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58개 · 1 / 3쪽 · 한 쪽 20개
빌려 온 뼈로 끓인 수프
설교자는 많은 교회 강단에서 기쁨이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설교자가 자기 주제를 즐거워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말씀을 전했다는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대 교리에는 즐거워할 것이 없어서 아무도 그것을 즐기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하나의 비유로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빌려 온 뼈로 끓인 수프'로 만족해야 하는데, 그 뼈는 엿새 동안 내리 같은 용도로 빌려 쓴 것이라 고기 맛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어젯밤 우리 벗이 이 수프를 생생하게 이야기했다고 언급하며, 이 비유를 통해 생명력 없는 새 교리를 비판합니다. 그에게 참된 양식과 기쁨은 옛 복음에 있습니다. 이 비유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 설교 현장에서 쓰인 구체적인 대비이며, 설교자의 메시지는 옛 복음만이 설교자와 청중에게 기쁨과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8
설교 내 15–1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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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많은 교회 강단에서 기쁨의 요소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기 주제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말씀을 전하는 동안 성령 안에 있었다는 말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십 분 설교보다 이십 분 설교를 더 좋아하고, 두 차례의 저녁 집회를 하나로 합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교리에는 즐거워할 것이 없으므로 아무도 그것을 즐기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어젯밤 우리 벗이 참으로 생생하게 이야기한 그 수프로 만족해야 합니다. 빌려 온 뼈로 끓인 수프인데, 같은 용도로 엿새 동안 내리 빌려 쓴 뼈여서 고기 맛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수프 말입니다.
독이 든 빵과 창문을 여는 장로들
설교자는 원수가 아이들의 빵에 독을 넣었다고 경고했을 때 들었던 반응을 소개합니다. 그가 이 사실을 알리자 어떤 이들은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이 악에 맞서 창문을 열고 아이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쐬어 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설교자는 창문을 여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며 여러 목적에 유익하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독을 넣는 자들을 막지 않은 채 영적 생명을 깊게 하자는 말만 반복한다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한 가지 선한 일을 하면서 다른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며, 독을 막으면서도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생명과 진리와 길 가운데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대신, 각각이 똑같이 중요하고 서로 없이는 어느 것도 바르게 유지될 수 없다는 확신으로 하나가 되자고 적용합니다. 이 이야기는 진리를 소홀히 한 채 경건과 생명만 강조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8
설교 내 29–29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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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들에게 원수가 아이들의 빵에 독을 넣었다고 경고하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런 소식을 들으니 안타깝습니다. 이 악에 맞서기 위해 창문을 열고 아이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쐬어 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쐬어 주십시오. 여러 목적을 이루는 데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독을 넣는 자들을 막으면서 창문도 여십시오. 사람들이 계속 거짓 교리를 전하는 동안에는 그들의 영적 생명을 깊게 하자는 말을 아무리 해도 실패할 것입니다. 한 가지 선한 일을 하면서 다른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생명이 더 중요하다거나 진리가 더 중요하다거나 길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대신, 각각이 똑같이 중요하며 다른 것들 없이 어느 하나도 바르게 유지되거나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는 굳은 확신으로 하나가 됩시다.
숨겨진 보화를 던진 괴팍한 부자
설교자는 한 괴팍한 부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너그러웠지만 몹시 까다롭고 거칠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빚을 많이 진 한 가난한 사람이 그의 집 문 앞을 지나가곤 했는데, 부자는 그가 빚 때문에 몹시 염려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자는 그 채무자에게 무거운 주머니를 던졌습니다. 채무자는 맞아 다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자기를 해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머니를 집어 드니 동전 소리가 났고, 열어 보니 빚을 갚고도 남을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 돈은 당신이 가지시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채무자는 폭행으로 고소하지 않고 그 선물에 감사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섭리에 적용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거친 손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보화를 던져 주실 때가 많은데, 그것은 금보다 귀한 믿음의 시련이라는 형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잠시 입은 멍은 잊히지만 영적 유산은 영원히 남습니다. 고난이 저주처럼 보여도 실은 복으로 찾아온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8
설교 내 55–56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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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너그러웠지만 몹시 괴팍했습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이 그의 집 문 앞을 지나가곤 했는데, 그는 그 가난한 채무자가 빚 문제로 몹시 염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이상한 부자는 너그러운 사람이면서도 잔인하게 행동하여 그 가난한 채무자에게 무거운 주머니를 던졌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에 맞아 다쳤고, 무슨 일인가 둘러보았습니다. 자기를 해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머니를 집어 드니 동전이 짤랑거렸습니다. 열어 보니 빚을 갚고도 남을 만큼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 돈은 당신이 가지시오’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 사람을 폭행으로 고소하지 않고 선물에 감사했습니다.
