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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8개 · 1 / 1쪽 · 한 쪽 20개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한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

설교자는 프랑스의 사상가 알랭 드 보통이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설명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보통은 현대 사회가 관계를 매마르게 만들었고, 새로운 사회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때 인상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현실을 짚으며, 무슨 일을 하고 어디서 일하는지가 곧 정체성처럼 여겨진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교회의 직분조차 자신의 의지와 열정으로 얻은 것처럼 여기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이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누구의 의지와 열정으로 된 것인지 물으며,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밝힌 점을 보여 줍니다. 결국 설교자는 우리의 자리와 직분이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왔음을 기억하라고 적용합니다.

남득현 · 2026-10-2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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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이 현대 사회의 특징을 뭐라고 말했냐면, 현대 사회는 서로의 관계를 불필요할 정도로 매마르게 만들었고, 새로운 사회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좀 어려운 말로 했는데, 그냥 우리가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은 무엇이냐면 "무슨 일을 하십니까?"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우리가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 때마다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이며, 이때 인상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해졌다고 말하고 있죠. 여러분, 우리가 부정할 수 없죠.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알랭 드 보통이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어디에서 일하십니까?"이며, 이때 인상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해졌죠.

이민 초기 '밥벌지'라 불린 청년 시절

설교자는 20대 초반 이민 초기에 자신에게 '밥벌지'라는 별명이 붙었던 시절을 회고합니다. 그 별명은 밥이나 축낸다는 뜻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어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고백합니다.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막노동을 하며 영어도 못하는 자신이 형편없이 보여 비웃음을 살 것 같아 위축되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결핍의 고통이 가장 컸던 이 시기를 숨기지 않고 되돌아봅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그를 살린 것은 교회였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를 영어 실력이나 처지로 평가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통해 교회가 사람을 소유나 처지의 기준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대해야 한다는 적용을 이끌어 냅니다.

