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5개 · 1 / 1쪽 · 한 쪽 20개
김선태 목사와 점자 성경 공부
설교자는 성경학교에서 이 년간 공부하던 시절 특강을 하러 온 강사 김선태 목사를 소개합니다. 김선태 목사는 시각 장애인이었지만 성경을 매우 많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그가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고 전하며, 비장애인인 자신들이 눈으로 읽고 지나가는 것과 대비합니다. 김 목사는 점자를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더듬어 읽었기 때문에 훨씬 정밀하고 세밀하게 말씀을 읽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 휙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글자를 더듬어 기억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정전이 되어도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그가 우리에게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으나 자기는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하며,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19–20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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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에 진주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이 년을 공부할 때 어떤 특강하는 강사가 오셨는데, 김선태라고 하는 목사예요. 김선태 목사가 시각 장애인인데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여러분, 성경을 아마 다 외우다시피 하는 것 같아. 우리는 눈이 보이니까 그냥 스르르 읽어 지나가거든요. 이 사람들은 점자를 가지고 손으로 한 자 한 자 더듬어 읽으니까 굉장히 정밀하게, 세밀하게 읽고 그걸 생각하면서 읽어요. 눈이 안 보이니까 휙 지나가는 게 아니고 한 자를 더듬어서 기억하는 거예요. 성경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자기는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대. 정전된 거나 전기 들어온 거나 똑같으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으나 자기는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대요. 얼마나 밝은 눈을 갖고 있느냐? 착착착착 해서 계단을 올라서 어디 몇 걸음 딱딱 가서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탁 꽂으면요. 요즘은 번호 키를 하지만 옛날에는 열쇠 구멍 있잖아요. 바로 쏙 하는 거예요. 더듬지도 않고 착착착 하면 돼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 보고 하는 말이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는데 자기는 점점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복잡한 빌딩 한쪽에서 성경을 읽던 여사원
설교자는 어느 빌딩을 방문했을 때의 장면을 전합니다.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식사를 하러 분주하게 오가는 복잡한 틈에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한 여사원이 의자 한쪽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습 때문에 복잡하던 빌딩 전체가 갑자기 기도원처럼 느껴졌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자리에 다가가지 못하고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는데,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장면을 통해 기도의 자리가 반드시 조용한 예배당이나 특별한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버스 안이든 집안이든 복잡한 일터든 상관없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흔들리고 불안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고 승리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기도가 습관이 된다면 그곳이 각자의 겟세마네 동산이 되리라고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하용조 · 2026-10-26
설교 내 18–19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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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 번은 어느 빌딩에 갔는데, 점심시간에 다들 식사하느라고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왔다 갔다 하는데 제가 그 복잡한 틈을 가다가 발걸음을 멈춘 적이 하나 있어요. 어느 여사원 같아요. 여사원이 그 복잡한 틈에 의자 한쪽에 이렇게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더라고요. 그 순간에 그 복잡한 빌딩은 갑자기 이 여자 하나 때문에 아주 기도원이 돼 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가지를 못하고 옆에서 이렇게 봤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버스 속이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집안이면 어떻습니까? 복잡한 일터면 어떻습니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 내가 흔들리는 이 마음을 하나님, 붙잡아 주십시오. 불안한 이 마음을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승리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이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습관이라면 그것이 여러분의 겟세마네 동산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멘.
진주 성경학교 시각 장애 강사 김선태 목사 이야기
설교자는 진주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2년간 공부할 때 특강을 하러 온 김선태 목사를 소개합니다. 김 목사는 시각 장애인이었지만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자신들이 눈으로 성경을 쓱 읽고 지나가는 것과 달리, 김 목사는 점자를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더듬으며 정밀하게 읽고 생각하면서 기억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생활 속 모습이었습니다. 김 목사는 정전이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더듬지 않고 바로 꽂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설교자들에게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으나 자기는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겨 실족이 거의 없고 듣는 것에도 민감한 모습을 보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듣고 깊이 생각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적용합니다. 믿음은 보는 데서 나는 것이 아니라 들으면서 난다는 메시지가 이 예화를 통해 강조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20–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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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진주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2년을 공부할 때 특강하는 강사가 오셨는데, 김선태라고 하는 목사예요. 김선태 목사가 시각 장애인인데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하면, 아마 성경을 다 외우다시피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눈이 보이니까 그냥 쓱 읽어 지나가거든요. 이 사람들은 점자를 가지고 손으로 한 자 한 자 더듬어 읽으니까 굉장히 정밀하고 세밀하게 읽고, 생각하면서 읽어요. 눈이 안 보이니까 휙 지나가는 게 아니고 한 자를 더듬어서 기억하는 거예요. 성경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자기는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대요. 정전된 것이나 전기가 들어온 것이나 똑같으니까. 그래서 우리 보고 하는 말이,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으나 자기는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고 해요. 얼마나 밝은 눈을 갖고 있느냐 하면, 착착 계단에 올라서 어디까지 몇 걸음 딱 가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탁 꽂아요. 요즘은 번호 키를 하지만 옛날에는 열쇠 구멍이 있잖아요. 거기에 바로 쏙 들어가는 거예요. 더듬지도 않고 착착 해요.