섭리도 거친 손으로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보화를 던져 주신 경우가 많았습니다. 금보다 훨씬 귀한 믿음의 시련이라는 형태로 주셨습니다. 주님을 찬송합니다. 잠시 입은 멍은 곧 잊히지만 영적 유산은 영원히 남습니다. 어쨌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우리의 일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끊어질 수 없는 교제로 우리는 그분과 결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비용을 계산했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저는 예수님의 낙인 찍힌 종이며, 제 귀는 그분을 위하여 뚫려 있습니다.
파리 끈끈이를 붙이는 브리짓
설교자는 가정부 브리짓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여주인이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브리짓은 파리를 잡느라 바쁘다고 답했습니다. 끈끈이 종이를 샀으니 파리들이 그 위에 붙어야 하는데 저절로 앉지 않아 자신이 직접 붙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복음 전도에 빗댑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만으로는 죄인을 끌어오고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 인간이 고안한 방법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단순하게 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보충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은 그런 끈끈이 종이를 쓰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예화는 비유로 쓰였으며,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복음 자체와 성령의 역사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8
설교 내 65–65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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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설교자들은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듯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만으로는 죄인을 끌어오고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 인간이 고안한 것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복음을 단순하게 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보충물이 필요합니다. 브리짓이 파리를 잡아 죽이느라 아주 바빴습니다. 여주인이 물었습니다. ‘브리짓, 지금 무엇을 하는 거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보세요, 마님. 우리가 끈끈이 종이를 샀으니 파리들이 그 위에 붙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절로 앉지 않으니 제가 붙이고 있어요.’ 저는 그런 끈끈이 종이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썰물을 보고 바다가 마를까 걱정하지 않는 뱃사람
설교자는 노련한 뱃사람의 모습을 들어 복음의 승리를 확신하라고 말합니다. 뱃사람은 썰물이 몇 시간 이어져도 걱정하지 않고, 물때가 바뀌기를 확신하며 기다리며, 밀물은 제때 찾아옵니다. 설교자는 지난 삼십 분 사이에 바위가 드러났다고 해서 바다가 몇 주 동안 계속 빠져 영국 해협의 물이 하나도 남지 않고 프랑스 사람들이 셰르부르에서 걸어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지적합니다. 바다가 그런 식으로 줄어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비유를 신앙에 적용하여, 복음이 무너지고 영원한 진리가 우리 땅에서 쫓겨날 것처럼 말하지 말자고 권합니다. 신자는 전능하신 주님을 섬기므로, 일시적인 썰물 같은 상황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진리의 최종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이 비유는 일시적 현상과 변하지 않는 진리를 구별하는 데 쓰인 설교자의 비교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8
설교 내 86–86문단 · 예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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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썰물이 몇 시간째 이어진다고 걱정하는 노련한 뱃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물때가 바뀌기를 확신하며 기다리고, 밀물은 제시간에 찾아옵니다. 지난 삼십 분 사이에 저 바위가 드러났다고 해서 ‘바다가 몇 주 동안 이렇게 계속 빠지면 영국 해협에 물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고, 프랑스 사람들이 셰르부르에서 걸어올 것이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바다가 줄어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니 아무도 그처럼 유치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복음이 무너지고 영원한 진리가 우리 땅에서 쫓겨날 것처럼 말하지 맙시다. 우리는 전능하신 주님을 섬깁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함
설교자는 교회가 건물에 비유되고, 제국에 비유되며, 가족에 비유된다고 먼저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가 풀어 설명하는 또 하나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그 비유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신부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처음에 읽은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이 말씀을 다시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위하여 신부를 준비하고 계시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 안에서 교회의 모습은 장차 혼인 잔치에서 신랑을 맞이할 신부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이 모습을 조금이라도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 영광스러운 날을 위해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55–55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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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위하여 신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건물에 비유되고, 제국에 비유되며, 가족에 비유됩니다. 