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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32 / 32쪽 · 한 쪽 20개

귀신도 아는 사실과 그리스도인의 차이

설교자는 믿음의 고백과 순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귀신의 예를 듭니다. 야고보서 본문에서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은 성도들이 날마다 고백하던 정통 신앙이었지만, 야고보는 이를 '잘하는도다'라고 빈정대듯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말이 칭찬이 아니라 비꼼이라고 풀이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알고 있어서 믿고 몸을 떤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귀신은 하나님을 알고 떨기만 할 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안기지도 못합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이 교리를 알고 성경을 매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지식이 많다고 곧바로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우리가 아는 것이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믿음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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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성경의 순서에 따라서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을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매일 새벽을 깨워서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 나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매일의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 분주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믿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를 나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아닙니까?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다는 그 역사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며, 그 믿음이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이 믿음에 더하여 한 가지 사실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고백이, 이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우리의 믿음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가? 야고보는 십자가를 믿는 믿음 자체가 부족하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믿음의 고백이 진짜라면, 그 믿음의 고백은 살아서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은 짧은 단락입니다만, 이 단락 안에서 야고보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절에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절도 볼까요?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6절도요.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다라고 야고보서에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이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몸이 숨을 쉬듯이, 살아 있는 믿음은 살아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이 믿음의 숨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우리의 믿음의 숨은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인가? 이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살펴보고 우리의 삶의 자리로 함께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말뿐인 믿음입니다. 우리 15절의 말씀을 함께 볼까요? 15절의 말씀을 보니까요. 이러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형제와 자매가 등장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입을 옷이 없습니다. 또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이것을 채울 수 없는 변치 않은 형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이 형편이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는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말씀에서는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여서 이렇게 행동을 합니다. 16절에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여기서 이 평안히 가라라는 말은 헤어질 때에 건네는 인사입니다. 구약의 샬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 표현이죠. 그런데 오늘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궁핍한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떠날 때에 샬롬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사실 축복보다는 모욕에 가깝습니다. 이어서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축복의 말이죠. 오늘 이 사람은 이 형편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배를 채우시기를 원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축복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축복입니까? 그런데 오늘 이 말뿐인 자는 정작 자신의 손에 있는 빵은, 자신의 손에 있는 옷은 이 사람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저 경건한 말로, 그럴듯한 말로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고 자신을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그저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나라의 한 표현이 떠올랐는데요. 밥 한번 먹자라는 표현입니다. 한국의 전형적인 인사죠. 우리가 이렇게 전화를 하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질쯤에 혹은 전화를 끊을 조금 어색하니까 그 대화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래요. 우리 밥 한번 먹읍시다. 나중에 밥 한번 먹읍시다. 이렇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항상 대화의 마무리쯤에는 서로의 기도 제목을 묻곤 하죠. 그리고 마무리에는 항상 우리가 어떻게 얘기합니까? 그래요.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이 제가 질문으로 떠오르더라고요. 정말로 나는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형편에 정말 필요한 것을 내가 최선으로 돕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과 겹치는 기도를 하나님께 고백을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그 기도를 나에게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니까요. 늘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향한 간구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향하여서 필요한 간구를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샬롬, 평안을 빌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의 평안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고린도서 8장 9절의 말씀, 우리 함께 다 같이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유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함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의 갈급함 그 갈망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을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은혜를 받은 것이 우리가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 아닙니까? 