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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12 / 32쪽 · 한 쪽 20개

밤에 예수를 찾아간 니고데모

설교자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장면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본문을 함께 읽습니다. 설교자는 오늘 본문의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씀과 이 대목이 비슷한 구조라고 연결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뜻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스스로 거듭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고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를 낮출 수도, 교만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며, 성령의 역사로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이 예화는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낮아질 수 없고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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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는 이미 죄악이 가득하고, 실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놓여 있는데, 화를 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실족시키는 일을 내가 멈출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은 가능할까요?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서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니구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죠.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의 본문, "그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비슷한 문장이죠.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또 남을 없신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자기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 낮출 수도 없고, 교만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작은 자가 중요합니다. 왜냐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자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그다음 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10절을 제가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자 중에 하나도 없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옵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돌보시고 있는지 지금 말씀하고 계시죠. 그들의 천사가 하나님을 항상 보고 있고, 그리고 보고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는 작은 자 개개인의 수천사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의 천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천사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니까 그들의 천사, 그들에게 속한 천사, 이것을 설명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혼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네. 이 말씀을 보니까, 그들을 위해 섬기는 천사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보고를 합니다. 누군가 그 작은 자들을 보고, 그들을 돕고, 그리고 하나님께 보고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보고가 된다는 거죠. 특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없신 여기면 보고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그다음 9절에 나옵니다. 이른 양의 비유.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비유죠. 100마리의 양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을 때, 그 목자는 아홉 아홉 마리를 그냥 산에 놔두고,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그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찾았을 때, 길을 잃지 아니한 아홉 마리의 양보다 그 찾은 길 잃었던 그 양을 찾은 것을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작은 자, 단 한 명이라도 실족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거죠.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같은 양이며, 쥐가 높거나 낮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소중한 한 마리 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자가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을 잃은 그 양이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선을 좀 바꿔서 제자들에게로 한번 관심을 가져 보겠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과 34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가보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니라." 네.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이렇게 다투었다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죠. 근데 왜 이런 다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사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을 통해서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 고백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겠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죄송합니다.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17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있죠. 이때도 예수님은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이 세 제자만 목도하게 됩니다. 이 또한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죠. 다른 아홉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예수님에게 소중하게 되어지는가라는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 시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제자들이 질문하기 전에 두 번 정도 예수님이 고난받을 것과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을 거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는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누가 크냐? 나는 어떤 위치에, 누가 어디에 서열에, 누가 클 것인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죠.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이 조금 다르다는 거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과 선지자의 그 선지서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성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그 개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죠? 제자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왕이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는 지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명기 17장 20절을 보면, 왕이 마음을 높여서 자기 형제를 위해 교만하게 굴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 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 18장의 그 말씀과 매우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조차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이미 모세의 오경을 알고 있는 이 제자들은 천국에서 더 누가 높은 것인가 여기에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제자들의 마음속에 교만이 지금 예수님에게 질문하도록 이끌었단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그 사회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이들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가 오시고,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실 거다.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부활 이후에도 남아 있던 기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을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죽음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이들은 고난 당하는 메시아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순한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신들이 익숙했던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의 방향 자체를 사실 바꾸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생각에서 돌이켜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그 태도는 남을 낮추려는 것이고, 남을 무시하거나 없신 여기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반대되는 행동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더 큰가 관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오히려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천국의 개념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바로 나의 삶에서 그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이 공동체에서 낮은 자가 돼야 됩니다. 그리고 남을 없신 여기면 안 됩니다.

길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던 제자들

설교자는 마가복음 9장을 인용하며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었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성경이 다툼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의 사건에서 그 배경을 유추해 봅니다. 베드로가 신앙 고백 후 천국의 열쇠를 받았고, 변화산에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만 영광스러운 변모를 목도했다는 점을 짚습니다. 이런 일들이 제자들 사이에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이 높은 자리에 관심을 두었던 점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믿었지만, 익숙한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 나라를 이해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교만이 그런 질문을 이끌었다는 것이 설교자의 해석입니다. 이 예화는 천국의 큼이 세상의 서열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배경으로 쓰입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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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는 이미 죄악이 가득하고, 실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놓여 있는데, 화를 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실족시키는 일을 내가 멈출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은 가능할까요?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서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니구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죠.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의 본문, "그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비슷한 문장이죠.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또 남을 없신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자기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 낮출 수도 없고, 교만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작은 자가 중요합니다. 왜냐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자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그다음 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10절을 제가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자 중에 하나도 없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옵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돌보시고 있는지 지금 말씀하고 계시죠. 그들의 천사가 하나님을 항상 보고 있고, 그리고 보고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는 작은 자 개개인의 수천사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의 천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천사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니까 그들의 천사, 그들에게 속한 천사, 이것을 설명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혼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네. 이 말씀을 보니까, 그들을 위해 섬기는 천사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보고를 합니다. 누군가 그 작은 자들을 보고, 그들을 돕고, 그리고 하나님께 보고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보고가 된다는 거죠. 특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없신 여기면 보고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그다음 9절에 나옵니다. 이른 양의 비유.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비유죠. 100마리의 양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을 때, 그 목자는 아홉 아홉 마리를 그냥 산에 놔두고,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그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찾았을 때, 길을 잃지 아니한 아홉 마리의 양보다 그 찾은 길 잃었던 그 양을 찾은 것을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작은 자, 단 한 명이라도 실족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거죠.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같은 양이며, 쥐가 높거나 낮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소중한 한 마리 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자가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을 잃은 그 양이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선을 좀 바꿔서 제자들에게로 한번 관심을 가져 보겠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과 34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가보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니라." 네.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이렇게 다투었다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죠. 근데 왜 이런 다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사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을 통해서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 고백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겠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죄송합니다.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17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있죠. 이때도 예수님은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이 세 제자만 목도하게 됩니다. 이 또한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죠. 다른 아홉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예수님에게 소중하게 되어지는가라는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 시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제자들이 질문하기 전에 두 번 정도 예수님이 고난받을 것과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을 거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는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누가 크냐? 나는 어떤 위치에, 누가 어디에 서열에, 누가 클 것인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죠.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이 조금 다르다는 거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과 선지자의 그 선지서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성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그 개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죠? 제자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왕이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는 지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명기 17장 20절을 보면, 왕이 마음을 높여서 자기 형제를 위해 교만하게 굴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 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 18장의 그 말씀과 매우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조차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이미 모세의 오경을 알고 있는 이 제자들은 천국에서 더 누가 높은 것인가 여기에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제자들의 마음속에 교만이 지금 예수님에게 질문하도록 이끌었단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그 사회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이들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가 오시고,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실 거다.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부활 이후에도 남아 있던 기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을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죽음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이들은 고난 당하는 메시아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순한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신들이 익숙했던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의 방향 자체를 사실 바꾸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생각에서 돌이켜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그 태도는 남을 낮추려는 것이고, 남을 무시하거나 없신 여기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반대되는 행동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더 큰가 관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오히려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천국의 개념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바로 나의 삶에서 그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이 공동체에서 낮은 자가 돼야 됩니다. 그리고 남을 없신 여기면 안 됩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향한 고소와 압박

