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58개 · 3 / 3쪽 · 한 쪽 20개
사과나무 씨의 비유
설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총명이 왜 자연스럽게 선행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과나무 씨의 비유를 듭니다. 그는 먼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점을 짚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주신 지혜가 사람의 마음에 심기면, 그 사람이 행하는 행동도 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사과나무 씨를 심으면 사과나무가 자라 사과가 맺히는 일에 견줍니다.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가 마음에 심기면 하나님의 성품인 선하심이 드러나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선행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지혜와 선행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김성헌 · 2026-10-20
설교 내 6–6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총명은 자연스럽게 선행으로 도출됩니까? 바로 지혜를 주신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인간의 마음에 심겨지면 당연히 그 인간이 행하는 행동은 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과나무 씨를 심으면 사과나무가 자라 사과가 맺히듯이,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 심겨진다면 하나님의 성품인 선하심이 드러나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선행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깨끗한 물에 든 먼지의 비유
설교자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첫째로 성결하다는 말씀을 붙잡습니다. 시간이 짧아 성결함만 다루겠다고 밝히며, 성결함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지 않은 상태라고 풀이합니다. 그는 청중에게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안에 먼지가 떨어져 있으면 성결한 물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그는 성결하지 않다고 단호히 답합니다. 이 비유를 따라 하나님께 받은 지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끼어들 수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기적인 마음, 시기심, 경쟁심, 정치적인 야망이 섞여 들어간다면 그것은 성결한 지혜가 될 수 없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가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지혜에 불과하다고 규정합니다. 결국 작은 자기 욕심이라도 섞이면 지혜의 순수함이 흐려진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김성헌 · 2026-10-20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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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공동체를 더욱 단단히 하나님의 지배로 결속시키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우리 공동체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경험하게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하고 받은 그 지혜가 여러분들을 더욱더 하나님과의 다스림에 단단히 결속하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기도를 통해 받은 지혜, 말씀의 묵상과 예배를 통해 받은 지혜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계속적으로 수용하고 발생시키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계속 보면요. 15절에 이러한 진단을 합니다. 14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독한 시기는 너무 강한 경쟁심, 시기심이 심한 상태예요. 그리고 두 번째 다툼은 이기적인 야망입니다. 당파심이죠.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중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중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적인 마음과 경쟁심, 그리고 이기적인 야망과 당파심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그때 야고보는 어떻게 진단을 하냐면, "자랑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당연하죠,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다 자랑입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어떠한 일이 생깁니까? 진리를 대항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여서 거짓말합니다. 거짓을 만들기 위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일이 그 당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규명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늘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다. 여러분, 여기에 나온 모든 내용을 다 다루기에는 이 새벽의 시간이 짧기 때문에 성결함에 대해서만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성결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그 안에먼지가 떨어져 있으면 성결한 물입니까? 성결하지 않습니다. 성결하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 시기심, 경쟁심, 나의 어떤 정치적인 야망이 모든 것이 다 들어간다면 그것은 성결한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지혜에 불과한 것이죠. 결과적으로 18절 말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여러분, 18절에 화평에 대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 전까지는 지혜에 관한 말씀이었어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에 대한 권면의 말씀과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인지 분별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면, 지금 18절에는 화평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일까요? 갑자기 왜 화평에 대한 주제가 등장할까요? 우리가 17절 말씀을 보면 선한 열매가 등장합니다.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라고 했는데, 18절에는 "화평으로 심어 어떠한 열매를 거둡니까? 의의 열매를 거둔다."라고 합니다. 선한 열매가 있어요. 그리고 의의 열매가 있습니다. 여러분, 선한 열매는 결과적으로 개인이 얻는 열매입니까? 공동체가 얻는 열매입니까? 개인이 얻는 열매예요. 우리가 17절 말씀을 보았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이것은 한 개인에 해당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 이것은 개인일까요? 공동체일까요? 공동체예요. 왜냐면 의의 개념을 좀 봐야 되는데요. 의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법정적 선언으로 구약의 말씀에선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재판장 앞에 두 사람이 나와서 자신을 변호했어요. 재판장이 듣고 "네가 맞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구약 시대에서는 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의의 열매"라고 했을 때, 이 의는 무엇이냐면, 야고보서 안에서의 의는 공동체 안에서의 공정성, 신실성을 의미했어요. 한마디로 공동체 안에서 공정하고 신실함에 대해서 재판정이 "네가 옳다"라고 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민수기 12장 말씀을 보았던 것처럼, 모세와 아론과 그리고 미리암이 왔을 때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재판장 대신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의 손을 들어 주신 것, 그것은 곧 누가 의롭다라고 선언하신 겁니까? 모세가 의롭다라고 선언하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에서 지혜가 더 큽니까? 화평이 더 큽니까? 여러분, 물론 두 개념 다 너무 중요하죠. 이 특징 다 너무 중요해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지금 야고보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화평이에요. 화평. 하나님으로부터 한 개인이 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해요. 이것을 잘 분별해서 이게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잘 판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한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발생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화평은 뭐 무엇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무엇입니까? 그 공동체 안에서 "네가 옳다"라고 인정받는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공동체 안에 각자의 개인의 삶에 가득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공동체 안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더 많아지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여러분들의 가정에 여러분들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시길 축원드려요. 우리 교회 안에 화평하게 하는 자, 피스메이커, 화평하게 하는 자. 우리 팀 안에, 우리 목장 안에, 내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시는 이 아침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화평에 대해서 말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면요. 이미 예수님께서 화평을 심는 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말씀, 우리 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맡긴다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화평을 심으셨어요. 어디서 심으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심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을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이 아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특권을 인식하고, 다시 한번 우리가 삶에서 화평을 심는 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고, 여러분들이 가져 나온 기도의 제목을 두고 기도하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시겠습니다. [음악] 기도하시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설교자는 마태복음 13장의 밀과 가라지 비유를 들려줍니다. 좋은 씨를 뿌린 농부의 밭에 사람들이 잠든 사이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잡초를 뿌리고 갔습니다. 밀이 자라 곡식이 맺히자 잡초도 함께 드러나고, 종들이 그 출처를 묻습니다. 농부는 원수의 짓이라고 답하며, 뽑다가 밀까지 뽑힐 수 있으니 함께 자라게 두라고 말합니다. 추수 때에 잡초를 먼저 거두어 태우고 밀은 곳간에 모으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근거로, 의인과 불의한 자가 함께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인내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의 목적과 계획을 따라 일하고 계심을 강조합니다.