이찬수 · 2026-10-25

설교 내 2–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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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이 여기 있다고 치고 한 번 보세요. 멀쩡히 그 존재로 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꺾어 가지고 꽃꽂이로 만들어 놓으면 이미 그 꽃은 죽은 꽃이에요. 살아 있던 생명력으로 며칠 연장하는 거지. 이게 에리프롬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에서 맨 앞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눈여겨 살펴보니, 콧마하고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는 뭘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꽃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궁금해요. 눈 여겨 봐야 보이는 꽃이에요. 여러분, 꽃구경 가자, 단풍놀이 가자 해서 버스 대절하고 설상 가는 건, 눈 여겨 봐야 찾을 수 있는 꽃이 아니잖아요.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명한 꽃을 보러 가는 건데, 하나님은 눈 여겨 살펴봐야 하는 초라한 꽃, 존재가 별로 없는 꽃을 보고 계신 거예요. 확 뽑아버려도 되는데, 눈 여겨 살펴본 그 꽃이 너무 아름다운데도 꺾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설교 준비하려고 에리프롬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쭉 읽으면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점이 있었어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천 같아요. 그 책 뒤에 보면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그런 내용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에리프롬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모르겠지만, 마음이 감동이 되었어요. 왜 우리 하나님은 테니슨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의 시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신가요? 눈 여겨 봐야 볼 수 있는, 보살 것 없는 초라한 작은 꽃도 인간의 평가긴 하지만, 그걸 존귀하게 보고 눈여겨 보고, 감상하되 생명력을 존중해서 꺾지 않는 게 우리 하나님 성품이구나. 왜 제가 유난히 그게 은혜가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저는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철이 들수록 제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양식의 삶의 기준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식했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걸 사춘기 때부터 느꼈어요. 너무나 가난했고요.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 집에서 중학생 때 충격을 받았어요. 뽀빠이라는 과자를 박스로 사 놓고 먹더라고요. 선반에 올려 놓고, 누나가 매일 놀러갔잖아요. 하나씩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 가난이 제게 결핍이었어요. 외모나 소유물도 부족했고요.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어요. 결핍이 많았습니다. 제 결핍의 정점은 이민 초기예요. 정말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밥벌지'였어요. 20대 초반에요. '밥이나 춥네요'라는 뜻이었죠.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었어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 살기 전에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형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비웃겠나 싶었죠. 막노동하고 살고, 영어도 못 하니까요. 83년도는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도 심했어요. 길 가면 지들끼리 '하이, how are you, fine, thank you' 하는데, 육사람 지나가는데 '하이' 하면 고개를 돌려요.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어요. 제 존재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요. 일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그렇게 살았어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그때 저를 살려 준 건 교회예요. 교회는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어요.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께 이걸 전하고 싶어요. 교회는 그런 기준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고, 막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 중에는 영어 못 하는 걸 대놓고 무시하거든요. 비웃고 그러면 너무 리얼했나? 교회만 가면 그런 걸로 저를 대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어릴 때부터 격려해 주었어요. '너 걱정도 하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되? 네 아버지가 교회를 위해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축복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우리 청년들이, 기성 세대, 은퇴하신 분들이, 세상은 퇴직하면 퇴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눈 여겨 봐야 보이는, 조그만한 꽃을 그냥 작은 꽃이라고 보세요. 자기 틈새에 있는 귀한 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고 난 이후로는 열정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있으면 바로바로 하루 이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없애 주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왜 지난주 설교로 끝내지 않고, 이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나누고 싶었어요. 지난주와는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자는 거예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대답하길,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가 방송실에 요청했더니, 직원이 어색하다고 했어요. '목사님, 이거 어디 그 어색하잖아요. 뿐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썼어요. 왜 '뿐인이다'라고 썼겠냐고요. 제자들 입장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린아이 도시락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출처가 어린아이 도시락이라고 나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장난치나? 예배 풀치를 하려고 이걸 갖고 왔냐?' 그런데 놀라운 건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죠.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은밀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이 보잘이 뿐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갖고 왔는데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꽃이 너무 존귀하고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뿐인이다' 인생을 '충분하다'로 바꾸어 주세요. 저는 주님 만나기 전에 '뿐인이다' 인생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고 죽고 싶다고 미시간 호수까지 가봤지만, 실제로 시도한 건 아니에요.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우울하고 밥이나 춥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충분하다'의 인생이 되었어요. 주님 앞에 너무나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어요.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20대 때 제가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20대, 30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뿐인이다' 인생은 누구나 겪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비하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저를 비하하기를 원해요.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저를 만나서 득담하시느라고 '목사님은 뭘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사업하면 잘하셨을 거예요'라고 하시면, 그런 칭찬으로 기분이 나빠요. 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 어디 시느냐고요? 뭘 해도 다 잘하는 사람이면요. 그래서 저는 저를 피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비하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비하가 충분치 못하니까요. 더 비하하고 더 비하해도 '뿐인이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가지예요.

아이들에게 전한 설교 이야기

설교자는 첫 번째 예배에서 아이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었다고 회고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자리에 없었기에, 설교자는 이제 모두가 아이들이 된 셈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삶의 주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의 것인가?'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아이들에게 집에 가서 엄마 아빠에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라고 했는데, 부모님들도 이 말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며 '당신은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반복합니다. 그는 20세기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 존엄, 존중, 가치에 지나치게 신경 쓴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삶의 주요 문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며, 그래서 이 질문이 본문 위에 떠다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예화는 바울의 자기 이해를 소유와 관계의 질문으로 옮겨 놓는 적용의 자리입니다.

존 파이퍼 · 2026-10-23

설교 내 8–8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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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예배에서 저는 아이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모두 아이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들, 삶의 주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닙니다. 삶의 주요 질문은 ‘나는 누구의 것인가?’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집에 가서 엄마 아빠에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들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 앞에서 이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의 것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20세기의 우리는 자기 정체성과 같은 것들에 너무나 신경 씁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존엄, 내 존중, 내 가치 등등.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삶의 주요 문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며, 당신이 누구의 것인가입니다. 누구의 것입니까? 이 질문이 이 구절 위에 떠다녀야 합니다.

