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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9개 · 1 / 1쪽 · 한 쪽 20개

바리새인과 구별된 성도의 차이

설교자는 성도가 세상과 구별되었다고 말하면 바리새주의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는 이 반론에 대해 두 태도의 차이를 분명히 밝힙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아주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성도는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임을 깨달았기에 구별되었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합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붙잡으시고 그들에게 행하셨으며 앞으로도 행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일은 마침내 성도가 온전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그는 이 차이를 통해 성도의 구별이 자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점을 적용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52–52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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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바리새주의입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을 따로 구별해 놓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만 관심이 있고 다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군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것은 바리새주의가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아주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에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딸을 재촉하다 소리를 지른 설교자의 일화

설교자는 어제 있었던 자신의 일을 직접 고백합니다. 그는 늦은 딸을 집에서 빨리 데리고 나가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했습니다. 딸이 신발을 집어 들고 양말만 신은 채 짜증을 내며 앞문으로 나가자, 그는 '바로 지금 집으로 돌아가라!'며 소리쳤습니다. 딸이 다시 들어와 그를 쳐다보자 그도 '나는 시간에 맞춰 가려고 하고 있는데, 네가 하는 일은...'이라며 말을 쏟아냈다고 털어놓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자신이 지은 죄였다고 인정하며, 결국 자신이 사과했고 딸도 그에게 사과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분노 모드로 즉시 전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노가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폴 트립 · 2026-10-23

설교 내 17–17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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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에 너무나 기쁩니다. 나는 이제 내 마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아이는 방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분노가 이끄는 방향입니다.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낳지 않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드러내는 일입니다. 어제 실제로 나는 딸을 집에서 빨리 데려나가서 목적지에 시간에 도착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늦었습니다. 매우 늦었습니다. 나는 "가자. 지금 당장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가서 신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녀는 양말을 신고 있고, 어느 정도 짜증을 내며 앞문을 나갑니다. 그녀는 신조차 신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습니다. "바로 지금 집으로 돌아가라!" 그녀는 다시 들어와서 나를 그렇게 쳐다보았고, 나는 "나는 시간에 맞춰 가려고 하고 있는데, 네가 하는 일은..." 이 모든 것들은 어제 내가 죄를 지은 일입니다. 나는 사과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사과했고, 우리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분노 모드로 즉시 전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 이것이 우리가 얼마나 깊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네. 완전히 존재합니다. 표면 아래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필요합니다.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습니다. 종종 분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내 상사가 누군지 모릅니다." 또는 "당신은 내 이웃이 누군지 모릅니다." 당신은 내가 사는 남편이나 아내를 모릅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자식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럴 때 야고보서 4장이 도움이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 사이의 다툼과 싸움은 어디에서 오는가요?" 이것이 바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열망들이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무언가를 원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므로, 너희는 살인하고 시기합니다." 바로 이것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내 분노의 근원은 내 자제력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내길 막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는 분노합니다. 나는 가게에 도착했을 때 내가 원하는 물건을 원하고, 줄을 서고 싶지 않으며, 교통 체증도 싫고, 반대 의견도 싫고, 인내심 있는 상사를 원하고, 나는 원하고, 나는 원하고, 나는 원하고, 나는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매우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는 내 인생에 대한 멋진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기 있습니다. 네. 아마도 이는 우리가 분노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네. 야고보서 4장 1절부터 10절까지, 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기를 권합니다. 이는 분노에 대한 논문입니다. 네. 정확히 중간쯤에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그분은 더 많은 은혜를 주십니다." 얼마나 멋진가요? 네. 이는 폭풍 속에서 필요한 작은 섬입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그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분노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때리거나 소리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분노하는 생각, 불耐, 짜증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분노가 있는지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문제와 함께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하고 참지 못하는 상황에서 분노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분이 되지 않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아니, 내가 처음부터 너에게 은혜를 주었다는 것을 후회한다. 너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도 아니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고갈되지 않습니다. 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우리는 이 큰 싸움을 우리 자신에게 남깁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인정해야 할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네. 나는 우리 모두에게 격려의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먼저 나 자신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네. 이는 필요합니다. 네.