설교자는 테살로니카 교회가 처음부터 외부의 압박 속에 있었던 상황을 먼저 설명합니다. 이 어린 교회는 바울이 머물기를 원했던 것보다 더 빨리 떠나야 할 만큼 외부의 반발을 겪었습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테살로니카의 군중을 선동했고, 군중은 새로 믿은 신자들을 권력층에 끌어들였습니다. 신자들은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한다는 고발을 받았습니다. 설교자는 교회가 경험이 부족한 어린 교회였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교우들의 운명에 대한 오해가 일부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반대자들은 바울의 동기와 그가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주장까지 의심했고,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에서 자주 이 문제를 논증해야 했습니다. 설교자는 가르침의 출처가 믿을 수 없다면 믿는 진리 자체를 의심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그 손실을 상상해 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이 편지가 그들의 진정한 믿음의 증거를 담고 있으며, 바울이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필요한 교정을 주고자 했다고 강조합니다. 이 배경은 오늘 성도들이 믿음의 인내를 생각하는 출발점으로 제시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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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로서 때때로 믿음 속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며, 여러 이유로 인해 그렇습니다. 이 긴장감은 한쪽에서는 영적 성장, 중앙에서는 정체 상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 두 방향 사이에 머무를지도 모릅니다. 예, 어느 정도의 후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영역 사이의 긴장감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하는 만큼의 성장이 보이지 않지만, 당신이 실제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걸 자신 안에서 관찰할 때, 당신의 믿음이 정체되고 있고, 압박 속에서 줄어들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알다시피, 이런 걱정은 좋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스스로에게 묻어 본 적이 있습니까? 제 믿음은 깊어지고 있습니까? 저는 그냥 흘러가고 있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맞습니까? 이건 좋은 질문입니다. 저는 어느 정도 무관심한 수준의 편안함으로 더 안착하려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면, 아마 당신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영적으로 평가를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이 일을 2코린도서 13장 5절에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시험하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여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주 주의 날마다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시 성례를 받기 위해 준비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시험하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은혜로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당신 삶 속에서 이런 내면의 성찰을 두려워하는 것은 불필요한 짐이 될 것입니다. 테살로니카 교회는 어린 교회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 그는 그들을 걱정하며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공동체와 믿음 안에서 같은 긴장감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깊이 걱정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을 본문은 짧지만, 내용은 깊고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걷는 삶에 있어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함께 열어 주십시오. 1테살로니가전서 1장으로 가십시오. 오늘 아침 우리는 2절과 3절을 읽고 있습니다. 예배 안내서는 2절에서 5절까지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2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너희를 위하여 감사드리며, 기도할 때마다 너희를 떠올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너희의 믿음의 열매, 사랑의 열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굳은 소망을 기억합니다." 다시 말해, 이 교회는 어린 교회이며, 외부에서의 반항을 겪고 있습니다. 대부분 외부에서의 것입니다. 바울이 소개를 검토할 때, 이에 대해 일부 설명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나기 원했던 것보다 더 빨리 떠나야 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테살로니카의 군중을 선동했고, 이 군중은 신자들을, 이 새로운 신자들을 권력층으로 끌어들였으며, 그들을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외부에서 느끼는 압박이 어린 교회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 나아가 어린 교회의 경험 부족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모든 상황과 어려움을 감안하고, 이 편지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결국 이 오해와 그리스도의 재림이 영원한 안전성, 즉 자신들과 교회 안에서 죽은 교우들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오해는 일부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테살로니카의 반대자들은 바울과 그가 복음을 전하는 동기를 의심했으며, 그가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주장이 정당한지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당신이 기억하시면, 바울은 편지에서 이 문제를 자주 논증해야 했습니다. 이는 그의 첫 편지인 1테살로니가전서입니다. 그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바울이 그들을 진정한 관심으로 다루지 않았고, 오히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교회가 이런 메시지를 듣는다면, 얼마나 큰 손실이 될 수 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이제 이걸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그 가르침이 악덕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당신은 믿는 진리를 의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믿는 모든 진리가 악덕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당신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의심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네, 성령께서 말씀에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울 필요는 없지만, 이 어린 교회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주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어린 교회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유아기만 알고 있습니다. 이는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바울을 매우 걱정하게 했습니다. 증거입니다. 이 편지는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편지의 시작 부분에서 이걸 보게 됩니다. 그는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필요한 교정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매튜 헨리의 말을 인용한 진정성

설교자는 바울이 테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기억한 방식을 먼저 짚습니다. 그 기억은 지난 일을 향수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기도와 감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인 덕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어서 매튜 헨리 목사의 말을 인용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진정성의 표시이다'라는 말을 소개합니다. 이 인용을 바탕으로 설교자는 믿음의 덕을 소유하고 삶 속에서 구현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적용합니다. 또한 바울이 감사한 이유는 테살로니가 교인들의 영적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선택이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내용은 고난을 이겨내며 눈에 보이는 영적 변화를 이루는 믿음을 키우라는 격려로 이어집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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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짧은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바울이 그가 함께했던 사람들이 테살로니가 교회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라는 그리스도인 덕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들은 그 교회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기억했고, 그것을 그들에게 알렸습니다. 바울이 기억하는 방식은 우리가 어떤 추억을 떠올릴 때처럼 향수적으로 기억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기도와 감사 속에서 그 일을 떠올렸습니다. 바로 그런 방식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믿음의 일, 사랑의 일,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확신 있는 소망을 하도록 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인식 속에서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믿음 안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덕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감사와 예를 본받는 것은 젊은 교회에게 필수적인 격려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는 큰 격려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테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바울이 느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매일매일 추구해야 할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매튜 헨리 목사가 말했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진정성의 표시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덕을 소유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테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들의 영적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선택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에게 격려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기억할 만한 믿음을 키우라고 부르십니다. 곧, 고난을 이겨내며 눈에 보이는 영적 변화를 이루는 믿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이 믿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키우시는 기억할 만한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저는 이 구절에서 바울이 분명히 보여줍니다. 믿음의 세 가지 특징이 그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특징들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오늘 설교의 구조가 될 것입니다. 첫째, 기억할 만한 믿음은 선한 행위를 통해 표현됩니다. 둘째, 기억할 만한 믿음은 사랑으로 동기화된 노동을 통해 나타납니다. 셋째, 기억할 만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확고한 소망을 뿌리로 하여 지속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제 이 기억할 만한 믿음의 첫 번째 특징, 즉 선한 행위를 통해 표현되는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우선 바울이 '믿음의 일'이란 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일'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레온 모리스 목사, 이분은 오늘날 더 이상 함께하지 않으신 존경받는 신약학자입니다. 레온 모리스는 그의 주석에서 바울에게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단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구주를 향한 따뜻한 개인적 신뢰이며, 이 믿음은 결코 삶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 믿는 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길을 걷고,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과 영과 힘으로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을 해야 하지만,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다시 태어난 자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의 일은 어떤 모습일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 복음 전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입니다. 복음 전도는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좋은 일을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일은 보통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십니다. 마지막 심판 때 양과 염소에 대해. 예수님께서 오른쪽에 앉은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하였던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언젠가 듣고 싶어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이 섬김은 가족에서 시작되어 교회로, 이웃으로 이어져 나갑니다. 작은 범위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친절, 자비, 돌봄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이 일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의 일은 또한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상의 일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과 24절을 읽어보면,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위하여 하라. 주님께 보상으로 상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죄악을 버리는 일도 믿음의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거룩함으로 자라며 삶 속의 악습을 거절하고, 진실, 겸손, 순결, 절제, 다른 그리스도인의 덕들을 품는 일도 믿음의 행위입니다.