중부 인도 친구의 '힌두교도 가족' 표현

설교자는 중부 인도에서 살던 시절 알게 된 한 남성과의 우정을 떠올립니다. 이 사람은 내부 운동의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그의 증언이 중요한 사례를 보여 준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되었고 지역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중부 인도의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소개할 때 "저희 가족은 힌두교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이는 역사적으로 이슬람 가족도 가톨릭 가족도 아니었고, 전통적으로 힌두교인의 성씨를 가진 집안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표현이 그에게 적절한 신앙 정체성의 표현은 아니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를 직접 알고 있기에 그 뜻을 이해한다고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그 친구가 즉시 자신의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에 있으며 교회에 소속되어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그 사람이 그 지역 운동의 대표자였다면, 운동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시되지 않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케이일 바우스 · 2026-10-22

설교 내 4–5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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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힌두교도와의 대화에서 자막 오류를 바로잡고 문장부호와 대소문자를 넣어 읽기 좋은 영어 문단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힌두교도와의 대화는 매우 다양한 반응과 복잡한 대화 흐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도시에 사는 20대 힌두교도와의 대화는, 농촌에 사는 60대 힌두교 여성과의 대화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언제나 존재하므로, 우리는 대화를 진정으로 필요한 방향으로 이끌고, 상대방의 실질적인 필요를 듣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저는 인도에서 힌두교도들과 오랫동안 나눈 대화를 돌이켜보면, 종종 '바른 카르마를 통해 구원을 얻는 것'과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사이의 대비를 언급하게 됩니다. 이는 너무 단순한 대답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좋은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대비는 힌두교도들과의 대화에서 복음의 독특함이 특히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로, 전통, 교파에 속하든, 많은 힌두교도들은 바른 카르마를 통해 목숨을 구원받는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8절의 진리, 즉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는, 제 경험상 힌두교도들에게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복음이 본래 있어야 하는 모습대로요. 그렇습니다. 정말 훌륭한 이야기입니다. 매우 좋습니다. 따라서 케일, 과거 미션 톡에서 우리는 이슬람 내부 운동의 방법론에 대해 논의한 바 있습니다. 이슬람 배경의 신자는 사회적·종교적으로 이슬람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힌두교 공동체 내에서의 내부 운동의 방법론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에 대한 연구와 출판물이 일부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힌두교 내부 운동의 방법론이 어디에서 부족한지, 그리고 신실한 문화적 적용이 어떤 모습일지 설명해 주세요. 네. 네, 훌륭한 질문입니다. 우선 저는 힌두교 내부 운동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존 트래비스의 맥락에서 있었던 내부 운동과 비슷합니다. 저는 힌두교 내부 운동에 대한 최초의 출판된 저서인 허버트 호퍼의 『교회 없는 기독교』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금은 다소 오래된 내용이지만, 힌두교 맥락에서 활동했던 저자가 제시한 사고방식은 매우 종교적 융합적이며 문화적으로 적응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이 힌두교인들 사이에서 종교적 융합을 시도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힌두교 내부 운동에 해당합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힌두교도라고 여깁니다. 그들의 공동 예배에는 힌두교 문화적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찬식을 할 때 빵과 포도주 대신 코코넛 우유와 쌀을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공동 예배는 매우 문화적으로 적응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운동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간단히 말하자면, 내부 이슬람 운동이 잘못된 곳과 동일한 점에서 잘못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 교회와의 정체성을 부족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나 교회와의 정체성을 부족하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입니다.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네,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네, 미션 톡에서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네, 저는 중부 인도에서 살던 시절, 한 남자와의 우정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사람은 단순히 내부 운동의 구성원이 아니었지만, 그의 증언이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지 오래된 사람으로, 지역 교회의 적극적인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유일한 신앙과 종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부 인도의 특정 사회 구성원으로 자신을 정체화할 때, 그는 "저희 가족은 힌두교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뜻은 역사적으로 저희 가족은 이슬람 가족이 아니며, 가톨릭 가족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전통적으로 힌두교인 성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네, 그래서 저희 민족은 힌두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까? 저는 이 표현이 그에게 적절한 정체성 표현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를 직접 알고 있으므로, 그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저는 힌두교도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단지 역사적으로 힌두교인 부족에 속한 사회 집단에 속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맞죠? 하지만 그는 즉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알겠지만, 제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고, 제 죄를 사함 받기 위해, 구원을 받기 위해 오직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걸 떠나게 하고, 만약 당신이 "이 남자가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운동의 대표자였다고 가정해 보자"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는 그 운동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시되지 않을 것입니다. 네, 이건 매우 유용한 이야기입니다.

