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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31 / 32쪽 · 한 쪽 20개

마틴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설교자는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을 주면서 마틴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정의한 말을 소개합니다. 루터의 정의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사랑 안에서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만물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붙들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가 '구원받았으니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천국에서 만나자'는 방종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열심과 애정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자유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거룩한 삶을 기쁘게 살아갈 힘이며,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선택하게 하는 힘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자유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향과 목적, 믿음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벌받을까 두려워서 하거나 상을 받으려고 수고하는 믿음과 다르다고 덧붙입니다. 결국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며, 청중이 이 믿음의 방향을 붙들도록 권면합니다.

유재준 · 2026-10-18

설교 내 21–2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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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 이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을 주면서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사랑 안에서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만물의 종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내가 이제 구원받았으니 내가 하고 싶은 욕망대로 살아가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시는 방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열심과 애정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자유는 성령, 즉 거룩한 영이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대로 거룩한 삶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힘,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선택할 수 있는 힘, 내 이웃과 내 몸을 내 이웃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거룩한 힘이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방향과 목적, 믿음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거 안 하면 벌받을까 봐 두려워서 아니면 이렇게 해야만 상받을 수 있으니까 하면서 수고하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줄 믿습니다.

소예배실에서 회개의 영을 경험한 설교자의 기억

설교자는 서울역 사랑나눔부와 사회복지법인 헤세드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기보다 정의로운 마음과 막연한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았다고 돌아봅니다. 사역 중 막막하고 가슴 아픈 일을 겪을 때마다 그는 불안과 두려움, 걱정에 사로잡혔고, "너무 억울합니다"라며 하나님께 왜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 묻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던 연약함 속에서, 관계가 틀어져 있는데도 회개가 되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고 나눕니다. 어느 날 그는 소예배실 제일 앞, 어두컴컴한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렸는데,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터져 나왔고, 그는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높아져 열정을 쏟았던 자신을 회개했습니다. 또 교회와 부서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셨고, 그는 너무 기뻤다고 전합니다. 그는 이 회개와 죄 사함의 은혜, 그리고 진리 안의 자유함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지금도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회개는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윤진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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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예. 반갑습니다. 예. 단임 목사님이 아니셔서 여러분들이 좀 마음이 어려우실 수 있을 텐데 저는 누군지 아시죠? 예. 서울역 사랑나눔부 섬기고 있는 윤진수 목사입니다. 어, 서사부라고 하죠. 서사부의 예배가 따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 설교를 하다가 이렇게 또 목사님께서 부르시고 또 하나님께서 세워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또 하나님께서 종에게 깨닫게 해 주신 말씀 그리고 그 은혜를 담백하게 좀 나누고 또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또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한번 인사할 때에 오늘 제목이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입니다. 그래서 오른쪽에 계신 분이 '내가 믿으면' 이렇게 인사하시고 반대쪽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렇게 화답하며 인사하겠습니다. 인사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 이제 한번 바꿔서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시작.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참 큰 상과 같은 그런 어려움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절벽과 같고 또 낭떨어지와 같고 참 막막하고 답답하고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일, 또 도저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고 해결이 되지 않는 그런 어려움들, 큰 고통이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마주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정말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님의 품에 부름을 받으셨다든지, 또는 배신이나 그런 인간관계에 있어서 큰 갈등을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도 있겠고, 이렇게 우리가 사회적으로, 또 학교에서, 또는 집에서, 또 교회에서 여러 가지의 일들로 막막하고 그런 상실감을 느끼면서 큰 고통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만날 때 우리는 낙심이 되고, 또 절망하게 되고, 포기하고 싶고, 마음이 자꾸만 내로운 마인드가 되어서 좁아지고 좁아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또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싫어지겠죠. 기도도 안 되겠죠. 그럴 때는 회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혹시 그런 일들을 지금 겪고 계시는 분들이 계실까요? 아니면 최근에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지나오신 분들이 계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에는 그런 여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시라 간략하게 핵심만 스토리를 말씀드리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자주 들리셨던 그런 관계 속에 있었던 남매들이죠. 마르다가 제일 큰 언니가 되겠고, 그다음에 마리아, 그리고 남동생 나사로가 됩니다. 그렇게 학자들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누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봅니다. 어쨌든 이렇게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있었지만, 갑자기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 살려 주십시오. 빨리 오십시오.'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사랑하시지만, 성경에 보시면 사랑한다고 되어 있어요. 사랑하시지만 미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완전히 사망에 이르렀을 때,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마을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도착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당도했을 때 마르다의 첫 마디가 뭐였죠?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 오라고 할 때 빨리 오셨어야죠. 왜 내가 제일 힘들 때, 내가 제일 큰 어려움을 마주할 때, 왜 그때 예수님 도와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내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압니다. 부활의 때, 마지막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살려 주실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살려 주셨을 텐데, 지금 죽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거잖아요. 그렇게 낙심하면서 절망하면서 예수님께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다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고, 마리아, 마르다는 그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뭐라도 도와주실지 않을까?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집에 남자, 남자 가장이 죽었기 때문에 경제력의 상실로 굉장히 두려워서 뭐라도 좀 도와주십시오 하면서 예수님께 요청을 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를 못했습니다. 깊이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신앙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만 그렇습니까? 마리아도 마찬가지죠.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 대해서는 다시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곳에 있던 모든 우는 자들, 예루살렘에서 무난 왔던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는지요. 거기 쓰여졌던 단어가 '에분히 여기시고', 과거에 우리 개혁 성경은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이 여기서 개혁 계정에는 '비통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서' 이게 어떤 표현이냐면요. 예수님께서 강한 분노를 드러내신 겁니다. 호흡을 치면서 부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떨고 있는 단어를 요한은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전히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고 짓눌려 있고, 부활과 생명의 주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진리의 자유함 가운데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 여전히 마귀의 속박 가운데 죽음의 권세에 놓여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비통함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에다크리센' 예수님께서 흐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돌을 옮겨 놓아라. 무덤 입구에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아라.' 근데 말하다가 뭐라고 하죠? '죽은지가 벌써 나흘이 되었습니다. 시체에서 냄새가 납니다.' 라면서 예수님을 일축해 버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가 인사 나누었던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이 한 말, 진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고,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갇혀서 두려움에 떨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그 장례 현장 가운데 있던 사람들만 이렇게 믿음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제 삶과 신앙생활을 뒤돌아보면은 마르다, 마리아처럼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제가 서울역 사랑 나눔부를 섬기면서, 또 사회복진 법인 헤세드를 섬겨오면서, 지금은 이제 사무국장이 아니죠. 그렇게 섬겨오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고 그렇게 의지하기보다, 정의로운 저의 마음 또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막연한 열정과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설 때가 많지 않았나? 그렇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역하면서 정말 막막한 어려운 일을 경험하거든요.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걱정하면 하는 제 모습을 얼마 전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데 왜 이런 어려운 시련과 이런 일들이 나에게 닥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의롭게 교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 너무너무 억울합니다. 왜 저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내 옹절한 그런 의로움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고, 그런 연약함 속에 놓여졌던 제 모습을 한번 돌아봅니다. 그러다가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너무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움, 하나님과의 그 관계에서의 뭔가 이상하게 틀어져 있는데 하나님께 회개가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다 죄 죄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언제 해 보셨습니까? 회개를 해보셨겠죠. 회개는 정말 제 힘으로,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소예배실에 어느 날 가서 제일 앞에 어두컴컴한데 무릎 꿇고 딱 이렇게 엎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더라고요. 그 순간 제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이 단어가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하나님, 하나님보다 제가 더 의롭게 더 높아져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했던 것 하나님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다른 사람, 우리 교회 안에 저희 부서 안에 일어난 모든 일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입니다. 하나님,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죄 잘못입니다. 죄 죄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가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에 자유함을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기뻤습니다. 회개와 죄사함의 은혜, 그로 인해서 주어지는 그 진리 가운데의 자유함,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큰 은혜였고 지금도 그 은혜의 힘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또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좀 집중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을 맞이하고 염려, 근심, 걱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 믿음의 바닥이 드러났을 때, 시험에 빠져서 혼돈 속에 있을 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것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찾고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영화 속 폭군 앞에서 열광하는 백성의 찬양

