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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19 / 32쪽 · 한 쪽 20개

결혼반지를 끼고 있지만 마음이 떠난 아내 이야기

설교자는 세상을 따르는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흔드는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한 아내가 결혼 반지를 그대로 끼고 있고 집에도 매일 들어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로 하나님을 향한 신부 된 교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야고보가 세상과 벗이 되려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한 것과 이어집니다. 세상 생각이 스쳐 가는 것과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것은 다르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신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비유입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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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기름이 가득 찬 항아리를 가져온 이웃의 상상

설교자는 기름을 빌리러 온 소년이 이웃에게서 이미 가득 찬 항아리를 받아 오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소년은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집으로 가져오지만, 어머니가 기름을 부으려 하자 항아리는 이미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가득 찬 것은 더 채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그녀에게 큰 손실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기름의 질이 나빴을 수도 있다는 상상도 함께 펼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창조하신 기름은 결코 최고가 아니었겠느냐고 되물으며 장면의 의미를 이어갑니다. 이를 적용하여 설교자는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수님께서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선함으로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도우실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찬송가 구절을 인용하여 여기서 배제되는 자는 자기 스스로 배제한 자뿐이라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안의 가득함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는 것을 막는다고 결론짓습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9–10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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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화에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 필요했는가입니다. 이 기적에서 요구된 것은 단지 비어 있는 그릇뿐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신성한 충만함을 위한 비어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기름은 그 여인의 그릇 하나에 있었지, 비어 있는 그릇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소년이 그릇을 빌리러 왔을 때, 그녀의 이웃 중 한 사람이 "가엾은 여인, 겸손하게 빈 기름 항아리를 요청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가득 찬 항아리를 주어 도와주겠어."라고 생각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소년은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여 집으로 가득 찬 항아리를 가져옵니다. 어머니가 기름을 붓고자 항아리를 들고 오자, 그 항아리는 이미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야," 어머니가 말합니다. "이건 내 일이 아니야. 이미 가득 차 있으니, 가득 찬 것을 다시 채울 수는 없어." 이로 인해 그녀에게 큰 손실이 될 수도 있었겠죠. 기름이 질이 나빴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창조하신 기름은 결코 최고가 아니었을까? 따라서 이 세상에 자연적으로 공덕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충분히 자연적인 선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없고, 그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도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수님은 그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찬송가가 잘 말해 줍니다. "여기서 배제되는 자는 자기 스스로 배제한 자뿐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안의 가득함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는 것을 막습니다. 바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플로우먼과 허비 씨의 대화

설교자는 플로우먼이 허비 씨에게 사람들이 구원받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이냐고 묻는 대화를 소개합니다. 허비 씨는 죄 많은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플로우먼은 죄 많은 자기보다 의로운 자기가 사람들의 구원에 더 큰 장애가 된다고 답합니다. 설교자는 이 대화를 통해 죄인은 용서를 구하러 예수께 나아오지만,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예수께 오지 않는다는 점을 짚습니다. 그는 앞서 말한 가득 찬 기름 항아리를 다시 떠올리며, 이미 가득 찬 항아리는 더 이상 기름을 담을 수 없다고 연결합니다. 설교자는 죄인 중에서도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구주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구주도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경고합니다. 이 대화는 자기 의를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사례로 제시됩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지 말고, 빈 그릇처럼 자신을 비우고 예수께 나아오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구원의 길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죄보다도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마음이라는 적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11–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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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과 플로우먼, 허비 씨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플로우먼이 허비 씨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는 데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허비 씨는 "죄 많은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플로우먼이 말했습니다. "죄 많은 자기보다는, 의로운 자기가 사람들의 구원에 더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죄인들은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러 올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결코 예수님께 오지 않습니다. 가득 찬 기름 항아리는 더 이상 기름을 담을 수 없습니다. 죄인 중에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주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구주도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름이 남아 있던 항아리

설교자는 소년이 가져온 항아리 하나에서 기름이 흘러나오지 않는 장면을 그립니다. 어머니는 기적적인 항아리를 다른 항아리 위에 들어 보지만 기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가 항아리를 흔들어 보니 바닥에 약간의 기름이 남아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건네준 이웃은 안에 조금 남겨 두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설교자는 상상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름이 흐르지 않는 이유가 항아리에 기름이 이미 조금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아들에게 마지막 방울까지 다 부어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비어 있는 항아리만 사용하라고 명령받았다고 말하며, 비어 있지 않은 항아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남겨 둔 자기 의와 자기 것을 완전히 비워야 은혜가 채워진다는 가르침으로 연결합니다. 항아리의 바닥에 남은 기름처럼 조금이라도 자기 것을 붙들고 있으면 은혜가 흘러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일을 마치자 기름이 자유롭게 흘러나와 항아리를 꽉 채웠다는 장면을 근거로, 비움이야말로 적절한 자세라고 말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12–13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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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이 또 다른 항아리를 가져옵니다. 그가 항아리를 들여다보니, 어머니의 기름이 그 안으로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기적적인 항아리를 다른 항아리 위에 들고 올리지만, 기름은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이 항아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내 아이?"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항아리를 흔들어 보니, 바닥에 약간의 기름이 남아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건네준 이웃은 "다 빼내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가엾은 사람들, 안에 조금만 남겨두면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소년에게 말합니다. "기름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은 항아리에 이미 기름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이야. 부어 버려, 아들아. 마지막 방울까지 다 부어 버려. 나는 비어 있는 항아리만 사용하라고 명령받았어. 이 항아리는 비어 있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 일을 마치자, 기름은 자유롭게 흘러나와 항아리를 꽉 채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직 기대할 만한 좋은 것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 주님 예수의 은혜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비어 있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비움이야말로 적절함입니다. 자연적인 선함의 부족은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증명하며, 그 필요 자체가 당신이 받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말라붙은 빈 기름병