이 믿음이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제도 그렇고 많은 공동체와 지체를 만날 때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다면, 오늘 이 시간 이 자리 박차고 떠나기 전 그 영혼과 공동체를 위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심으로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우리의 삶을 기꺼이 주는 그 실천의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아는 것뿐인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할 텐데요. 이어서 18절의 말씀을 보면요. 이 18절의 말씀은 신약을 통틀어서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시작을 하는데요. 여기서 이 어떤 사람이 한 말이 어디까지를 나타내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인용 부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혁 계정에서 번역한 번역을 살려서 번역을 해 보았는데요.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번역 의역본을 가지고 왔는데요. 요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행함 없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이 있다. 너는 행함이 없으니 내 믿음을 보일 수 없지만 나는 행함이 있어서 내 믿음을 볼 수 있다. 요점은 이겁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믿음은 앞서 말했듯 삶으로 드러난다라는 것을 야고보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19절은 충격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절의 말씀 보면요.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의 고백은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이 날마다 고백했던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이 항상 고백했던 정통적인 신앙의 방식이었죠. 그런데 야고보서는 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는도다. 근데 여기서 말하는 잘하는도다는 정말로 칭찬의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겁니다. 잘한다. 야고보가 이렇게 어떻게 보면 빈정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귀신들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도 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믿고 몸을 던다. 여기서 던은 털이 곤두 정도로 몸설이 친다라는 뜻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과 그리스도인의 극명한 차이는 무엇일까요? 귀신은 하나님을 알기만 할 뿐, 하나님 앞에서 떨기만 할 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안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울 수도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자 하는 열망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교리를 알고 있고요. 성경의 말씀을 매일마다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식만이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이어진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계산을 넘어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완성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이는 그의 믿음이 연약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 23절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믿음이 창세기 22장에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함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합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백 세가 넘어 얻은 외아들을 드릴 수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그 답으로 히브리서 11장 19절을 함께 읽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잃는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자신의 계산을 넘어 역사하실 하나님을 신뢰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예를 통해 우리도 계산을 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구하라고 권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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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을 끌어앉는 그런 행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서 세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하나님이 살리시는 믿음입니다. 오늘 21절부터의 말씀을 쭉 보면요. 야고보서는 두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요.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고요. 두 번째는 라합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너무나 유명한 두 인물이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었고, 언약의 약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반면에 라합은 여리코 성에 살던 이방 여인이었고, 기생이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아가던 두 인물을 야고보서는 같은 원리 아래 뒀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살펴볼까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완성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죠. 일례로,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였던 사라를 어떻게 합니까?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 23절을 한번 볼까요?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드러내십니까? 창세기 22장의 말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이었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장면을 통하여서 그 행함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의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어서 신이 얻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9절의 말씀인데요. 이 말씀 우리 한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웃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아브라함은 계산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으면 얼마나 슬플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지 않습니다. 숨겨주지 않습니까? 그 숨겨준 사실을 걸리면 죽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이유에 대해서 라합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요. 여호수아 2장 10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것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온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아멘. 라합이 고백합니다. 모든 일들을 다 본 겁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정탐꾼들에게 합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의 행함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게 되죠.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자신의 누를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족보, 그리스도의 족보에 하나님께서 올려두게 됩니다. 