아론 라이트 · 2026-10-20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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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순종하는 것이 부름받은 것이다. 왜 자신이 있을 수 있는 다른 곳을 갈망하겠는가? 만약 내가 여기 있었다면, 혹은 누군가 이전에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상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지금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아는가? 당신이 충성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분은 모든 적을 제거하신 후에 다스리시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적들 속에서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우리가 수없이 보았듯이, 죄인들의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세상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아니다, 주님은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적들을 친구로 전환시키신다. "왜 이렇게 오래가는가? 왜 주님은 악함이 계속되는 것을 허락하시는가? 왜 악을 행하려는 자들이 번영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전도서의 저자가 했던 것이다. 우리가 보는 귀곡수화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현재의 상황이 왜 그러한지를 상기시키신다. 우리가 주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거스르려 하지 말고,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적들을 친구로 전환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각자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당신은 하나님의 적이었다. 바울이 말했듯이, 당신은 불의하게 걷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생명을 주셨다. 마태복음 13장 24절은 이러한 비유를 들려준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려주셨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가 하면, 좋은 씨를 밭에 뿌리는 농부와 같다. 그런데 모두가 자고 있는 동안, 그의 적이 와서 밀 사이에 잡초를 뿌리고 갔다. 밀이 자라나고 곡물이 맺히자, 잡초도 나타났다. 농부의 종들이 와서 물었다. ‘주님, 당신께서는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까? 그런데 잡초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농부가 대답했다. ‘적의 짓이다.’ 종들이 물었다. ‘우리가 뽑아내면 되겠습니까?’ 농부가 대답했다. ‘아니다. 뽑을 때 밀도 뽑을 수 있다. 둘 다 함께 자라도록 하라. 추수할 때 내가 수확인들에게 말할 것이다. 먼저 잡초를 줍고, 묶어서 태우고, 밀은 내 곳간에 모으라.’" 우리는 지금 주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보고 있다. 의인과 불의한 자가 함께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며, 불의한 자들을 의인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왜 그분이 모든 일을 하지 않는가? 그분은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자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고 계신다. 다니엘의 삶에도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으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의 적들 속에서도 주권적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았다. 이 시편을 계속 읽어 나가면서도 우리는 그분의 주권적인 통치를 계속 보게 될 것이다. 결국 모든 이가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될 것이다. 세상 모든 곳의 모든 이가 결국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될 것이다. 이 생애에서는 저항할 수 있지만, 결국 모든 이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을 것이다. 바울은 필립보서 2장 5절에서 이를 상기시켜 준다. 그는 말했다. "그러한 마음을 너희 안에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형체를 띠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셨다. 오히려 자신을 비워내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사람처럼 보이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높이시고, 모든 이름보다 높은 이름을 주셨으니,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자가 예수의 이름을 듣고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예수는 주님이심을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시며, 주권적인 주님이시다. 우리가 여기서 보았듯이, 그분은 자신의 적들 속에서도 통치하신다. 바울은 모든 이가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쓴 글을 감옥에서 썼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에 있었지, 이 세상의 편안함이나 권위, 부, 힘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 이루신 일을 통해,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임을 보았다. 우리 죄를 자신에게 지시고, 믿는 자들에게는 그 죄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셨으며,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다. 주권적인 주님이시며, 자신의 적들 속에서도 통치하신다. 이 주님의 통치와 왕권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왕이 어디서 왔는지, 그분의 근원과 힘을 본다. 그분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오셨으며, 육체를 입으셨다. 그분은 백성을 대표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그분의 왕국과 통치는 끝이 없다. 하늘과 땅의 한 치도 그분의 주권적인 통치를 받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고 그분은 고통, 아픔,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백성을 위한 선을 이루시며, 자신의 적들 속에서도 통치하신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온 서신의 비유
설교자는 스데반이 성전을 파괴했다는 고발을 설명하면서, 스데반의 행위가 로마인들이 성전을 무력으로 부순 방식과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고발자들은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제사, 모세, 그리고 모세를 영감하신 하나님에 반대하는 모독으로 추론했다고 설교자는 설명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들이 성취에 내재된 파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설교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오면 서신이 파괴되는 방식과 같다는 비유를 듭니다. 설교자는 옛 형식이 새 현실 앞에서 역할을 마치는 것을 이 비유로 드러내며, 스데반이 파괴한 것도 바로 그런 성격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옛 형식이 새 현실 앞에서 효력을 잃는다는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설교자는 성전과 제사 체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뒤 역할을 마쳤다고 말하며, 옛 형식 자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현실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덧붙입니다.
존 파이퍼 · 2026-10-20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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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든 말을 옳게 했다면, 그들은 모든 말을 옳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테판이 거룩한 장소와 율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고, 그의 말이 11절에 보면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모독적인 말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성전이 파괴될 것이다'는 말을 들었고, 이에 대해 '그는 제사, 모세, 그리고 모세를 영감하신 하나님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모독이다'라고 추론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추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틀렸습니다. 왜 틀렸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성취에 내재된 파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행에 내재된 파괴를요. 스테판이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방식처럼 성전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스테판이 파괴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오면 서신이 파괴되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파괴하신 것은 해가 뜨면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가로등이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드리겠습니다. 이 비유는 성경적이기도 하고 가장 유용합니다. 메시야가 오고 있다면, 지금 제 손은 메시야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 빛이 여기 있습니다. 아마 이 빛들로도 할 수 있겠지만, 만약 이 빛이 하나님께서 메시야, 즉 제 손에 대한 확증과 축복의 빛이라면, 메시야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오시고, 이 빛이 그분을 인정하며 비추시면 그림자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과 모세 율법의 계명들에서 우리가 보는 그림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미래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메시야께서 오시면 그 그림자는 작아지고, 메시야께서 그 그림자를 밟을 때 사라집니다. 그분은 그림자를 파괴하시지만, 그 모양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고 세대를 세대를 거쳐 축복을 가져다 준 그 모든 것을 미워해서도 아닙니다. 성전, 제사장, 제사, 영광의 중심이 파괴된 것은 바로 이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이 나타나고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원치 않을 때만 두려운 것입니다. 그림자만 가지고 놀고 싶을 때 말입니다. 새 언약에서도 단지 종교의 형식만 가진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그들은 능력이나 현실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마무리하며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형상만 가지고 놀지 마십시오. 우리의 형식조차도 놀지 마십시오. 우리의 형식은 여기 있습니다: 조명, 건물, 건축가, 의복, 예배 순서. 형식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사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사장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믿고, 쉬고, 받아들이고, 아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분은 제 희생자이십니다. 제 유일한 대제사장, 중보자, 변호자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맛보았고, 저는 만족합니다.
해가 뜨면 헤드라이트가 꺼지는 비유
설교자는 그리스도께서 성전의 목적을 완성하셨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해가 뜨면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가로등이 꺼지는 장면을 듭니다. 밤에는 헤드라이트와 가로등이 길을 밝히는 역할을 하지만, 해가 떠오르면 그 빛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스데반이 말한 파괴의 성격과 연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파괴하신 것은 강제로 부수신 것이 아니라, 본래 가리키던 실재가 나타나면서 옛 빛이 역할을 마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구조를 통해 성전과 제사 체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끝났다고 말합니다. 빛이 나타나면 이전의 빛이 의미를 잃는다는 논리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성전의 시대가 끝났음을 이해하도록 돕는 예로 제시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0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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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든 말을 옳게 했다면, 그들은 모든 말을 옳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테판이 거룩한 장소와 율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고, 그의 말이 11절에 보면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모독적인 말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성전이 파괴될 것이다'는 말을 들었고, 이에 대해 '그는 제사, 모세, 그리고 모세를 영감하신 하나님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모독이다'라고 추론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추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틀렸습니다. 왜 틀렸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성취에 내재된 파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행에 내재된 파괴를요. 스테판이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방식처럼 성전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스테판이 파괴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오면 서신이 파괴되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파괴하신 것은 해가 뜨면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가로등이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드리겠습니다. 이 비유는 성경적이기도 하고 가장 유용합니다. 메시야가 오고 있다면, 지금 제 손은 메시야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 빛이 여기 있습니다. 아마 이 빛들로도 할 수 있겠지만, 만약 이 빛이 하나님께서 메시야, 즉 제 손에 대한 확증과 축복의 빛이라면, 메시야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오시고, 이 빛이 그분을 인정하며 비추시면 그림자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과 모세 율법의 계명들에서 우리가 보는 그림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미래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메시야께서 오시면 그 그림자는 작아지고, 메시야께서 그 그림자를 밟을 때 사라집니다. 그분은 그림자를 파괴하시지만, 그 모양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고 세대를 세대를 거쳐 축복을 가져다 준 그 모든 것을 미워해서도 아닙니다. 성전, 제사장, 제사, 영광의 중심이 파괴된 것은 바로 이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이 나타나고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원치 않을 때만 두려운 것입니다. 그림자만 가지고 놀고 싶을 때 말입니다. 새 언약에서도 단지 종교의 형식만 가진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그들은 능력이나 현실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마무리하며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형상만 가지고 놀지 마십시오. 우리의 형식조차도 놀지 마십시오. 우리의 형식은 여기 있습니다: 조명, 건물, 건축가, 의복, 예배 순서. 형식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사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사장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믿고, 쉬고, 받아들이고, 아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분은 제 희생자이십니다. 제 유일한 대제사장, 중보자, 변호자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맛보았고, 저는 만족합니다.