박해자였던 바울의 과거

설교자는 바울이 한때 유대교 바리새인으로서 기독교를 깊이 미워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는 로마서 9장 1절을 근거로 바울이 기독교인들에게 살해 위협을 가했다고 말하고, 첫 기독교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에도 가담했다고 전합니다. 또한 바울은 교회를 고문했던 사람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격렬한 반대자였던 인물이 약 7,100자, 성경책 기준 약 22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써서 세상의 얼굴을 바꾸었다는 점을 놀라움으로 제시합니다. 이어 2,000년 동안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 쇠락한 등불을 다시 밝혔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를 오늘 아침의 질문으로 삼습니다. 이 과거의 대비는 바울의 변화가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생각하게 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설교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로마서 1장 1절에서 찾겠다고 예고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3

설교 내 4–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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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 아침의 질문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한때 유대교의 파리세인으로서 기독교를 깊이 미워하며, 로마서 9장 1절에 따르면 기독교에 살해 위협을 가했고, 첫 기독교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에 가담했으며 교회를 고문했던 사람이, 7,100자에 달하는 편지, 제 성경책 기준으로 약 22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써내어 세상의 얼굴을 바꾸었을까요? 2,000년 동안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의 글에서 영감을 얻으며 자신의 쇠락한 등불을 다시 밝혔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바울의 육체의 가시와 응답

설교자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 마음에 무엇이 드러나는지 살피기 위해 바울의 사례를 듭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바울은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는 응답을 들었다고 설교자는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서운함이 올라오는 우리의 모습을 함께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하시는 것 같고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거절된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도록 권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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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간음한 아내를 다시 데려온 이야기

설교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방식을 설명하면서 호세아 선지자의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호세아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과 같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았느냐'고 부르시는 소리는 내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내를 값 치르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다고 이어갑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부르시는 말씀이 정죄가 아니라 돌아오게 하시는 사랑의 음성임을 강조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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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기름이 가득 찬 항아리를 가져온 이웃의 상상

설교자는 기름을 빌리러 온 소년이 이웃에게서 이미 가득 찬 항아리를 받아 오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소년은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집으로 가져오지만, 어머니가 기름을 부으려 하자 항아리는 이미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가득 찬 것은 더 채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그녀에게 큰 손실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기름의 질이 나빴을 수도 있다는 상상도 함께 펼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창조하신 기름은 결코 최고가 아니었겠느냐고 되물으며 장면의 의미를 이어갑니다. 이를 적용하여 설교자는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수님께서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선함으로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도우실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찬송가 구절을 인용하여 여기서 배제되는 자는 자기 스스로 배제한 자뿐이라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안의 가득함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는 것을 막는다고 결론짓습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9–10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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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화에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 필요했는가입니다. 이 기적에서 요구된 것은 단지 비어 있는 그릇뿐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신성한 충만함을 위한 비어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기름은 그 여인의 그릇 하나에 있었지, 비어 있는 그릇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소년이 그릇을 빌리러 왔을 때, 그녀의 이웃 중 한 사람이 "가엾은 여인, 겸손하게 빈 기름 항아리를 요청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가득 찬 항아리를 주어 도와주겠어."라고 생각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소년은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여 집으로 가득 찬 항아리를 가져옵니다. 어머니가 기름을 붓고자 항아리를 들고 오자, 그 항아리는 이미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야," 어머니가 말합니다. "이건 내 일이 아니야. 이미 가득 차 있으니, 가득 찬 것을 다시 채울 수는 없어." 이로 인해 그녀에게 큰 손실이 될 수도 있었겠죠. 기름이 질이 나빴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창조하신 기름은 결코 최고가 아니었을까? 따라서 이 세상에 자연적으로 공덕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충분히 자연적인 선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없고, 그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도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수님은 그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찬송가가 잘 말해 줍니다. "여기서 배제되는 자는 자기 스스로 배제한 자뿐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안의 가득함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는 것을 막습니다. 바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기름이 남아 있던 항아리