배고픈 형제에게 빈말만 한 사람

설교자는 야고보서 2장의 장면을 떠올리며 한 사람이 옷과 음식이 부족한 형제를 만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가거라.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다. 추우면 따뜻하고 배불리 먹기를 바란다'라고 말만 할 뿐, 실제 필요를 채우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마치 그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어 떡과 생선을 만들어 주는 듯한 모습에 비유하며,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보여 줍니다. 그는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범하는 일이 아니며, 바울이 말한 믿음도 아니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진 믿음도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믿음은 단지 공허한 감정일 뿐이며, 행위와 분리될 때 본질적으로 불완전함을 드러낸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하며, 그것이 기억에 남는 믿음의 모습이라고 적용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3–3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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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당신 안에서 작동하는 것은 항상 외적인 행동으로 즉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속 깊은 영역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믿음의 일은 시작되어, 성숙한 신앙인을 만들어냅니다. 바울이 이후 에베소서 4장에서 여행하며 쓴 말씀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은 더 이상 믿음의 어린아니라고 압니다. 그는 물결에 흔들리며, 과학의 바람이나 사람의 교활함과 속임수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이신 머리로 향해 자라납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일은 당신과 나를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 주일학교에서 히브리서 5장 12~14절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한 신앙인은 이제 젖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단지 젖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단한 음식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신과 서로를 위해 모두가 믿음에서 성숙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성숙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진척을 측정하고자 한다면, 믿음이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선한 행위와 행동으로 표현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 2장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옷이나 음식이 부족한 형제를 만났을 때 단지 빈말로 대답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거라.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다. 추우면 따뜻하고 배불리 먹기를 바란다.” 마치 그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어 떡과 생선을 몇 개 만드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숙한 신앙인이 범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사람 안에서 의로움을 낳는 믿음의 일이 아닙니다. 이는 바울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단지 공허한 감정일 뿐입니다. 믿음이 행위와 분리되어 있을 때,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믿음의 고백과 그 믿음이 드러내는 실천 사이의 대조는 기억에 남는 믿음이 무엇이 아닌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히 희생 없이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일과 단순한 활동이나 직업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둘을 구분하는 주요 특징은 감사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하러 가서 일을 하고 나서 갑자기 불평하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는 가장 영광스럽지 않은 순간입니다.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감사에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일을 할 때 믿음을 주었습니까? 이는 단순히 쓴 맛이나 이기심을 낳을 뿐입니다. “그들이 나를 제대로 감사하지 않았다. 나는 X, Y, Z를 해야 한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도 이러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진심으로 기도하고, 피곤하거나 완전히 지쳐 있거나, 주의가 산만한 마음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세요. 이러한 것들이 당신의 예배에서 진심을 추구하는 것을 막지 않도록 하세요. 저는 이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 일을 어렵게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조를 아시며, 우리가 단지 흙덩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피로함을 아시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위대한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피로함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계속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고,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으세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의 행위가 믿음의 내용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러한 선한 행위를 이끌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일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견뎠습니다. 믿음의 일, 사랑의 노동,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굳건한 소망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존 칼뱅은 이 삼중 구조를 믿음이 일하는 것, 사랑이 일하는 것, 소망이 견딘 것을 짧게 참된 기독교의 정의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배타적인 기독교의 정의가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의 정의는 우리가 하늘에서 이 일을 완벽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주님과 영광과 소망과 함께 있을 때 믿음이 무엇이 필요한가요? 상상해 보세요. 그분이 바로 거기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소망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영적 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박해를 겪었습니다. 그들은 전환되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그들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렸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우리의 믿음 있는 일은 우리 몸이나 이웃의 필요를 섬기는 것일 수도 있고, 믿음을 위해 고난을 겪는 자들을 돕는 것일 수도 있고, 박해받는 자들을 지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가 됩니다. 이 선한 일에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자주 비판하는 대신, 진정한 변화의 길은 사람을 더 잘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남자의 에로스

설교자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랑의 전형으로 사랑에 빠진 젊은 남자를 예로 듭니다. 그는 한 여성을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고 싶어 하는 모습입니다. 설교자는 이 인간적 사랑의 구조를 설명하며, 모리스 주석에 따르면 에로스는 가치 있는 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특징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이 구조를 하나님의 사람 사랑에 적용하면 전혀 맞지 않는다고 대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며, 이사야의 말처럼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사랑이 본질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강조하며, 십자가에서 이 사랑을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대상의 가치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사랑이며, 그러므로 테살로니가 교인들의 섬김도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에서 나온다고 적용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4–4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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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믿음으로 인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돌봄을 받을 때, 그는 단지 드문 친절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주님의 더 분명한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삶의 증거를 마주하게 됩니다. 믿음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바울은 더 깊이 들어가서 ‘왜 우리가 계속 그렇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기억에 남는 믿음은 단순히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있고, 이 행동은 사랑에 의해 이끌립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믿음은 사랑에 의해 동기화된 노동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 사랑은 여러 은혜 중 가장 중요한 것이며,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분이 그들을 향한 사랑과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을 향한 사랑이 바로 그들의 기억에 남는 믿음의 레시피에서 활동적인 요소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이 낳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사랑으로 인한 노동과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기억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노동’이라는 단어는 피로, 고갈, 심지어 고통까지 이르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도 자신의 선교 활동에서 겪었던 고된 노동을 묘사할 때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노동입니다. 많은 테살로니가 사람들은 재산을 박탈당하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조언이 필요했습니다. 오, 바울이 팀오스를 그들에게 보내야 했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지 상상해 보세요. 그들은 육체적으로 취약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필요의 지형이 바로 사랑으로 인한 노동을 단순히 관리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말 고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네, 저는 바울이 ‘사랑으로 인한 노동’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표현을 ‘노력된 사랑’이나 ‘사랑의 노동’처럼 줄이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 표현에서 ‘노동’의 중요성을 축소시키는 것은 실수입니다. 바울이 다시 사용한 ‘노동’이라는 단어는 무거운 활동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의 직업입니다. 이는 고된 일, 고된 노동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사랑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바로 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 많은 분들이 익숙한 단어입니다. 이는 존경, 애정, 그리고 보편적인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랑입니다. 이는 하늘에서 낳은 자아 없는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레온 모리스가 매우 유용한 설명을 제시했고, 저는 이 설명이 왜 아가페 사랑이 자연스럽게 그러한 무거운 노동이 되는지를 설명하므로 신중히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설명을 시작하면서 ‘에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주요 단어입니다. 모리스는 에로스가 두 가지의 정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그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이는 사랑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매우 다릅니다. 모리스는 계속해서, 에로스는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 선하고 아름답고 완전한 사랑으로 정제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항상 이 두 가지 특징을 유지합니다. 본질적으로 이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향해 뻗어나가는 사랑이며, 그것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남자. 이는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그녀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무엇인지 아시겠죠. 하나님께서 도와주소서. 이제 이 구조, 이 에로스의 사랑, 이 구조를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향한 사랑에 적용해 보세요. 이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이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말했듯이, 우리의 의는 더럽고 찢어진 옷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우리를 가치 있는 투자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값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 아무것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당신의 본질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왜 우리가 일부를 선택하셨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 아가페 사랑이 정의되는 곳입니다. 테살로니가 사람들을 위한 실용적인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아가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인 에로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성격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가치 있는 것을 사랑하고 원하는 원리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대상의 가치와 무관하게 사랑해야 하며,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주어야 합니다. 아가페는 바울이 3절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는 죄와 필요로 가득한 세상에서 필요한 사랑의 종류입니다. 또한, 여기서 설명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대상입니다. 이 노동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 구절에서는 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편지를 통해 테살로니가 사람들의 사랑이 여러 방향으로 확장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시 내 그리스도의 성도들, 교회 지도자들, 다른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예를 들어 필립보와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이 사랑이 확장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공동체 밖 사람들에게까지도 이 사랑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3장 12절에서 그들의 사랑이 서로와 모든 사람에게 더 커지고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거기서도 이 사랑이 나타납니다. 이 사랑의 범위, 즉 사랑이 얼마나 멀리까지 이르는가가 바로 이 사랑이 작동하는 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얼마나 멀리까지 이릅니까?