이 모든 스토리에 대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 뒤에 우리가 이 믿음이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먼저 행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우리 함께 다 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행함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향한 큰 행함과 순종을 행할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나의 믿음이 살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믿음이 죽어 있는 것 같다'라는 주저함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 오늘도 무릎 꿇고 나아가며 기도하는 그 복된 걸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기꺼이 순종할 때에 그 순종하는 삶 위에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2장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요. 그러나 그 공기와 산소 역시도 외부로부터 들어올 때에 숨을 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에,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던 것처럼,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에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시간, 그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모든 이의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어제 또 많은 순간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시면서, 전심으로 한 명, 한 명, 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이미 나에게 주신 그 부요함을 베풀어내는 은혜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같이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 믿음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 제목 가지고, 또 우리가 가지고 온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다가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복된 예배에

정탐꾼을 숨긴 라합의 고백

설교자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 준 사건을 소개합니다. 여리고 성에 살던 이방 여인인 라합은 그 일이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었지만 정탐꾼들을 숨겼습니다. 설교자는 여호수아 2장 10절과 11절을 읽으며, 라합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여호와께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요단 저편 아모리 두 왕에게 행하신 일을 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사람들이 정신을 잃을 만큼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여호와가 위로 하늘에서도, 아래로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라합이 모든 일을 직접 보고 들었기에 믿음의 고백을 정탐꾼들에게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행함 뒤에는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일하셨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의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도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은혜 위에 서 있음을 적용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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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을 끌어앉는 그런 행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서 세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하나님이 살리시는 믿음입니다. 오늘 21절부터의 말씀을 쭉 보면요. 야고보서는 두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요.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고요. 두 번째는 라합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너무나 유명한 두 인물이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었고, 언약의 약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반면에 라합은 여리코 성에 살던 이방 여인이었고, 기생이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아가던 두 인물을 야고보서는 같은 원리 아래 뒀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살펴볼까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완성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죠. 일례로,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였던 사라를 어떻게 합니까?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 23절을 한번 볼까요?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드러내십니까? 창세기 22장의 말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이었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장면을 통하여서 그 행함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의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어서 신이 얻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9절의 말씀인데요. 이 말씀 우리 한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웃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아브라함은 계산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으면 얼마나 슬플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지 않습니다. 숨겨주지 않습니까? 그 숨겨준 사실을 걸리면 죽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이유에 대해서 라합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요. 여호수아 2장 10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것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온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아멘. 라합이 고백합니다. 모든 일들을 다 본 겁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정탐꾼들에게 합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의 행함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게 되죠.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자신의 누를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족보, 그리스도의 족보에 하나님께서 올려두게 됩니다. 이 모든 스토리에 대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 뒤에 우리가 이 믿음이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먼저 행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우리 함께 다 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행함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향한 큰 행함과 순종을 행할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나의 믿음이 살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믿음이 죽어 있는 것 같다'라는 주저함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 오늘도 무릎 꿇고 나아가며 기도하는 그 복된 걸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기꺼이 순종할 때에 그 순종하는 삶 위에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2장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요. 