설교자는 영화 속 폭군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 폭군은 자기를 섬기는 하녀든 백성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칼로 찔러 죽입니다. 그가 나오는 전투장에서 수많은 백성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열광하며 찬양합니다. 설교자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두 가지 보기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왕을 너무 좋아해서 즐거워 찬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두려워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당연히 후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도 이런 예배를 원하실지 묻습니다. 주일 찬양 인도 중 손을 들자고 했는데 손도 입도 열지 않는 성도를 떠올리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우는 식으로 억지 예배를 얻을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공포와 의무로 드린 예배로는 영화롭지 않으시고, 백성이 그분으로 인해 너무 즐거워서 찬양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즐거움이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며, 즐거움에는 강제가 들어설 수 없다고 적용합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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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그리고 이게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다. 그렇다면 그 설계 목적인 그 찬송과 예배라는 것도 반드시 주를 즐거워함으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 '윤하'를 보신 분 계십니까? 거기에 하콘 앤 가물에 엄청난 폭군이요, 독재자가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섬기는 하녀든 백성이든 마음에 안 들면 그대로 칼로 그냥 축 찔러 죽입니다. 그 폭군 독재자가 거기서 어떤 인간 가문과 콜로세움 같은 전투장에서 전투를 납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그 전투장에서 회중석에서 학권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열광하며 응원하며 찬양합니다. 이들은 왜 그럴까요? 1번. 핫콘의 우리 왕을 내가 너무 좋아해서, 난 그를 즐거워서 찾는 찬양이다. 2번. 이렇게 안 하면 죄다 죽으니까, 공포다. 몇 번이죠? 당연히 2번이겠죠. 하나님께서 이런 예배와 찬양을 원하실까요? 주일 찬양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실 뒤보다 앞이 편합니다. 제가 주일 찬양 인도하는데 손 들자고 했어요. 근데 어떤 성도께서 손을 안 들고 입도 끝 안 해요.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태웁니다. 그렇게 매주 딱 두 분씩만 주님이 데려가 주시면 그 다음 주에 부흥 일어날 겁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이거 원하실까요? 주님이 우리 주님 원하시기만 한다면, 이 세상 모든 만민이 그분께 두 손 들고 찬송토록 만들 능력 되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우리 주 여호와는 이런 공포와 의무에 의해 드린 예배로는 영화롭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실로 그분으로 인하여 너무 즐거워서 찬양 드릴 때 영화롭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묵은지 김치찜을 아는 사람만 즐거워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묵은지 김치찜을 예로 듭니다. 잘 익은 묵은지를 돼지 수육과 함께 뚝배기에 넣고 오랜 시간 끓여 김치가 황금빛으로 투명해지면, 김이 나는 흰밥 위에 큼지막하게 찢어 올립니다. 그 위에 부드럽게 익은 수육을 얹어 한 입 베어 무는 순간을 묘사하며, 입에 침이 고이는 사람이 바로 김치찜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맛을 직접 알아야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시편 기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호세아 6장 6절을 함께 읽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이고 그분을 기뻐하지 않는 제사는 의미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한때 뜨거웠던 신앙 열정이 식는 이유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직접 맛보아 아는 경험이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적용합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맛본 이들의 즐거움은 찬양과 경배와 헌신으로 터져 나온다고 말합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8–8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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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생 최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묵은지 김치찜입니다. 전라도 주신 어 김치찜 맛있게 먹는 법이 있습니다. 깊고 거룩하게 무릎 익은 묵은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돼지 수육과 함께 두꺼운 뚝배기에 넣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팔팔 끓립니다. 언제까지? 그 김치가 황금빛으로 변하고 투명해질 때까지요. 그리고 김이 모랑모랑 나는 그 흰살밥 한 수를 탁 뜹니다. 그리고 그 황금 김치를 큼지막하게 찢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불을 대듯이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야들야들하게 익은 돼지 수육을 딱 들었을 때 파르 떨어야 됩니다. 이 파르를 떠는 돼지 수육을 그 김치찜 위에 올려서 입을 크게 벌리고 한 입을 확 무는 순간, 지금 입에 침이 고이신 이분들, 이분들이 바로 김치찜을 아는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묵은지 김치찜을 실제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아멘. 왜요? 알아야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래야 그분이 영화롭는 까닭입니다. 호사야 6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게 아니라, 네가 만약 나 여호와 아는 것이 먼저이지 않는다면 그 제사 의미 없다. 왜? 네가 나를 알지 못하면 나를 기뻐할 수 없고, 기쁨이 없는 제사는 내게 의미 없다. 왜 한 때 뜨거웠던 우리 신앙 열정이 곧잘 식어가는 걸까요? 선교에 대한 긴급성이 좀 떨어져서, 세상가 좀 많이 힘들어서가 아닐지 모릅니다. 사실상 그 사랑스러운 하나님을 직접 맛보아 아는 경험이 점점 사라지면, 자연히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에게 뜨거웠던 예배도 헌신도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이들의 즐거움은 반드시 찬양과 경배와 헌신으로 터져 나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의 글인데요. 제가 한번 읽어 드리죠. 사람들은 어떤 것을 참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면 자연히 그것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녀는 참 사랑스럽지 않니? 그거 참 영광스럽지 않았니? 묵은지 김치찜 참 맛있지 않니? 찬양은 이건 제가 한 겁니다. 찬양은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기쁨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합니다.