손 그림자로 보는 메시야와 그림자 비유
설교자는 손을 메시야에 빗대는 비유를 듭니다. 메시야가 오고 있다면 지금 자신의 손이 메시야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메시야가 아직 땅에 오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빛이 하나님께서 메시야에 대한 확증과 축복의 빛이라면, 메시야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오시고 빛이 그분을 인정하며 비출 때 그림자가 땅에 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성전과 모세 율법의 계명들에서 보는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듯 우리는 미래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고, 메시야께서 오시면 그 그림자는 작아지며 그분이 그림자를 밟으실 때 사라집니다. 설교자는 그분이 그림자를 파괴하시는 것이 그 모양을 싫어하셔서가 아니라 현실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림자만 붙잡지 말고 현실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0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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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든 말을 옳게 했다면, 그들은 모든 말을 옳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테판이 거룩한 장소와 율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고, 그의 말이 11절에 보면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모독적인 말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성전이 파괴될 것이다'는 말을 들었고, 이에 대해 '그는 제사, 모세, 그리고 모세를 영감하신 하나님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모독이다'라고 추론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추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틀렸습니다. 왜 틀렸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성취에 내재된 파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행에 내재된 파괴를요. 스테판이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방식처럼 성전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스테판이 파괴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오면 서신이 파괴되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파괴하신 것은 해가 뜨면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가로등이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드리겠습니다. 이 비유는 성경적이기도 하고 가장 유용합니다. 메시야가 오고 있다면, 지금 제 손은 메시야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 빛이 여기 있습니다. 아마 이 빛들로도 할 수 있겠지만, 만약 이 빛이 하나님께서 메시야, 즉 제 손에 대한 확증과 축복의 빛이라면, 메시야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오시고, 이 빛이 그분을 인정하며 비추시면 그림자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과 모세 율법의 계명들에서 우리가 보는 그림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미래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메시야께서 오시면 그 그림자는 작아지고, 메시야께서 그 그림자를 밟을 때 사라집니다. 그분은 그림자를 파괴하시지만, 그 모양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고 세대를 세대를 거쳐 축복을 가져다 준 그 모든 것을 미워해서도 아닙니다. 성전, 제사장, 제사, 영광의 중심이 파괴된 것은 바로 이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이 나타나고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원치 않을 때만 두려운 것입니다. 그림자만 가지고 놀고 싶을 때 말입니다. 새 언약에서도 단지 종교의 형식만 가진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그들은 능력이나 현실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마무리하며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형상만 가지고 놀지 마십시오. 우리의 형식조차도 놀지 마십시오. 우리의 형식은 여기 있습니다: 조명, 건물, 건축가, 의복, 예배 순서. 형식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사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사장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믿고, 쉬고, 받아들이고, 아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분은 제 희생자이십니다. 제 유일한 대제사장, 중보자, 변호자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맛보았고, 저는 만족합니다.
훼손된 스코틀랜드 성에 빗댄 인간의 상태
설교자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아름답지만 훼손된 옛 성들을 비유로 듭니다. 길을 따라 꺾어지면 그 성들이 장엄하게 서 있지만, 그것은 과거 영광의 증언이자 기념일 뿐 온전한 모습은 아닙니다. 설교자는 이 성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 빗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어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그 아름다움이 훼손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흔적, 하나님의 친절과 아름다움의 흔적이 남아 있고, 사람들은 깊은 마음속에서 자신이 폐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엉망이라고 느껴 삶의 성을 수리하려고 합니다. 정원을 가꾸고 커튼과 외부 장식을 붙이며 예전처럼 보이려 하지만, 설교자는 그것으로는 작동하지 않으며 작동할 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내 삶의 성에 머무르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내부의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새 삶, 새 탄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적용하며,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새 태생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인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0
설교 내 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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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어린이들을 곳곳에 날려 보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매우 날카로운 유머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때로는 유머도 없이 단지 산만함만 남았습니다. 저는 이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한 번은 수업 중에 어떤 불쌍한 아이가 서게 되었고, 맥패디언 선생님은 그 아이의 목에 머리가 아니라 당근이 달려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위더스푼, 가상의 이름이지만, 네 목에는 당근이 달려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이제 위더스푼, 네가 목에 무엇을 달고 있는지 반에 말해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반에 "친구들, 제 목에는 당근이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이 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파이프 연주자에게는 큰 치료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초등학교 생활은 영원히 그 이름으로 남게 되었고, '당근 머리'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맥패디언 선생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 여러분, 이 일이 팀오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저는 그가 어깨를 살짝 곧게 펴고, 자신이 어린 나이에 겁이 많고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세우려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 신분에 대한 적용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날 남녀,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단지 용액 속에 떠다니는 화학물질의 조합에 불과하다고 믿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실로 사소한 것입니다. 삶이 궁극적으로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소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은 신분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를 들어 시편 139장을 읽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어머니의 배 속에서 섬세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께서 목적 있게 설계하셨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이 진리를 인식하고 아침에 일어나며 "나는 단지 성장한 유전자들의 집합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이 점에서 나는 가치가 있다. 나는 폐기물이 아니다. 쉽게 버려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본질적으로 무관심한 존재도 아니다. 나는 나만의 지문을 가지고 있고, 나만의 DNA를 가지고 있다.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나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분의 계획 속에서, 순간순간, 나의 삶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셨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이는 진화론을 받아들여 자신을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희망도 없고 도움도 없는 이 세상을 방황하는 삶과는 얼마나 큰 차이인가요. 이제 새 창조의 경이로움을 더해보면, 이는 얼마나 큰 기적이겠습니까?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이전에 사용했던 비유를 다시 한 번 사용해 보겠습니다. 스코틀랜드에는 아름다운 성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저는 여러분을 만나면서 여러분의 조상들이 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저는 그 점에 대해 기쁩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은 모두 결혼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에는 여러분 모두가 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가끔 솔직한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들은 더 이상 그 영광을 빛내지 못합니다. 길을 따라 꺾어지면 그 성들을 보게 되고, 그 장엄함에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훼손된 장엄함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장엄함에 대한 증언이자 기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성을 보고 "이 성이 과거의 영광을 가졌다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제, 훼손된 성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남녀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만드셨지만, 그들 안에는 본질적인 결함이 있었고, 이로 인해 그 건물은 해체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던 그 아름다움은 결국 인간의 죄로 인해 훼손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의 삶을 바라보면, 우리는 그 안에 하나님의 흔적, 하나님의 친절의 흔적,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자신 안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깊은 마음속에서 "나는 폐기물이 아니다. 나는 단지 용액 속의 화학물질이 아니다.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하지만 나는 엉망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의 성을 수리하려고 노력하고, 약간의 정원을 가꾸고, 커튼과 직물, 외부 재단을 붙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예전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작동할 수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가 나의 삶의 성에 머무르고,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결코 이룰 수 없는 내부에서의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새 삶, 새 탄생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새 태생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워즈워스의 천둥새에 비유된 사도 바울
설교자는 에베소서 3장 12절을 풀면서 바울이 가장 높은 교리를 전하면서도 발은 땅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바울을 워즈워스의 천둥새에 빗대어, 하늘 높이 날면서도 신앙과 실천의 두 극단에 충실했던 사도로 그립니다. 바울은 용어를 즐기는 지성주의자가 아니었고, 그의 목적은 언제나 실천적인 결과에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교리 지식이 기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며, 교리와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교리만 쌓고 실천이 없는 것과 실천만 말하며 교리를 무시하는 것을 모두 경계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0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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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주로 마음과 지성에 대한 것입니다. 당신은 이 것을 마음과 지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나 교리나 신학—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습니다. 교리, 이 용어들 중 하나라도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단지 그 자체로, 끝이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이는 당신이 인식하고, 마음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논의하고, 말하고, 토론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 이것이 그 데까지 끝난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이 것이 오히려 저주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며, 실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보고 있는 이 구절은 그 점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이 사람이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인도하고, 가장 깊은 교리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도, 그 목적은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확신 있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점이 저에게 늘 마음과 영혼을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위대한 사도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만큼 높은 교리를 전하면서도, 그 발은 항상 땅에 단단히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워즈워스의 천둥새처럼 하늘과 집, 즉 신앙과 실천의 두 극단에 충성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단순한 이론적인 신학자도 아니며, 단지 용어들을 즐기며 떠벌리는 지성주의자도 아닙니다. 물론 그는 그런 것도 하지만, 그의 목적은 항상 실천적인 결론과 결과를 위한 것입니다. 