그러나 사도가 바로 이 서신의 5장에서 풀어 설명하는 또 하나의 비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신부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읽어 드린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이 말씀을 다시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이것을 보고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양과 어린아이의 비유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끝이 없는 대양에 비유합니다. 대양의 가장자리에서는 어린아이도 물장구를 칠 수 있지만, 중심부 깊은 곳으로 나아가면 가장 거대한 대서양 정기선도 코르크나 거품처럼 작게 보입니다. 설교자는 그것이 끝없이 깊지만 여전히 같은 대양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그는 그리스도인이 처음에는 어린아이처럼 가장자리에서 물장구를 치기 시작하지만, 이 위대한 기도를 함께 살피며 더 깊은 곳으로 인도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 강력한 어구들이 하나하나 깊은 내용으로 가득하여, 몇 마디 말로 다 다루었다고 여기고 넘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멈추어 깊이 묵상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성도의 일이며 의무라고 권면합니다. 위대하고 깊은 진리를 다룰 때에는 오해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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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대한 기도가 쉽게 이해되거나 쉽게 풀이될 수 있다고 가정하거나 그런 척하는 것은 어리석고 헛된 일일 것입니다. 이 기도는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으며, 그렇게 되도록 의도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리스도인의 메시지, 그리스도인의 복음은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대양에 비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대양의 가장자리에서 물장구를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부의 깊은 곳으로 나아가면, 가장 거대한 대서양 정기선도 마치 코르크나 거품 같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그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것입니다. 같은 대양입니다.
앞문으로 쫓겨난 자기 사랑
설교자는 자기 사랑을 집 안에 들어온 존재처럼 비유합니다. 앞문으로 쫓아내도 그것은 뒷문으로 들어오고, 창문으로 들어오며, 굴뚝으로 내려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기 사랑을 버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며 모든 경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정한 싸움은 자아와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혼자서는 그것을 해낼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위한 자리가 생기기 전에는 들어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자기를 버리고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하며, 사랑은 억지로 끌어올릴 수 없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분이 마음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39–39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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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이 다소 어렵고 힘겹게 느껴진다면, 성령의 능력을 기억하고 그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경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정한 싸움은 자아와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제가 단독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앞문으로 그를 쫓아내면 그는 뒷문으로 들어옵니다. 창문으로 들어옵니다. 굴뚝으로 내려옵니다. 어딘가로 들어옵니다. 아, 자기 사랑을 버리는 일의 어려움이란!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위한 자리가 생기기 전에는 그곳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억지로 사랑을 끌어올리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은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인으로서는 너무도 낯선 이 순수한 사랑을 위해 그분이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열 감지기와 비판의 양동이 비유
설교자는 멘토에게 은혜의 불씨를 알아보는 열 감지기가 있다고 비유합니다. 교회는 젊든 오래되었든 완전하지 않지만, 멘토는 그 안에서 새로운 상황에 들어갔을 때 불어서 살릴 수 있는 불씨를 찾아냅니다. 반대로 또 다른 유형의 사람에게는 비판의 양동이가 있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그 양동이는 축축하고 차가운 비판이어서, 그런 사람은 상황에 들어가도 감지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불완전함의 잿더미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불씨는 사그라듭니다. 설교자는 지도자를 훈련하는 사람은 은혜의 불꽃을 향해 따뜻한 눈과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두 태도의 차이가 지도자를 살리느냐 꺼뜨리느냐를 가른다는 메시지입니다.