결과를 바라지 않는 간병인과 친구

설교자는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달리며 개선이 없는데도 계속 돌보는 간병인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간병인은 어디로 가는지 거의 알면서도 그 어려운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죄로 고통받는 친구를 인내심 있게 돕는 사람을 함께 예로 듭니다. 그 친구가 다시 죄에 빠져도 그는 여전히 도와줍니다. 또 어려움을 겪는 젊은 어머니를 조용히 지지하는 노인 여성도 그녀가 안정되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사랑을 결과로 측정하면 가장 오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포기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가장 깊은 필요가 있는 곳일수록 보상이 빨리 오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둔 사랑의 신학을 가르치고, 불완전하더라도 성령의 힘으로 인내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5–5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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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도움이 가장 쉬운 사람만을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으로 하는 일은 단순한 일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일은 쉬워지나요? 만약 그런 사랑이 있다면 일은 쉬워지나요? 절대 아닙니다. 사랑으로 동기화된 일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에너지를 새로워주는 일은 피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과가 노동이 되면 우리의 힘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하늘의 사랑은 피로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당신을 그 노동 속에서 지지해 줍니다. 그 사랑은 일을 쉬워하게 하지 않습니다. 비용을 무릅쓰고 일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그분은 소중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욕구와 필요를 부담으로 받아들이고, 보상을 걱정하지 않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처럼요, 그렇죠?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내가 이전에 예를 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비용을 표현합니다. 교회가 서로에게 어떻게 섬김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여, 우리가 사랑을 측정하는 방식은 사랑이 무언가를 주었는지, 눈에 보이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주었는지로 판단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도운 사람이 회복되었는지, 관계가 회복되었는지, 우리의 노력이 감사받았는지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일은 종종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사람과 달리며 개선이 없이 달리고, 어디로 가는지 거의 알아차리면서도 여전히 그 어려운 일을 하는 간병인. 죄로 고통받는 친구와 인내심 있게 일하는 친구는 그 친구가 다시 빠져들어도 여전히 도와줍니다. 어려움을 겪는 젊은 어머니를 조용히 지지하는 노인 여성이 그녀가 완전히 안정되기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결과를 사랑의 가치 기준으로 삼는다면, 사람들이 가장 오래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때에 그들을 포기하거나, 우리의 믿음을 그들의 부담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가장 깊은 필요 상황은 우리의 노력이 빠르게 보상받을 가능성이 가장 낮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가는 쓴 여정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본질에 뿌리를 둔 사랑의 신학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것이 성화의 수단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제공하고 받는 불완전한 도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야 할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이나 느린 반응으로 인해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는 인내로운 사랑입니다. 이 힘은 무한합니다. 좋은 방식으로 시험해 보세요.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행함을 낳고, 사랑이 행함을 낳는다면, 믿는 자가 특히 어려운 시기에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이 그를 계속하게 하겠습니까? 이제 바울이 테살로니가인들에게 말한 다음 내용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지속적인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이는 제3, 마지막 주제입니다. 기억할 만한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에 뿌리를 둔 끈기로 스스로 지속됩니다. 테살로니카의 젊은 교회가 직면한 주요 문제는 거짓 교리에 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이 거짓 교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습니다. 이 거짓 교리의 출처는 약간 불확실하고 애매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거짓말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1세기 교회에서 다른 곳에서도 문제였습니다. 이 거짓말은 가르침으로 전해졌습니다. 뒤에 기록된 제2테살로니가서에서 거짓 선생들은 바울 자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위장된 예언이나 서신을 인용하며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마치 바울이 그 거짓말에 가담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울이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끈기로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것이 그들의 기억할 만한 믿음의 일부였음을 기억합니다. 이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성도들이 다시금 열린 이교적 생활 방식에서 최근에 개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속한 사회가 원래 기독교 이념에 기반을 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점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에게 강한 소망을 은혜롭게 심어 주셨습니다. 많은 해설가들이 지적했듯이, '인내'로 번역되는 단어는 오래된 번역에서 자주 사용되는 '인내'보다 더 적절한 번역은 '지속'입니다. 지속적인 소망 대신 인내로운 소망. 우리 현대인의 귀에 들리면, 인내는 단순히 조용하고 수동적인 표현처럼 들립니다. 불평 없이 기다릴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더 강력합니다. 다시 레온 모리스의 지혜를 빌리자면, 이는 조용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역경에 직면한 활발한 회복력입니다. 한 사람이 말했듯이, 타오르는 소망입니다. 타오르는 소망입니다.