즉, 당신의 교리 지식이 기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아는 것이 많을수록, 기도 생활이나 거룩한 삶, 다른 모든 면에서 더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결코 단순한 교리나 신학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서신서의 시작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교리가 나옵니다만, 그 서신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적용하고, 당신이 어떻게 삶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반영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3장의 처음 11절은 결국 12절로 이어지며, 그 12절은 강력하고 중요한 진술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이 문제의 다른 측면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교리는 실천적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인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당신의 그리스도인 삶이 풍요롭지 않다면, 당신이 교리를 알고 있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은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이 둘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오직 교리만을 관심 있게 다루며, 그것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그들의 삶이 거룩하고 성결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들의 마음은 교리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말하겠죠. "그건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말만 하고 토론만 하죠. 우리는 실천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친구여, 당신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은 비판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 둘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교리 없이 실천은 불가능하며, 실천 없이 교리는 진정한 실천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균형을 항상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어야 하며,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는 실천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에베소서 1, 2, 3, 4장은 읽지 않고 4장 중반쯤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합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4장 중반에서 끝내고 끝까지 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찬가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에베소서 3장의 12절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다시 말해, 사도는 이 에베소인들에게 이 놀라운 진리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전에는 이방인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 세상에서 희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복음으로 인해 그들은 이제 성도들과 함께 유업을 나누는 자가 되었고, 유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구성원이 되었으며, 위대한 약속들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사실을 기뻐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확신 있게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에 비유한 확신
설교자는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을 예로 듭니다. 도움을 주던 사람의 손이 떨어진 첫 순간에는 누구나 주저하고 불확실하지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혼자 거리를 달리고 언덕을 오르며 내리막도 걱정 없이 내려올 수 있게 됩니다. 설교자는 이 자신감이 반복된 경험의 결과이며, 연설자가 처음의 긴장을 지나 점점 자신감을 얻는 모습도 같다고 덧붙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과 확신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결론이라고 적용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접근권 안에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0
설교 내 3–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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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그들에게 기뻐하게 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전에는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성전의 의식과 제사 그리고 대제사장 등을 통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멀어져 있던 자들이 가까이 다가왔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유대인들이 늘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목적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늘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의 최고봉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 구원의 모든 축복 중에서도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부 사항을 다루기 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담함과 접근권을 얻었노라'는 말씀에서 '우리'라는 말을 주목해 주세요. 즉, 제가 말하려는 것은 사도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생활에 전념한 특정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진리의 영광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고에서 영원히 버려야 할 것은 가짜이고 성경적이지 않으며, 사실은 죄악적인 이원론입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 교리에서 자주 보는 것처럼 신도와 평신도로 나누는 것은 말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구분이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사도요, 너희는 이전에 이방인이었으나, 우리는 모두 함께 하나님께 대담함과 확신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이제 이 진리를 실생활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해 볼까요? 당신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기도 생활의 성격은 어떤가요?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 각자에게 일어나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때 어떤 느낌인지 말해달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기도를 즐기십니까? 자유롭게 느끼십니까? 확신이 있습니까? 안정감이 있습니까? 기도할 때 어떻게 지내십니까? 당신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당신의 기도 생활은 어떤 생활입니까? 사도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기독교 기도는 대담함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교 기도입니다. 이제 이 두 단어를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대담함'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두려움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불안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기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악의 감각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대담함은 어떤 형태의 억제나 두려움도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용감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는 바로 앞으로 걸어갑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강력한 적이 있어도, 용감한 사람은 가슴을 펴고,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걸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대담함'의 본질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억제도 없습니다. 억눌림을 느끼지 않으며, 주저하거나 의심하거나 불확실하지 않습니다. 대담함은 바로 그런 모든 것의 반대입니다. 첫 번째 단어는 '대담함'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접근권'입니다. 이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만약 편하게 말하자면, 이 단어는 '입장권' 또는 '입장의 기회'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표현을 씁니까? '저는 거기 입장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죠.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지만, 저는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입장을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입장을 위한 특권, 즉 허가를 받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집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접근권'의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가 그분께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확신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접근권'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이 단어는 이전 단어와 거의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장을 위한 권리, 즉 입장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사도는 이 단어를 이전에 이미 사용한 바 있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이 단어는 2장 18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확신'이라는 단어를 덧붙입니다. 보세요, 사도는 이 진리를 전달하려는 데 매우 신경 썼습니다. 마치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중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도는 이걸 강조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진리를 배우는 데 얼마나 느리게 반응하는지 알고 있었고, 기도에서의 실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강조하고 반복하며, 또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확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확신은 어떤 과정의 끝에 오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당신이 무언가를 해왔고, 그 과정의 결과로 지금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을 상상해 보세요.
도움을 주던 사람의 손이 떨어진 첫 순간, 당신은 주저하고 불확실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감을 얻게 되고, 이제 거리에서 혼자 걸을 수 있고, 모퉁이를 돌고, 언덕을 오를 수 있으며, 내리막길도 걱정 없이 내려올 수 있게 됩니다. 자신감은 과정의 결과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처음에는 긴장하고 주저하지만, 그 일을 반복할수록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연사는 처음 말을 시작할 때 긴장할 수 있지만, 몇 마디를 말한 후에는 긴장이 사라지고 자신감을 얻습니다. 누군가가 말할 수 있습니다. "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감을 얻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겪은 과정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결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접근권 안에서 자신감과 용기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제 당신은 성경 전서를 찾아 기도에 대해 살펴보세요. 어디에서나 항상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이 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입니다. 당신은 기도에 대해 말할 때, 이 외의 다른 것이 진정한 기도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는 용기와 접근, 자신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0장에서 본 바로 그 예시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 자신감을 얻고, 용기를 얻으며, 심지어 심판의 날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제 이 접근 방식은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기도에 대해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두 번째 원리로 이어집니다. 바로 이 접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즉 이 용기와 자신감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는 이 구절에서 두 번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용기와 자신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보다 더 강조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그분이 믿음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또는,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인해 용기와 자신감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완전히 생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명백한가요? 이는 신약성경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은 오직 주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라 오는 자는 누구든지 죽지 아니하리라." 이에 사도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한 분뿐이시니, 곧 사람 그리스도 예수시니라." 그분이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 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항상 그분 안에서,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기도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있습니다. 세상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사람들의 지혜가 끝나갈 때마다 "기도는 어때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어때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꺼이 그렇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은 오직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일을 이루신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이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다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신 자기에 대한 묘사를 떠올려 보세요. 그분의 거룩함, 영원함, 위엄, 능력을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분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삼키는 불입니다. 친구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교육이나 가르침에 의해, 하나님께 대한 쉽게 접근하는 친밀함이 영성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도록 유도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옛 언약하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모든 그런 지시를 주셨을까요? 왜 그들은 성막을 짓고 나중에는 성전을 지어야 했을까요? 왜 그 안을 여러 구역과 구획으로 나누었을까요? 왜 그 안에 "가장 거룩한 곳"이라는 이름의 내부 공간이 있었을까요?