왕실 깃발이 휘날리는 궁전의 성벽

설교자는 런던에 여왕이 거주하면 모든 왕실 거주지처럼 연합기와 함께 여왕의 깃발이 휘날린다는 장면을 들었습니다. 왕실 깃발은 궁전의 성벽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여왕이 그곳에 머물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나 여인으로 만드실 때의 모습에 비춥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의 성벽 위에 왕실 깃발을 휘날리시며, 그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이 교회와 같은 모임을 바라보실 때도 그분은 인종이나 재정, 학력으로 우리를 보지 않으시고 왕실 깃발을 찾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그리스도께서 그 삶 속에서 높여졌는지를 살피십니다. 설교자는 여기서 정체성의 기준이 사회적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에 있음을 적용합니다. 청중이 자신의 삶에 어떤 깃발이 걸려 있는지 돌아보도록 이끄는 대목입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5–5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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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여왕이 거주하시면, 모든 왕실 거주지처럼, 연합기와 함께 여왕의 깃발이 휘날립니다. 왕실 깃발은 궁전의 성벽을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여왕이 거주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이제 이 점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람이나 여인을 만드실 때, 그분은 우리의 삶의 성벽 위에 왕실 깃발을 휘두르십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와 같은 모임을 바라보실 때, 그분은 인종, 재정, 학력 따위로 우리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왕실 깃발을 찾으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가 그 삶 속에서 높여졌는지 보십니다.

목사의 아들이라는 부담을 덜어준 대화

설교자는 자녀들이 아버지의 사역을 부담으로 느끼지 않도록 가정에서 노력했던 일을 나눕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들들에게 '목사의 자식'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덜어준 것이었습니다. 마이클이 10살, 11살 무렵 교회의 한 사람이 그에게 목사 아들이면서 그런 짓을 한다고 말했고, 아내 토니아에게 이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마이클은 그 말이 공평하지 않다고 여겼고, 토니아는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더 중요한 것은 마이클이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땅의 아버지보다 하늘 아버지가 중요하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잘못 보고 있으니 무시해도 괜찮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설교자는 자녀들에게 강조한 것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에게 책임지는 시간은 짧지만 영원히 하늘 아버지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 가정의 원칙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가치를 따라 교회보다 아내와 아들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려 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은 자녀에게 정체성을 바르게 심어 주는 것이 가정 사역의 중요한 부분임을 드러냅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17–17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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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목사의 자식"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제거한 것입니다. 마이클이 10살, 11살 때 교회에 있던 누군가가 그에게 "믿을 수 없어, 너 목사 아들이면서 그런 짓을 하다니"라고 말했다고 토냐에게 말했어요. 마이클은 그 말이 공평하지 않다고 했고, 토냐는 "네 말이 맞아"라고 했습니다.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버려야 해"라고 말했죠.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라고 하자 마이클이 "무슨 문제인가요?"라고 묻자, 토냐는 "목사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 네가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네가 신경 써야 할 일이고, 너의 땅에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서의 아버지가 중요하다는 걸 기억해. 그리고 네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도 잘못된 점을 보고 있는 거니까 무시해도 괜찮아." 우리가 아이들에게 강조한 것은 "이 세상에서 네가 내게 책임을 져야 하는 시간은 짧지만, 영원히 하늘 아버지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를 그분께 맡기고 사는 거야." 그리고 저는 이 가치를 반영하는 결정을 내려왔습니다. 제 아들에게도, 제 아내에게도 교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항상 교회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아내는 다시 얻을 수 없고, 마이클과 세스의 아버지라는 역할도 한 번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잘할 수는 있지만,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면, 저는 항상 아내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드릴게요. 기본적으로 갈등은 없지만, 때때로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지금은 포스트시즌이 진행 중이라 1995년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시 제 아들 마이클은 12살이었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브레이브스가 1995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을 때 저는 멍청한 생각을 했습니다. 브레이브스가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이겼을 때 마이클이 너무 기뻐했고, 저는 "마이클, 만약 브레이브스가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면, 우리가 가자. 나이가 아무리 들었어도, 다른 일이 아무리 있어도, 우리가 가자. 내가 80살이라도 너가 데려가줘야 해"라고 맹세했습니다. 마이클은 12살이었으니, "아니, 그런 멍청한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해"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네, 좋아요"라고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다음 해 브레이브스가 플레이오프를 무패로 통과해 야니스와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저는 놀랐습니다. 그 주에는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부흥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부흥회 강사로 삼 카티를 예정해 놓았습니다. 삼 카티는 오래전 남침 통합 교회에서 이름을 알던 인물이었죠. 그는 불과 석유로 가득한 설교를 했고,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꺼내면 바로 꺼내는 사람으로, 저는 그가 부흥회에 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마이클과 월드시리즈 약속을 지키기로 한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두 경기는 뉴욕에서 열렸고, 세 번째 경기는 애틀랜타에서 화요일 밤에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부흥회는 일요일 아침에 시작되었고, 삼 카티는 토요일 밤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삼, 말할 게 있어"라고 했습니다. "내일 부흥회에 참석할 거고, 월요일 밤에도 참석할 거지만, 화요일과 수요일 밤에는 참석하지 못할 거야." 삼은 제가 2x4로 머리를 때렸다는 듯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럼 어디 가는 거야?"라고 묻자, 저는 "월드시리즈 경기에 가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교회를 포기하고 경기를 보러 가는 거야?"라고 묻자, 저는 "아니, 교회를 포기한 게 아니라, 내가 아들에게 한 멍청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는 거야.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해. 애틀랜타로 가서 월드시리즈 경기를 보러 가야 해. 티켓은 어떻게 구할지 몰라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삼은 "그건 잘못된 일이야"라고 했고, 저는 "알겠네"라고 했습니다. "야구 경기를 보기 위해 교회를 빠지는 건 안 돼"라고 하자, 저는 "삼, 네가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아. 나는 야구 경기를 보기 위해 교회를 빠진 게 아니라, 내가 아들에게 한 멍청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빠진 거야. 성경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어. 나는 그 약속을 지킬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삼은 제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제 이야기를 꺼내며 제 믿음을 흔들었습니다. 저는 월드시리즈 경기를 보러 갔고, 교회에서 익명의 편지를 두 통 받았습니다. 그리고 삼과의 관계는 그 후로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삼의 사위가 제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저는 설교 예시로 쓰였다고 합니다. "나는 어떤 목사를 알고 있어. 이름을 말하면 다들 알 거야. 그 목사는 야구 경기를 보기 위해 교회를 빠졌지."