그러나 그 공기와 산소 역시도 외부로부터 들어올 때에 숨을 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에,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던 것처럼,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에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시간, 그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모든 이의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어제 또 많은 순간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시면서, 전심으로 한 명, 한 명, 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이미 나에게 주신 그 부요함을 베풀어내는 은혜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같이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 믿음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 제목 가지고, 또 우리가 가지고 온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다가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복된 예배에

숨이 없는 몸에 빗댄 죽은 믿음

설교자는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를 몸의 숨에 빗댑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영혼'은 숨이라는 뜻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만,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살아 있는 몸도 공기와 산소가 외부에서 들어와야 숨을 쉴 수 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창세기의 장면을 연결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을 근거로,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이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된다고 적용합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살아 있는 믿음을 구하도록 권면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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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을 끌어앉는 그런 행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서 세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하나님이 살리시는 믿음입니다. 오늘 21절부터의 말씀을 쭉 보면요. 야고보서는 두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요.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고요. 두 번째는 라합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너무나 유명한 두 인물이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었고, 언약의 약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반면에 라합은 여리코 성에 살던 이방 여인이었고, 기생이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아가던 두 인물을 야고보서는 같은 원리 아래 뒀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살펴볼까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완성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죠. 일례로,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였던 사라를 어떻게 합니까?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 23절을 한번 볼까요?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드러내십니까? 창세기 22장의 말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이었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장면을 통하여서 그 행함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의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어서 신이 얻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9절의 말씀인데요. 이 말씀 우리 한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웃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아브라함은 계산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으면 얼마나 슬플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지 않습니다. 숨겨주지 않습니까? 그 숨겨준 사실을 걸리면 죽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이유에 대해서 라합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요. 여호수아 2장 10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것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온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아멘. 라합이 고백합니다. 모든 일들을 다 본 겁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정탐꾼들에게 합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의 행함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게 되죠.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자신의 누를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족보, 그리스도의 족보에 하나님께서 올려두게 됩니다. 이 모든 스토리에 대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 뒤에 우리가 이 믿음이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먼저 행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우리 함께 다 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행함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향한 큰 행함과 순종을 행할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나의 믿음이 살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믿음이 죽어 있는 것 같다'라는 주저함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 오늘도 무릎 꿇고 나아가며 기도하는 그 복된 걸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기꺼이 순종할 때에 그 순종하는 삶 위에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2장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요. 그러나 그 공기와 산소 역시도 외부로부터 들어올 때에 숨을 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에,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던 것처럼,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에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시간, 그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모든 이의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어제 또 많은 순간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시면서, 전심으로 한 명, 한 명, 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이미 나에게 주신 그 부요함을 베풀어내는 은혜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같이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 믿음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 제목 가지고, 또 우리가 가지고 온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다가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복된 예배에