설교자는 소년이 가져온 항아리 하나에서 기름이 흘러나오지 않는 장면을 그립니다. 어머니는 기적적인 항아리를 다른 항아리 위에 들어 보지만 기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가 항아리를 흔들어 보니 바닥에 약간의 기름이 남아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건네준 이웃은 안에 조금 남겨 두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설교자는 상상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름이 흐르지 않는 이유가 항아리에 기름이 이미 조금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아들에게 마지막 방울까지 다 부어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비어 있는 항아리만 사용하라고 명령받았다고 말하며, 비어 있지 않은 항아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남겨 둔 자기 의와 자기 것을 완전히 비워야 은혜가 채워진다는 가르침으로 연결합니다. 항아리의 바닥에 남은 기름처럼 조금이라도 자기 것을 붙들고 있으면 은혜가 흘러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일을 마치자 기름이 자유롭게 흘러나와 항아리를 꽉 채웠다는 장면을 근거로, 비움이야말로 적절한 자세라고 말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12–13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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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이 또 다른 항아리를 가져옵니다. 그가 항아리를 들여다보니, 어머니의 기름이 그 안으로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기적적인 항아리를 다른 항아리 위에 들고 올리지만, 기름은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이 항아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내 아이?"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항아리를 흔들어 보니, 바닥에 약간의 기름이 남아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건네준 이웃은 "다 빼내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가엾은 사람들, 안에 조금만 남겨두면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소년에게 말합니다. "기름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은 항아리에 이미 기름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이야. 부어 버려, 아들아. 마지막 방울까지 다 부어 버려. 나는 비어 있는 항아리만 사용하라고 명령받았어. 이 항아리는 비어 있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 일을 마치자, 기름은 자유롭게 흘러나와 항아리를 꽉 채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직 기대할 만한 좋은 것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 주님 예수의 은혜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비어 있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비움이야말로 적절함입니다. 자연적인 선함의 부족은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증명하며, 그 필요 자체가 당신이 받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고양이 점프 기록과 심판관의 금메달 비유

설교자는 정의(칭의)를 설명하면서 고양이 점프 세계 기록을 비유로 듭니다. 그는 자신의 키 190cm와 손을 든 높이 240cm를 말하며, 청중 대부분은 그 높이에도 닿지 못할 것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260cm라는 가상의 기준을 세우고, 이를 넘어야 금메달을 받을 수 있다고 설정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열심히 연습하면 된다는 극단적 펠라기주의이고, 두 번째는 특별한 힘이 주입되어 장애물을 넘는다는 반펠라기주의입니다. 세 번째는 장애물을 넘지 못했어도 심판이 사랑으로 금메달을 준다는 방식으로, 설교자는 이것이 잘못된 이해라고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 번째 방식이 종교개혁의 칭의 이해처럼 들릴 수 있지만 개혁주의 교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개혁주의 교리는 누군가가 대신 세계 기록을 세우고, 그 기록이 당신의 계좌에 입금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는 트렌트 공의회의 저주 선언을 언급하며 가톨릭 교회와의 차이를 짚습니다. 귀속된 의와 주입된 의의 구분을 고린도후서 5장 21절과 연결하여,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셨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적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이 비유가 완벽하지 않다고 덧붙입니다.