버킹엄 궁전 방문에 비유한 그리스도의 중보
설교자는 버킹엄 궁전에 아무렇게나 들어가 여왕을 만나려는 사람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 사람은 곧 쫓겨나고 어쩌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죄인을 하나님께 소개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뿐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방문 카드에 서명하셨고, 이 서명만이 천국의 권위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죄의 깊이나 지난 삶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카드와 피의 서명을 가졌다면 천국 문이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누구든지 용감하게,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메시지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0
설교 내 6–6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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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은 상태에서도, 수치 속에서도, 죄악 속에서도 우리는 용감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자비를 받고 때에 맞는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왕립궁전인 버킹엄 궁전에 아무렇게나 들어가서 여왕을 만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는 곧 쫓겨날 것이며, 어쩌면 감옥에 가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이 아무 준비 없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을 소개해 주는 자는 오직 한 분뿐입니다. 당신의 방문 카드를 서명해 주는 자도 오직 한 분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이 자신의 피로 카드에 서명하셨고, 이 서명만이 천국의 권위자들에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누구이든, 어떤 상태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어떤 죄악의 깊이에서 왔든, 평생을 오물 속에서 기어다녔든, 그분의 카드와 피로 쓰인 서명을 가졌다면 천국의 문은 당신에게 열려 있습니다. 당신은 용감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 비유한 성령의 역사
설교자는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예로 들어 성령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아기가 나올 때 엄마가 힘을 주어 낳는 것처럼, 성령께서 힘을 주어 영적인 존재를 태어나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사람의 노력보다 성령께서 한 사람을 그 세계로 밀어 넣으셔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설교자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이 아기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던 법과 전통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의 역사를 믿고 기대하며 어린아이처럼 배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새 출발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적용도 덧붙였습니다.
이바울 · 2026-10-19
설교 내 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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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고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사람의 나라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나라죠. 그런 나라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리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주는 물은 여기서 여기서 이 물이라. 물리적 물이지만 비유한다면, 야곱이 주는 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주는 물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사람이 주는 칭찬, 인정, 사랑 속에서 결국 사람들은 서로를 요구하죠. 서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이해받기를 바라지만, 사람의 것을 받으면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사람의 칭찬을 받기 시작하면, 칭찬은 좋긴 하지만 그것에 매여 버립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정을 먹으면 그 하나로 충분합니다. 다른 걸 필요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의 칭찬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예수님의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 사람의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어떤 사회가 있을까요? 사람에게 매여 있으면 결국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정 속에 살아가면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각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가 큽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요한복음 5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 되었음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가 고치겠느냐? 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때에 나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먼저 내려가라. 베데스다 못가에서는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나옵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경쟁이 필수입니다. 예전에 한때 포요가 있었는데,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고치셨나요? 제일 꼴찌에 있는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꼴찌가 1등이 되게 한 것입니다. 꼴찌의 반란이라는 말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가장 뒤쳐진 사람을 오히려 가장 앞세울 수 있는 세계입니다. 준비는 많이 했지만 다다라지 못한 사람도, 내놓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는 다릅니다. 사람이 사람의 나라에서만 살면, 밀리기 시작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자기 존재와 가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무가치한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38년 된 병자처럼 가장 낮게 보이는 자라도 가장 먼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각자가 자기 삶을 살도록 해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성령이 주체가 되어 성령의 존재를 낳는 것입니다. 아기가 나올 때 누가 나옵니까? 엄마가 나와야 합니다. 엄마가 힘을 주고 아기를 낳습니다. 성령이 힘을 주어 영적인 존재를 태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이 노력하기보다는, 성령이 한 사람을 하나님의 세계로 밀어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믿고 기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니고데모에게는 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법과 전통을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살아온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태어나면 그것들은 모두 없어지고, 완전히 새로 출발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로 완전히 새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세계를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림을 받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항상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새롭게 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그대로 고집하거나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항상 아기처럼, 모르는 것을 알고 배우는 태도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출발점입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모험 소설이나 영화처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가던 길로 가는지, 모험을 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복음 3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나라와 땅의 나라가 있지만, 결국 사람의 나라는 경쟁 사회이고, 1등만 기억하는 세계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뒤쳐지는 그런 세계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가장 뒤쳐진 자가 가장 먼저 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세계와 땅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 영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시 찾아오시고, 성령이 주체가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역사를 이루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풍성하며 생명을 얻으며 사랑을 알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은혜가 풍성하도록 축복하여 주소서. 각 사람에게 항상 말씀이 임하시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의자 뒤에 서 있는 설교자의 예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대 뒤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예를 들어, 능력만으로는 실제 행위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누군가 그가 왜 의자 뒤에 서 있는지 묻고 '그냥 서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면, 그 대답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론적으로 그는 많은 의자 뒤에 설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이 예를 아담의 죄에 적용합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이유를 죄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만 답한다면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죄의 필수 조건이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니라고 정리합니다. 그는 이 질문이 실제 선택의 원인을 묻는 것임을 분명히 하며, 가능성과 실제를 구분하는 논증으로 제시합니다.