C.S. 루이스가 말한 아름다움과 찬양

설교자는 20세기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의 글을 소개합니다. 설교자가 직접 읽어 준 내용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참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면 자연히 그것을 찬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그 영광이 대단했다고, 묵은지 김치찜이 참 맛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근거로 찬양이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쁨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적용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기뻐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연인들이 서로에게 아름답다고 계속 말하는 장면을 예로 듭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 기쁨이 완성되며, 표현되기 전의 기쁨은 불완전하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를 알고 맛보는 즐거움이 없다면 찬양도 삶의 예배도 불가능하다고 결론짓습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8–8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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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생 최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묵은지 김치찜입니다. 전라도 주신 어 김치찜 맛있게 먹는 법이 있습니다. 깊고 거룩하게 무릎 익은 묵은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돼지 수육과 함께 두꺼운 뚝배기에 넣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팔팔 끓립니다. 언제까지? 그 김치가 황금빛으로 변하고 투명해질 때까지요. 그리고 김이 모랑모랑 나는 그 흰살밥 한 수를 탁 뜹니다. 그리고 그 황금 김치를 큼지막하게 찢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불을 대듯이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야들야들하게 익은 돼지 수육을 딱 들었을 때 파르 떨어야 됩니다. 이 파르를 떠는 돼지 수육을 그 김치찜 위에 올려서 입을 크게 벌리고 한 입을 확 무는 순간, 지금 입에 침이 고이신 이분들, 이분들이 바로 김치찜을 아는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묵은지 김치찜을 실제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아멘. 왜요? 알아야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래야 그분이 영화롭는 까닭입니다. 호사야 6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게 아니라, 네가 만약 나 여호와 아는 것이 먼저이지 않는다면 그 제사 의미 없다. 왜? 네가 나를 알지 못하면 나를 기뻐할 수 없고, 기쁨이 없는 제사는 내게 의미 없다. 왜 한 때 뜨거웠던 우리 신앙 열정이 곧잘 식어가는 걸까요? 선교에 대한 긴급성이 좀 떨어져서, 세상가 좀 많이 힘들어서가 아닐지 모릅니다. 사실상 그 사랑스러운 하나님을 직접 맛보아 아는 경험이 점점 사라지면, 자연히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에게 뜨거웠던 예배도 헌신도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이들의 즐거움은 반드시 찬양과 경배와 헌신으로 터져 나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의 글인데요. 제가 한번 읽어 드리죠. 사람들은 어떤 것을 참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면 자연히 그것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녀는 참 사랑스럽지 않니? 그거 참 영광스럽지 않았니? 묵은지 김치찜 참 맛있지 않니? 찬양은 이건 제가 한 겁니다. 찬양은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기쁨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합니다.