스토아주의자와 그리스도인의 인내

설교자는 유대인의 소망이 순교자의 희망으로 표현되었다는 배경을 먼저 말합니다. 그는 극한의 압박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확고한 끈기가 바울이 말한 인내이며, 테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런 모습으로 주님께 충성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스토아주의자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인의 인내와 대비합니다. 스토아주의자는 단순히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의 의지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려 합니다. 그는 무언가를 억지로 억누르며 자제력을 유지하려 하므로 결국 최악의 경우 무너질 수 있다고 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은 확실한 희망 때문에 인내하며, 그 희망은 주님이 보여 주시고 마음에 심어 주셨기에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게 합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한 사람,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고 강조하며, 이 소망이 삶의 방식을 바꾼다고 적용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6–6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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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이 끈기 있는 삶은 순교자의 희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교자는 극한의 압박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바로 이 끈기, 이 확고함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삶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희망이 필요했습니다. 이 두 가지 희망의 차이는 정확히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차이가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을 바꾸어 놓습니다. 테살로니가 교인들은 자신의 주님께 확고하고 충성심 있게 서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너뜨릴 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희망은 기대에 의해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희망의 특징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결심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끈기는 예수님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희망은 여기서 동반자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제, 오래 지속되는 끈기를 유지하려면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희망을 빼앗는다면, 끈기는 점차적으로 사라져서, 최악의 경우는 단순한 스토아적 인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조차 결국 무너질 것입니다. 희망을 빼앗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바탕으로 확고히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희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자신과 그의 선교 동료들에게도 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그들에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그것은 그분이 약속하신 재림이었습니다. 언젠가 그분이 그들을 데려가시고, 모든 부당함을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은 미래를 향한 것입니다. 이는 3절의 삼중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 가지 은혜, 믿음, 사랑, 희망이 단순히 나열된 것이 아닙니다. 모리스가 그의 주석에서 지적했듯이, 여기에는 내재된 논리가 있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뢰이기 때문에 활동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함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특히 아가페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든, 얼마나 고통스럽든 간에 말입니다. 희망은 끈기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정말로 미래가 어디로 가는지 확신할 때,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파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잘 버틸 수도 있습니다. 이제 모리스가 언급했듯이, 이 세 가지 은혜는 각각 외부 표현에서 자신만의 특성을 낳습니다. 이 생성적 연결이 바로 이 목록이 단순한 덕목의 나열이 아닌 이유입니다. 이는 단순한 덕목 목록 이상입니다. 이는 그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당신도 볼 수 있습니다.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 희망은 제1테살로니가서의 각 장이 마무리될 때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희망은 아이디어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기다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미래는 그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당신의 희망이 단순한 원리나 이데올로기 대신 한 사람에 있을 때, 그 희망은 그 사람의 성품과 힘, 약속에 의해 형성됩니다. 이러한 종류의 희망은 교회가 당신의 삶을 바꾸는 방식을 바꿉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사람의 종말론이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지 이유입니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아마도 점점 더 세속화된 세상에서 이 현상이 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영혼이나 "자기"가 단순히 사라진다고 믿습니다. 소멸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희망은 무엇일까요? 삶의 시련을 견디는 그들의 끈기는 최악의 경우 단순한 스토아적 인내에 불과합니다. 스토아주의자는 단순히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의 의지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그 외에도, 그들은 무언가를 억지로 억누르고, 자제심과 자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할까요? 반대로, 무언가나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처럼, 이 스토아주의자는 희망을 억누르며 인내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무엇도 원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바로 희망 때문에 인내합니다. 이 희망은 믿는 자에게 매우 확고하고 확신되어 현재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네, 이 기독교인은 주님께서 보여주셨고, 그의 마음에 심어주셨으며, 알려주셨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최고 수준으로 높입니다. 모든 믿는 자가 스토아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낙관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어떤 무신론자 낙관주의자가 무엇을 할까요? 당신은 당신의 날들이 끝날 때 낙관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저는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을 다시 괜찮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주의자들이 바로 그리스도께 가장 마음을 닫고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곡선을 따라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인내심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받은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이 은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인내해야 하는 필요는 절망을 낳을 수 있으며, 아마도 자만심도 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승선을 바라보는 마라톤 선수

설교자는 마라톤 선수가 결승선을 바라보는 모습을 비유로 듭니다. 선수는 결승선 너머에 기다리는 분이 남은 거리 전체의 가치가 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누군가 더 달리라고 재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그리스도인의 인내에 적용합니다. 인내는 단순한 끈기나 의지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향한 소망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가 받을 유업,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주의를 집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통해 인내가 생겨난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감사한 대상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이 인내 역시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 소망이 기억할 만한 믿음을 지속시키는 힘이라고 마무리합니다.

에린 프라이 · 2026-10-23

설교 내 7–7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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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뱅이 옳습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대상은 테살로니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인내심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인내심은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내심이 단지 끈기로만 이해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끈지르는 마음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인내심을 유지하려 한다면 결국 소진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향한 소망에 집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의 부활과 여러분의 필수적인 유업과 영원한 생명을 생각해 보세요. 만약 기도와 주의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소망에 집중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통해 그 인내심이 생겨날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결승선을 보고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분이 모든 남은 거리의 가치가 된다고 느낀다면, 그는 더 달리라고 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인내심은 바로 이 소망에서 비롯됩니다. 교회여, 저는 이 말씀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바울이 테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평범하고 지친, 새롭게 회개한 사람들에게 이르렀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 안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로 인해 그들의 믿음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기억할 만한 믿음이 어떤 모습인지 보았습니다. 기억할 만한 믿음은 선한 행위를 통해 표현됩니다. 이는 비어 있는 말이나 빈약한 소망이 아닙니다. 이는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행동입니다. 또한 기억할 만한 믿음은 사랑으로 동기화된 노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주는, 소중하고 고된 아가페의 믿음입니다. 그녀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섬깁니다. 기억할 만한 믿음은 소망에 뿌리를 둔 인내심을 통해 자신을 지속시킵니다. 이는 단순한 절제나 의지력이 아닙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약속하신 재림에 대한 열정적이고 활발한 확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믿고 소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늘어진 바퀴와 멈춰 선 시계

설교자는 무게를 돌리지 않으면 바퀴가 곧 멈추고, 계단에 있는 오래된 시계도 움직이지 않아 쓸모없고 침묵하는 죽은 물건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농장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노력과 경계심이 필요하지만, 땅이 참새조차 먹을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고 설명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료도 주지 않으며 쉬게 하지 않은 채 수확만 계속하면 비옥한 땅은 황폐지대가 되고 정원은 사막으로 변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목회자의 영혼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매일 기도로 영혼을 일깨우지 않으면 빠르게 쇠퇴하고, 마음의 양육을 소홀히 하면 가시덤불과 잡초가 자라며, 내면의 삶을 놓치면 전 인격이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훈련과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권면입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5–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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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를 돌리지 않으면 바퀴는 곧 멈추게 되고, 계단에 있는 오래된 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쓸모없고, 침묵하고, 죽은 채, 마치 뒤집어진 관처럼 있게 됩니다. 농장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노력과 경계심이 필요하지만, 땅이 심지어 참새조차 먹을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만드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료도 주지 않고 휴식도 주지 않고 계속 수확만 한다면, 비옥한 땅은 황폐지대로, 정원은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등대지기가 물고기를 잡던 시절과 안개 낀 밤

설교자는 등대에 줄을 감고 훅이 달린 털을 매달아 물고기를 잡던 등대지기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만조 때 물에 잠긴 장치에 물고기들이 걸리고, 물이 빠지면 등대가 여러 종류의 물고기로 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처음 사역을 시작했을 때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고 말하며, 쉬지 않고 물고기를 잡던 시기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등대지기가 탑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짙은 안개와 폭풍우의 구름이 빛 주위에 내려앉고 바람이 격렬하게 몰아쳐서, 그는 모든 문과 창문을 닫고 버텨야 하며 해변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설교자는 이를 수확 없는 고된 시기를 겪는 사역자의 상황에 비유합니다. 이런 때에 정신이 약해지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며, 활발한 사역 속의 자연스러운 마모도 고갈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16–17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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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등대지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등대에 줄을 감고 그 줄에 훅이 달린 털 몇 가닥을 묶습니다. 만조 때에는 모두 물속에 잠기고, 적절한 시점에 물고기들이 물린다 합니다. 그리고 물이 빠지면 등대는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로 덮여 있습니다. 그 물고기들은 거기서 매달리고, 성공한 어부가 할 일은 그 잡은 물고기를 수확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 시작했을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훅을 매달고 쉬지 않고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등대지기가 탑에서 바라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안개가 너무 짙기 때문입니다. 폭풍우의 구름이 그의 빛 주위에 내려앉았고, 바람은 매우 격렬하게 몰아칩니다. 그는 모든 문과 창문을 닫아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등대지기가 얼마나 힘든지 생각하게 되고, 해변에서의 생활을 꿈꾸게 됩니다. 우리도 때때로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묻습니다. "지킴이여, 밤은 어때요?" 그리고 대답은, "아침은 오지 않지만, 밤은 더 짙어지고 어둠은 점점 더 두터워집니다." 우리는 매일 큰 물고기를 가득 담은 그물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오히려 수확 없는 고된 노동의 시기를 겪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에는 사람의 정신이 약해지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활발한 삶 속에서 자연적인 마모와 손상도 우리의 고갈을 초래합니다. 우리 중 일부는 우리가 단지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며 매주 두세 번 말을 흘려보내는 것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성실한 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열등한 설교를 듣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어떤 형제가 주님을 의지하며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형제의 교인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고도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들은 그 형제가 영감을 받은 설교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형제가 준비하던 설교조차도 약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립된 등대 관리자들의 침묵