제임스 도레잘 · 2026-10-19
설교 내 20–20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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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동성은 타락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며, 타락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자체를 타락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보세요, 아담은 죄를 지었습니다. 스포일러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죄의 결과 아래 태어났습니다. 아담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담이 왜 죄를 지었을까요?"라고 묻고, "그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시겠습니까? 만약 그가 죄를 지을 수 없었다면, 실제로 죄를 지을 수 없었겠죠. 저는 이 가능성이 죄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이 이야기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중요합니다.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죄를 지을 수 있는 필수 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마이클과 가브리엘, 그리고 라파엘이라는 천사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죄를 지을 수 있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실제로 죄를 지을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저는 이 설교대 뒤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델이 왜 의자 뒤에 서 있나요?"라고 묻고, "그냥 서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단순히 서 있을 수 있다는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저는 많은 의자 뒤에 서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묻어야 할 질문은,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이 그가 죄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네, 그렇지만 이는 충분한 인과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투렛의 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는 단지 신이 무죄한 인간을 창조한 상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선택받은 천사들이 확증을 받기 전에도 결점 없이 존재했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투렛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시겠습니까? 천사들은 확증을 받기 전에도 죄를 지을 수 있었고, 이는 결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경우에도 결점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는 어떤 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창조물 속에 내재된 선의 부정이나 확정이 아닙니다. 신은 아담에게 처음부터 확증된 의로운 뜻을 주지 않으셨을 의무는 없었습니다. 신께서 아담에게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의로운 뜻을 주지 않으셨다고 해서, 신이 아담을 통해 잘못하셨거나, 아담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쁘거나 더럽거나, 심지어 죄를 지으려는 성향이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부당한 것이었고, 자연 상태에서 필요한 완전성을 빼앗아 가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자연 상태에서 필요했던 만큼 완전했습니다. 네, 심지어 "매우 좋았다"고 기록된 상태였고, 변할 수 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투렛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변동 가능성 자체, 즉 존재에 적합한 상태와, 변동 가능성의 행위, 즉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경향 사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변질은 나쁜 것이지만, 변덕스러움은 아닙니다. 첫 번째로, 변동 가능성은 악으로 기울일 수 있는 힘이지만, 아직 기울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실제 변질은 악 자체에 대한 실제 경향성을 의미합니다. 만약 아담이 타락 전에 반대 선택의 능력을 갖지 않았다면, 신이 죄의 작자가 되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의 의미가 아담이 자연적으로 악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악으로의 경향성은 신이 그 즉각적인 원인과 작가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 지음은 자연적인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아담이 왜 죄를 지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의 죄가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타락은 자연적으로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자유 선택, 도덕적 책임, 그리고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반대 선택의 능력은 도덕과 관련해서는 사람의 도덕적 삶의 시작보다 끝에 더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임스 토른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인간에게 자신, 즉 신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 헌법을 주셨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악의 본질과 결과를 선과 대비시켜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듯이요. 만약 사람이 선을 선택한다면, 그 선은 그 사람 안에 확립됩니다. 그것은 뜻 깊이 뿌리내려서, 그 뜻이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확증입니다. 만약 사람이 악을 선택한다면, 그 악도 그 사람의 뜻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 됩니다. 그 악은 "e"가 되고, 그 사람은 종이 되어 다시는 자신의 내면에서 선을 뜻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영적 선이나 그것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다시 일어난다면, 그것은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전에 의무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이는 아담이 이행해야 할 세 번째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선택의 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포함했습니다. 이 사명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을 포함했습니다. 원래 에덴의 낙원에서 인간은 아직 도착점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번식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땅을 정복하고, 동물들을 다스리고, "e"를 지키며, 정원을 가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 외에도, 이 장들에서 명시되지 않은 자연법의 다른 모든 요소들에 대해서도 아담은 의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구름 같은 중력 비유와 원인 설명
설교자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설명을 물리 현상의 예로 보여줍니다. 그는 물체가 방 안을 떠돌지 않는 이유를 중력의 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질량이 큰 물체가 다른 물체를 끌어당기는 궤도 안에 있다면 떠돌지 않는다는 식의 설명입니다. 설교자는 이런 대답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지적하는 정당한 답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그는 아담이 왜 죄를 지었는지 묻는 질문에도 같은 기대를 품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자연적, 필수적, 법적 설명을 찾으려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답을 시작할 수 있지만, 죄 자체는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에게 죄는 불법이며 미친 짓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그의 뜻이 행한 선택이었고, 그 안에 하나님을 떠나는 힘이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제임스 도레잘 · 2026-10-19
설교 내 24–25문단 · 예화 11
본문 발췌 보기
이제 항상 등장하는 질문은 "왜", "어떻게"입니다. "왜"라는 질문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곧, 죄의 원리나 죄의 무지가 본성에 없고, 죄의 경험도 없으며, 죄의 습관도 없고, 죄의 원리도 없고, 신체적 부패도 없으며, 새 Testament에서 바울이 말한 육체적 원리가 정신과 싸우는 것도 없는 존재가 어떻게 죄를 지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오직 옳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의로움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죄를 지을 때까지 의로웠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그가 어떻게 죄를 지었는가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그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사실이지만, 왜 자유의지가 이 선택을 했는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이 질문을 묻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백에서, 제2단락에서 제3단락으로의 전환, 즉 죄의 상태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자가 죄의 상태로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 이 질문입니다. 그 죄인은 의로웠습니다. 그는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이클과 그의 천사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창조물입니다. 네, 그는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의 의로움, 기울어짐, 통치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하나님으로 계셨습니다. 제 짧은 대답은, 나는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조심하고 싶습니다. 저는 짧은 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늘 저녁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저는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포인트입니다. 저는 때때로 "왜"라는 질문을 할 때 우리가 찾는 것은 이 사건을 일으킨 필수적이거나 최소한 충분한 원인 설명입니다. 그래서 저는 방 안을 떠돌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답은 중력의 극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질량이 있는 물체가 다른 질량이 있는 물체를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 궤도 내에 있다면, 질량이 더 큰 물체는 더 큰 중력 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래서 저는 방 안을 떠돌거나 떠돌지 않는 것이고, 이로써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것은 그 경우에 정당한 답입니다. 제가 시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말하자면, 당신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지적한 것입니다. 저는 방 안을 떠돌지 않는다는 결과를 요구하는 원리이며, 이것이 당신이 "왜 당신은 방 안을 떠돌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킵니다.
사실 우리가 "왜"라는 질문을 던질 때는, 우리가 묻는 일에 대해 충분하고 심지어 필수적인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아담에게 돌리면, "아담이 왜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아담의 죄에 대해 자연적이고 필수적이며 법적인 설명을 찾는다면, 물리학, 화학, 생물학, 혹은 인간 행동의 어느 정도까지라도, 특히 죄의 원리가 있을 때는, 우리는 실제로 그 질문에 답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자체, 즉 죄인도 아니고 타락하거나 부패하지 않은 상태에서 죄를 지은 선택은 불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설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죄가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불법이라면, 죄에 대한 법적 설명을 찾는 것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저는 죄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는 합리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창조의 미친 정점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바가 있다면, 죄에 대한 이 불법적인 것은 아담의 뜻입니다. 이 선택은 그가 한 것이었고, 그 안에는 실제로 하나님을 떠나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그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의 뜻이 바로 그가 죄를 지은 힘이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가 왜 그 특정한 선택을 했는지 저는 합리적인 답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합리적이었다면, 어떤 원리에서 논리적으로 따르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죄는 미친 짓입니다. 죄는 불법입니다. 그러나 이 힘은 인간에게 주어졌고, 그는 그것을 실행했으며, 아마 변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변이가 되었고, 아마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주 나쁜 일, 즉 진정한 죄가 되었습니다.
프리즘과 흰빛의 비유
설교자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흰빛과 같은 하나의 본질로만 보였다고 설명합니다. 빛이 여러 색으로 나뉘는 모습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지닌 다양한 색상과 그 안의 숨겨진 영광은 그들에게 낯설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다양한'이라는 단어를 암시하면서 이 비유를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교회를 빛의 경로에 놓인 프리즘에 비유하며, 흰빛이 스펙트럼의 색상들로 나뉘듯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다채로운 지혜가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교회가 없었다면 천사들은 빛과 지혜를 보았더라도 그 안의 모든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이 지혜의 영광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교회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를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는 매개체라는 원칙으로 제시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19
설교 내 9–10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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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이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가서 자식들을 낳고, 이삭을 통해 목적을 이루고, 이삭을 통해 야곱을 통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에서를 통해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세요.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에서가 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닙니다. 야곱이었습니다. 에서는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냥하는 사람, 건강하고 힘찬 사람입니다. 그는 보기에도 멋진 사람이었고, 이처럼 집에만 있는 야곱과는 달랐습니다. 항상 어머니 곁에 있는, 불쌍한 타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야곱을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목적의 펼침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보여 주신 것은 바로 의로운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가장 나쁜 것을 선택하시고, 그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만드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큰 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바로와 그 군대를 적홍해에서 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으로 다시 데려오셨고, 이후의 역사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의 대단한 드러남을 지켜보았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사도가 말하길,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이는 내가 맡은 메시지와 교회가 생겨난 결과로, 하늘에 있는 이 권세들과 권병들이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알고 있었지만, 그 다양성을 몰랐습니다. 그 지혜의 다양한 성격, 즉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색상들을 몰랐습니다. 그 본질은 알고 있었지만, 사도의 논리는 이겁니다. 천사들, 이 권세들과 권병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다양하고, 더 다채로운 것이며, 그 안에 있는 색상들 중 일부는 그들이 전혀 몰랐고, 그 안에 숨겨진 영광들 중 일부는 그들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학교에서 항상 살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있습니다. 사도는 이 단어 '다양한'을 암시하면서 이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가 진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지혜의 빛, 흰빛이 스펙트럼의 색상들로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빛이 구성 요소들로 분해되었죠. 그들은 단지 흰빛만 보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그늘과 색상, 하나님의 다채로운 지혜를 보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저는 두 번째 원칙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교회가 바로 이 지혜가 드러나는 매개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보세요. 교회는 빛의 경로에 놓인 프리즘과 같습니다. 그 흰빛을 스펙트럼의 색상들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리스도교 교회의 개념입니까? 저는 말입니다, 교회가 없었다면, 천사들은 빛을 볼 수 있었고, 지혜를 볼 수 있었지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지금 그것을 보게 되었습니까? 프리즘이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입니다. 천사들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의 영광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교회라는 매개체를 통해입니다. 이제 이는 우리가 결코 잡고 깨달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그리스도교 교회는 세상이 지금까지 보았거나 앞으로 보게 될 가장 놀라운 것입니다. 이 주장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교 교회입니다. 자연 속의 어떤 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연의 경이로움에 관심이 많습니다. 수십 마일을 여행해서 보려고 합니다. 스위스로 가서 높은 산들을 보려고 합니다. 미국으로 가서 그랜드 캐니언을 보려고 합니다. 놀라운, 멋진, 흥미진진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걸 보기 위해 많은 돈을 씁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경관을 보고 얼마나 놀라운지 말합니다. 사도의 주장은 이겁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 교회와 비교하면 무의미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교회에 모여 있는 것과 비교하면 말입니다.