페라리와 직장을 포기하는 사랑의 방정식

설교자는 자신이 만든 '사랑과 포기의 방정식'을 소개합니다. 한 사람이 나를 얻기 위해 페라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의 값은 페라리를 넘어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나를 얻기 위해 구글 직장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 사랑의 값은 구글보다 못하다는 예를 듭니다. 설교자는 이 등식이 사랑의 가치를 가늠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택하기 위해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는가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옥합 여인의 이야기에 적용합니다. 여인은 거의 전재산에 가까운 옥합을 예수님께 모두 포기했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그녀에게 예수님이 그만큼 소중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포기는 사랑의 값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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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왜 이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삶의 예배에 이런 헌신의 허의를 요청하실까요?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랑에 대한 값을 먹길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실 사랑의 값을 먹긴다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만, 제가 만들어 본 방정식, 사랑과 포기의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어느 정도 사랑의 값이란 걸 먹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나란 사람을 얻기 위해 기꺼이 페라리를 포기할 수 있다면, 나를 향한 그 사람의 사랑이 값이지인데, 페라리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구글 회사 직원이고, 나를 얻기 위해 구글이라는 직장을 포기할 수 없다면, 안타깝게도 나를 포기합니다. 그러면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값은 구글보다 못 합니다. 어찌 보면 이렇게 사랑의 값을 정하는 것이 꽤 우순 일이겠지만, 사랑의 가치를 가늠하는 데는 이 등식이 매우 유용합니다. 내가 이걸 택하기 위해 얼만큼 포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그걸 향한 내 사랑의 값이요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포기란 사랑의 값을 보여줄 수 있는 법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배우 공유와 설교자의 아내

설교자는 아내가 겪은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아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다리다 문이 열렸을 때 배우 공유가 걸어 나왔습니다. 아내는 놀라서 '어머, 세상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숨이 멎는 듯했고, 자기도 모르게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감탄과 이끌림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는 '어머, 세상에'라는 감탄이 경배이고, 그 이끌림이 헌신이라고 적용합니다. 참된 예배는 보상이나 위로를 기대하며 억지로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와 사도들이 변한 이유도 이 목격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즐거움으로, 그분만을 향하여, 이끌리듯 무언가를 허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33–33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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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사야서를 보면 사자들이 주님을 향하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치며 경배가 터져 나옵니다. 이유는 의지적으로 행한 게 아니라, 너무 아름다워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거룩’이란 ‘카도’라는 단어는 온 우주에서 무한히 탁월하고 아름답고 지고한 최고의 상태를 뜻하여서, 동시에 그 거룩을 본 자들의 감탄과 최고의 찬사가 됩니다. 언젠가 제 아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다리다가 문이 열렸는데, 배우 공유가 걸어나오더랍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막고 ‘어머, 세상에’라고는 안 했고, ‘어머, 세상에’라고 하며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참고로 제 앞에서 숨을 잘 쉽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이끌리듯 공유를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답니다. 여러분, ‘어머, 세상에’가 경배입니다. 그리고 그 이끌림이 헌신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하나님을 보는 기쁨

설교자는 미국이 낳은 대표적 신학자로 불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줍니다. 그 글의 요지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더 고상한 어떤 것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 자체가 구속받은 목적이고 구속의 정점이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피조물이 보고 누리고 즐거워하도록 모든 것을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혀 자신을 완전히 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을 옥합 여인의 행동에 적용합니다.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에 이끌려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헌신의 출발점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준희 · 2026-10-18

설교 내 35–35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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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나온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죠. ‘하나님을 보는 것은 더 고상한 어떤 것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우리가 구속받은 목적이고 우리 구속의 정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피조물이 보고 알고 누리고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지으셨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달콤함에 매료되어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예. 이 여인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그토록 아름다우심에 이끌려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기초만 쌓고 멈춘 망대 공사 현장

설교자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 망대를 세우던 모습을 먼저 소개합니다. 그런데 자금이 떨어지거나 재료가 부족해 기초만 쌓아 두고 공사가 중단되면, 그 모습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지금 교회 곁에서 지어지고 있는 교육관 이야기를 꺼냅니다. 교육관은 우여곡절 끝에 완공을 앞두고 있는데, 공사 전에 얼마나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 보고 준비했기에 차질 없이 올라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 건물이 완공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 하고 시작했다'며 비웃었을 것이고, 그 순간이 얼마나 아찔했겠느냐고 묻습니다. 설교자는 여기서 핵심을 짚습니다. 시작할 때는 다들 응원해 주지만, 완성되지 않으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제자의 길에 적용합니다. 은혜에 감격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믿기 시작했다가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에 기초만 쌓아 둔다면,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남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고, 처음부터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러야 한다'고 정직하게 말씀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가 단순한 건축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의 끝까지 가는 자세에 대한 말씀이라고 풀어 설명합니다. 시작은 쉬워도 끝을 맺으려면 계산과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신앙의 출발점에서 미리 값을 계산하고 준비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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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

만 명의 왕과 2만 명의 왕의 전쟁 비유

설교자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또 하나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두 배인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 본다는 장면입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승산이 없다면 싸우는 대신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패배해서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편이 낫다는 뜻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의 핵심을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앞선 망대 비유와 공통된 메시지, 즉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고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가르침으로 연결합니다. 적용으로 설교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제자의 길에서 요구되는 값을 미리 알고 나서야 정직하게 걸음을 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감정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주님이 요구하시는 대가를 분명히 보고 결단하라는 권면입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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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