존 파이퍼 · 2026-10-28
설교 내 6–6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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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경적인 멘토는 은혜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과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과 기쁜 마음입니다. 11장 23절입니다. 상황을 아실 겁니다. 스데반의 박해 이후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이 교회는 이교도의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연합을 확보하고 몸을 보존하기 위해 누군가를 그곳에 보내야 합니다. 누구를 보내야 할까요? 한 사람이 응답합니다. 바나바입니다. 그는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그를 보내자. 그래서 바나바가 떠나고, 그의 사역은 놀랍도록 성공적입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많은 사람이 주님께 더해졌습니다. 그러나 23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 때 기뻐했습니다. 그는 보았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은혜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과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교회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젊은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래된 교회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멘토에게는 열 감지기가 있습니다. 멘토에게는 열 감지기가 있고, 그것을 세밀하게 조정하여 새로운 상황에 들어갔을 때 불어서 살릴 수 있는 은혜의 불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양동이가 있습니다. 비판의 양동이입니다. 축축하고 차가운 비판입니다. 그들은 상황에 들어가지만 감지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잿더미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함의 잿더미입니다. 그래서 불씨는 사그라듭니다. 지도자를 훈련하는 사람들은 은혜의 불꽃을 향해 따뜻한 눈과 기쁜 마음을 가집니다. 제가 아는 이 은사의 가장 좋은 예는 필리핀 민다나오의 일리간 시에서 우리 선교사로 섬기는 밥 에스플린입니다. 그녀는 이전에 여기 와 있었고, 노엘과 저는 그저 놀라서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본 것을 이 여성에게서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직 모든 것을 제대로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은혜의 표지를 알아보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고방식을 복음 전도자, 설교자, 선교사들 사이에서 흔한 것과 대비해 보겠습니다. 그녀에게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고정된 채 보고, 그들의 특성 속에 얼어붙은 것처럼 보는 그 정적인 위기의 사고방식이 없어 보입니다. 무언가 극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그래야 그들이 회심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방식입니다. 이건... 그녀가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그 대안은, 이것을 설명할 말을 찾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것일 것입니다.
그늘 속으로 물러나는 정비사 비유
설교자는 바나바가 바울이 점점 앞서 나가면서 자신은 희미해지는 모습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 모습은 명성을 얻는 조종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항공기 정비사와 같다고 말합니다. 정비사는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뒤에서 일하지만, 주목은 조종사에게 돌아갑니다. 설교자는 바나바가 바울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이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자신의 자리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태도가 드러나는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지도자를 세우는 사람이 얼마나 겸손하게 뒤로 물러서는지를 적용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8
설교 내 11–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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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바나바는 점점 희미해지고, 바울의 그림자가 그를 감싸기 시작합니다. 마치 명성을 얻는 조종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항공기 정비사처럼 말입니다.
뚝을 넘지 않게 하는 물
설교자는 고난을 파도에 비유합니다. 고난이 와도 파도처럼 계속 밀려오고, 또 왔다, 또 왔다 하며 거듭 닥쳐와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들으면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뚝 끝까지 차올라 찰랑거리고 난리를 쳐도 다시 내려가면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뚝을 넘으면 홍수가 나고, 뚝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면 사고가 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물이 뚝을 넘지 않게만 하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환난이 와도 다시 가라앉을 수 있다는 적용을 전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44–44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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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어떤 환난이 와도 고난은 파도 같은 거예요. 저 또 왔다, 또 왔다, 또 왔다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물이 말이죠, 뚝을 넘지 않게 하기만 하면 돼요. 뚝을 넘으면 홍수가 납니다. 물이 뚝 끝까지 왔다가 막 찰랑거리고 난리를 쳐도 다시 내려가면 돼요. 근데 이 뚝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면 사고가 나요.
태양 빛과 하나님을 바라봄
설교자는 태양을 비유로 들어 하나님의 본성을 설명합니다. 태양빛으로 사물을 보면서도 태양 자체는 너무 강렬해 똑바로 바라볼 수 없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들여다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디모데전서 6장 16절을 근거로 하나님이 홀로 능력 있는 통치자이시며 완전하시고 홀로 불멸하신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불멸성은 하나님의 존재에 내재한 것이며,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불멸을 얻지만 하나님 자신이 생명의 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이방인도 영원히 살지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지는 못한다는 구별도 덧붙입니다. 이어 하나님은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했고 볼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설교자는 이 태양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빛나는 본성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그분은 홀로 능력 있는 통치자이시며, 왕들의 왕, 주들의 주,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하십니다. 이것이 16절 첫머리의 진술이 가진 의미입니다. 그분만이 홀로 불멸하십니다. 그분의 불멸성은 그분의 존재에 내재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면, 디모데후서 1장 10절 몇 구절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생명과 불멸이 복음을 통해 드러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불멸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도 일종의 불멸성이 있습니다. 그들도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만이 홀로 불멸하신다고 말하는 이유는, 믿는 자가 생명의 샘에서 마시며 불멸을 발견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 생명의 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불멸하실 뿐 아니라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십니다. 태양과 같아서 우리는 그 빛으로 보기는 하지만, 너무도 강렬하게 빛나기 때문에 그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셋째로,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했고 볼 수도 없다고 우리는 듣습니다. 그분은 불멸하시고 또한 보이지 않으십니다.