케빈 드영 · 2026-10-19

설교 내 6–7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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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義德)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행위로서,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며 받아 주십니다. 이 의는 우리에게 계산되어 주어지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난 한 달간 우리가 이 정의의 정의에서 다루었던 요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은혜, 선물, 믿음으로만. 오늘 아침에는 짧은 요리문답서의 정의에서 단 한 가지 단어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바로 '계산하다' 또는 '귀속시키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자주 사용되지 않습니다. '내게 그런 일을 돌리지 마라'는 말처럼, '계산하다'는 것은 '고려하다', '계산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고려하다'는 동사는 '귀속시키다' 또는 '계산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의 계좌에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개념입니다. 이 귀속의 교리는 종교개혁 시기에 핵심 논쟁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차이점은 바로 의가 귀속되는 것, 즉 계산되거나, 신뢰되거나, 우리 것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주입되거나, 부여되거나, 우리 속에 있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의로 여김을 받는 의는 완전히 우리 밖에 있는 것이며, 우리에게 귀속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도덕적으로 소유한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첫 번째를 주장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두 번째를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트렌트 공의회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시기에 가톨릭의 반개혁도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트렌트 공의회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공의회는 1540년대, 50년대, 60년대에 걸쳐 약 20년간 여러 차례 개최되었습니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말하자면,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 역사에서 '우리 역사가 1517년에 시작된다'거나 '우리 역사가 와일리프나 후스에게 시작된다'고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2,000년의 교회 역사 전체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옳은 일을 했을 때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 이후에야 가톨릭 교회조차도 이러한 미묘한 구분들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트렌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11조: '누구든지 사람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귀속되는 것만으로 정의롭게 된다고 하거나, 오직 죄 사함만으로 정의롭게 된다고 하여, 성령께서 그들 마음에 부어 주시는 은혜와 자비가 그들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배제한다면, 저주를 받을지니라.' 즉, 저주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의롭게 되는 의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죄 사함 그리고 귀속된 의뿐이며, 당신이 실제로 소유한 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저주를 받으라.' 우리는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도요, 그렇죠? 이 것이 가톨릭 교리입니다. 그리고 이 것이 목사의 말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트렌트 공의회의 말과 반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셨듯이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그분을… 그분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모르시던 그분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으니,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논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던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실제적인 죄를 범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죄가 되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도덕적으로 죄인이라는 이유로 죄가 되셨습니까? 그런 생각은 모독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던 그분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우리 죄를 그리스도께 계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죄가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 의로운 행위를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지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지위를 귀속받으셨습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계산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한 행위를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 것이 바로 귀속된 의와 주입된 의 사이의 구분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론, 저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모든 기독교인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그 은혜가 저 안에서 제가 행하는 의로 작용합니다.' 이는 주입된 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와 함께 협력함으로써, 나의 성품과 인격에 진정한 의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르침을 거의 그대로 묘사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지만, 복음서에서 '의롭게 여김' 또는 그에 해당하는 동사가 사용된 것은 거의 이 이야기가 유일합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바리새인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처럼 죄인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이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처럼 죄인이 아니며, 저는 선한 일을 합니다.'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이 말한 것을 주목해 보세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죄인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결국 세리가 가슴을 치며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말하며, 그가 집으로 돌아가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인정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당신을 의롭게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의롭게 여김을 단순히 법적 허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종종 이는 개혁교회, 즉 우리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성경적 의롭게 여김의 이해가 비판받는 부분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손을 휘두르시고 갑자기 정의의 기준을 폐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법적 허구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방법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전 3장에서 보았던 바로 그 내용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복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율법의 형벌을 치르셨고,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으므로, 그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은 의를 입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비유가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이 비유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빠르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비유는 운동 경기에서 빌어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 비유를 듣고 기대했겠죠. 고양이 점프 세계 기록은 쿠바의 자비에르 소토메요가 1993년 세운 것입니다. 약 8피트 조금 넘는 높이입니다. 저는 키가 190cm이고, 손을 들어 올리면 천장에 닿을 수 있는 높이는 240cm입니다. 이 정도입니다. 우리가 모두 고양이 점프 세계 기록을 깨야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그 높이조차 닿지 못할 것입니다. 어차피 그렇다면, 오늘 제가 세운 기록은 260cm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오늘 제가 세운 기록은 약 15cm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든 인간보다 높이 점프해야 합니다. 260cm를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이 불가능한 기준을 충족시켜 세계 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따겠습니까? 한 가지 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능력이 있습니다. 단지 열심히 연습하면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극단적인 펠라기주의입니다. 펠라기라는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논쟁을 벌인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 동안 약 백 명의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지만, 펠라기는 '사람은 타고난 죄성 본성이 없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는 이처럼 보이는 불가능한 기준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단지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면 정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펠라기주의입니다. 또는 두 번째 방법, 이는 반펠라기주의의 한 형태이거나 중간 지점입니다. '아니요, 물론 당신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장애물을 넘기 위해 은혜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당신이 열심히 노력하고 은혜를 받는다면, 이른바 영적 도핑 같은 것을 하게 되고, 운동화와 함께 특별한 힘이 주입되어 실제로 높은 기둥을 넘을 수 있습니다. 이는 반펠라기주의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이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으로 장애물을 넘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장애물을 전혀 넘지 못하지만, 심판관이 말합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준은 무시하세요.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에게 금메달을 줄게요.' 그러나 이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어떤 사람들의 종교적 이해입니다. 이는 종교개혁의 의롭게 여김 이해입니다. 규칙을 따르는 심판관이 말합니다. '아, 당신은 그 밑을 기어 들어왔습니다. 사실은 그 밑을 뛰어 들어왔습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사랑하므로, 그 높이를 넘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금메달을 줍니다. 금메달을 줍니다. 금메달을 줍니다. '오프라가 심판관이라면요.' 이는 개혁주의의 의롭게 여김 교리가 아닙니다. 개혁주의의 교리는 누군가가 당신을 대신해 세계 기록을 세우고, 그 기록이 당신의 계좌에 입금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8.5피트를 넘는 기록을 세웠고, 누군가가 금메달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 기록이 당신의 계좌에 입금됩니다. 이는 바로 '귀산적'이라는 교리입니다. 이 비유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율법 교사가 영생을 묻는 이야기 (누가복음 10장)