설교자는 오래전부터 기름이 전혀 없었던 기름병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 병은 냄새를 맡아도 기름 흔적이 없고,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스쳐도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을 만큼 말라붙어 있습니다. 설교자는 여자가 그 병 위에 그릇을 들이대는 순간 기름이 흘러나와 병을 가득 채운다고 말합니다. 병의 크기가 아무리 커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입니다. 이 장면을 설교자는 죄인의 상태에 비유합니다. 그는 오늘 밤 자신이 잃어버리고 깨어지고 비어 있으며 가치 없는 죄인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가득 찬 그리스도는 비어 있는 죄인들을 위한 분이지만, 스스로를 가득 채운 자들에게는 주어질 자리가 없다고 설교자는 대조합니다. 또한 마음속에 선함의 흔적조차 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예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자신이 느껴야 할 대로 느끼지 못하고 울어야 할 대로 울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비어 있는지를 보여 준다고 설교자는 해석합니다. 그 자연적인 공허함 속으로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가 흘러들어 영혼을 채우고 그분의 영광으로 넘치게 하신다는 것이 그의 메시지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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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분명히 말하건대, 이러한 생각이 생기면 은혜의 흐름을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어 있는 버킷은 은혜의 우물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그들은 채워질 것이고, 가득 찬 버킷들은 우물 가장자리에서 무심코 서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기름병이 있습니다. 완전히 비어 있는 것입니다. 냄새를 맡아 보세요. 기름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병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스쳐 보지만 아무것도 붙지 않습니다. 말라붙었습니다. 매우 말라붙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기름이 없었습니다. 여자가 그 병 위에 그릇을 들이대는 순간, 기름이 흘러나와 그 병을 가득 채웁니다. 병의 크기가 아무리 커도 말입니다. 아, 불쌍한 영혼이여, 오늘 밤에 자신이 잃어버리고, 깨어지고, 비어 있고, 가치 없는 죄인이라고 느낀다면,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필요하신 것입니다. 가득 찬 그리스도는 비어 있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지만, 자신을 가득 채운 자들에게는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너무나 비어 있어서 마음속에 선함의 흔적이조차 없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당신이 말하길, '하지만 내가 느껴야 할 대로 느끼지 못하고, 생각해야 할 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울어야 할 대로 울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는 당신이 얼마나 비어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러한 자연적인 공허함 속으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채우고, 그분의 영광으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아, 믿음의 행위로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다면, 이는 자랑스러운 죄인에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인식과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구주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 주님, 저는 간구합니다. 지금 바로 그분의 조용하지만 풍성한 성령의 기름 흐름 속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소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세요. 이 기적에서 비어 있는 그릇들이 가져와지자마자, 크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 모든 그릇들이 가득 찼습니다. 한 이웃은 작은 그릇을 빌렸고, 다른 이는 큰 그릇을 빌렸지만, 모두 가득 찼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으로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 안에서 완전합니다. 그분의 풍성함으로부터 우리는 모두 받았고,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혼아,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분 안에서 당신을 용서해 주시는 은혜, 당신의 성품을 바꾸어 주시는 은혜, 그 성품을 바꾸어 놓은 채 지키는 은혜, 당신을 완전케 지키는 은혜, 당신을 영광으로 데려가기까지 도와주는 은혜를 모두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 문과 천국 문 사이에서 죄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자유롭게 주십니다. 그분은 반만 채우지 않으시고, 영혼이 말할 수 있도록 '내 잔은 가득하다'고 하게 만드십니다. 그분은 반쪽짜리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분은 낙원의 파괴로부터 완전한 구속자이십니다. 아, 비어 있고, 필요로 하는 죄인들아, 완전하고 충분한 구속자 예수님을 받아들여 영원히 축복을 받으소서. 이 기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까요? 기름이 얼마나 오래 흘러갔을까요? 이는 주목할 만한 순간입니다. 비어 있는 그릇이 가져와질 동안 계속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명령은 '너무 작게 빌리지 말라'였습니다. 저는 오늘 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영혼을 축복하실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어 있고, 그분의 신성한 은혜의 흐름 아래 놓인 모든 영혼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굶주린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법이시며, 또 다른 법칙도 마찬가지로 참입니다. 그분은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필요로운 죄인들이 그분께 나아와 구원을 받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만약 지상에 죄인이 없다면, 구세주는 지상에 자리 잡을 곳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죄책이 있는 자가 없다면, 그분의 속죄의 피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불결한 자가 없다면, 그들이 스스로 정결케 할 수 있는 근원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어 있고, 가난하고, 궁핍한 영혼이 예수님을 간절히 원하는 한, 그분은 그 가난하고 목마른, 필요로 하는 영혼을 위한 귀한 구세주이십니다. 저는 이야기 속의 여인처럼 외치고 싶습니다. '다른 그릇을 가져다 주소서.'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은혜로 가득 채우신 많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립니다. 하지만 저 앞에 또 다른 그릇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 죄인으로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자에게 설교하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일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인 설교입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자들이 그분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게 설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밤중까지 설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촛농처럼, 인장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원하면 예수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필요가 깊어질수록, 당신은 그분께서 모든 필요로운 자에게 자유롭게 주시는 완전한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 더 용의할 것입니다. '다른 그릇을 가져다 주소서.' 더 이상 그릇이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저는 분명히 더 많은 그릇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아직 모든 그릇을 소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채워져야 할 많은 자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모든 선택받은 자들이 모이고, 모든 구원받은 자들이 집으로 돌아온 시기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비어 있는 그릇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우리의 구속자 안에서의 만족을 얻고, 그릇을 가득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이 설교에서 저는 복음 전파를 위한 매우 단순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절망에 빠진 한 신자

설교자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의 안타까운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그 신자는 한때 미친 듯이 행동하여 기독교의 이름을 실추시켰고, 그 결과 지금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그 절망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반항일까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가 다른 유혹들을 가져왔듯이 그 특별한 유혹을 하나님께 믿음으로 가져왔다면, 그는 그것을 이겨냈을 것이라고 설교자는 안타까워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서 이길 수 없는 죄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죄나 저 죄가 본능적이라서 이길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이겨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사례를 통해 청중에게 자신의 죄를 빈 그릇으로 여기고 예수님께서 만지실 수 있도록 가져오라고 권면합니다. 절망 속에서 그 죄를 감추기보다 주님께 내어놓는 것이 회복의 길이라는 적용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20–20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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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한 사람 있는데, 불행히도 그는 미친 듯이 행동하여 기독교의 이름을 실추시켰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으며, 자신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의 절망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반항이라고 두려워합니다. 만약 그가 다른 유혹처럼 그 특별한 유혹을 하나님께 믿음으로 가져왔다면, 그는 그것을 이겨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속에서 이길 수 없는 죄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죄나 저 죄가 본능적이라서 이길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겨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빈 그릇을 예수님께서 만지실 수 있도록 가져오십시오.

자비의 천사와 빈 그릇이 없는 장막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비유로 들어 자비의 천사를 묘사합니다. 자비의 천사는 풍성한 뿔에 귀중한 축복을 담아 들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장막 위를 때때로 날아다닙니다. 그는 장막 근처에 멈추어 부드러운 날개를 펼치고 잠자는 자 곁에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막 안을 둘러보아도 축복을 부어 줄 빈 그릇을 찾지 못하면 그냥 떠나 버립니다. 설교자는 그러다 결국 다른 장막을 발견하는 장면을 그립니다. 그 장막의 주민들은 잠자기 전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많은 빈 그릇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자비의 천사는 그 그릇들을 하나하나 채우고, 사람들이 깨어났을 때 자신들에게 풍부하게 부어진 은혜에 놀라게 됩니다. 설교자는 약한 갈망과 작은 요청,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큰 갈망과 진심 어린 기도, 강한 믿음과 높은 기대를 가진 사람들은 그 믿음대로 받고 풍요로워집니다. 그는 교회가 낮과 밤으로 빈 그릇들을 준비해 둔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공동체에 풍부히 채워지지 않겠느냐고 청중에게 묻습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23–23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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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더 이상 이러한 죄악적인 침묵에 참여할 의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빈 그릇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께 가져가지 않습니다. 왜 당신은 이토록 고집스럽게 어리석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에게 "고민을 그분께 맡겨라. 그분이 당신을 돌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그것을 맡기지 않겠습니까? 왜 당신의 죄, 필요, 고민을 계속 짊어지고 다니겠습니까? 이러한 걱정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반드시 채워져야 할 빈 그릇들입니다. 아, 형제들아, 왜 우리는 더 큰 갈망과 더 넓은 기대를 갖지 못합니까? 우리의 믿음에 따라 그분께서 주실 것입니다. 자비의 천사가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장막 위를 날아다니며, 풍성한 뿔을 들고 귀중하고 풍요로운 축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종 그는 장막 근처에 멈추어 부드러운 날개를 펼치며 잠자는 자 옆에 머뭅니다. 그는 장막 안을 둘러보지만, 축복을 부어 줄 빈 그릇을 찾지 못하고 떠납니다. 결국 그는 또 다른 장막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서 주민들은 잠자기 전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많은 빈 그릇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는 자비로운 은혜의 뿔을 들고 하나하나 그릇들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들이 깨어나면, 자신들에게 풍부하게 부어진 은혜에 놀라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약한 갈망, 작은 요청, 부족한 기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기도를 드리며, 그들은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은 큰 갈망, 진심 어린 기도, 강한 믿음,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에 따라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은 풍요로워집니다. 아, 교회에서 낮과 밤으로 빈 그릇들이 전시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이 공동체에 풍부히 채워지지 않겠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와 기도하는 성도들