설교자는 고립된 등대의 관리자들을 방문했던 일을 전합니다. 한 방문객이 그들에게 탑에서 꽤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자, 관리자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지만 자신은 파트너와 한 달 동안 단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설교자는 영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없는 시골로 유배된 상황이라면 그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철이 철을 갈듯 사람은 친구의 얼굴을 갈아준다고 말하며, 이런 교제가 부족하면 마음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고 적용합니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으며, 가장 중요한 관심사에 대해 나눌 사람이 없는 고독은 가장 혹독한 시련 중 하나라고 권면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20–20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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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떤 형제들이 다른 따뜻한 마음과 친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제 부족으로 인해 쇠퇴하는 것이 놀랍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등대에 대한 또 다른 비유를 드리겠습니다. 한 남자가 고립된 등대의 관리자들을 방문했을 때, 그 중 한 명에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 당신들은 결국 이 탑에서 꽤 행복할 거예요."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관리자가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요. 그러나 저는 제 파트너와 한 달 동안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적하거나 영적으로 유사한 수준의 사람도 없는 시골 지역으로 유배당한다면, 저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철은 철을 갈고, 사람은 친구의 얼굴을 갈아줍니다. 이와 같은 갈림이 부족하면, 마음이 마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형제들아. 그러나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에 대한 끔찍한 고독은 가장 혹독한 시련 중 하나입니다. 오, 만약 친밀한 정신을 가진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심바드 이야기와 고래의 등

설교자는 '사냥꾼 심바드'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항해 중 선원들이 섬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배를 버린 뒤 그 위에서 잔치를 벌이고, 왕의 이름으로 섬을 점령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섬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가라앉아 결국 선원들이 모두 물속으로 잠겼습니다. 설교자는 그것이 섬이 아니라 고래의 등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근거 없는 새로운 이론과 예언 해석에 쏠리는 위험에 빗대어 말합니다. 그는 한동안 이스라엘 배경이 시간을 채워 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흥밋거리에 열광하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함께 경고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23–2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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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순간에 악해지지 않습니다. 번개 한 번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사실이지만, 그 번개가 내리지 않았다면 폭풍우가 될 만큼 요소들이 먼저 축적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드러난 스캔들은 그 사람 안에 있던 것을 단지 드러낸 것입니다. 악의 뿌리는 훨씬 더 깊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특별한 미친 짓으로 성격을 망쳤다고 들으면, 보통 그 상처는 화산이 활동하는 땅에서 일어나는 황연의 방출이었을 것입니다. 또는 비유를 바꾸어 말하자면, 야수 군단의 굴에서 울리는 단 한 마리 사자입니다. 여러분이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기도해도 도덕적 재앙이 닥치지 않기를 간구하신다 해도, 그 재앙을 이끄는 죄를 조심하십시오. 그 재앙을 끝내는 이단을 조심하십시오. 왜냐하면 원인이 없다면 결과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매일 길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면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태양 아래에는 드러난 재앙만큼 끔찍한 악이 있습니다. 사실 장기적으로 교회에 더 큰 해를 끼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사역의 영혼을 잃고도 여전히 사역에 남아 있는 경우입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도 폭발을 견뎌내고 끝내는 것이 이 사람들을 계속해서 형식적인 믿음을 유지시키며 죽은 경건을 퍼뜨리고 여전히 존경받는 위치를 유지하는 것보다 낫겠죠. 후자를 전자만큼이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소서. 내가 썩은 가지라면, 잘라내어 주소서. 그러나 기생류와 편모로 덮인 나무에서 매달리는 것은 불쌍합니다. 영적 생명이 없는 존경받는 사역은 존경받는 저주보다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사람들이 이 지경에 이르면 보통 그것을 숨기려는 수단을 찾습니다. 양심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만, 속된 마음은 그것을 숨기거나 완화하려고 합니다. 일부는 복음을 전하는 대신 취미로 자신을 달래며 이 일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으니, 자신들의 일을 하려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용기를 갖지 못하니, 자신들을 위한 '취미'를 찾습니다. 이는 그들이 부차적인 문제를 끌어들여 주된 일에서 자신을 분산시키는, 악의 미약한 형태입니다. 그러한 놀이터는 많지만, 나는 하나만 언급할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형제들은 예언 해석에 전념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으로 가득한 사람은 예언을 아무리 해석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사랑을 잃은 자들이 과거의 인기를 되찾기 위해 미래에 대한 추측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만약 사람들이 마리아의 안식처와 십자가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봉인과 잔을 다루는 일에서는 완전히 실패할 것임을 확신하십시오. 여러분은 칼뱅의 주석서에서 계시록 해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셨습니까? 왜 없습니까? 그는 '이 책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누군가가 '나는 마태복음에 있는 많은 내용이 교회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대부분은 넘겨버렸고, 시편도 내 경험의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하므로 즐길 수 없다. 나는 더 고귀하고 영적인, 더 복잡하고 놀라운 것을 원한다'고 말할 때, 나는 이 형제가 마지막 실마리를 뽑아내고 마지막 지혜의 돈을 써가며 끝장을 내는 중임을 결론짓습니다. 나는 복음의 구유에서 벗어나 예언자가 되려는 자들이 빠지는 함정을 유쾌하게 여깁니다. 계시록의 짐승은 보통 나폴레옹 1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생물은 갑자기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결국 치명적인 상처가 치유되고, 제국의 왕자는 예언서의 끔찍한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이제 죽었고, 예언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곧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한동안 우리의 이스라엘 배경이 시간을 채워줄 것입니다. '사냥꾼 심바드' 이야기에서 그들은 항해 중 섬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섬에 도착했습니다. 선원들은 배를 버리고 섬에서 잔치를 벌이며 왕의 이름으로 섬을 점령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섬이 떨리기 시작하고 가라앉더니 결국 그들과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섬이 아니라 고래의 등이었기 때문입니다.

멘톤 해변의 대형 그물 어업

설교자는 멘톤 해변에서 본 어부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바다 한가운데까지 뻗은 거대한 그물과 큰 부표가 있었고, 열두 명씩 두 줄로 서서 줄을 끌며 물고기를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큰 힘과 노력을 들였지만 그들이 끌어 올린 물고기는 설교자의 손가락 끝만 한 작은 것이었고,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였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독일의 신학자들이 생각의 바다를 둘러싸고 거대한 그물을 만들어 놓고 큰 소동을 일으키지만 실제 결실은 적은 상황과 대비시킵니다. 그 그물에서 나온 작은 물고기를 두고 여러 철학자가 비판하고 다시 던져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사도적 어업을 버리고 무의미한 논쟁에 뛰어드는 젊은 목사들을 안타까워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34–34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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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톤의 해변에서 저는 어부들이 바다 한가운데까지 뻗은 거대한 그물과 거대한 부표를 보았습니다. 열두 명의 사람들이 한 줄에 서서 줄을 끌고, 또 열두 명이 다른 줄을 끌며 그물을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끌어! 어서! 줄을 끌고 물고기를 끌어당겨라. 저는 한 번은 그들이 끌어 올린 물고기가 제 손가락 끝만 한 것을 봤습니다. 그건 운이 좋은 예였습니다.