싱클레어 퍼거슨이 전한 길 위의 노인과 젊은이

설교자는 신학자 싱클레어 퍼거슨이 책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국의 한 도시 거리에서 한 노인이 인도를 걷고 있었고, 그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젊은 남자가 그에게 다가갑니다. 젊은이가 옆에 서자 노인은 고개를 돌려 "인간의 최종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두 걸음 더 나아가 뒤돌아서서 "인간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노인은 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노인의 태도와 눈빛에 있던 특별한 기운이 그분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어서 젊은이의 정체성이 옷차림에 드러나듯, 우리의 삶의 원칙과 실천이 정체성을 증거한다고 적용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 것도 이 정체성이 권면의 기초가 된다는 맥락에서 설명됩니다. 설교자는 구약의 모세,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다윗 등이 같은 칭호를 받았음을 언급하며, 신약에 이르러 이 칭호가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0

설교 내 1–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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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서 당신은 꾸준히 자라고 있습니까? 알리스테어 벡 목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목자는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양들도 그렇게 된다.” 오늘의 ‘진리로 삶 사는 법’ 설교에서는 바울 사도가 제자 티모테오에게 주신 지침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전체의 영적 성숙을 어떻게 모범으로 세울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묵상할 성경 본문은 디모데전서 6장 11절부터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입니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의 사람아, 이 모든 것에서 떠나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붙잡으라. 너는 많은 증인 앞에서 좋은 고백을 하였으니, 이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증언할 때 좋은 고백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너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까지 이르기까지 흠이 없고 책잡을 데 없는 자로 지키라고 명하노라.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때에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오직 한 분뿐이신 왕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고 주 중의 주시며, 유일하게 죽지 아니하시고, 빛나는 빛 안에 계시며, 누구도 보지 못하거나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영원히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잠시 기도하며 머물러 보겠습니다. “주님, 이 성경을 제게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 자신을 보여 주소서. 제 자신과 제 구주를 보여 주소서. 그리고 이 성경을 제게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들을 따라하지 말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방인 이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셨습니다. 이 이방인들은 자연스러운 수준에서 다양한 일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가라면, 그리고 나를 신뢰한다고 한다면, 그들을 따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간단한 말은 바울이 티모테오에게 이 지점에서 권면을 전할 때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티모테오와 그의 독자들에게 티모테오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에서 큰 영향을 끼친 거짓 선생들이 무익한 논쟁에 빠져 있고, 탐욕스럽고 이중적인 말을 하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지적하셨습니다. 티모테오의 사역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향을 끼치려면, 그는 이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 방식을 통해 사역과 경건을 재정적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보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3절부터 10절까지, 이는 처음이 아니지만, 바울은 이 사람들의 악행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1절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티모테오에게 단호하게 말하며, 이전의 악한 인물들이 악행을 직업처럼 삼았다면, 티모테오의 삶과 사역은 선을 향한 헌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제 노트에는 이 초기 구절들을 읽으며 두 가지 문구를 중심으로 생각을 전개했습니다. 첫째는 “그를 어떻게 묘사했는가?” 둘째는 “그에게 어떻게 지시했는가?”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이 구절들을 탐구해 나가겠습니다. 바울이 티모테오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묘사한 방식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 깊습니다. 잠시 멈추어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왜 그가 이렇게 표현했을까?” 바울은 “내 동료 병사”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다른 곳에서처럼 “믿음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으며, 동료로서 격려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도적으로, 분명히 이 매우 강렬한 표현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이 금의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금, 즉 재산에 너무 관심이 많았지만, 너는 금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사람이다.” 