체스터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구경꾼
설교자는 유럽의 작은 프랑스 마을이나 영국 체스터처럼 길의 높이가 사람 머리 위에 있는 곳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길보다 약 15피트 위의 발코니에 앉은 사람들은 아래로 걷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저 사람은 왜 혼자 걸을까, 어디로 갈까' 하고 이런저런 추측을 합니다.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모든 질문이 이론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길 아래에서 걷는 여행자에게는 같은 질문이 즉시 적용해야 할 실제 문제가 됩니다. 나는 혼자 걷고 있는가, 언제 길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잘 가고 있는가, 시간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그렇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 적용합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추측에 게을러서 발코니에 앉아 답 없는 질문을 던지기를 좋아한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태도가 게으르고 결국 헛되다고 경고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6–6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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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드리고 나니, 그것을 제가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제 자신의 빈약함을 느낍니다. 개인적 적용으로서 세 가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림 하나를 그려 보면서 이것을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어디든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십시오. 유럽의 어느 곳이라고 해 봅시다. 제가 떠올리는 장면은 작은 프랑스 마을들 중 하나와 비슷합니다. 길을 걸을 때 길의 높이가 실제로 여러분의 머리 위에 있는 곳입니다. 약 15피트쯤 됩니다. 그러니까 이층짜리 구조와 같습니다. 영국의 체스터에도 그런 곳이 있습니다. 걸어가는 여러분보다 15피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발코니 층에 있습니다. 그리고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며 길에서 걷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오, 저 사람은 걸음걸이가 이상하네. 왜 혼자 걷고 있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것도 궁금하고 저것도 궁금하네." 구경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질문과 잠재적 문제들은 이론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길 아래에 있다면, 그 질문들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것들은 한가한 추측의 문제가 아닙니다. 즉시 적용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는 혼자 걷고 있는가? 나는 언제 이 길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나는 잘 가고 있는가? 나는 시간을 지키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은 모두 중대합니다. 이는 여행자에게는 구경꾼에게 중요하지 않은 방식으로 중요합니다. 이제 이것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추측에 있어 게으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발코니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답을 얻지 못하는 온갖 질문들이 있고, 때때로 그것들을 그저 던져 보기를 좋아합니다.
노자의 상선약수 비유
설교자는 물이 어떤 더러운 물도 받아들이고 바다에서 정화되어 다시 맑은 물로 비에 실려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물은 구정물이나 흙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결국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노자가 말한 최고의 선이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에 빗댑니다. 물처럼 온갖 이로움을 끼치면서도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삶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가르침을 현대 사회의 경쟁 문화와 대비합니다.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경쟁해 높은 자리에 오르고, 그 자리에서 남의 것을 털어먹으려 하며, 서울로 가려는 욕망도 그런 데서 나온다고 비판합니다. 설교자는 삭개오와 바디메오처럼 예수님이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을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다는 점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78–79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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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한 번 말씀드렸죠. 유교 문화라든지 오늘 현대 한국 문화라는 것은 죽기 살기로 경쟁해서 높은 데 올라가서 남의 것을 털어먹고 짜먹고 편하게 놀고먹고 이런 걸 하잖아. 반면에 유교가 아니고 도가 같은, 노자, 장자 이런 사람을 따라갔던 사람은 높은 데 올라가는 거 안 가고 아래로 내려가고, 물처럼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면서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요.
여러분, 물을 봐요. “구정물은 안 돼. 흙물은 안 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떤 물도 좋아. 가져와라. 그리고는 바다까지 가서 소금 있는 데까지 가서 정화해서 또다시 맑은 물로 비에 실어서 여기까지 가져오는 거 봐요. 그래서 노자가 가장 고차원적인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상선약수라, 물과 같이 온갖 이로움을 끼치면서도 끝없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거예요.