캐스티글리오네 산책 중 찾아온 안개

설교자는 작년 프랑스 남부에서 반쯤 버려진 고대 도시 캐스티글리오네 발치를 산책하던 경험을 나눕니다. 날씨는 맑고 햇빛이 따뜻했고, 친구들은 언덕을 올라갔지만 그는 조금 낮은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곧 산 너머에서 구름이 스며들어 왔고, 몇 분 만에 그는 안개에 갇혀 뼈가 얼어붙을 만큼 추위를 느꼈습니다. 구름 속에서는 멘톤조차 거의 보이지 않아, 그는 하인에게 말을 마구에 매라고 하며 즉시 태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안개가 사방에서 감싸는 가운데 그는 다시 태양을 볼 때까지 서둘러 내려갔습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그리스도에게서 조금이라도 떠난 사람은 즉시 그분께 돌아가야 한다는 적용으로 연결하며, 추상적 이론의 추운 곳에 들어갔다면 옛 복음으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고 권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39–40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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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저는 프랑스 남부에서 캐스티글리오네라는 반쯤 버려진 고대 도시의 발치로 산책을 했습니다. 그때 날씨는 맑고 햇빛이 따뜻했습니다. 제 친구들은 그 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언덕을 올라갔지만, 저는 조금 낮은 곳에 머물렀습니다. 곧 저는 산 너머에서 구름이 스며들어 오는 것을 알아차렸고, 몇 분 만에 저는 안개 속에 갇혀 뼈가 얼어붙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멘톤을 거의 볼 수 없었고, 저는 제 하인에게 말했습니다. "말을 마구에 매어라. 나는 즉시 태양으로 돌아가야 한다." 곧 안개가 사방에서 나를 감싸고, 다시 태양을 볼 수 있기 전에 저는 서둘러 내려갔습니다. 형제 여러분, 당신도 마찬가지로 느껴야 합니다. 안개 속에 갇혀 추위가 당신을 잡는다면, 즉시 그리스도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으로 쉬고, 당신 주위에 있는 모든 축복과 위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높은 이론에 오르고 추상적 사고의 추운 지역에 들어갔다면, 즉시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당신은 옛 복음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나는 내 쉼의 복된 자리가 보이고, 즉시 거기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좋은 옛 길을 떠나서 위로를 잃은 자들에게 지혜로운 충고입니다.

소에게 화살을 쏜 사람과 갈리에누스 황제

설교자는 소를 향해 화살을 여러 번 쏘았지만 모두 빗나간 사람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군중이 그를 비웃었지만,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를 불러와 머리에 관을 씌우며 그렇게 큰 표적을 여러 번 놓친다면 매우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설교자들에게 적용합니다.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죄를 깨닫게 하지 못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을 몰아내지 못하고, 죄인을 예수의 발 앞에 엎드러지게 하지 못하는 설교자들은 결국 수치의 관을 쓰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목회자가 베냐민의 왼손잡이 전사처럼 화살을 정확히 맞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그런 일은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거할 때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48–48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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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소에게 화살을 여러 번 던졌지만 놓쳤고, 군중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를 불러와 머리에 관을 씌우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만약 그렇게 큰 표적을 여러 번 놓친다면, 당신은 매우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죄를 깨닫게 하지 못하며, 스스로 의로운 자인 바리새인을 몰아내지 못하고, 죄인을 예수의 발 앞에 엎드러지게 하지 못하는 설교자들에게는 어떤 관을 씌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언젠가 그런 죄로 수치의 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독한 벨라돈나로 이마를 감쌀 것입니다. 우리는 베냐민의 왼손잡이 전사처럼, 머리카락의 끝까지 정확하게 화살을 던져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그런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해 선장의 안전 우선 항로

설교자는 남해의 한 선장이 항구 입구를 지나쳐 더 길지만 더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그에게 너무 조심스럽다고 말하자, 선장은 배 위에 많은 영혼들이 있어서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가져와 목회자가 맡은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그는 고양이나 개처럼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귀중하고 불멸한 영혼들이 사역자에게 맡겨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일,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이 하나님의 섬김에 달려 있다면 내면의 건강에 얼마나 신경 써야 하는지 묻습니다. 설교자는 외과의사가 떨리는 손으로 수술하지 않듯, 영혼의 의사도 항상 최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49–49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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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자신을 돌보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종은 더욱이 자신을 돌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맡기심을 받은 자들을 위해 자신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남해의 선장이 항구 입구를 지나치고, 더 길지만 더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너는 너무 조심스럽군요"라고 말하자, 그는 "선상에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배에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타고 있는지 아십니까? 저는 반복하지만, 이 가르침은 지금 유행하지 않지만,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있는지 아십니까? 고양이나 개처럼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귀중하고 불멸한 존재들이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영원한 일,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이 우리의 하나님의 섬김에 달려 있으니,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요? 우리의 내면 건강에 얼마나 신경 써야 할까요?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요? 제가 외과의사라면, 환자를 수술할 때 병이 있거나 손이 떨린다면 칼이나 환자의 몸을 만지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을 끊을 수 있는 순간에 저는 가장 차분하고 차가우며 결단력 있는 상태가 아니면 있을 수 없습니다. 영혼의 의사들이 항상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소서. 저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진전이 우리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때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시기에 왕국에 부름받은 것입니다. 심슨 메누가 네덜란드에서 세례 신앙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불을 지켰던 것처럼, 우리 나라에서는 한서드 낸리, 키핀, 키치 등이 주님을 위해 전쟁의 폭풍을 맞섰던 것처럼, 저는 여러분이 순수한 복음 진리를 방어한 자들의 직계 후계자로 부름받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우리 존경할 만한 선조들이 전해 준 영원한 복음을 전달하는 사명을 맡고 있습니다. 네이더가 말했듯이, 감리교에는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모든 것을 그 사랑하는 머리에게 복종하려는 교회에는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명성도, 부도, 정부의 지원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파르타인을 물어 "네 나라의 경계는 어디인가?"라고 하자, 그는 "스파르타의 경계는 우리의 창 끝에 의해 표시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경계도 마찬가지로 창 끝에 의해 정의되지만, 우리의 무기는 육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리스도와 그의 엄숙한 말씀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를 전합니다. 물어본 사람이 스파르타인에게 돌아가며 "스파르타는 성벽이 없다."라고 말하자, 그는 "아니요, 스파르타의 성벽은 그 아들들의 가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입법부의 조치나 강요된 신앙 고백으로 교회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왕을 섬기며 삶과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회개된 마음과 헌신된 영혼이 영적 권능의 손에 의해 우리를 중대한 이단으로부터 보호해 왔습니다. 저는 이 진리의 싸움이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고, 그 시작은 보이지 않으며, 그 끝은 오직 주님의 오심과 영원한 승리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겁쟁이들은 우리가 멈추고 대학에 다니는 젊은이들이 직업을 배우도록 하며, 영국이 목사들로 과포화되지 않도록 사역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해외 선교사들을 훈련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선교 사회가 부채를 지고 있으며,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교 사회를 축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회의 상태는 우리의 개인적 노력의 한계가 아닙니다. 또한 사회는 곧 그 부담을 던져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르심에 합당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지나치게 의지하지 않고 용감하게 독립해야 합니다. 창 끝이 없는 겁쟁이들이 스파르타를 보호할 수 없었던 것처럼, 겁쟁이 정신을 가진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시대의 요구를 감당하려면 여러분은 용감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 가장 약한 자도 다윗처럼, 다윗의 집도 하나님처럼 만드소서. 제가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바로 우리 각자에게 새롭게 되는 시기이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신령한 영을 통해 개인적인 부흥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를 살펴보면 이것이 올바른 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우리는 자아 확장, 국가 이익, 정복보다는 의로움, 정의, 진리에 대한 존중이 회복된 상태에 있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영국 이익의 거짓된 개념과 그에 관련된 정치에 이끌리지 않고, 법, 정의, 인도주의의 위대한 원칙에 따라 이끌리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정당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며, 개인 정치인들도 그들이 올바른 원칙을 체현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번연의 순례자와 막대기가 내려오는 문