설교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분노하신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전했을 때 큰 깨달음이 일어났던 일을 소개합니다. 그는 그 결과가 놀라운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설교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며칠 전에 모여 설교할 목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했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그들의 기도가 에드워즈의 설교에 힘을 주었고, 그 결과 죄인들이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기도가 사역의 열매를 가져온다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는 마을과 도시를 품고 진심으로 기도한다면, 지금은 아무 열매가 없어 보이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성공을 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씨를 뿌리지만 싹이 나지 않는 목사들도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그는 격려합니다. 설교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 간구한 이들은 그 신비를 풀어낼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조용히 빈 그릇을 기름이 흘러내리는 곳 아래 놓는 것과 같아서, 아무 소리 없이 그릇이 채워진다는 비유로 이 적용을 마무리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24–24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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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도 이 원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빈 그릇들처럼 여겨야 합니다. 당신은 저를 빈 그릇으로 보고, 하늘의 기름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해 주기를 원합니다. 사역의 은혜를 기대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무익합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교회들이 목회자에게 무엇을 투입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즉, 그들이 목사님을 위해 많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많은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서 영혼이 채워지기를 기대하면서도, 한 번도 목사님을 도와주시고 설교에 복을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은 이들은 은혜의 방문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목사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일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빈 그릇으로 여겨 주님께 채워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식들과 친족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일부 경우는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들을 기도로 하나님 앞에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믿지 않고 세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왜 놀라겠습니까? 빈 그릇들을 채우지 않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친구들아, 당신 집안의 미신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아직 구원받지 않은 친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로 자주 기억하고, 기도를 멈추지 마세요. 그리스도의 은혜는 결코 흐르지 않는 것이 없고, 기도의 능력은 결코 고갈되지 않습니다. 가족 모두가 회개할 때까지, 하나의 빈 그릇도 남지 않을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마세요. 우리는 이웃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열심인가요? 우리가 사는 지역이 기도 중에 더 자주 마음속에 떠오른다면, 런던에서 얼마나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분노하신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로 일어난 큰 깨달음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설교는 결과적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설교의 힘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몇 일 전에 모여, 설교할 목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것을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을, 도시, 도시들을 가지고 진심으로 기도한다면, 지금은 축복이 없는 일에 하나님께서 성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지만 결코 싹이 나지 않는 목사님들은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 간구한 이들은 이 신비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마치 조용히 빈 그릇을 기름이 흘러내리는 곳 아래에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 소리 없이 그릇이 채워집니다.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보자. 망설이십니까? 하늘의 열쇠를 허리에 차고 계신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의 보물을 우리의 믿음에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소홀로 이 은혜를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기 당신의 완전한 자유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면 주어질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입을 넓게 벌리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두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어떤 일에 합의하면,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왜 우리는 즉시 합의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서명하셨고 당신을 위해 비워두신 이 체크를 작성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무한한 보물을 열어 놓으셨는데, 거기에 페니나 적은 금액을 쓰겠습니까?

회심자가 늘어나자 불신한 교회

설교자는 한 교회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30명이나 40명으로 늘어나자, 나이 많은 교인들이 놀라기보다 완전한 불신으로 반응했던 일을 전합니다. 그들은 그런 큰 인파가 부당한 영향이나 과도한 흥분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설교자는 또 다른 무리를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 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설교하던 이전 목사 아래서 10년 동안 단 한 명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달 만에 20명이 회심을 선언하자, 사람들은 지나친 흥분을 경계하고 너무 빨리 받아들이지 말라는 충고를 했습니다. 흥분이 지나가면 끔찍한 반작용이 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자는 또 한 친절한 노인 여인이 교회가 뒷문을 쉽게 열 수 있도록 하기를 바란다고 조롱했던 일도 소개합니다. 그녀는 앞문으로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곧 뒷문으로 밀려날 사람이 생길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설교자는 그녀가 한 해에 두세 명만 회심하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는 이 모습을 어리석다고 비판하며, 선지자의 아내가 보여준 원칙과 정반대라고 지적합니다. 많은 그릇을 가져오면 실패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제한하는 것이라는 취지입니다. 설교자는 성령께서 큰 일을 행하실 수 있으며, 교회가 믿음을 회복하고 많은 빈 그릇을 가져올 때 모든 민족이 채워질 것이라는 소망을 덧붙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25–25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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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도들이여, 너희 자신을 제한하지 마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그릇들을 가져오라, 그리고 많이 가져오라. 다시 한 번, 나는 이 성경 말씀을 성령의 역사와 관련하여 세 번째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어느 교회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이 30명이나 40명이 되면, 나이 많은 교인들이 손을 휘두르며 놀라기보다는 완전한 불신으로 반응하곤 했다. 그들은 그런 큰 인파가 모였다는 것이 무언가 부당한 영향이나 과도한 흥분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이 말했다. "우리 이전 목사님의 올바른 교리 설교 아래서 10년 동안에 단 한 명만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신학자와 함께 있었고, 스스로도 현명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잘 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보세요. 한 달 만에 20명이나 회심을 선언했습니다." 그 좋은 형제들은 덧붙였습니다. "당신은 매우 조심하길 바랍니다. 너무 빨리 받아들이지 마세요. 지금 이곳에는 많은 흥분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현명하고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흥분이 지나가면 끔찍한 반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한 친절한 노인네 여인은 조롱하듯 말했다. 교회가 뒷문을 쉽게 열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고. 왜냐하면 그녀는 확신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앞문으로 들어온다면 곧 뒷문으로 밀려나야 할 사람들이 생기리라고 말이다. 나는 그녀가 아마도 한 해에 단 두세 명만 회심할 때 비난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친구들은 이 일을 성령의 역사로 여겼다. 모든 사소한 일은 성령의 역사라고 여겼다. 그러나 회심자가 30명이나 40명, 특히 300명이 되면, 그것은 단지 흥분일 뿐이라고 여겼다. 목사가 교회에 적절한 사람이라도 한 명이라도 끌어들이기 위해 지역 사회를 뒤져야 할 때는 성령의 역사라고 여겼다. 그러나 수백 명의 새 신자가 몰려들 때는, 아, 그때는 누구나 두려워했다. 그것이 얼마나 육체적인 흥분이었든 말이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어리석지 않겠는가? 이 사람들은 바로 선지자의 아내가 보여준 원칙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매우 적은 그릇만 가져오라, 매우 적은 그릇만. 일부가 채워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한두 개만 채우기에 기름이 충분할 것이다. 더 가져오지 말라. 그렇게 하면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백 개의 그릇이 기름으로 가득 찼다고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기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악랄한 모조품일 것이다. 수많은 그릇이 채워졌다면, 그것이 모두 좋은 기름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성령이 크고 훌륭하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성령이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분이 이 세상에서 큰 일을 행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며, 수천 명이 "선생님,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외치는 새로운 페스티벌을 기다렸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부흥의 시기보다 성령이 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형제들이여, 나는 이것이 성령이 행할 수 있고 행하고자 하는 일에 비하면 미미하다고 믿는다. 우리가 진정한 최고의 부흥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성령이 권능으로 오셔서 진리와 함께 일하실 때, 우리가 완전히 믿고 그분께 복종할 때, 한 번의 설교로 가득 찬 성전 전체가 회심하는 것을 듣기를 소망한다. 나는 런던의 모든 교회와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유롭게 전파되고 영광을 받기를 소망한다. 나는 한 교회가 가득 찼다가 다음 교회가 기다리며 들어오기를 소망한다. 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구원자께 달려들기를 소망한다. 어째서 안 되겠는가? 너희는 이 지역 사회가 매우 크고 놀라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그것은 맞다. 수천 명이 계속 모이는 곳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수백 개의 교회가 바닥에서 천정까지 가득 찰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수만 명이 "와서 우리를 도와주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해 주소서"라고 외치는 날 말이다. 영국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방인들이 지금까지 느리게 전환되었던 것처럼 계속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교도 세계의 인구는 기독교로 전환된 인구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전환의 시대가 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한 나라가 한순간에 태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째서 안 되겠는가? 하나님의 영은 제한받지 않는다. 교회가 믿음을 회복하고, 그녀가 많은 비어 있는 그릇들을 가져올 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그분의 신적인 일을 자비롭게 증식시키시고, 모든 빈 민족들이 채워질 것이다. 잉글랜드, 미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힌두스탄, 중국, 아라비아—모든 민족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귀중한 피로 수많은 민족들이 구원받을 것이다.