굶주린 나그네와 뱃사람의 비유 및 전쟁 후 생존자의 식사
설교자는 핸들리 물 주교의 글을 소개하며, 굶주린 나그네가 음식을 먹는 데 힘이 필요하냐고 묻고, 길 잃은 뱃사람이 도선사를 갑판에 맞아들이는 데 힘이 필요하냐고 묻는 비유를 전합니다. 물 주교는 그런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답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며, 그 주교의 자기 예화에 비추어 보아도 오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난 전쟁 때 어뢰 공격을 받고 뗏목이나 구명정에서 여러 날을 보낸 사람들, 혹은 강제 수용소에서 굶주림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이 자유를 얻고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푸짐한 식사를 차려 주고 싶어 했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그들을 죽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정맥으로 포도당을 주입하고 여러 추출물을 공급해야 했고, 그 뒤에야 살짝 삶은 달걀처럼 가벼운 음식을 줄 수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이처럼 우리가 받아들이려는 그리스도와 그 능력이 너무 강하고 커서, 먼저 강건해져야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29–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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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므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점은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사례 하나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경건한 핸들리 물 주교가 쓴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지 우리의 생명과 빛을 받아들이는 데 왜 지극히 큰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까?” 그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가 강건해져야 한다니, 그런 말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굶주린 나그네가 먹지 않으면 곧 쓰러질 음식을 먹기 위해 힘이 필요합니까? 길을 잃은 뱃사람이 자신을 소망하는 항구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도선사를 갑판에 맞아들이는 데 힘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 생각은 터무니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증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여기에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는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힘이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힘을 받아들이는 데 어떻게 힘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터무니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광야를 헤매던 사람을 예로 듭니다. 그 사람에게 힘을 줄 음식을 먹는 데 힘이 필요합니까? 또는 배를 타고 대양에서 길을 잃은 뱃사람이 길을 아는 도선사를 배에 맞아들이는 데 힘이 필요합니까? 그 도선사가 올라와 그를 항구로 인도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럴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말씀이 반드시 이런 뜻이어야 한다고 이어서 말합니다.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 능력을 무서워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할지 염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 자체는 전적으로 참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특정한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서는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의 설명은, 우리 자신에게 맡겨 두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므로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거기에 매우 분명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 자신이 든 예화에 비추어 보아도 오류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먹지 못한 사람이 자신에게 힘을 줄 음식을 먹기 위해 힘이 필요하냐고 묻고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저는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감히 그 답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전쟁 때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자주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뢰 공격을 받고 바다 위 뗏목이나 구명정에서 여러 날을 보낸 사람들, 또는 강제 수용소에 갇혀 굶주림을 겪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자유를 얻습니다. 누군가 그들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푸짐한 한 끼를 차려 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들을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기와 채소 등을 듬뿍 차린 식사를 주면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든든한 식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먼저 그의 기력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정맥으로, 혈액 속으로 포도당을 주입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추출물을 공급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뒤에야 아주 살짝 삶은 달걀 같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양분이 많지 않지만, 그저 조금이라도 가벼운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에게 너무 벅차지 않은 음식이어야 합니다. 쇠약하고 기진한 사람은 도무지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내세운 논증 자체에 비추어 보아도, 제 생각에는 그 입장 전체가 잘못되었으며, 이 대목에서 사도의 기도가 지닌 영적 의도를 분명히 놓치고 있습니다.
강한 전기를 담는 용기의 벽
설교자는 전기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비유를 듭니다. 강력한 전기력을 어떤 용기 안에 담으려면, 그 용기의 벽이 보강되어 그 힘을 견딜 수 있도록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 안의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종이로 된 벽이나 나무로 만든 벽 안에 그것을 넣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에 적용합니다. 우리 안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매우 크기 때문에, 그것을 담을 속사람의 벽이 튼튼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기도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담을 그릇이며, 그 그릇이 견고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39–39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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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여 주는 비유는 많습니다. 전기의 세계 같은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강력한 전기력을 어떤 용기 안에 넣으려면 그 용기의 벽이 보강되어 그것을 견딜 수 있는지 아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종이로 된 벽이나 나무로 만든 벽 안에 그것을 넣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에너지와 힘 때문에 정말 강한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가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세 끼 밥을 먹는 것처럼
설교자는 기도가 믿음이 어느 정도 자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래 살았다고 밥을 끊지 않고, 나이가 들어도 세 끼를 꼭 챙겨 먹듯이, 예수님과 아무리 친하고 오래 믿었으며 믿음이 좋다 해도 기도는 호흡처럼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기도를 한두 번의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일상으로 이해하라고 권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삶에 동참하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여 나의 삶이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성도들의 삶과 온누리교회가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하용조 · 2026-10-26