가게 손님을 대하는 두 가지 시선

설교자는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가게를 하는 상황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이웃이 가게에 찾아와 물건을 사 갈 때, 그저 구매자의 관점으로만 그분을 보지 말라고 권합니다. 늘 와 주어 고맙다는 단골의 관점에만 머물지 말라고도 합니다. 설교자는 교회 안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이 예배당 울타리를 넘어 이웃에게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게에 찾아오는 이웃을 여러분의 자식을 대하듯, 형제자매를 대하듯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사랑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예화는 가족 안에서 배운 본능적인 사랑을 교회 밖으로 확장하라는 적용으로 쓰입니다. 설교자는 적절한 관계나 좋은 거래 관계에만 머물지 말라고 거듭 당부합니다. 가게라는 일상의 자리가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현장이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선은 대가나 결과를 따지지 않는 본능적인 사랑의 시선입니다. 설교자는 이웃을 손님 이상으로, 가족을 대하듯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요청합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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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예배당의 울타리를 넘어서 여러분에게 이웃들을 대할 때, 여러분의 이웃을 그냥 적절한 관계성으로 좋은 관계 안에서만 만나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의 피부지들을 대하는 눈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고 사랑하는 것이 성경이 기대하는 사랑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가게를 하는데 그 가게를 이웃들이 찾아와서 뭔가 물건을 사가면, 그저 구매자의 관점으로만 그분을 보지 말고, 단골이 되어서 늘 와 주는 게 고맙다 하는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여러분의 자식을 대하듯이,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들을 대하듯이 이웃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사랑이라는 거예요.

부모의 이혼을 겪은 설교자가 공동체에서 받은 사랑

설교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가족 관계에서 본능적인 사랑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너무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셨고, 이혼하실 때 누님이 어머니를 따라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족 안의 사랑을 경험적으로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가장 어려웠다고 나눕니다. 믿기지 않는 그 사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매우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대학에 올라와 20대와 30대를 보낸 공동체에서 형들과 누나들을 만났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꽁꽁 닫혀 있던 마음을 형들과 누나들이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설교자는 그 공동체가 늘 생각나며, 그때 받은 사랑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마음 한편에는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약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형들과 누나들은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이 조금씩 닿으면서 마음이 약간씩 부드러워졌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탁 와닿았을 때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 지체를 가족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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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제가 여러 번 말했지만, 저는 가족 관계 안에 있는 본능적인 사랑을 거의 못 느끼고 자랐어요. 너무 일찍 아버지 어머니가 이혼하셨고, 아버지 어머니 이혼하실 때 누님이 어머니를 따라갔기 때문에 저는 사실 형제들 가운데 혹은 가족 가운데 있는 본능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참 경험적으로 약했고, 그래서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 하는 말이 제일 어려웠어요. 안 믿겨지는 그 사랑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대학으로 올라오면서 제 젊은 시절 20대와 30대를 보냈던 그 공동체에서 그렇게 꽁꽁으로 붙어 있는 제 마음을 만져 주는 형들과 누나들을 만났어요. 저는 참 잊을 수가 없어요. 늘 그 공동체가 생각나는 것은 그때 형들에게, 누나들에게 받았던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버림 받았다 하는 약간의 상처들이 남아 있었는데, 형들과 누나들은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게 뭔지를 가르쳐 줬어요. 꽁꽁으로 붙어 있는 제 마음을 형들과 누나들의 사랑이 많이 만지기 시작하면서 약간씩 약간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을 때,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이렇게 탁 와닿왔을 때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신학 공부 중 불편했던 동료 목사와 주님의 질문

설교자는 에버르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때의 경험을 나눕니다. 그곳에는 한국 목사님들 15가정 정도가 함께 와서 공부했고, 대부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자에게 유독 불편한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설교자에게 잘해 주었고 사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설교자는 성격 탓인지 그를 보면 속에서 부글부글 무언가가 올라온다고 고백합니다. 여러 제목으로 그를 싫어했는데,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잘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를 매일 바라보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는 태도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 그의 약점이 드러나는 현장을 포착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장면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고 표현하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겨 너무 기뻐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칭찬할 때마다 그 약점을 한 번씩 열어 보며 이중적인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엉뚱한 기쁨으로 기뻐하던 어느 날 주님이 질문하셨다고 나눕니다. 설교자가 되묻자, 주님은 그에게 '너에게 부활은 뭐야?'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허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며, 오늘 부활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을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설교자는 그때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세상이 상대의 약점을 붙들고 자기를 높이는 자리라면,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일로 배웠다고 적용합니다. 상대의 약점을 붙들고 낮추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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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르에서 공부할 때, 여러분 한국 목사님들이 한 15 가정 정도가 와서 같이 신학을 공부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좋은 관계를 잘 맺으면서 지냈는데 한 분은 참 불편했어요. 저한테 참 잘해 줬고, 정말 그 사회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인정을 많이 받던 분인데, 희한하게 저는 성격이 약간 뭐가 나서 그런지, 그냥 보고 있으면 속에서 부글부글 뭐가 자꾸 끌어 올라오면서 그렇게 한 분 힘들게 생각했어요. 