안식일 연구를 시작하게 된 피곤했던 신혼 시절

설교자는 경력 초기 몇 년 뒤, 막 결혼한 신혼 시절을 떠올립니다. 그 무렵 아이를 빠르게 두 명이나 두게 되었고, 그는 솔직히 매우 피곤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경험 속에서 그는 믿음이 자신의 실제 삶에 대해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이라는 개념에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고, 이를 제대로 따져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진짜 과학자처럼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경력 초기에는 안식일의 여러 측면을 다룬 학술 연구들도 내놓았습니다. 당시 그는 시애틀 평화 대학에서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 세 사람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신 재능과 역할을 삶의 리듬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 모든 고민은 결국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않는다는 실천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질문이 경력의 맨 처음부터 자신을 붙잡았다고 말하며, 믿음과 일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관심 역시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밝힙니다. 설교자에게 휴식과 안식은 학문적 주제이기 이전에 자신의 피로와 삶의 방향을 묻는 개인적 질문이었던 셈입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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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빠르게 설명드리자면, 이는 위튼 대학(Wheaton College)이고, 위튼 대학교(Wheaton University)는 아닙니다. 이 점을 명확히 해주셔서 기쁩니다. 저는 매우 바쁜데요, 현재 휴가 중입니다. 학문의 휴가라 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은 한 학기 동안 수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동료들은 어제부터 업무를 시작했고, 저는 방금 녹음 전에 남편이 기술 지원을 하러 들어오셨다는 점에서 보셨겠지만, 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제 삶의 역할 중 하나는 할머니라는 점입니다. 저희는 네 명의 자녀와 두 명의 손자녀를 둔데요,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크와 저는 다음 세대, 다음 세대의 변화에 대해 관심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이 점을 공유하는 것이 기쁩니다. 그리고 젊은 청취자 여러분, 다음 에피소드에는 27세의 손님이 출연할 예정입니다. 데니스 교수님, 교수님의 관심 분야 중 하나는 여가이며, 교수님은 바쁜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수님은 휴가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왜 이는 교수님의 관심 분야 중 하나인가요? 이 팟캐스트는 주로 리더들을 위한 것이고, 리더들은 보통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진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교육, 멘토, 경험을 통해 훈련받았고,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에게 휴식이 중요한가요? 그리고 교수님은 어떻게 휴식을 취하시나요? 네. 저는 제 연구의 대부분이 어느 정도는 제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경력 내내 어떻게 하면 진정한 나답게 삶을 살 수 있을지를 궁리해 왔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직업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관심은 제 자신의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제 경력의 맨 처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31년간 교사로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경력 시작 후 몇 년 뒤, 저는 방금 결혼한 신혼부인이었고, 남편과 저는 아이들을 빠르게 두 명이나 둡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매우 피곤했습니다. 그리고 제 믿음이 제 실제 삶에 대해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토요일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 개념에는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짜 과학자처럼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 경력 초기에는 안식일에 관한 어떤 측면을 다룬 학술적 연구들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 시애틀 평화 대학에서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했는데, 세 명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주어주신 재능과 기술, 능력, 그리고 우리가 맡은 역할을 어떻게 삶의 리듬 속에서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는 실제로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작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96년 학문적 직책 면접에서 받은 공동 집필 질문

설교자는 1996년 첫 학문적 직책을 얻기 위한 면접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면접 위원 중 한 명은 나중에 동료가 된 사람이었는데, 그는 설교자의 이력서를 비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력서, 곧 학문적 용어로 CV에 실린 발표 논문이 모두 공동 집필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그 위원은 설교자가 정말 연구를 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성과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 듯한 뉘앙스를 드러냈습니다. 설교자는 그 말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질문의 암시는 분명했다고 회고합니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답했습니다. 함께 일할 때 더 즐겁고 에너지와 집중력이 유지되며, 서로의 사고에서 결점과 오류를 찾아내 결과물이 더 나아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혼자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평가 과정을 거친 결과이기에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일화는 그가 협력적 연구 방식을 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근거로 제시됩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4–5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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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어요. 월요일 아침에 그날의 일정—수업이나 회의, 무엇이든 간에—에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년 동안 월요일에 아무도 제가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점에 놀랐어요. 그러다 제가 사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오히려 이 경험은 저에게 많은 힘을 되찾아 주었고, 그날 하루는 아침 아홉 시에서 오후 다섯 시까지의 직장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제 직장은 아침 아홉 시에서 오후 다섯 시까지의 일과는 아니었지만, 주간 업무는 일반적인 직장과 비슷했어요. 오호. 그래서 데니스, 휴식이 단순히 더 편안해진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의 일부가 되었고, 의식적으로 연습할 필요가 없게 된 시점은 언제였나요? 이건 이제 삶의 리듬이 되었죠. 얼마나 걸렸나요? 아마 수십 년은 걸렸을 거예요. 이걸 격려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천천히 움직이지만, 고난을 겪는 우리들을 격려해 주세요. 저는 25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있어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네. 저는 10년이 지나서야 이 하루는 결코 일하지 않는 날이라는 게 분명해졌어요. 때때로 "오늘은 이 일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죠. 즉, 그 길목에는 많은 유혹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런 것들에 대해 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아요. 누군가 제게 "이건 일 아닌가요?"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살아가지 못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저는 10년이 지나서야 저,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이 하루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일들을 위한 날이라는 걸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와, 이건 정말 흥미롭네요. 연구를 하면서 세대 간의 차이점이나 아이디어를 알아차리셨나요? 예를 들어, 베이비부머와 밀레니얼 세대, X세대와 밀레니얼 세대, Z세대 사이에서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관찰은 어떤가요? 네, 저는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아마 90년대 말이었어요. 그래서 밀레니얼 세대가 직장에 들어오기 전이었죠. 그건 꽤 오래된 일이에요. 지난 25년 동안 제가 보았던 건, 베이비부머와 X세대, 그리고 저는 X세대에 속해요, 이들은 일에 열심히 헌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반면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잠깐, 제 삶이 조금 더 조화롭게 유지되기를 원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크죠. 그래서 저는 젊은 세대가 일과 휴식의 리듬에 대해 더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반대 방향으로도 흘러갈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이 스펙트럼 양쪽 끝에는 모두 실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면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살지 못하게 되고, 반대로 너무 많이 휴식을 취하다 보면 아예 일하지 않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이건 또 다른 종류의 문제일 수 있죠. 그래서 이 연속체의 양쪽 끝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가 창조된 목적과는 부조화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더 자주 일을 많이 하게 되는 경향이 있어서, 이 휴식의 리듬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해요. 네. 감사합니다. 당신의 연구에서 또 하나 드러나는 주제는 협력과 일종의 공유 접근 방식이에요. 당신의 책들이 공동 집필된 점은 제가 눈치채지 못할 수 없었어요. 저는 공동 집필과 개인 집필 모두로 책을 썼는데, 공동 집필은 어떤 면에서는 더 어려워요. 하지만 당신은 이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공동 집필을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는 당신의 일에 효율성과 즐거움을 더해주는가요? 즉, 모든 걸 혼자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죠. 모든 걸 혼자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는 나중에 다루겠지만, 일에 있어 개인주의를 피하고 더 집단적인 접근 방식을 원하는 당신의 욕구와 관련이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연구와 공동 집필을 하려는 욕구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네. 저는 이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1996년에 짧은 이야기가 있어요. 오래 전 일이었지만, 저는 첫 번째 학문적 직책 면접을 받고 있었어요. 면접 위원 중 한 분은 나중에 동료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위원회에 속해 있었죠. 그분은 제 이력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어요. 이력서는 학문적 용어로는 CV라고 해요. 제가 그때 발표한 모든 논문이 공동 집필된 걸 알아차리셨죠. 그분은 "당신이 정말 이 일을 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했고 당신은 그 성과를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라고 물으셨어요. 저는 솔직히 말해, 이건 꽤 오래 전 일이었고, 당신은 참 인내심이 있었겠네요. 그분이 그 말을 직접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질문의 암시는 분명했어요. 내 대답은 이렇게 했습니다. "사실은, 저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제 업무도 더 잘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게 문제라면, 아마 제가 그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문제가 아니었고, 문제가 있다 해도 제가 고용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두 가지 이유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게 더 잘되는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더 즐거워서 에너지와 집중력이 유지되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서로의 사고 속 결점이나 오류를 서로 찾아내기 때문에 결과물이 더 나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아이디어를 나누는 대화를 할 수 있고, 이제는 단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일하는 과정에서 이미 어떤 필터와 평가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더 신뢰할 수 있는 결과물이 됩니다. 네. 저는 이 점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디나. 저는 또한 우리가 미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개인주의적이라는 점을 언급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크와 저는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이렇게 말한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믿음을 나누고, 동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하루 종일 끝나면 교회나 다른 필요한 곳에 약간의 돈을 떼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 웨슬리가 오래 전에 말한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가능한 한 많이 벌고, 가능한 한 많이 주어라." 이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직장에서 기독교인이 되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나누고, 동료들을 잘 대하고, 돈을 아낌없이 쓰는 것을 우리는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보다 더 깊은 것이 있습니다. 시스템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일의 중요성을 보는 것에 대해 당신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지적한 것처럼, 일에서 믿음을 적용하는 방식은 매우 개인주의적입니다. 그리고 이 방식들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제가 말할 것이 이 방식들을 약화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방식들은 중요하고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있는 구조와 시스템이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행동도 형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이러한 구조는 최선이 아닙니다. 때때로 이러한 구조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인적으로 일에서 솔직하고 올바른 일을 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특히 더 넓은 공동체와 더 넓은 구조와 시스템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어야 하며, 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에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지속적인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보게 되고,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제한된 일을 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세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특정 구조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과 함께 단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네. 디나, 이러한 맥락에서, 누군가가 조직에서 일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의 우선순위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당신은 어떤 조언을 드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요? 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결국 당신은 자신만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은 개인적인 행동만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어떤 개인적인 행동이 더 넓은 시스템이나 문화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입니다. 저는 특히 리더십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멈추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에는 내가 일상생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어떤 구조들이 있을까?" 그래서 저는 때때로 멈추고, 성찰하고, 이러한 시스템적 요소들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어보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엇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저는 리더들이 자신이 보여주는 행동이, 만약 모두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어떤 문화를 만들게 될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제가 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어떤 문화가 생기게 될까요?" 우리는 한 권의 책에서 '구현된 돌봄 문화'라는 개념을 다루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이며, 이 돌봄의 습관은 주변 사람들에게 파동처럼 전달되어 영향을 미칩니다. 이 것이 조직에서의 규범이 되면,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시스템이 형성되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인 문화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문화가 됩니다. 당신이 이전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영향력의 레버를 인식하는 데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동을 보여주면 이러한 문화적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웨슬리의 말: 가능한 한 많이 벌고 많이 주라