10억 원 투자에 빗댄 기회 비용 계산

설교자는 청중에게 10억 원이 주어져 어딘가에 투자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기회 비용과 승산을 따지고, 이 투자가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나은지 꼼꼼히 계산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우리가 그렇게 계산하면서도, 영원한 생명이 걸린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같은 계산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돈 앞에서는 정직하게 따지면서 신앙의 값 앞에서는 계산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질문을 통해 비용 계산에는 예외가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투자에 쏟는 신중함을 주님을 향한 헌신에도 똑같이 가져오라는 적용입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들며 청중이 스스로 자신의 계산 방식을 돌아보도록 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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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

죄수의 십자가 행진

설교자는 당시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직접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철저한 죽음의 행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그런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철학적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을 각오한 걸음임을 보여 주고, 성도 역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따르겠다는 태도를 경계하는 메시지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이 말씀을 쉽게 흘려듣지 않도록 당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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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설교자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여겨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을 언급합니다. 설교자는 그 원인이 두려움이었다고 설명하며,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 실제로 두려운 길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처럼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조차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도 죽음을 각오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말로만 따르는 신앙이 아니라 실제 결단이 필요한 신앙임을 적용합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정죄의 대상이라기보다, 성도가 자신의 두려움과 자아를 직면해야 한다는 거울로 제시됩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자신의 두려움과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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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

결혼 서약과 영적 간음의 비유

설교자는 결혼이 한 남자와 한 여자만 바라보겠다는 약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결혼한 뒤에도 이전의 연인들과 만남을 이어 간다면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고 탐욕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주님을 향해 이런 모습으로 살 때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십자가의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어서, 두 주인을 모두 놓치기 싫어 계산을 회피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연인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랑에 빠진 뒤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신앙에 적용합니다. 강렬한 끌림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지만, 그 이후에 성도는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두 주인을 섬기려는 태도를 분명히 경계합니다.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사람이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신앙의 응답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1–2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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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어쩌면 성경 말씀 중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부담과 도전을 안겨 주는 본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시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라고 기록합니다. 6장 19절에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낳게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이 나에게 줄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또 누가복음 9장 16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여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는 기적 앞에 그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른 것을 보시고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26절과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물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숨이 턱 막히는 말씀입니다. 짧은 두 절에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수많은 무리에게 폭탄 선언과도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각 부서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저희 부서로 오세요. 다음 주에 사역 방남회 때도 저희 부서로 오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어느 부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근데 우리 하는 거 별로 없어요. 그냥 오면 다 돼요라는 말에 지금까지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 부서에 오시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집안일보다 자녀 일보다 여기의 우선 순위를 더욱 두셔야 합니다. 여기 최우선 순위를 두실 거 아니라면 오지 마십시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갈 때가 여기밖에 없나? 에이 나 안 가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데 집을 해야 할 혹독한 대가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냥 철학적인 은유나 가벼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랑 친숙했던 관계의 단절, 신앙생활, 내가 믿어왔던 그 유대교회 전통에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불이익, 배척당하던 때입니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매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는 철저한 죽음의 행진을 의미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야 함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는 그 말씀은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충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정말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자기 가족을 돌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징후가 아니라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법에서 상대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족이나 내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압도적으로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내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제자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이처럼 무게를 줄인다고 해도 오늘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왜 이 비용 계산을 외면하려고 할까요? 첫 번째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28절과 31절까지 망대를 세운 사람, 전쟁에 나가는 왕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여 능히 일을 성취하기까지 준비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원지기가 밭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초만 덩그러니 쌓아 놓고 자금이 떨어져 재료가 부족해서 중단된 공사 현장만큼 동네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바로 옆에 이제 교육관이 완성되어 가죠. 너무나 감사하게 우여곡절 끝에 예쁘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왕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비용이 들지 미리 따져보고 준비하여 차질이 없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공이 되어 가지만, 만약에 그냥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렇게 놔둔다면 주변 사람들이 "비용 계산도 못한 하면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완공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시작할 땐 다들 응원해 줍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아니하면 그 시작조차 조롱거리가 됩니다. 31절과 32절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만 명을 거느린 왕이 2만 명을 거느린 왕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승산이 있는지 따져봅니다. 승산이 없다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굴복하더라도 화친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앉아서 계산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고 가라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감격해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일단 믿기 시작했다가,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기초만 쌓아둔다면, 기초만 쌓아둔 채 완공되지 않은 망대처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쪽자리 제자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만큼의 값을 치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근데 그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이 결코 값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갑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고 주님의 치르신 그 대가를 통해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저는 소속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에 주인을 섬기며 누리던 죄의 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다른 여자 보지 않고 다른 남자 보지 않고 한 여자 한 남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이전의 연인들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죠. 탐욕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을 해야 할 대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다 놓치기 싫어서 애써 비용 계산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짧은 25절에서 33절에 이 짧은 본문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세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쩌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소유와 나의 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인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지파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그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용 계산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뒤로 밀어둡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정직하게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계산합니다. 기회 비용을 따지고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10억이 주어져서 그 10억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면 기회 비용과 그 승산을 가지고 따져 볼 것입니다.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지, 저것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비용 계산할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비용 계산을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비용 계산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쯤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제자가까지는 못하겠어라며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용 계산에 예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 인용