이 정체성의 문제는 이후 모든 권면의 기초가 됩니다. 티모테오가 누구인가, 또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가 그의 원칙과 실천을 결정합니다. 오늘날에는 사생활과 공적인 활동이 분리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신약성경은 그런 구분을 아예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개인의 성품과 정체성이 그가 결정을 내리는 원칙과 삶의 실천을 설명하고 기초를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신학자 싱클레어 퍼거슨은 자신의 책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영국의 한 도시 거리를 걷는 노인을 묘사합니다. 그가 인도를 걷고 있을 때, 젊은 남자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그 노인은 젊은 남자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그분에게 다가가 옆에 서자, 늙은 분은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은 무엇입니까?" 젊은이는 두 걸음 더 나아가서 뒤돌아서며 대답했습니다. "주님, 인간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늙은 분은 "당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사람인 것 같군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태도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특별한 기운이 있었고, 그 기운은 그분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의 정체성은 그의 옷차림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입는지에 따라 정체성을 찾으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정체성이 그들의 옷차림을 반영할 뿐입니다. 단지 어떤 행사나 축제를 위해 특별히 옷을 입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원칙과 실천은 우리의 정체성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너에게 말한다." 이 말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 전반에서 가장 인상 깊은 칭호 중 하나입니다. 여호수아 14장에서 모세는 하나님 사람으로 불립니다.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다윗도 모두 하나님 사람으로 불립니다.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국가의 수장에게서 편지를 받는 상황을. 편지를 펴서 거짓 선생들과 세상의 이익에 집착하는 자들에 대해 읽고 있을 때, 편지를 뒤집어 보면 "그러나 너, 하나님 사람아."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칭호를 좋아하시나요? 이 칭호에 부합하시나요? 구약성경에서 이 칭호를 받은 모든 인물들은 높은 직분을 맡았습니다. 티모테오 역시 높은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신약성경에 이르러 이 칭호는 특별한 직분을 맡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티모테오 3장 16~17절을 보면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고치심과 훈련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저자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보세요.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인,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손길로 구속받은 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핸드릭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하나님 사람이라면, 특별한 책임을 맡은 티모테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티모테오, 하나님 사람. 그런데 바울이 티모테오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칭호는 더욱 인상 깊습니다. 이 연구의 시작에서 우리는 티모테오가 갖는 결격 사유가 자격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결국 그는 비교적 어린 나이였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젊음을 언급하며, 그게 오히려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소심했고,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코웃음] 신체적으로 약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소화가 여러 가지로 불편해지는 것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티모테오, 네가 자연스럽게 어리고, 신체적으로 약하고, 소심하다는 것을 내가 안다." 이건 큰 격려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절망만 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결점에 대해 상기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것은 큰 도전이자 격려가 됩니다. 티모테오, 너는 하나님 사람이다. 너는 하늘에서 받은 임무를 맡고 있으며, 하나님의 봉사에 투입되었다. 너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오늘 아침 여기 계신 믿는 자 여러분에게도 이 모든 말이 적용됩니다. 여러분에게 다른 어떤 사실이 적용되든, 여러분이 자신의 이력서에 무엇을 써 넣으려 하든, 여러분이 삶의 여정에서 자신의 의미를 무엇으로 정의하려 하든, 삶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사람입니다." 어제나 그 이전 날, 그 이전 날에 우리가 우리의 결점이나 능력 부족, 중요하지 않은 존재감에 집중하며 발걸음을 가볍게 하지 못했다면, 이런 간단한 상기만으로도 큰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은 종종 이와 정반대입니다. 저는 이전에 글래스고의 초등학교 부교장이셨던 맥패디언 선생님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대단한 바게트 플레이어셨고, 경연에서 우승하셨으며, 여기저기서 바게트를 불러주셨습니다.