설교자는 교회 안에서 흔히 듣는 직장 신앙의 방식을 소개합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믿음을 나누고, 동료를 친절히 대하며, 하루를 마친 뒤 교회나 필요한 곳에 돈을 떼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때 웨슬리가 오래전 남겼다고 알려진 말을 떠올립니다. 그 말은 가능한 한 많이 벌고, 가능한 한 많이 주라는 내용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직장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러한 실천에 반대하지 않으며, 믿음을 나누고 동료를 잘 대하며 돈을 아낌없이 쓰는 일을 진심으로 지지한다고 밝힙니다. 다만 그는 이보다 더 깊은 관점이 필요하다고 덧붙입니다. 개인의 행동만이 아니라 일을 둘러싼 시스템과 사회적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인용은 개인주의적 직장 신앙을 돌아보고 구조적 시각으로 넓혀 가는 출발점으로 쓰입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5–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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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답은 이렇게 했습니다. "사실은, 저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제 업무도 더 잘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게 문제라면, 아마 제가 그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문제가 아니었고, 문제가 있다 해도 제가 고용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두 가지 이유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게 더 잘되는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더 즐거워서 에너지와 집중력이 유지되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서로의 사고 속 결점이나 오류를 서로 찾아내기 때문에 결과물이 더 나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아이디어를 나누는 대화를 할 수 있고, 이제는 단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일하는 과정에서 이미 어떤 필터와 평가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더 신뢰할 수 있는 결과물이 됩니다. 네. 저는 이 점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디나. 저는 또한 우리가 미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개인주의적이라는 점을 언급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크와 저는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이렇게 말한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믿음을 나누고, 동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하루 종일 끝나면 교회나 다른 필요한 곳에 약간의 돈을 떼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 웨슬리가 오래 전에 말한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가능한 한 많이 벌고, 가능한 한 많이 주어라." 이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직장에서 기독교인이 되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나누고, 동료들을 잘 대하고, 돈을 아낌없이 쓰는 것을 우리는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보다 더 깊은 것이 있습니다. 시스템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일의 중요성을 보는 것에 대해 당신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지적한 것처럼, 일에서 믿음을 적용하는 방식은 매우 개인주의적입니다. 그리고 이 방식들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제가 말할 것이 이 방식들을 약화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방식들은 중요하고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있는 구조와 시스템이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행동도 형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이러한 구조는 최선이 아닙니다. 때때로 이러한 구조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인적으로 일에서 솔직하고 올바른 일을 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특히 더 넓은 공동체와 더 넓은 구조와 시스템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어야 하며, 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에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지속적인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보게 되고,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제한된 일을 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세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특정 구조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과 함께 단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네. 디나, 이러한 맥락에서, 누군가가 조직에서 일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의 우선순위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당신은 어떤 조언을 드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요? 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결국 당신은 자신만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은 개인적인 행동만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어떤 개인적인 행동이 더 넓은 시스템이나 문화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입니다. 저는 특히 리더십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멈추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에는 내가 일상생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어떤 구조들이 있을까?" 그래서 저는 때때로 멈추고, 성찰하고, 이러한 시스템적 요소들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어보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엇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저는 리더들이 자신이 보여주는 행동이, 만약 모두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어떤 문화를 만들게 될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제가 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어떤 문화가 생기게 될까요?" 우리는 한 권의 책에서 '구현된 돌봄 문화'라는 개념을 다루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이며, 이 돌봄의 습관은 주변 사람들에게 파동처럼 전달되어 영향을 미칩니다. 이 것이 조직에서의 규범이 되면,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시스템이 형성되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인 문화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문화가 됩니다. 당신이 이전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영향력의 레버를 인식하는 데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동을 보여주면 이러한 문화적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장기 질병을 앓는 신앙인들이 말한 교회의 돌봄

설교자는 최근 장기 질병을 앓는 신앙인들과 대화한 경험을 나눕니다. 그는 그들이 참여한 지원 그룹을 함께 돌보고, 도움을 주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얼마나 신경 써 주는지 감사하며 말했습니다. 설교자가 도움이 필요한지 묻자,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하며 교회가 항상 돌봐 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제 그 시스템이 이미 작동하고 있어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새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석합니다. 그는 이 교회가 10년, 20년 동안 그렇게 돌봄을 실천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긍정적인 의미로 전하면서도, 사람들이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느낌을 함께 말합니다. 이러한 돌봄 문화가 자리 잡았기에 자연스럽게 도움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자신이 속한 문화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권합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6–6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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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속한 조직이 기독교 윤리와 일치하는 행동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정도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당신은 빠른 대신 솔직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받고 있습니까? 당신은 항상 솔직합니까? 저는 우리가 일상에서 작은 결정을 내리면서 점차적으로 이상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작은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해 주었는데, 제가 언급한 문제 목록에는 없었습니다. 저는 리더가 늘 감사함을 표현하고, 주변 사람들의 강점을 인정하며, 긍정적이고 치유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조직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지난 몇 시간 동안 저는 장기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신앙인들과 대화했는데, 우리가 그들의 지원 그룹에 참여하거나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얼마나 신경 써 주는지 말하며 감사함을 표현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아니요, 교회가 항상 우리를 돌봐 주고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그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10년, 20년 동안 그렇게 해 왔습니다. 저는 이 말을 긍정적으로 하고자 하는데, 마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느낌입니다. "물론이죠, 이 여인의 남편이 두 해 동안 중병에 걸렸는데 도와줄 수밖에요." 왜냐하면 그러한 문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문화 속에 속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당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개인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가자면, 저는 교회나 회의에서 믿음과 일에 대해 말할 때, 매튜 25장의 말씀을 읽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나는 굶주렸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으며, 벗었을 때 너희가 옷을 입혔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는데, 당신이 농부이든, 트럭 운전사이든, 식료품점에서 셀프를 채우는 사람이라도,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이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제가 이웃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연에 겨우 10번 정도일 뿐입니다. 식품 산업에서 일한다면, 당신은 매일매일 사람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수도공이나 유압 엔지니어라도,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이 일상적인 40~50시간 동안 성실하게 하는 일을 거의 잊고 있다는 사실에 항상 놀라곤 합니다. 이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러분과 마크가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이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빠르게 대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제 친구이자 동료인 엘레인 하워드 에클런드와 함께 진행한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서 1만 5천 명의 사람들을 조사하고 약 300명을 인터뷰했기 때문입니다. 1만 5천 명의 인터뷰는 너무 많았지만,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우리는 사람들이 일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내적 의미, 다른 하나는 외적 의미입니다. 외적 의미는 일 자체가 중요하지 않지만, 그 일을 통해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 사람들이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직장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교회에 기부하는 것처럼, 이는 모두 외적 의미입니다. 일 자체가 이 내용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 점을 경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저는 외적 의미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적 의미, 즉 당신이 하는 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간과하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이 "제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찾아옵니다. 한 번은 강연을 마치고 누군가가 "제 직업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더군요. 저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었고, 그는 은행 부행장이었습니다. 저는 "정말요?"라고 놀랐습니다. 은행은 기업들이 운영되도록 대출을 제공하고, 사람들이 집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는 당신의 일 덕분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의미 있는 활동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디나, 당신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축복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일요일에 듣는 설교에서 그 일을 덮어주는 것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아이디어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강연 후 은행 부행장이 던진 직업의 의미 질문