그래서 우리 보고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는데 자기는 점점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굉장히 촉각이 민감하고, 걸음도 우리보다 실족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세밀히 더듬어서 가니까요. 우리는 까불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빠지고 하는데, 이분은 범사에 조심조심하고 듣는 것도 굉장히 민감하게 듣는 거예요.
손바닥 그릇의 물을 쏟아버리는 이미지
설교자는 베일리의 권면을 따라, 들은 말씀을 교회를 떠난 뒤에도 되새기라고 말합니다. 베일리는 집에 돌아가거나 들어와서 잠시 말씀을 묵상하며 소가 되새김질하듯 씹어 보라고 했다고 소개합니다. 그는 신앙의 깊이를 원한다면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대비로, 손바닥 크기의 그릇에 물을 담아 주차장에서 쏟아버리고 곧바로 세상 음악을 틀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베일리는 말씀을 무릎 꿇고 기도로 바치고, 마음 깊이 새기지 않으면 사탄이 그것을 빼앗아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떠올리며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가 먹는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새를 놓아주고 자신의 양식을 빼앗는다고 적용합니다. 이는 외적 형식이 아니라 말씀을 원칙으로 붙드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2
설교 내 8–8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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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간섭이 제거되는 기회를 원하는가?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기대가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설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너무 낮게 보는 바람에, 다른 모든 상상 가능한 것들을 함께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라도 하나님이 단순한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 계획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분은 주의 날에, 자신의 사역자들을 통해 백성을 축복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서기 전에 보내심을 받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15초라도 이 일이 쉽거나 좋거나 재미있거나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서는 일은 엄숙하고 경건한 일이다. 당신은 말한 모든 말에 대해 계좌를 드러내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설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게 되면, 이 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 된다. 베일리(Bayly)는 『신성의 추구(The Pursuit of Godliness)』에서 이 일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성도 모임 후 세 번째 의무는 무엇인가?' 교회를 떠난 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무들을 설명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갈 때, 또는 집에 들어왔을 때, 잠시 동안 들은 말씀을 묵상하라. 소처럼 씹는 그림을 보라. 교회에서 들은 말씀을 마음속에 되새기라'고 말한다. '신앙 깊이를 원한다면,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신은 손바닥 크기의 그릇에 물을 담아 주차장에서 쏟아버리고, 차에 타서 세상적인 음악을 틀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이롭게 받고자 한다면 말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집에 돌아가서는 들은 것을 되새기고, 잠시 동안 그것을 씹어보라.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로 바치라. 들은 말씀이 당신의 삶을 이끌고 영혼을 위로하는 축복이 되게 하라. 말씀이 마음속 깊이 새겨지지 않으면, 사탄이 그것을 빼앗아가고, 당신은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확신한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는데, 길가에 떨어지면 새들이 다 먹어버린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새들을 놓아준다. 나는 내 마음속에 새들을 놓아주고, 내 음식을 스스로 빼앗는다. 이는 외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것만 강조했다. 예수님은 이는 거짓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일을 원칙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분은 자동차도 없고, 말이라도 있었을 뿐, 모든 곳을 걸어다녔다. 삶의 조건은 달라졌지만, 원칙은 같다. 점심을 먹을 때도 예배 후의 경건한 태도와 감사로 먹어야 한다. 능력에 따라 한두 명의 가난한 성도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게 하라. 거룩한 욥처럼, 그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이 경건의 실천은 우리가 개인적인 성도 모임에 빠져들어 자기만의 성도 클럽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식사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사회 복지가 왜 혼란스러워지는지 이해할 수 있다. 교회가 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지난 20년간 지역 교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진정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명확히 주어진 일을 충성스럽게 행했다면, 오늘날의 상황은 훨씬 달랐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더 풀어가지 않겠다. 이제 그만 하겠다. 300년의 세월을 감안하더라도, 솔직히 말해, 나는 문화를 내가 행한 일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 문화는 나를 영향받게 한다. 나는 내가 행하고, 너는 너의 일을 행한다. 그래서 특정 시대와 장소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짓누르는 규율과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선택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주목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앞에서 자신이 특별한 백성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이 일이 종종 외적인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그분은 '의와 경건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일을 시도할 것이다. 어떻게 바뀔지, 무엇이 바뀔지는 모르겠다. 너는 얼마나 순종할지, 나는 얼마나 순종할지도 모른다.