맥패디언 선생님의 '당근 머리' 일화

설교자는 글래스고의 초등학교 부교장이었던 맥패디언 선생님의 일화를 전합니다. 그분은 바게트 경연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을 만큼 유머가 날카로운 분이었고, 수업 중 한 아이를 두고 목에 머리가 아니라 당근이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반 친구들 앞에서 "친구들, 제 목에는 당근이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하게 했고, 이후 그 아이는 '당근 머리'라는 별칭으로 초등학교 생활 내내 불리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이 아이에게 오래 남은 일이었음을 짚으며, 이 일이 디모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질문합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어린 나이와 겁 많은 성품, 약한 몸을 알면서도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어깨를 펴고 스스로를 세우려 했을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권합니다. 이어 설교자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자신을 화학물질의 조합으로 여기며 삶을 사소하게 느끼는 유혹을 받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시편 139장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께서 목적 있게 설계하신 존재임을 알려 줘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이 정체성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폐기물이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침을 맞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0

설교 내 2–3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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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젊은이가 그분에게 다가가 옆에 서자, 늙은 분은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은 무엇입니까?" 젊은이는 두 걸음 더 나아가서 뒤돌아서며 대답했습니다. "주님, 인간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늙은 분은 "당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사람인 것 같군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태도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특별한 기운이 있었고, 그 기운은 그분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의 정체성은 그의 옷차림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입는지에 따라 정체성을 찾으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정체성이 그들의 옷차림을 반영할 뿐입니다. 단지 어떤 행사나 축제를 위해 특별히 옷을 입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원칙과 실천은 우리의 정체성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너에게 말한다." 이 말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 전반에서 가장 인상 깊은 칭호 중 하나입니다. 여호수아 14장에서 모세는 하나님 사람으로 불립니다.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다윗도 모두 하나님 사람으로 불립니다.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국가의 수장에게서 편지를 받는 상황을. 편지를 펴서 거짓 선생들과 세상의 이익에 집착하는 자들에 대해 읽고 있을 때, 편지를 뒤집어 보면 "그러나 너, 하나님 사람아."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칭호를 좋아하시나요? 이 칭호에 부합하시나요? 구약성경에서 이 칭호를 받은 모든 인물들은 높은 직분을 맡았습니다. 티모테오 역시 높은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신약성경에 이르러 이 칭호는 특별한 직분을 맡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티모테오 3장 16~17절을 보면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고치심과 훈련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저자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보세요.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인,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손길로 구속받은 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핸드릭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하나님 사람이라면, 특별한 책임을 맡은 티모테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티모테오, 하나님 사람. 그런데 바울이 티모테오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칭호는 더욱 인상 깊습니다. 이 연구의 시작에서 우리는 티모테오가 갖는 결격 사유가 자격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결국 그는 비교적 어린 나이였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젊음을 언급하며, 그게 오히려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소심했고,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코웃음] 신체적으로 약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소화가 여러 가지로 불편해지는 것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티모테오, 네가 자연스럽게 어리고, 신체적으로 약하고, 소심하다는 것을 내가 안다." 이건 큰 격려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절망만 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결점에 대해 상기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것은 큰 도전이자 격려가 됩니다. 티모테오, 너는 하나님 사람이다. 너는 하늘에서 받은 임무를 맡고 있으며, 하나님의 봉사에 투입되었다. 너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오늘 아침 여기 계신 믿는 자 여러분에게도 이 모든 말이 적용됩니다. 여러분에게 다른 어떤 사실이 적용되든, 여러분이 자신의 이력서에 무엇을 써 넣으려 하든, 여러분이 삶의 여정에서 자신의 의미를 무엇으로 정의하려 하든, 삶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사람입니다." 어제나 그 이전 날, 그 이전 날에 우리가 우리의 결점이나 능력 부족, 중요하지 않은 존재감에 집중하며 발걸음을 가볍게 하지 못했다면, 이런 간단한 상기만으로도 큰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은 종종 이와 정반대입니다. 