누가복음 8장 씨 뿌리는 비유
설교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믿음을 떠나게 하는 예로 누가복음 8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소개합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밭에 나가 씨를 뿌렸는데, 일부는 길가에 떨어져 새가 먹고, 일부는 돌 위에 떨어져 곧 시들고, 일부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자라다가 질식당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자세히 풀지 않겠다고 밝히며, 청중이 개인적으로 더 깊이 연구하도록 이끌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며 이 비유를 해석하신 점을 상기시킵니다. 설교자가 전하는 해석에 따르면,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듣지만 삶의 염려, 부, 즐거움에 질식당해 익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받아들였어도 세상의 것들이 그 말씀을 막아 열매 맺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연결합니다. 재물에 대한 관심이 말씀의 자리를 점점 차지하면, 처음에 들었던 말씀도 자라지 못하고 숨이 막힌다는 적용입니다. 그래서 그는 청중에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말씀을 질식시키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것을 권합니다. 돈 문제가 단지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열매의 문제라는 점을 이 비유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19
설교 내 4–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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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악의 근본이다.' 그리고 그는 돈을 탐하는 사람들이 믿음을 떠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금이 하나님의 마음을 대체할 때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저는 이 비유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더 깊이 연구하도록 이끌어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씨 뿌리는 이야기를 기억하시겠죠. 씨를 뿌리는 사람이 나가 씨를 뿌리고, 일부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치우고, 일부는 돌 위에 떨어져 즉시 자라났다가 곧 시들어지고, 일부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자라나며 식물을 질식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이 비유를 설명합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만, 그들이 길을 가면서 삶의 염려, 부, 즐거움에 의해 질식당하여 익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숨이 없는 몸에 빗댄 죽은 믿음
설교자는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를 몸의 숨에 빗댑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영혼'은 숨이라는 뜻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만,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살아 있는 몸도 공기와 산소가 외부에서 들어와야 숨을 쉴 수 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창세기의 장면을 연결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을 근거로,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이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된다고 적용합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살아 있는 믿음을 구하도록 권면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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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을 끌어앉는 그런 행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서 세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하나님이 살리시는 믿음입니다. 오늘 21절부터의 말씀을 쭉 보면요. 야고보서는 두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요.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고요. 두 번째는 라합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너무나 유명한 두 인물이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었고, 언약의 약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반면에 라합은 여리코 성에 살던 이방 여인이었고, 기생이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아가던 두 인물을 야고보서는 같은 원리 아래 뒀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살펴볼까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완성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죠. 일례로,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였던 사라를 어떻게 합니까?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 23절을 한번 볼까요?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드러내십니까? 창세기 22장의 말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이었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장면을 통하여서 그 행함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의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어서 신이 얻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9절의 말씀인데요. 이 말씀 우리 한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웃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아브라함은 계산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으면 얼마나 슬플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계산에 하나님을 넣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지 않습니다. 숨겨주지 않습니까? 그 숨겨준 사실을 걸리면 죽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이유에 대해서 라합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요. 여호수아 2장 10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것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온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아멘. 라합이 고백합니다. 모든 일들을 다 본 겁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정탐꾼들에게 합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의 행함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게 되죠.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자신의 누를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족보, 그리스도의 족보에 하나님께서 올려두게 됩니다. 이 모든 스토리에 대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 뒤에 우리가 이 믿음이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먼저 행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우리 함께 다 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행함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향한 큰 행함과 순종을 행할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나의 믿음이 살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믿음이 죽어 있는 것 같다'라는 주저함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 오늘도 무릎 꿇고 나아가며 기도하는 그 복된 걸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기꺼이 순종할 때에 그 순종하는 삶 위에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2장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몸은 스스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몸은 숨을 쉬지요. 그러나 그 공기와 산소 역시도 외부로부터 들어올 때에 숨을 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에, 사람이 비로소 살아났던 것처럼, 죽어 있던 우리의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생기와 숨과 성령을 불어넣으실 때에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시간, 그 믿음의 고백 위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모든 이의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어제 또 많은 순간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시면서, 전심으로 한 명, 한 명, 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이미 나에게 주신 그 부요함을 베풀어내는 은혜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같이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 믿음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 제목 가지고, 또 우리가 가지고 온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다가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복된 예배에
가게 손님을 대하는 두 가지 시선
설교자는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가게를 하는 상황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이웃이 가게에 찾아와 물건을 사 갈 때, 그저 구매자의 관점으로만 그분을 보지 말라고 권합니다. 늘 와 주어 고맙다는 단골의 관점에만 머물지 말라고도 합니다. 설교자는 교회 안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이 예배당 울타리를 넘어 이웃에게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게에 찾아오는 이웃을 여러분의 자식을 대하듯, 형제자매를 대하듯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사랑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예화는 가족 안에서 배운 본능적인 사랑을 교회 밖으로 확장하라는 적용으로 쓰입니다. 설교자는 적절한 관계나 좋은 거래 관계에만 머물지 말라고 거듭 당부합니다. 가게라는 일상의 자리가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현장이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선은 대가나 결과를 따지지 않는 본능적인 사랑의 시선입니다. 설교자는 이웃을 손님 이상으로, 가족을 대하듯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요청합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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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예배당의 울타리를 넘어서 여러분에게 이웃들을 대할 때, 여러분의 이웃을 그냥 적절한 관계성으로 좋은 관계 안에서만 만나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의 피부지들을 대하는 눈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고 사랑하는 것이 성경이 기대하는 사랑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가게를 하는데 그 가게를 이웃들이 찾아와서 뭔가 물건을 사가면, 그저 구매자의 관점으로만 그분을 보지 말고, 단골이 되어서 늘 와 주는 게 고맙다 하는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여러분의 자식을 대하듯이,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들을 대하듯이 이웃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사랑이라는 거예요.
끓다가 냄비가 터지기 직전인 물에 빗댄 열심
설교자는 11절의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을 짚습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물이 버글버글 끓어 냄비가 터지기 직전인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상태를 '열심'으로 해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물이 끓어 터지기 직전과 같은 열정이 생긴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열심이 사랑을 하는 일에 정말 중요하다고 덧붙입니다. 이 열심은 기질이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 내는 기적 같은 요소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 열심이 육신을 따라 인간의 방법으로 나오면 쉽게 공로주의에 빠진다고 경고합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은 남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방향으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열심이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로 나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또한 열심은 방향이 매우 중요하며, 방향이 잘못되면 많은 해를 끼치고 사랑이기보다 폭력이 될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주님을 향해 제대로 향할 때, 주님을 섬기는 연장선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성경이 원하는 바른 열심이 있는 사랑이라고 결론짓습니다.