설교자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율법 교사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교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 대답이 옳다며 이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사는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질문의 속내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데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율법을 갖추었으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여긴 그에게 영생은 자신을 더 빛나게 해 주는 액세서리처럼 비칩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하나님을 위해 수고했으니 하나님이 보상하셔야 한다고 여기는 기복 신앙과 연결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헌금하면 인생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지만, 축복이 주어지지 않을 때 그 관계 속에서는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구원이 나의 노력과 고행으로 얻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격 없이 받은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유재준 · 2026-10-18

설교 내 14–1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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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마치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던 질문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율법 교사가 뭐라고 했는지,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2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어디 율법엔 이렇게 써 있는데, 그 이웃이 누군지 저한테 말만 해 보세요. 제가 얼마나 율법의 요구대로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지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29절 앞에 지문처럼 쓰여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 율법 교사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단지 나를 옳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고,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들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러한 것을 얻을 만한 자격과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나는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고, 도덕적으로 많은 것들이 이미 갖추어진 괜찮은 사람, 나를 옳게 보이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영생은 나를 더 빛나게 만들어 주는 액세서리와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해내었기 때문에, 마치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애쓰고 수고했으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한 채무를 갖고 계신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형태를 기복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축복해 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 내가 주를 위해서 무언가 합당한 것을 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법적인 의무가 있다고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로 바꿔 보면, 내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여기에 예수까지 믿고,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고, 착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면, 나는 더 멋지고 완벽하고 괜찮은 사람이 될 것 같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까지 믿으면 나는 더 잘될 수 있어.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주실 것이고, 성경에 약속된 축복이 나에게 다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신앙과 믿음에는 큰 오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약에 그러한 축복과 보상을 주지 않는다면, 그 관계 속에서는 신앙에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무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수많은 것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에게 주셔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으신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주지 않겠다고 하시면,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이러한 프로세스가 절대 아닙니다. 어떠한 나의 노력, 고행, 수고, 애정과 같은 것들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는 사실 복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았냐, 받지 않았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믿음은 무엇을 동반하는 믿음입니까? 사랑을 동반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복음의 은혜는 자격 없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무언가 애쓰고 노력하고 열심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삶을 자랑하는 삶, 나의 괜찮음을 증명하는 요구와 시도들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자격 없는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나는 그러할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그럴 거 요구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와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함께 해 주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의무가 없는 사람이 베푸는 사랑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와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자격 없이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나보다 남을 더 낮게 여기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까지도 우리는 사랑하게 되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역을 통해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이러한 내용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완벽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가장 낮고 천한 곳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힘과 권세가 있으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실 수 있는 영향력도 가지신 분이었지만, 그분은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대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셔서 왕권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쟁취하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진정한 복음의 참된 승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