설교자는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인용합니다. 스토트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분을 따르는 데 얼마나 큰 대가가 필요한지 숙고하지 않은 채 따르기 시작한다고 한탄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명목상 기독교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진단이 시간이 흘렀어도 오늘의 여러분과 자신에게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도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안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의미가 새겨져 있으니, 성도와 제자를 따로 말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철저한 헌신이 사역자만의 몫이라고 타협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적용입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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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듯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사기치듯 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심과 동시에, 그분을 따를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끊임없이 무리들과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무리 안에는 훗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제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하자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합니다.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놓고, 주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을 가시자 움직여 주지 않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꾸 우리는 그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말씀이 무겁게만 들린다면, 왜 무겁게만 들릴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에 천국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함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지고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비용 계산이 끝났습니다.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는 거저받은 것이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사실 간음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인 무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따르는 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유익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용 계산 없이 제자인 척하는 자들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 자꾸 세상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세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억울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유익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재정이 아까워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고를 뛰어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밤에 한 번, 저를 향해 질문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임정태 목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 안수식을 보면서, 임정태 목사님은 안 보고 저의 10년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 수품 받은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목회 벌써 40년 하셨다고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조금 배운 쪼물레기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전에 목사 수품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비용 계산을 다 끝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비용 계산하는 저를 보면서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내가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비용 계산을 했더라면 선택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이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랑만 생각하고, 그냥 그것이 좋아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한테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니까, 너를 재미있게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솔직하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저희 아내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감사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고 사실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냥 주님의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담임 목사님 지금 40년 목회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만약이란 없지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질문은 안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볼 때,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복음을 증언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귀해서, 매일 강단에서 표현하시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을 써 주시는 거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뚜벅뚜벅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어떠하십니까? 신앙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그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세상에 작은 것 좀 반짝여 보이는 그런 것들의 눈이 멀고, 여전히 주님과 저울질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거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해 두라고. 너를 부인하고, 너보다 더 그 너의 삶의 참 주인 되신 주님을 따르라고. 네가 움켜지고 있는 그 소유를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붙잡고 따르기로 결단하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그 비용 계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 그 영광스러움 앞에, 아까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보고 따르실 수 있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내가 말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설교자는 결혼 전 아내에게 자신이 유머가 없는 사람이라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솔직히 말했다고 나눕니다. 그러면서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아내는 설교자에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감사로 받아들이며, 이 정도일 줄 몰랐기에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웃으며 전합니다. 이 일화를 통해 설교자는 우리도 주님을 잘 모른 채 따라왔지만, 그분의 사랑이 좋아서 따라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 없다고 적용합니다.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설교자는 이 고백이 결혼 생활에서 웃음을 주는 말인 동시에, 신앙의 여정에서도 되새길 만한 고백이라고 덧붙입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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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듯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사기치듯 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심과 동시에, 그분을 따를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끊임없이 무리들과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무리 안에는 훗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제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하자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합니다.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놓고, 주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을 가시자 움직여 주지 않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꾸 우리는 그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말씀이 무겁게만 들린다면, 왜 무겁게만 들릴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에 천국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함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지고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비용 계산이 끝났습니다.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는 거저받은 것이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사실 간음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인 무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따르는 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유익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용 계산 없이 제자인 척하는 자들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 자꾸 세상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세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억울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유익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재정이 아까워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고를 뛰어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밤에 한 번, 저를 향해 질문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임정태 목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 안수식을 보면서, 임정태 목사님은 안 보고 저의 10년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 수품 받은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목회 벌써 40년 하셨다고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조금 배운 쪼물레기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전에 목사 수품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비용 계산을 다 끝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비용 계산하는 저를 보면서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내가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비용 계산을 했더라면 선택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이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랑만 생각하고, 그냥 그것이 좋아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한테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니까, 너를 재미있게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솔직하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저희 아내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감사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고 사실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냥 주님의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담임 목사님 지금 40년 목회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만약이란 없지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질문은 안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볼 때,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복음을 증언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귀해서, 매일 강단에서 표현하시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을 써 주시는 거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뚜벅뚜벅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어떠하십니까? 신앙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그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세상에 작은 것 좀 반짝여 보이는 그런 것들의 눈이 멀고, 여전히 주님과 저울질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거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해 두라고. 너를 부인하고, 너보다 더 그 너의 삶의 참 주인 되신 주님을 따르라고. 네가 움켜지고 있는 그 소유를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붙잡고 따르기로 결단하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그 비용 계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 그 영광스러움 앞에, 아까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보고 따르실 수 있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정태 목사의 목사 안수식을 보며 떠올린 10년 전 자신

설교자는 지난주 월요일 임정태 목사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 자리에서 설교자는 안수받는 임 목사가 아니라 자신의 10년 전 모습을 떠올렸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10년 전 안수를 받을 때 이미 비용 계산을 끝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비용을 계산하는 자신을 보며 절망스러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그래서 오히려 감사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는 대가를 알지 못한 채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런 자신의 고백을 통해 신앙의 길이 계산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주님의 사랑 앞에 날마다 다시 결단해야 하는 길임을 나눕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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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듯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사기치듯 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심과 동시에, 그분을 따를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끊임없이 무리들과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무리 안에는 훗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제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하자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합니다.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놓고, 주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을 가시자 움직여 주지 않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꾸 우리는 그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말씀이 무겁게만 들린다면, 왜 무겁게만 들릴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에 천국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함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지고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비용 계산이 끝났습니다.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는 거저받은 것이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사실 간음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인 무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따르는 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유익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용 계산 없이 제자인 척하는 자들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 자꾸 세상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세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억울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유익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재정이 아까워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고를 뛰어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밤에 한 번, 저를 향해 질문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임정태 목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 안수식을 보면서, 임정태 목사님은 안 보고 저의 10년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 수품 받은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목회 벌써 40년 하셨다고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조금 배운 쪼물레기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전에 목사 수품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비용 계산을 다 끝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비용 계산하는 저를 보면서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내가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비용 계산을 했더라면 선택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이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랑만 생각하고, 그냥 그것이 좋아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한테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니까, 너를 재미있게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솔직하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저희 아내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감사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고 사실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냥 주님의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담임 목사님 지금 40년 목회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만약이란 없지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질문은 안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볼 때,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복음을 증언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귀해서, 매일 강단에서 표현하시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을 써 주시는 거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뚜벅뚜벅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어떠하십니까? 신앙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그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세상에 작은 것 좀 반짝여 보이는 그런 것들의 눈이 멀고, 여전히 주님과 저울질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거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해 두라고. 너를 부인하고, 너보다 더 그 너의 삶의 참 주인 되신 주님을 따르라고. 네가 움켜지고 있는 그 소유를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붙잡고 따르기로 결단하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그 비용 계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 그 영광스러움 앞에, 아까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보고 따르실 수 있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비유