화종부 · 2026-10-18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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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존중하기를, 상대의 훌륭함과 귀함을 인정하면서 그를 귀하게 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 봐가면서 평가하고 나서 그렇게 하지 말고, 사랑은 우리 같은 사람을 주님이 죄로 다 망가지고 일어선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주님이 필요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필요도 모르고 있던 그때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처럼, 사람들을 존중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지나가야겠어요. 사랑은 11절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게으르다는 것은, 오늘 해야 될 것을 내일로 연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해야 될 것을 지금 하지 않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늘 뭘 붙이나요? 어느 날 한꺼번에 기적같이 일어날 사건을 기대하면서 오늘 나의 게으음을 계속해서 딜레이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은 반드시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구분이 되시죠? 그죠? 바른 사랑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연기하고 미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주실 때, 사랑을 위한 기회로 선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죠?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깁니다. 여러분, 여기 ‘열심을 품고’ 하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물이 버글버글 끓어서 남비가 터지기 직전인 상태입니다. 그게 열심입니다. 물이 그냥 불에서 벌펄벌펄 끓어서 남비가 이제 더 이상 감당이 안 될 만큼 터지기 직전의 상태를 ‘열심’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여러분, 열심은 여러분이 사랑을 하는 일에 정말 중요합니다. 그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냥 물이 끓어서 터지기 직전인 상태와 같은 열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기질이 어떤 건가,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요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만약에 여러분의 육신적인 열심이면, 열심은 있기는 있는데 육체를 따라하는 열심이면, 여러분은 굉장히 쉽게 공로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에는 정말 열심이 너무너무 있게 되는데, 여러분 육체를 따라 인간의 방법으로 하는 열심은 자주 공로주의에 빠져서 남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제목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게 아니라 어떤 열심입니까?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로 열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죠? 사랑은 열심을 다하도록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열심은 방향이 너무 중요해요. 열심히 방향이 잘못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죠? 그런데 이 열심에 사랑은 열심을 드러내게 되는데, 어떤 방향을 가지고 주를 섬기는 방향을 가지고 열심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여러분과 저에게 가르치는 사랑입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사랑이기보다 폭력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주님께로 향해서 사랑이 딱 제대로 향하고 있을 때,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사랑이 되어 죽게 하듯이 주님을 섬기는 연장선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정말 성경이 원하는 바른 열심이 있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다음 빨리 보고 싶어서 서둘러 온 것 같아요. 여러분, 저는 이 본문 묵상할 때 12절이 너무 좋았어요. 여러분, 12절 앞에 ‘사랑은’ 붙여서 12절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사랑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쓴다.’ 여러분, 사랑을 세 가지로 12절은 소개해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 사랑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환난 중에 참는 것입니다. 그죠? 항상 사랑은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12절은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 주변을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 주로 뭘 가지고 좋아해요? 현재를 가지고 좋아합니다. 현재 지금 일어난 어떤 일, 지금 뭔가 바라든 일이 성취된 지금을 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원하는 대로 됐는데 안 기쁠 사람이 누구가 있겠어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랑은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여러분을 넘어뜨리고, 여러분을 낙심시키고, 여러분들이 그만하고 싶도록 만들고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만두지 않고, 낙심해지지 않고, 소망을 딱 붙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행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뭡니까?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이미 시작한 그 위대한 놀라운 주님의 일을, 우리 몸에까지, 우리의 전 인격에까지 그 놀라운 일을 다 드러내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여러분과 제가 최선을 다해서 뭔가를 사랑함으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너무 돌아오지 않아서 낙심스럽고 멈추고 싶을 때, 여러분이 이 힘을 다해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들이 여러분을 배반하고 여러분을 낙심시킬 때, 그럴 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다 보시고 계시잖아요.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실 그 주님의 오실 그날을 사모하면서 오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죠?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좀 나쁜 말로 우리의 모든 사랑과 수고를 조롱할 때도, 전혀 섭섭해하지 않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죠? 환난 중에 참는 것. 여러분,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는 뭘 보면 알아요? 환난이 왔을 때 보면 되죠. 그죠? 환난이 딱 오면, 이게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짜 사랑은 참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죠?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할만큼 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참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그 위대한 장에 사랑은 하고, 제일 먼저 뭐가 나왔지요? ‘오래 참는다’가 나왔어요. 그죠? 사랑은 참된 사랑은 참게 됩니다. 포기하거나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그냥 모조품이었으니까 멈출 수 있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참게 하고 견디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믿게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한 번씩 넘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기도의 골방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죠?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아픔을 들으시고, 우리를 들으시는 그 기도의 골방에 항상 힘써서 들어가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죠?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그 자리에, 우리를 아시는 그분의 만짐이 일어나는 그 현장으로 항상 힘써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마지막 두 개 사랑이 있습니다. 그죠? 그게 뭡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익숙한 두 사랑이 나와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 이게 뭡니까? 뭐라고 말하면 될까요? 사랑은 나눔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여러분의 시간을 나누고, 관심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여러분의 재능을 여러분의 것으로만 쓰려고 하지 않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나누고, 여러분의 물질을 나누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누가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울 줄 모르면, 이것이 참으로 믿는 자이겠는가? 너희 사랑이 어디 있느냐? 주님이 반문하시는 것처럼, 사랑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흘려보내고 나누어서, 그들의 아픔을 만지고, 그들의 아픔을 만짐으로 형평케 하고 균등케 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여러분이 보는 것처럼, 정부가 세계의 정부들이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어서 획적인 균등을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제도가 하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해야 되는 사랑과 구별되기 때문이에요. 제도가 만들어서 획적인 평등을 만들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흘려 보내고 나누면서 균등케 하는 이 사랑이 살아나야, 우린 정말 아픔이 해소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랑. ‘나그네를 접대하라.’ 이게 뭐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환대하라입니다. 환대하라. 나은 사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집에 들리면 해괴한 짓을 할지, 정말 성도의 교재를 할지 전혀 검정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불편을 끼치고, 우리의 일상에 일상적인 삶의 리듬을 깨게 만드는 사람인데, 그러기 때문에 못 본체하고 지나가지 말고, 그를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환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 잘 몰라요.’ 하고 뒤걸음질 치지 말고, 처음 봤기 때문에 제 실력이 잘 안 나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누구든지 마음을 활짝 열어서 받아서, 그의 필요와 그의 아픔과 그의 여러 가지 상황이 해소될 수 있도록 사람을 마음을 열고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조국 땅에 오늘 이렇게 많은 아픔과 부르짖음의 핵심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이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오늘 이 시대, 조국 땅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에 제일 핵심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미루지 말고, 오늘 해야 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낯설기 때문에 못 다가간다고 그렇게 자꾸 말하지 말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모든 삶의 자리를 사랑을 행할 현장으로 여기면서, 누가 먼저 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먼저 공경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먼저 존경을 행하는 것이 사랑인 줄 알고, 삐죽되지 않고 뒤걸음질 치지 않고, 이 시대에 이런 보편적인 덤성덤성한 문화에 지지 말고, 피부치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칠 그 사랑을 바로 그 사람에게 적용하면서, 많이 사랑해서, 오늘 이 조국의 아픔이 여러분들의 믿음과 삶의 실천을 통해서 해소되고 극복되고, 정말 따뜻한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조국 사회 되도록,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 되어 주시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