설교 내 6–6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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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누구든지,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님도 기도하셨는데, 아무리 믿음이 좋고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었다 할지라도 믿으면 믿을수록 더욱 필요한 것은 기도예요. 여러분, 오래 살았다고 밥 안 먹어요? 이제 밥 안 먹어도 되십니까? 아니에요. 나이가 들어도 밥 세 끼 꼭 잡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아무리 친하고 아무리 오래 믿고 우리가 믿음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기도는 호흡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을 호흡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삶에 내가 동참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라는 거예요. 주여, 나의 삶이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의 삶이 기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온누리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양철 지붕에 튕겨 나가는 빗물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익숙해지고 그 교훈에 무감각해지면, 마음이 건물의 양철 지붕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비가 내리면 양철 지붕 위에서 소리가 나지만 빗물은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 나갑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말씀을 듣고도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그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친다는 권위에 근거해, 질문하는 그날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설교자는 자주 '오늘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말해 왔다고 밝힙니다. 마음이 너무 완고해지면 언젠가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끝내 듣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비유를 통해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열어 두라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19–20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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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여기 계신 어떤 분은 자신이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예수님께 여러 질문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중요하고 결정적이며 영원한 의미를 가진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준비될 때까지 그분이 기다리시면 되지.”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하여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질문하는 그날,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너무나 익숙해지고 그 교훈에 너무나 무감각해지며 그 지식에 흠뻑 젖어, 마음이 건물의 양철 지붕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빗물이 지붕 위에서 소리를 내고 튕겨 나갈 뿐, 결코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그토록 자주 “오늘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마음이 너무 완고해져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끝내 듣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질문의 답을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그분이 서서 기다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광의 세계로부터 오셔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고, 여러분의 삶에 말씀하시고, 경건한 부모와 친구들을 주시고, 성경을 알게 하시며, 자신에게로 부르신 그분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준비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시라고 정말 그분께 말할 작정입니까? 그러면 무엇이 있어야 준비되겠습니까? 여러분만을 위한 기적입니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헤롯의 태도입니다. “아, 좋아. 예수님을 모셔 오자. 나를 위해 구경거리를 보여 주실지도 모르지.” 그가 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열기 속에 녹아 버리는 초콜릿 병정
설교자는 열기 속에서 녹아 버리는 초콜릿 병정을 비유로 들어, 어려움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이 아닌 이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절실히 구해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공개적으로 반응하라고 요청하지는 않겠다고 밝힙니다. 대신 함께 고개를 숙이고 마음으로 삶을 그리스도께 새롭게 드리자고 권합니다. 그는 청중이 그분을 사랑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말씀드리기를 권면합니다. 이 비유는 시련 앞에서 쉽게 녹아내리지 않는 헌신을 구하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28–28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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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주님께서 열기 속에 녹아 버리는 초콜릿 병정과 같은 사람들이 아닌 이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절실히 구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께 공개적으로 반응하시라고 요청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저와 함께 고개를 숙이면서, 마음으로 여러분의 삶을 그리스도께 새롭게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을 사랑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사탄의 커다란 체 이미지
설교자는 가장자리를 날카로운 철사로 연결한 커다란 사각형 체를 마음에 떠올립니다. 그 체의 구멍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만 빠져나갈 수 있고, 신자는 그 안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허락을 받아 신자를 욥에게 했던 것처럼 철사 위에서 흔들고 찢고 상처 입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믿음을 잃고 체 아래로 떨어져 사탄의 품 안에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이 '그들의 믿음을 빼앗겠다, 예수님에게서 떠나 내 군대에 들어오게 하겠다'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체를 통과해 떨어질 수 없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구멍의 모양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신뢰하는 한, 아무리 심하게 상처를 입어도 사탄의 권세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시몬 베드로를 까부르는 일이 바로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시도라고 설명하며, 사탄이 노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비유는 믿음을 붙들고 있는 성도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드러내는 데 쓰입니다.
존 파이퍼 · 2026-10-26
설교 내 18–18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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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은 이렇습니다. 사탄에게 커다란 체가 있습니다. 커다란 사각형 체인데, 가장자리를 날카로운 철사로 연결하여 그물처럼 만들었고, 그 구멍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만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이 체를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뿐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신자들을 그 안에 던져 넣을 허락을 받아, 욥에게 했던 것처럼 그 철사 위에서 흔들고 찢고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믿음을 잃고 체 아래로 떨어져 자기 품 안에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바로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빼앗겠다. 예수님에게서 떠나 내 군대에 들어오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