여러 가지 제목으로 그분을 싫어했는데, 그중에 영어도 너무 잘해요. 저는 사투인데 그분은 네이티브처럼 영어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 많은 것들 때문에 불편해 하고 있을 때, 매일 가지고 '그래,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 이러고 딱 보고 있었는데, 놀랍게 놀라운 현장을 딱 포착했어요. 예. 여러분, 제가 그 현장을 딱 포착하고 보자에 딱 사서 호주머니에 딱 넣었어요. 그리고 너무 기뻤어요. '내가 아무한테도 말 안 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도 나는 아무한테 토스하지 않았다. 얼마나 훌륭한가 나요. 이러면서 너무 좋아했어. 너무 좋아했어.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그분 칭찬을 하면 한 번씩 열어 봤어요. 그러면서 이중적인 기쁨이 왔어요. 이 사람 이런 사람인데 나는 말 안 한다. 그 사람의 그 약점도 붙들고 있고, 그죠. 말 안 하는 저의 또 고매함이 드러나면서 막 너무 기뻤는데, 하도 그렇게 엉뚱한 기쁨으로 기뻐하니까 주님이 하루는 질문하셨어요. '쏘왓 영국이니까 영어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냐?' 그렇게 물었어요. 제가 주님께 대답했어요. '주님, 이걸 보시고 다 아시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제가 여쭈었어요. 그때 주님이 저에게 '너에게 부활은 뭐야?' 이렇게 질문하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 그 사람은 정말 그 일을 허물 있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고, 오늘 부활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을지 네가 어떻게 아냐?' 이렇게 주님이 반문 딱 하셨을 때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세상은 끝없이 상대의 약점이 드러나고 모자람이 보이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걸 붙들고 어떤 형태든지 그걸 붙들고 자기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어 하는 이런 세상에, 사랑을 하기를 사랑을 가르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은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끓다가 냄비가 터지기 직전인 물에 빗댄 열심

설교자는 11절의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을 짚습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물이 버글버글 끓어 냄비가 터지기 직전인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상태를 '열심'으로 해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물이 끓어 터지기 직전과 같은 열정이 생긴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열심이 사랑을 하는 일에 정말 중요하다고 덧붙입니다. 이 열심은 기질이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 내는 기적 같은 요소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 열심이 육신을 따라 인간의 방법으로 나오면 쉽게 공로주의에 빠진다고 경고합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은 남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방향으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열심이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로 나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또한 열심은 방향이 매우 중요하며, 방향이 잘못되면 많은 해를 끼치고 사랑이기보다 폭력이 될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주님을 향해 제대로 향할 때, 주님을 섬기는 연장선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성경이 원하는 바른 열심이 있는 사랑이라고 결론짓습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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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존중하기를, 상대의 훌륭함과 귀함을 인정하면서 그를 귀하게 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 봐가면서 평가하고 나서 그렇게 하지 말고, 사랑은 우리 같은 사람을 주님이 죄로 다 망가지고 일어선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주님이 필요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필요도 모르고 있던 그때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처럼, 사람들을 존중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지나가야겠어요. 사랑은 11절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게으르다는 것은, 오늘 해야 될 것을 내일로 연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해야 될 것을 지금 하지 않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늘 뭘 붙이나요? 어느 날 한꺼번에 기적같이 일어날 사건을 기대하면서 오늘 나의 게으음을 계속해서 딜레이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은 반드시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구분이 되시죠? 그죠? 바른 사랑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연기하고 미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주실 때, 사랑을 위한 기회로 선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죠?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깁니다. 여러분, 여기 ‘열심을 품고’ 하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물이 버글버글 끓어서 남비가 터지기 직전인 상태입니다. 그게 열심입니다. 물이 그냥 불에서 벌펄벌펄 끓어서 남비가 이제 더 이상 감당이 안 될 만큼 터지기 직전의 상태를 ‘열심’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여러분, 열심은 여러분이 사랑을 하는 일에 정말 중요합니다. 그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냥 물이 끓어서 터지기 직전인 상태와 같은 열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기질이 어떤 건가,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요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만약에 여러분의 육신적인 열심이면, 열심은 있기는 있는데 육체를 따라하는 열심이면, 여러분은 굉장히 쉽게 공로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에는 정말 열심이 너무너무 있게 되는데, 여러분 육체를 따라 인간의 방법으로 하는 열심은 자주 공로주의에 빠져서 남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제목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게 아니라 어떤 열심입니까?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로 열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죠? 사랑은 열심을 다하도록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열심은 방향이 너무 중요해요. 열심히 방향이 잘못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죠? 그런데 이 열심에 사랑은 열심을 드러내게 되는데, 어떤 방향을 가지고 주를 섬기는 방향을 가지고 열심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여러분과 저에게 가르치는 사랑입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사랑이기보다 폭력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주님께로 향해서 사랑이 딱 제대로 향하고 있을 때,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사랑이 되어 죽게 하듯이 주님을 섬기는 연장선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정말 성경이 원하는 바른 열심이 있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다음 빨리 보고 싶어서 서둘러 온 것 같아요. 여러분, 저는 이 본문 묵상할 때 12절이 너무 좋았어요. 여러분, 12절 앞에 ‘사랑은’ 붙여서 12절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사랑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쓴다.’ 