저는 이전에 글래스고의 초등학교 부교장이셨던 맥패디언 선생님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대단한 바게트 플레이어셨고, 경연에서 우승하셨으며, 여기저기서 바게트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분은 어린이들을 곳곳에 날려 보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매우 날카로운 유머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때로는 유머도 없이 단지 산만함만 남았습니다. 저는 이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한 번은 수업 중에 어떤 불쌍한 아이가 서게 되었고, 맥패디언 선생님은 그 아이의 목에 머리가 아니라 당근이 달려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위더스푼, 가상의 이름이지만, 네 목에는 당근이 달려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이제 위더스푼, 네가 목에 무엇을 달고 있는지 반에 말해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반에 "친구들, 제 목에는 당근이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이 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파이프 연주자에게는 큰 치료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초등학교 생활은 영원히 그 이름으로 남게 되었고, '당근 머리'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맥패디언 선생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 여러분, 이 일이 팀오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저는 그가 어깨를 살짝 곧게 펴고, 자신이 어린 나이에 겁이 많고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세우려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 신분에 대한 적용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날 남녀,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단지 용액 속에 떠다니는 화학물질의 조합에 불과하다고 믿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실로 사소한 것입니다. 삶이 궁극적으로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소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은 신분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를 들어 시편 139장을 읽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어머니의 배 속에서 섬세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께서 목적 있게 설계하셨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이 진리를 인식하고 아침에 일어나며 "나는 단지 성장한 유전자들의 집합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이 점에서 나는 가치가 있다. 나는 폐기물이 아니다. 쉽게 버려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본질적으로 무관심한 존재도 아니다. 나는 나만의 지문을 가지고 있고, 나만의 DNA를 가지고 있다.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나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분의 계획 속에서, 순간순간, 나의 삶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셨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이는 진화론을 받아들여 자신을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희망도 없고 도움도 없는 이 세상을 방황하는 삶과는 얼마나 큰 차이인가요. 이제 새 창조의 경이로움을 더해보면, 이는 얼마나 큰 기적이겠습니까?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이전에 사용했던 비유를 다시 한 번 사용해 보겠습니다. 스코틀랜드에는 아름다운 성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저는 여러분을 만나면서 여러분의 조상들이 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저는 그 점에 대해 기쁩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은 모두 결혼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에는 여러분 모두가 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가끔 솔직한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들은 더 이상 그 영광을 빛내지 못합니다. 길을 따라 꺾어지면 그 성들을 보게 되고, 그 장엄함에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훼손된 장엄함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장엄함에 대한 증언이자 기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성을 보고 "이 성이 과거의 영광을 가졌다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제, 훼손된 성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남녀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만드셨지만, 그들 안에는 본질적인 결함이 있었고, 이로 인해 그 건물은 해체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던 그 아름다움은 결국 인간의 죄로 인해 훼손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의 삶을 바라보면, 우리는 그 안에 하나님의 흔적, 하나님의 친절의 흔적,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자신 안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깊은 마음속에서 "나는 폐기물이 아니다. 나는 단지 용액 속의 화학물질이 아니다.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하지만 나는 엉망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의 성을 수리하려고 노력하고, 약간의 정원을 가꾸고, 커튼과 직물, 외부 재단을 붙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예전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작동할 수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가 나의 삶의 성에 머무르고,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결코 이룰 수 없는 내부에서의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새 삶, 새 탄생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새 태생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