설교자는 한 강연을 마친 뒤 생긴 일을 전합니다. 한 사람이 다가와 자신의 직업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설교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묻자, 그는 은행의 부행장이라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대답에 놀라 정말이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은행이 기업이 운영되도록 대출을 제공하고, 사람들이 집을 살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을 짚습니다. 그 일은 세상에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활동을 이루는 것이므로, 당연히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이 가진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문제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하도록 돕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사례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의 관찰을 뒷받침하는 장면으로 쓰입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6–6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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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속한 조직이 기독교 윤리와 일치하는 행동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정도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당신은 빠른 대신 솔직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받고 있습니까? 당신은 항상 솔직합니까? 저는 우리가 일상에서 작은 결정을 내리면서 점차적으로 이상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작은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해 주었는데, 제가 언급한 문제 목록에는 없었습니다. 저는 리더가 늘 감사함을 표현하고, 주변 사람들의 강점을 인정하며, 긍정적이고 치유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조직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지난 몇 시간 동안 저는 장기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신앙인들과 대화했는데, 우리가 그들의 지원 그룹에 참여하거나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얼마나 신경 써 주는지 말하며 감사함을 표현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아니요, 교회가 항상 우리를 돌봐 주고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그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10년, 20년 동안 그렇게 해 왔습니다. 저는 이 말을 긍정적으로 하고자 하는데, 마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느낌입니다. "물론이죠, 이 여인의 남편이 두 해 동안 중병에 걸렸는데 도와줄 수밖에요." 왜냐하면 그러한 문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문화 속에 속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당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개인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가자면, 저는 교회나 회의에서 믿음과 일에 대해 말할 때, 매튜 25장의 말씀을 읽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나는 굶주렸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으며, 벗었을 때 너희가 옷을 입혔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는데, 당신이 농부이든, 트럭 운전사이든, 식료품점에서 셀프를 채우는 사람이라도,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이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제가 이웃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연에 겨우 10번 정도일 뿐입니다. 식품 산업에서 일한다면, 당신은 매일매일 사람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수도공이나 유압 엔지니어라도,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이 일상적인 40~50시간 동안 성실하게 하는 일을 거의 잊고 있다는 사실에 항상 놀라곤 합니다. 이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러분과 마크가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이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빠르게 대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제 친구이자 동료인 엘레인 하워드 에클런드와 함께 진행한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서 1만 5천 명의 사람들을 조사하고 약 300명을 인터뷰했기 때문입니다. 1만 5천 명의 인터뷰는 너무 많았지만,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우리는 사람들이 일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내적 의미, 다른 하나는 외적 의미입니다. 외적 의미는 일 자체가 중요하지 않지만, 그 일을 통해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 사람들이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직장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교회에 기부하는 것처럼, 이는 모두 외적 의미입니다. 일 자체가 이 내용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 점을 경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저는 외적 의미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적 의미, 즉 당신이 하는 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간과하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이 "제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찾아옵니다. 한 번은 강연을 마치고 누군가가 "제 직업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더군요. 저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었고, 그는 은행 부행장이었습니다. 저는 "정말요?"라고 놀랐습니다. 은행은 기업들이 운영되도록 대출을 제공하고, 사람들이 집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는 당신의 일 덕분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의미 있는 활동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디나, 당신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축복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일요일에 듣는 설교에서 그 일을 덮어주는 것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아이디어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눈물을 흘리며 식당 일을 언급받았다고 말한 50대 남성

설교자는 식당 일을 예로 들어 설교했던 날을 회고합니다. 그 설교가 끝난 뒤 한 50대의 성공한 남성이 눈물을 흘리며 설교자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교회에서 식당 일에 대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알아봐 주어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늘 군인, 교사, 의사, 과학자만 언급되는 것을 보아 왔다고 덧붙였습니다. 설교자는 그 말에 동의하며, 이 일을 계기로 특정 직업만 강조되는 현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이 장면은 모든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다는 메시지가 실제 사람에게 얼마나 깊이 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순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식당 노동자처럼 주목받지 못한 일터를 설교에서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7–7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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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300명의 일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것 외에도, 이 연구 과정에서 약 50명의 목사를 만났습니다. 목사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배에서 성도들에게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직접 물어보니, “아니요, 저는 예배에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들은 내용과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 사이에 분명한 격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분들이 이 이야기를 듣길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들이 자신의 말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종 목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외부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목사들이 성도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업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일매일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저는 이 격차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질문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리석어 보일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목사가 제 일상적인 직장 생활을 더 잘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믿음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받고 싶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두 그룹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오랫동안 믿음과 직장에 관한 주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저는 목사 중에서도 이 주제에 대해 자주 말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번 식당에서 일하는 것을 예로 드렸던 날을 기억합니다. 50대의 성공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교회에서 식당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저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군인, 교사, 의사, 과학자들만 언급되고, 저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마크도 이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에 방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번 조립 라인에 함께 서서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을 항상 들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놀라울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금속 가공 공장에 들어가서 거대한 기계들이 금속을 눌러 재가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단순히 많은 것을 배웠고 구체적인 예를 얻었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일을 잘못 묘사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약 10~15명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직업을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며, 제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당신은 정확히 맞췄습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다니엘. 하지만 한 가지를 수정하면 더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저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를 위해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네, 다니엘, 제가 방금 말한 세 가지를 좋아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을 방문하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는 모든 사람의 일에 가치가 있다는 중요한 신호임을 느낍니다. 둘째, 저는 이러한 예들을 설교에 사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식당 직원이 눈물을 흘렸던 예는 완벽하게 이점을 설명해 줍니다. 셋째, 저는 사람들이 오류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겸손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며, 저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게 괜찮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질문을 하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데니스, 저는 바쁜 목사로서, 제가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에 만날 것을 권유받는다면, 왜 그게 좋은 생각인지 설명해 주세요. 이 활동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므로, 그 장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약간 불안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승리인가요?”라고 말입니다. 네, 저는 교회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대부분 교회 건물이 아닌, 사람들이 일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교회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직군에 속해 있고, 누구와 상호작용하며, 어떤 기회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방식으로 성도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도들이 성경 말씀과 그들이 하루 또는 밤에 하는 일 사이의 연결을 도와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믿음이 일상 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도움이 됩니다. 믿음은 단순히 “이번 주일에 이 것들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신이 누구신지에 대한 진리를 지적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금속 가공 공장 방문과 교인들의 검증

