝낼 때 건네는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서로의 삶과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 공동체에서 이 말은 늘 마무리 인사처럼 오갑니다. 설교자는 야고보서 2장 15절과 16절을 읽으며,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 앞에서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 건네고 손에 있는 빵과 옷은 내어 주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 인사는 축복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궁핍한 이웃을 외면하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자신에게도 질문이 떠올랐다고 고백합니다. 정말 기도하겠다고 말한 뒤에 기도하고 있는지, 나아가 그 형편에 꼭 필요한 것을 최선으로 돕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공동체를 위한 간구임을 짚고,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는 고린도서 8장 9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기도에서 멈추지 않고 기꺼이 나누는 실천의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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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성경의 순서에 따라서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을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매일 새벽을 깨워서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 나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매일의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 분주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믿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를 나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아닙니까?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다는 그 역사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며, 그 믿음이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이 믿음에 더하여 한 가지 사실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고백이, 이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우리의 믿음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가? 야고보는 십자가를 믿는 믿음 자체가 부족하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믿음의 고백이 진짜라면, 그 믿음의 고백은 살아서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은 짧은 단락입니다만, 이 단락 안에서 야고보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절에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절도 볼까요?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6절도요.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다라고 야고보서에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이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몸이 숨을 쉬듯이, 살아 있는 믿음은 살아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이 믿음의 숨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우리의 믿음의 숨은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인가? 이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살펴보고 우리의 삶의 자리로 함께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말뿐인 믿음입니다. 우리 15절의 말씀을 함께 볼까요? 15절의 말씀을 보니까요. 이러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형제와 자매가 등장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입을 옷이 없습니다. 또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이것을 채울 수 없는 변치 않은 형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이 형편이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는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말씀에서는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여서 이렇게 행동을 합니다. 16절에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여기서 이 평안히 가라라는 말은 헤어질 때에 건네는 인사입니다. 구약의 샬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 표현이죠. 그런데 오늘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궁핍한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떠날 때에 샬롬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사실 축복보다는 모욕에 가깝습니다. 이어서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축복의 말이죠. 오늘 이 사람은 이 형편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배를 채우시기를 원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축복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축복입니까? 그런데 오늘 이 말뿐인 자는 정작 자신의 손에 있는 빵은, 자신의 손에 있는 옷은 이 사람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저 경건한 말로, 그럴듯한 말로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고 자신을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그저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나라의 한 표현이 떠올랐는데요. 밥 한번 먹자라는 표현입니다. 한국의 전형적인 인사죠. 우리가 이렇게 전화를 하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질쯤에 혹은 전화를 끊을 조금 어색하니까 그 대화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래요. 우리 밥 한번 먹읍시다. 나중에 밥 한번 먹읍시다. 이렇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항상 대화의 마무리쯤에는 서로의 기도 제목을 묻곤 하죠. 그리고 마무리에는 항상 우리가 어떻게 얘기합니까? 그래요.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이 제가 질문으로 떠오르더라고요. 정말로 나는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형편에 정말 필요한 것을 내가 최선으로 돕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과 겹치는 기도를 하나님께 고백을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그 기도를 나에게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니까요. 늘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향한 간구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향하여서 필요한 간구를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샬롬, 평안을 빌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의 평안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고린도서 8장 9절의 말씀, 우리 함께 다 같이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유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함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의 갈급함 그 갈망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을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은혜를 받은 것이 우리가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 아닙니까? 이 믿음이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제도 그렇고 많은 공동체와 지체를 만날 때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다면, 오늘 이 시간 이 자리 박차고 떠나기 전 그 영혼과 공동체를 위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심으로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우리의 삶을 기꺼이 주는 그 실천의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아는 것뿐인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할 텐데요. 이어서 18절의 말씀을 보면요. 이 18절의 말씀은 신약을 통틀어서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시작을 하는데요. 여기서 이 어떤 사람이 한 말이 어디까지를 나타내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인용 부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혁 계정에서 번역한 번역을 살려서 번역을 해 보았는데요.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번역 의역본을 가지고 왔는데요. 요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행함 없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이 있다. 너는 행함이 없으니 내 믿음을 보일 수 없지만 나는 행함이 있어서 내 믿음을 볼 수 있다. 요점은 이겁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믿음은 앞서 말했듯 삶으로 드러난다라는 것을 야고보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19절은 충격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절의 말씀 보면요.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의 고백은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이 날마다 고백했던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이 항상 고백했던 정통적인 신앙의 방식이었죠. 그런데 야고보서는 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는도다. 근데 여기서 말하는 잘하는도다는 정말로 칭찬의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겁니다. 잘한다. 야고보가 이렇게 어떻게 보면 빈정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귀신들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도 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믿고 몸을 던다. 여기서 던은 털이 곤두 정도로 몸설이 친다라는 뜻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과 그리스도인의 극명한 차이는 무엇일까요? 귀신은 하나님을 알기만 할 뿐, 하나님 앞에서 떨기만 할 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안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울 수도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자 하는 열망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교리를 알고 있고요. 성경의 말씀을 매일마다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식만이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이어진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