귀신도 아는 사실과 그리스도인의 차이
설교자는 믿음의 고백과 순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귀신의 예를 듭니다. 야고보서 본문에서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은 성도들이 날마다 고백하던 정통 신앙이었지만, 야고보는 이를 '잘하는도다'라고 빈정대듯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말이 칭찬이 아니라 비꼼이라고 풀이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알고 있어서 믿고 몸을 떤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귀신은 하나님을 알고 떨기만 할 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안기지도 못합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이 교리를 알고 성경을 매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지식이 많다고 곧바로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우리가 아는 것이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믿음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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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성경의 순서에 따라서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을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매일 새벽을 깨워서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 나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매일의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 분주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믿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를 나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아닙니까?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다는 그 역사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며, 그 믿음이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이 믿음에 더하여 한 가지 사실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고백이, 이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우리의 믿음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가? 야고보는 십자가를 믿는 믿음 자체가 부족하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믿음의 고백이 진짜라면, 그 믿음의 고백은 살아서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은 짧은 단락입니다만, 이 단락 안에서 야고보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절에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절도 볼까요?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6절도요.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다라고 야고보서에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이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몸이 숨을 쉬듯이, 살아 있는 믿음은 살아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이 믿음의 숨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우리의 믿음의 숨은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인가? 이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살펴보고 우리의 삶의 자리로 함께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말뿐인 믿음입니다. 우리 15절의 말씀을 함께 볼까요? 15절의 말씀을 보니까요. 이러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형제와 자매가 등장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입을 옷이 없습니다. 또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이것을 채울 수 없는 변치 않은 형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이 형편이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는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말씀에서는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여서 이렇게 행동을 합니다. 16절에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여기서 이 평안히 가라라는 말은 헤어질 때에 건네는 인사입니다. 구약의 샬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 표현이죠. 그런데 오늘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궁핍한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떠날 때에 샬롬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사실 축복보다는 모욕에 가깝습니다. 이어서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축복의 말이죠. 오늘 이 사람은 이 형편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배를 채우시기를 원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축복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축복입니까? 그런데 오늘 이 말뿐인 자는 정작 자신의 손에 있는 빵은, 자신의 손에 있는 옷은 이 사람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저 경건한 말로, 그럴듯한 말로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고 자신을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그저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나라의 한 표현이 떠올랐는데요. 밥 한번 먹자라는 표현입니다. 한국의 전형적인 인사죠. 우리가 이렇게 전화를 하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질쯤에 혹은 전화를 끊을 조금 어색하니까 그 대화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래요. 우리 밥 한번 먹읍시다. 나중에 밥 한번 먹읍시다. 이렇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항상 대화의 마무리쯤에는 서로의 기도 제목을 묻곤 하죠. 그리고 마무리에는 항상 우리가 어떻게 얘기합니까? 그래요.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이 제가 질문으로 떠오르더라고요. 정말로 나는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형편에 정말 필요한 것을 내가 최선으로 돕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과 겹치는 기도를 하나님께 고백을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그 기도를 나에게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니까요. 늘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향한 간구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향하여서 필요한 간구를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샬롬, 평안을 빌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의 평안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고린도서 8장 9절의 말씀, 우리 함께 다 같이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유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함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의 갈급함 그 갈망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을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은혜를 받은 것이 우리가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 아닙니까? 이 믿음이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제도 그렇고 많은 공동체와 지체를 만날 때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다면, 오늘 이 시간 이 자리 박차고 떠나기 전 그 영혼과 공동체를 위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심으로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우리의 삶을 기꺼이 주는 그 실천의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아는 것뿐인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할 텐데요. 이어서 18절의 말씀을 보면요. 이 18절의 말씀은 신약을 통틀어서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시작을 하는데요. 여기서 이 어떤 사람이 한 말이 어디까지를 나타내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인용 부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혁 계정에서 번역한 번역을 살려서 번역을 해 보았는데요.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번역 의역본을 가지고 왔는데요. 요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행함 없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이 있다. 너는 행함이 없으니 내 믿음을 보일 수 없지만 나는 행함이 있어서 내 믿음을 볼 수 있다. 요점은 이겁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믿음은 앞서 말했듯 삶으로 드러난다라는 것을 야고보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19절은 충격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절의 말씀 보면요.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의 고백은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이 날마다 고백했던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이 항상 고백했던 정통적인 신앙의 방식이었죠. 그런데 야고보서는 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는도다. 근데 여기서 말하는 잘하는도다는 정말로 칭찬의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겁니다. 잘한다. 야고보가 이렇게 어떻게 보면 빈정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귀신들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도 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믿고 몸을 던다. 여기서 던은 털이 곤두 정도로 몸설이 친다라는 뜻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과 그리스도인의 극명한 차이는 무엇일까요? 귀신은 하나님을 알기만 할 뿐, 하나님 앞에서 떨기만 할 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안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울 수도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자 하는 열망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교리를 알고 있고요. 성경의 말씀을 매일마다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식만이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이어진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