설교자는 실제 일터를 직접 방문했던 경험을 나눕니다. 한번은 조립 라인에 함께 서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들어왔던 이야기가 실제로는 얼마나 놀라운지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날에는 금속 가공 공장에 들어가 거대한 기계들이 금속을 눌러 재가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일을 잘못 묘사할까 봐 두려워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약 10~15명의 교인을 모아 자신이 그들의 직업을 예로 들어 설명할 테니 틀린 부분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확하게 맞혔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은 잘했지만 한 가지만 고치면 더 믿을 만하다고 수정을 제안했습니다. 설교자는 교인들이 기꺼이 도와주었다고 말하며, 이 과정이 교회 전체를 위한 배움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7–7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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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300명의 일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것 외에도, 이 연구 과정에서 약 50명의 목사를 만났습니다. 목사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배에서 성도들에게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직접 물어보니, “아니요, 저는 예배에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들은 내용과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 사이에 분명한 격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분들이 이 이야기를 듣길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들이 자신의 말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종 목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외부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목사들이 성도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업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일매일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저는 이 격차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질문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리석어 보일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목사가 제 일상적인 직장 생활을 더 잘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믿음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받고 싶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두 그룹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오랫동안 믿음과 직장에 관한 주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저는 목사 중에서도 이 주제에 대해 자주 말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번 식당에서 일하는 것을 예로 드렸던 날을 기억합니다. 50대의 성공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교회에서 식당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저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군인, 교사, 의사, 과학자들만 언급되고, 저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마크도 이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에 방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번 조립 라인에 함께 서서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을 항상 들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놀라울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금속 가공 공장에 들어가서 거대한 기계들이 금속을 눌러 재가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단순히 많은 것을 배웠고 구체적인 예를 얻었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일을 잘못 묘사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약 10~15명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직업을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며, 제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당신은 정확히 맞췄습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다니엘. 하지만 한 가지를 수정하면 더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저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를 위해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네, 다니엘, 제가 방금 말한 세 가지를 좋아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을 방문하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는 모든 사람의 일에 가치가 있다는 중요한 신호임을 느낍니다. 둘째, 저는 이러한 예들을 설교에 사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식당 직원이 눈물을 흘렸던 예는 완벽하게 이점을 설명해 줍니다. 셋째, 저는 사람들이 오류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겸손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며, 저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게 괜찮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질문을 하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데니스, 저는 바쁜 목사로서, 제가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에 만날 것을 권유받는다면, 왜 그게 좋은 생각인지 설명해 주세요. 이 활동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므로, 그 장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약간 불안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승리인가요?”라고 말입니다. 네, 저는 교회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대부분 교회 건물이 아닌, 사람들이 일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교회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직군에 속해 있고, 누구와 상호작용하며, 어떤 기회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방식으로 성도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도들이 성경 말씀과 그들이 하루 또는 밤에 하는 일 사이의 연결을 도와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믿음이 일상 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도움이 됩니다. 믿음은 단순히 “이번 주일에 이 것들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신이 누구신지에 대한 진리를 지적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 설교와 성도들이 듣는 내용의 차이

설교자는 연구 과정에서 약 50명의 목사를 만났던 경험을 전합니다. 목사들은 자신이 예배에서 성도들에게 일에 대해 항상 말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직접 물어보니, 예배에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차이를 통해 목사가 말하려는 내용과 성도가 실제로 듣는 내용 사이에 분명한 격차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목사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며, 그들이 자신의 말이 성도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목사들이 직업의 이름은 알고 있어도 성도가 매일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이 사례는 설교의 전달 방식을 점검하고 성도의 일상 업무를 더 알아야 한다는 근거로 쓰입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7–7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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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300명의 일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것 외에도, 이 연구 과정에서 약 50명의 목사를 만났습니다. 목사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배에서 성도들에게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직접 물어보니, “아니요, 저는 예배에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들은 내용과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 사이에 분명한 격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분들이 이 이야기를 듣길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들이 자신의 말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종 목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외부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목사들이 성도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업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일매일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저는 이 격차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질문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리석어 보일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목사가 제 일상적인 직장 생활을 더 잘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믿음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받고 싶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두 그룹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오랫동안 믿음과 직장에 관한 주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저는 목사 중에서도 이 주제에 대해 자주 말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번 식당에서 일하는 것을 예로 드렸던 날을 기억합니다. 50대의 성공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교회에서 식당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저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군인, 교사, 의사, 과학자들만 언급되고, 저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마크도 이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에 방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번 조립 라인에 함께 서서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을 항상 들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놀라울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금속 가공 공장에 들어가서 거대한 기계들이 금속을 눌러 재가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단순히 많은 것을 배웠고 구체적인 예를 얻었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일을 잘못 묘사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약 10~15명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직업을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며, 제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당신은 정확히 맞췄습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다니엘. 하지만 한 가지를 수정하면 더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저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를 위해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네, 다니엘, 제가 방금 말한 세 가지를 좋아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을 방문하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는 모든 사람의 일에 가치가 있다는 중요한 신호임을 느낍니다. 둘째, 저는 이러한 예들을 설교에 사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식당 직원이 눈물을 흘렸던 예는 완벽하게 이점을 설명해 줍니다. 셋째, 저는 사람들이 오류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겸손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며, 저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게 괜찮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질문을 하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데니스, 저는 바쁜 목사로서, 제가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에 만날 것을 권유받는다면, 왜 그게 좋은 생각인지 설명해 주세요. 이 활동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므로, 그 장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약간 불안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승리인가요?”라고 말입니다. 네, 저는 교회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대부분 교회 건물이 아닌, 사람들이 일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교회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직군에 속해 있고, 누구와 상호작용하며, 어떤 기회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방식으로 성도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도들이 성경 말씀과 그들이 하루 또는 밤에 하는 일 사이의 연결을 도와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믿음이 일상 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도움이 됩니다. 믿음은 단순히 “이번 주일에 이 것들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신이 누구신지에 대한 진리를 지적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호텔 청소부가 말한 아이들의 신발

설교자는 스페인어로 인터뷰한 호텔 청소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그 인터뷰를 직접 진행하지 않았고, 번역된 원고를 읽었다고 밝힙니다. 설교자는 그녀가 방을 깨끗하고 편하게 만들어 피로한 여행객이 쉴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일이 의미 있다고 말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는 일 자체의 내적 의미를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외적 의미로 답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번 돈으로 아이들에게 신발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일이 의미 있다고 말했고,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기를 원하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말을 읽으며 거의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내부에만 집중해 외부의 가치를 잊고 있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의 내적 가치와 외적 가치가 모두 중요하다고 결론짓습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8–8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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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유용합니다. 네, 디나, 이것은 정말 가치가 있습니다. 좋은 인터뷰에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네 가지 질문을 한 번에 묻고 싶습니다. 전부 함께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의 최근 저서인 『더 나은 일』 34쪽에 있는 내용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셨는지 확인하시고, 이는 일에 대한 이해 방법들입니다. 마크와 시청자들이 볼 수 있도록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표는 외부적이고 내부적인 일, 그리고 일터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미 언급하셨지만, 이 아이디어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점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이 표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가지 차원이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일의 본질적 가치와 외부적 가치의 차이입니다. 이에 대해 조금은 언급했었죠. 만약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이 완료하는 업무나 창조하는 제품 자체에서 의미를 얻는다면, 그것은 본질적 가치입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는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돈을 벌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반면,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의 맥락이나 그 일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외부적 가치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번 인터뷰했던 호텔 청소부 이야기입니다. 저는 직접 인터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인터뷰를 진행한 후 저는 번역된 원고를 읽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이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내 일이 의미가 있는 것은 호텔 청소부로서 방을 깨끗하고 편하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로한 여행객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말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는 내부적인 관점에서 일에 대해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부적인 관점이 아니라 외부적인 관점에서 말했습니다. 그녀는 "내 일이 의미가 있는 것은 내가 벌어들인 돈으로 아이들에게 신발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이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기를 원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읽으며 거의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녀의 일이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 내부에만 집중해서 외부의 중요성과 가치를 거의 잊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 중요합니다. 또 하나의 차원은 일터 내부와 외부입니다. 당신의 일이 일터 내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얻는 것인지, 아니면 일터 외부에서 일의 결과가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입니다. 호텔 청소부의 예는 외부적이고 일터 외부에서 의미를 얻는 경우입니다. 일터 내부에서 외향적인 사람은 동료들과 연결되고, 그들에게 믿음을 나누거나 의미 있는 방식으로 지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일터 내부에서 내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잘 사용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일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느낍니다. 일터를 벗어난 외부에서는 당신이 창조한 상품이나 서비스가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브웨이에서 일하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아, 내 일이 정말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일을 하면서 복음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르신 사명을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서브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네, 제가 하는 일은 건강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음식이 항상 쉽게 구할 수 없는 곳에서 전 세계에 걸쳐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회사를 통해 세상을 건강하고 영양적으로 먹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와, 이 일을 통해 세상의 더 큰 이익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정말 멋지네요."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매우 내부적인 관점이지만, 동시에 식당 안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건강한 음식을 먹고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점에서 외부적인 의미도 지닙니다. 네. 디나, 웨이튼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죠. 저는 현재 세대와의 대화를 되돌아보면서, 일부 학생들, 혹은 많은 학생들, 심지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은 일터 내부에서 의미를 얻고, 시장에서 가치가 분명한 일, 즉 "진짜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종류의 일은 "진짜 일"이 아니거나 가치가 낮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인가요, 아니면 제 경험에 한계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네,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부는 발전 단계에 따라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자기 중심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죠.