설교자는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의 천국 비유를 인용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는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고 말씀합니다. 설교자는 두 사람이 값의 크기를 알았기 때문에 전부를 내어놓을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비용 계산이 끝났고, 가치를 알아보았기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구원에 적용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거저 받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으므로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맹목적인 무리가 아니라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신다고 말합니다. 또한 비용 계산을 철저히 하지 않는 사람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 얻는 유익과 치러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 보라고 권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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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듯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사기치듯 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심과 동시에, 그분을 따를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끊임없이 무리들과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무리 안에는 훗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제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하자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합니다.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놓고, 주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을 가시자 움직여 주지 않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꾸 우리는 그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말씀이 무겁게만 들린다면, 왜 무겁게만 들릴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에 천국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함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지고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비용 계산이 끝났습니다.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는 거저받은 것이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사실 간음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인 무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따르는 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유익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용 계산 없이 제자인 척하는 자들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 자꾸 세상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세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억울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유익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재정이 아까워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고를 뛰어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밤에 한 번, 저를 향해 질문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임정태 목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 안수식을 보면서, 임정태 목사님은 안 보고 저의 10년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 수품 받은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목회 벌써 40년 하셨다고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조금 배운 쪼물레기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전에 목사 수품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비용 계산을 다 끝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비용 계산하는 저를 보면서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내가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비용 계산을 했더라면 선택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이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랑만 생각하고, 그냥 그것이 좋아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한테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니까, 너를 재미있게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솔직하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저희 아내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감사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고 사실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냥 주님의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담임 목사님 지금 40년 목회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만약이란 없지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질문은 안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볼 때,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복음을 증언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귀해서, 매일 강단에서 표현하시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을 써 주시는 거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뚜벅뚜벅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어떠하십니까? 신앙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그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세상에 작은 것 좀 반짝여 보이는 그런 것들의 눈이 멀고, 여전히 주님과 저울질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거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해 두라고. 너를 부인하고, 너보다 더 그 너의 삶의 참 주인 되신 주님을 따르라고. 네가 움켜지고 있는 그 소유를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붙잡고 따르기로 결단하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그 비용 계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 그 영광스러움 앞에, 아까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보고 따르실 수 있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한 제자들

설교자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제자들은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했습니다. 설교자는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들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으로 설명합니다. 제자들은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 놓고, 주님이 그와 다른 길을 가시자 그 길을 가로막았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이 오늘 여러분과 자신의 모습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는 태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신앙을 고집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라고 적용합니다.

이용휘 · 2026-10-1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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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모두 그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인이 된 기독교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현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소위 명목상 기독교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뼈 아픈 진단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어맞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따로, 제자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저한 헌신은 목회자나 선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자들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사역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너무나 쉽게 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예수님 알아요. 그분의 생각을 들어보니 좋은 말 같아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분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한다는 말이 결혼 서약이라는 그 의미가 너무나 가벼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끌림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영적 생명력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생명력이 주어진 이후에, 마치 커플이 사랑에 빠진 후에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혼을 결심하고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의지를 다한 선택과 결정이듯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뜻과 의지를 다해 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사기치듯 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심과 동시에, 그분을 따를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끊임없이 무리들과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무리 안에는 훗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제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고 하자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항변합니다. 스승의 참혹한 미래가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그려놓고, 주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을 가시자 움직여 주지 않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꾸 우리는 그 기준을 낮추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말씀이 무겁게만 들린다면, 왜 무겁게만 들릴까요?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에 천국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아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함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지고 그 밭을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비용 계산이 끝났습니다.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는 거저받은 것이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셨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사실 간음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인 무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따르는 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유익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유혹이나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신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용 계산 없이 제자인 척하는 자들은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 자꾸 세상을 향해 뒤돌아보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세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억울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유익입니다. 그럼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재정이 아까워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고를 뛰어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밤에 한 번, 저를 향해 질문해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임정태 목사님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 안수식을 보면서, 임정태 목사님은 안 보고 저의 10년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 수품 받은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목회 벌써 40년 하셨다고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조금 배운 쪼물레기입니다. 그런데 그 10년 전에 목사 수품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비용 계산을 다 끝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비용 계산하는 저를 보면서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선택했을까? 내가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비용 계산을 했더라면 선택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근데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이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그 사랑만 생각하고, 그냥 그것이 좋아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한테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유머가 없는 사람이니까, 너를 재미있게 웃겨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솔직하죠.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저희 아내가 저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감사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깐,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잘 모르고 사실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냥 주님의 그 사랑이 좋아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용 계산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세상과 겸하여 섬기며, 양다리를 걸치며 주님을 적당히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담임 목사님 지금 40년 목회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만약이란 없지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질문은 안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볼 때,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복음을 증언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귀해서, 매일 강단에서 표현하시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을 써 주시는 거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뚜벅뚜벅 걸어가실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어떠하십니까? 신앙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그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세상에 작은 것 좀 반짝여 보이는 그런 것들의 눈이 멀고, 여전히 주님과 저울질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거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해 두라고. 너를 부인하고, 너보다 더 그 너의 삶의 참 주인 되신 주님을 따르라고. 네가 움켜지고 있는 그 소유를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 주님을 붙잡고 따르기로 결단하라고, 여러분과 저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그 비용 계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 그 영광스러움 앞에, 아까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보고 따르실 수 있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에 빗댄 말뿐인 기도