여러분, 사랑을 세 가지로 12절은 소개해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 사랑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환난 중에 참는 것입니다. 그죠? 항상 사랑은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12절은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 주변을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 주로 뭘 가지고 좋아해요? 현재를 가지고 좋아합니다. 현재 지금 일어난 어떤 일, 지금 뭔가 바라든 일이 성취된 지금을 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원하는 대로 됐는데 안 기쁠 사람이 누구가 있겠어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랑은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여러분을 넘어뜨리고, 여러분을 낙심시키고, 여러분들이 그만하고 싶도록 만들고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만두지 않고, 낙심해지지 않고, 소망을 딱 붙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행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뭡니까?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이미 시작한 그 위대한 놀라운 주님의 일을, 우리 몸에까지, 우리의 전 인격에까지 그 놀라운 일을 다 드러내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여러분과 제가 최선을 다해서 뭔가를 사랑함으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너무 돌아오지 않아서 낙심스럽고 멈추고 싶을 때, 여러분이 이 힘을 다해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들이 여러분을 배반하고 여러분을 낙심시킬 때, 그럴 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다 보시고 계시잖아요.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실 그 주님의 오실 그날을 사모하면서 오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죠?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좀 나쁜 말로 우리의 모든 사랑과 수고를 조롱할 때도, 전혀 섭섭해하지 않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죠? 환난 중에 참는 것. 여러분,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는 뭘 보면 알아요? 환난이 왔을 때 보면 되죠. 그죠? 환난이 딱 오면, 이게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짜 사랑은 참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죠?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할만큼 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참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그 위대한 장에 사랑은 하고, 제일 먼저 뭐가 나왔지요? ‘오래 참는다’가 나왔어요. 그죠? 사랑은 참된 사랑은 참게 됩니다. 포기하거나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그냥 모조품이었으니까 멈출 수 있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참게 하고 견디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믿게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한 번씩 넘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기도의 골방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죠?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아픔을 들으시고, 우리를 들으시는 그 기도의 골방에 항상 힘써서 들어가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죠?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그 자리에, 우리를 아시는 그분의 만짐이 일어나는 그 현장으로 항상 힘써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마지막 두 개 사랑이 있습니다. 그죠? 그게 뭡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익숙한 두 사랑이 나와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 이게 뭡니까? 뭐라고 말하면 될까요? 사랑은 나눔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여러분의 시간을 나누고, 관심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여러분의 재능을 여러분의 것으로만 쓰려고 하지 않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나누고, 여러분의 물질을 나누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누가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울 줄 모르면, 이것이 참으로 믿는 자이겠는가? 너희 사랑이 어디 있느냐? 주님이 반문하시는 것처럼, 사랑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흘려보내고 나누어서, 그들의 아픔을 만지고, 그들의 아픔을 만짐으로 형평케 하고 균등케 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여러분이 보는 것처럼, 정부가 세계의 정부들이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어서 획적인 균등을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제도가 하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해야 되는 사랑과 구별되기 때문이에요. 제도가 만들어서 획적인 평등을 만들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흘려 보내고 나누면서 균등케 하는 이 사랑이 살아나야, 우린 정말 아픔이 해소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랑. ‘나그네를 접대하라.’ 이게 뭐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환대하라입니다. 환대하라. 나은 사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집에 들리면 해괴한 짓을 할지, 정말 성도의 교재를 할지 전혀 검정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불편을 끼치고, 우리의 일상에 일상적인 삶의 리듬을 깨게 만드는 사람인데, 그러기 때문에 못 본체하고 지나가지 말고, 그를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환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 잘 몰라요.’ 하고 뒤걸음질 치지 말고, 처음 봤기 때문에 제 실력이 잘 안 나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누구든지 마음을 활짝 열어서 받아서, 그의 필요와 그의 아픔과 그의 여러 가지 상황이 해소될 수 있도록 사람을 마음을 열고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조국 땅에 오늘 이렇게 많은 아픔과 부르짖음의 핵심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이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오늘 이 시대, 조국 땅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에 제일 핵심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미루지 말고, 오늘 해야 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낯설기 때문에 못 다가간다고 그렇게 자꾸 말하지 말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모든 삶의 자리를 사랑을 행할 현장으로 여기면서, 누가 먼저 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먼저 공경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먼저 존경을 행하는 것이 사랑인 줄 알고, 삐죽되지 않고 뒤걸음질 치지 않고, 이 시대에 이런 보편적인 덤성덤성한 문화에 지지 말고, 피부치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칠 그 사랑을 바로 그 사람에게 적용하면서, 많이 사랑해서, 오늘 이 조국의 아픔이 여러분들의 믿음과 삶의 실천을 통해서 해소되고 극복되고, 정말 따뜻한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조국 사회 되도록,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 되어 주시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