서브웨이 직원이 말한 건강한 음식의 사명

설교자는 서브웨이에서 일하는 한 남성과 나눈 대화를 전합니다. 그 남성은 자신의 일이 정말 의미가 있다고 말하며, 일을 하면서 복음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처음에 서브웨이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 의외였다고 떠올립니다. 남성은 자신이 하는 일이 건강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건강한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곳에서도 전 세계에 걸쳐 일하고 있으며, 이 회사를 통해 세상을 영양적으로 먹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일을 통해 세상의 더 큰 유익에 기여한다는 생각이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식당 안에서 하는 일에 대한 내적 관점이면서도, 사람들이 건강한 음식을 먹고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점에서 외적 의미도 함께 지닌다고 해석합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8–8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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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유용합니다. 네, 디나, 이것은 정말 가치가 있습니다. 좋은 인터뷰에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네 가지 질문을 한 번에 묻고 싶습니다. 전부 함께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의 최근 저서인 『더 나은 일』 34쪽에 있는 내용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셨는지 확인하시고, 이는 일에 대한 이해 방법들입니다. 마크와 시청자들이 볼 수 있도록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표는 외부적이고 내부적인 일, 그리고 일터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미 언급하셨지만, 이 아이디어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점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이 표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가지 차원이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일의 본질적 가치와 외부적 가치의 차이입니다. 이에 대해 조금은 언급했었죠. 만약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이 완료하는 업무나 창조하는 제품 자체에서 의미를 얻는다면, 그것은 본질적 가치입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는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돈을 벌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반면,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의 맥락이나 그 일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외부적 가치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번 인터뷰했던 호텔 청소부 이야기입니다. 저는 직접 인터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인터뷰를 진행한 후 저는 번역된 원고를 읽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이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내 일이 의미가 있는 것은 호텔 청소부로서 방을 깨끗하고 편하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로한 여행객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말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는 내부적인 관점에서 일에 대해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부적인 관점이 아니라 외부적인 관점에서 말했습니다. 그녀는 "내 일이 의미가 있는 것은 내가 벌어들인 돈으로 아이들에게 신발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이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기를 원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읽으며 거의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녀의 일이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 내부에만 집중해서 외부의 중요성과 가치를 거의 잊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 중요합니다. 또 하나의 차원은 일터 내부와 외부입니다. 당신의 일이 일터 내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얻는 것인지, 아니면 일터 외부에서 일의 결과가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입니다. 호텔 청소부의 예는 외부적이고 일터 외부에서 의미를 얻는 경우입니다. 일터 내부에서 외향적인 사람은 동료들과 연결되고, 그들에게 믿음을 나누거나 의미 있는 방식으로 지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일터 내부에서 내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잘 사용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일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느낍니다. 일터를 벗어난 외부에서는 당신이 창조한 상품이나 서비스가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브웨이에서 일하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아, 내 일이 정말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일을 하면서 복음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르신 사명을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서브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네, 제가 하는 일은 건강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음식이 항상 쉽게 구할 수 없는 곳에서 전 세계에 걸쳐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회사를 통해 세상을 건강하고 영양적으로 먹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와, 이 일을 통해 세상의 더 큰 이익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정말 멋지네요."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매우 내부적인 관점이지만, 동시에 식당 안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건강한 음식을 먹고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점에서 외부적인 의미도 지닙니다. 네. 디나, 웨이튼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죠. 저는 현재 세대와의 대화를 되돌아보면서, 일부 학생들, 혹은 많은 학생들, 심지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은 일터 내부에서 의미를 얻고, 시장에서 가치가 분명한 일, 즉 "진짜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종류의 일은 "진짜 일"이 아니거나 가치가 낮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인가요, 아니면 제 경험에 한계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네,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부는 발전 단계에 따라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자기 중심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죠.

200~300년 쓰이는 좋은 의자와 목수의 봉사

설교자는 나이가 들수록 목수와 대화하는 것의 가치를 더 느끼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책상이나 의자를 만드는 사람을 예로 들며 이 비유를 설명합니다. 좋은 책상이나 의자는 200~300년까지 쓰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목수는 단지 손으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수십 년 뒤에도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셈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세상을 향한 봉사와 공동선을 위한 일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는 이 주제가 자신의 책에서도 다뤄졌다고 덧붙입니다. 이 비유는 일이 눈앞의 결과에만 머물지 않고 장기적으로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로 제시됩니다.

데니스 데이니엘스 · 2026-10-21

설교 내 9–9문단 · 예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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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르심은 무엇인가요?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내가 가진 기술은 무엇이며, 그것들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이 질문을 경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하고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외에도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목적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대학생들이 이 문제에 대해 다소 단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괜찮고,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시야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유용한 시각입니다. 그리고 저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망설이지만, 나이가 든 후에는 예를 들어 목수와 대화하는 것의 가치를 더 깨닫게 됩니다. 책상이나 의자를 만드는 사람 말입니다. 좋은 책상이나 의자는 200~300년까지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단순히 손으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봉사합니다. 결국,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수십 년 뒤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 외부적인 측면, 즉 세상을 향한 봉사, 공동선을 위한 봉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는 당신의 책에서 다루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주제를 다시 언급하고 싶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일』이라는 책이 작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분야에는 많은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의 이전 발언과는 어느 정도 반대되는 시각도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가 성스럽고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허물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 일을 하고 계시고, 이 책에서 그 점을 다루고 계십니다. 목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선교사는 하나님을 섬기며, 교사나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쓰레기 수거기사나 IT 제품을 마케팅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분을 허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좋은 일, 즉 정직하고 사람을 발전시키는 일은 어느 정도 성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반응이 있습니다. “신학자들, 저는 당신을 비공식적으로 신학자라고 부르겠습니다. 당신들은 성스럽고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허물고자 너무 열심입니다.” 이제 더 이상 목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 평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도 ‘나는 삼 년을 희생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이 분야에 들어가겠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당신이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저는 현재, 웨이턴 대학에서 성경과 신학 연구 석사 과정을 반 이상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는 일을 하기 위한 신학적 기초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석사 학위는 필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데니스 데이니엘스 박사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적 기초가 중요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순수 기독교 사역 분야로 진로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그룹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 그리고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몸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모든 유형이 필요합니다. 쓰레기 수거기사도 필요하고, 목사도 필요하며, 마케팅 인력도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기술과 재능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여할 수 있습니다. 데니스, 당신의 체계를 생각해 보면, 목사들은 보통 내부적인 업무 공간에 머무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외부적인, 일과 무관한 영역에 대해 전혀 듣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구조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내면적인 것을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높이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을 줍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목사들이 일터를 방문하면, 그들의 일 외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즉, 목사들의 일터가 교회라면, 그들의 일의 목적은 교회 외부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얼마나 실현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다른 맥락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도 함께 해야 합니다. 이 대답은 마음에 듭니다. 좋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책에서 여러 번 다루는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가도 될까요? 이는 마크에게는 더 흥미로울 수도 있지만, 저는 질문을 준비했으므로 물어보고 마크가 추가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일은… 저는 사람들을 어느 방향으로 부드럽게 유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을 건설적으로 밀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몇 번에 걸쳐 기독교인들이 때때로 직장에서 박해받거나 침묵당한다고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당신은 철저한 연구를 진행하셨고,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침묵을 강요받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서양 문화의 많은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특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