설교자는 번연의 글과 같은 꿈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 사람이 친구와 함께 동쪽의 한 도시로 가던 중, 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문 위의 막대기들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몸을 굽혀 보았지만 막대기가 너무 빨리 내려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도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느껴 절박하게 시도했고, 아름다운 리본이 달린 조끼를 벗은 뒤 땅에 몸을 눌러 자갈을 긁으며 그 밑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빛나는 자가 그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빛나는 옷으로 입혀 주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화려한 옷차림, 빛나는 이론, 인기와 수사학적 장식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적용으로 연결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51–51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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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 책을 넘기면 과거의 많은 추억이 떠오릅니다. 이 책의 페이지는 제가 설명할 수 없는 빛으로 빛나고 있으며, 어둠 속에서 제 영혼을 비추어 준 별들로 가득합니다. 당시 저는 이 신성한 책을 읽을 때 말씀을 찾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읽었습니다. 당시 저는 마르다처럼 여러 가지 걱정에 얽매여 있지 않았고, 라자로처럼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적 길의 처음 목표들을 회복하는 부흥을 주소서. 그때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이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런가요? 우리는 이제 설교를 잘 아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렇죠? 우리는 마치 자신의 기술에 능숙해진 것처럼 느낍니다. 아마도 우리가 그렇게 준비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기도하는 약함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자신감 있는 힘으로 준비하는 것보다 낫다고 믿습니다. 제가 "어리석은 자라!"라고 탄식하며 설교를 마치고, 제 처참한 시도에 부끄러워하며 예배당을 나설 때, 제가 자신의 성과에 만족할 때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중 누가 이 감정을 느끼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 설교 때는 얼마나 큰 책임감을 느꼈는지 기억합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진지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나요? 그때는 찬송가 한 곡을 선택하거나 성경을 읽는 방식조차도 기도하면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무거운 불안감이 우리 마음에 깊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집에서 성경을 신중히 읽고, 그것을 사람에게 읽기 전에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습관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루 종일 바빴고, 저녁에 설교해야 하는데, 어쨌든 해내겠지."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비용 없이 드리는 것을 기쁘시게 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설교 자료를 여러 개 가지고 있고, 예배당에 가기 전에 그 중 하나를 골라서 아무런 준비 없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읽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빵을 제물의 빵상에 올리는 상태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소서. 아니, 이제는 더욱 성실하고 경외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자. 많은 이들이 첫 기도와 경계심, 그리고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되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형제여,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축복으로 당신은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되찾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전만큼 열정적일 수 있습니다. 저는 늙은 말들이 풀밭으로 내보내졌다가 다시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게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피곤한 말이 풀을 먹고 다시 복음의 전차에 매여 새롭게 된 힘으로 다시 달릴 수 있는 풀밭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예수님과 만났던 그 거룩한 장소들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아미나다브의 전차처럼 되었습니다. 주님, 당신의 이전 은혜들을 회복해 주소서. 그러면 우리는 재앙에서 깨어난 학개처럼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존 번연은 한 순례자가 자신의 스크롤을 잃고 길을 세 번이나 되돌아가야 했으며, 태양이 지기 전에 그는 그의 캠프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어제 저는 한 꿈이 어떤 사람의 회심을 이끌어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친구와 함께 동쪽의 한 도시로 가는 길이었고, 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문 위의 막대기들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내려오자 그는 몸을 굽혔지만, 너무 빨리 내려와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도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느껴 절박하게 시도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리본이 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고, 그것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막대기들이 계속 내려오자, 그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이 벗어나는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땅에 몸을 눌러 자갈을 긁으며 그 밑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그가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가자, 빛나는 자가 그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빛나는 옷으로 입혀 주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이 화려한 옷차림, 빛나는 이론,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망, 수사학적 장식들을 모두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 우리가 이 문을 통과하고, 하나님께서 사랑받는 자의 수용의 옷으로 우리를 입혀 주신다면, 이 투쟁이 우리에게 어떤 비용을 치렀든 간에 충분히 보상받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그렇게 나쁜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후회합니다. 제 주님께서는 자주 그리고 엄하게 저를 다스리셔야 합니다. 저는 날카롭게 다듬어지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는 펜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날카로운 칼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 주님께서 제게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글을 쓰신다면, 저는 고통과 십자가를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들 사이에서 많은 고통의 원인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역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릇 속의 물이 너무 적어서 도달할 수 없었고, 그래서 돌을 하나씩 집어 그릇에 던져 물을 높이 올려 마실 수 있게 했습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템즈 강 일화

설교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템즈 강에서 침몰할까 두려워했을 때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결국 못 속에서 죽겠느냐고 말하며 두려움을 이겨 냅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청중에게 적용하여, 거친 물결을 이겨낸 사람이 마을 연못에서 침몰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우리가 받은 고통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이며, 이전의 타격으로 인해 이미 훌륭한 전투 준비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잃지 말고 사역의 싸움에 계속 서라고 격려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54–54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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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템즈 강에서 침몰할까 두려워했을 때, 그는 말했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결국 못 속에서 죽을 것인가요?" "아니요." 그래서 형제 여러분께 말하건대, 거친 물결을 이겨낸 당신이, 마을 연못에서 침몰할 것인가요? 우리가 받은 고통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전의 타격으로 인해 우리는 훌륭한 전투 준비 상태에 있습니다.

얼굴이 상한 로마 권투 선수

설교자는 로마의 한 유명한 권투 선수를 소개합니다. 그는 얼굴이 심하게 상해져서 코와 눈이 망가질 정도였지만, 이미 이보다 더 못생겨질 수는 없다는 이유로 항상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을 그와 같은 상황에 비유합니다. 사람들이 이미 말한 것보다 더 나쁜 말을 할 수는 없으며, 자신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거짓말로 둘러싸였고 자신이 한 말도 모두 왜곡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있던 매력은 사라졌고 이제 아무도 큰 해를 끼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두려움 없이 다시 싸울 수 있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권면합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3

설교 내 55–55문단 · 예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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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한 유명한 권투 선수는 얼굴이 심하게 상해져서 코와 눈이 망가졌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항상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이보다 더 못 생겼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와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말한 것보다 더 나쁜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거짓말로 둘러싸였고, 제가 한 말은 모두 왜곡되었습니다. 제가 가졌던 매력은 사라졌고, 이제는 아무도 저에게 큰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