설교자는 한국 사람들이 대화를 마무리할 때 습관처럼 '밥 한번 먹자'고 인사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본문을 풀어 갑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대화를 끝낼 때 건네는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서로의 삶과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 공동체에서 이 말은 늘 마무리 인사처럼 오갑니다. 설교자는 야고보서 2장 15절과 16절을 읽으며,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 앞에서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 건네고 손에 있는 빵과 옷은 내어 주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 인사는 축복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궁핍한 이웃을 외면하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자신에게도 질문이 떠올랐다고 고백합니다. 정말 기도하겠다고 말한 뒤에 기도하고 있는지, 나아가 그 형편에 꼭 필요한 것을 최선으로 돕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공동체를 위한 간구임을 짚고,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는 고린도서 8장 9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기도에서 멈추지 않고 기꺼이 나누는 실천의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박진우 · 2026-10-18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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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성경의 순서에 따라서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을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매일 새벽을 깨워서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 나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매일의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 분주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믿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를 나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아닙니까?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다는 그 역사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며, 그 믿음이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이 믿음에 더하여 한 가지 사실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고백이, 이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우리의 믿음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가? 야고보는 십자가를 믿는 믿음 자체가 부족하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믿음의 고백이 진짜라면, 그 믿음의 고백은 살아서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14절에서 26절의 말씀은 짧은 단락입니다만, 이 단락 안에서 야고보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절에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절도 볼까요?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6절도요.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다라고 야고보서에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이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몸이 숨을 쉬듯이, 살아 있는 믿음은 살아 숨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믿음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이 믿음의 숨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우리의 믿음의 숨은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인가? 이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살펴보고 우리의 삶의 자리로 함께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믿음은 말뿐인 믿음입니다. 우리 15절의 말씀을 함께 볼까요? 15절의 말씀을 보니까요. 이러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형제와 자매가 등장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입을 옷이 없습니다. 또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이것을 채울 수 없는 변치 않은 형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이 형편이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는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말씀에서는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여서 이렇게 행동을 합니다. 16절에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여기서 이 평안히 가라라는 말은 헤어질 때에 건네는 인사입니다. 구약의 샬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 표현이죠. 그런데 오늘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궁핍한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떠날 때에 샬롬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사실 축복보다는 모욕에 가깝습니다. 이어서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축복의 말이죠. 오늘 이 사람은 이 형편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배를 채우시기를 원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축복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축복입니까? 그런데 오늘 이 말뿐인 자는 정작 자신의 손에 있는 빵은, 자신의 손에 있는 옷은 이 사람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저 경건한 말로, 그럴듯한 말로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고 자신을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그저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나라의 한 표현이 떠올랐는데요. 밥 한번 먹자라는 표현입니다. 한국의 전형적인 인사죠. 우리가 이렇게 전화를 하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질쯤에 혹은 전화를 끊을 조금 어색하니까 그 대화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래요. 우리 밥 한번 먹읍시다. 나중에 밥 한번 먹읍시다. 이렇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항상 대화의 마무리쯤에는 서로의 기도 제목을 묻곤 하죠. 그리고 마무리에는 항상 우리가 어떻게 얘기합니까? 그래요.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이 제가 질문으로 떠오르더라고요. 정말로 나는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형편에 정말 필요한 것을 내가 최선으로 돕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과 겹치는 기도를 하나님께 고백을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그 기도를 나에게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니까요. 늘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향한 간구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향하여서 필요한 간구를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샬롬, 평안을 빌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의 평안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고린도서 8장 9절의 말씀, 우리 함께 다 같이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유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함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의 갈급함 그 갈망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을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은혜를 받은 것이 우리가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 아닙니까? 이 믿음이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제도 그렇고 많은 공동체와 지체를 만날 때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다면, 오늘 이 시간 이 자리 박차고 떠나기 전 그 영혼과 공동체를 위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심으로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우리의 삶을 기꺼이 주는 그 실천의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아는 것뿐인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할 텐데요. 이어서 18절의 말씀을 보면요. 이 18절의 말씀은 신약을 통틀어서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시작을 하는데요. 여기서 이 어떤 사람이 한 말이 어디까지를 나타내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인용 부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혁 계정에서 번역한 번역을 살려서 번역을 해 보았는데요.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번역 의역본을 가지고 왔는데요. 요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행함 없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이 있다. 너는 행함이 없으니 내 믿음을 보일 수 없지만 나는 행함이 있어서 내 믿음을 볼 수 있다. 요점은 이겁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믿음은 앞서 말했듯 삶으로 드러난다라는 것을 야고보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19절은 충격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절의 말씀 보면요.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의 고백은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이 날마다 고백했던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이 항상 고백했던 정통적인 신앙의 방식이었죠. 그런데 야고보서는 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는도다. 근데 여기서 말하는 잘하는도다는 정말로 칭찬의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겁니다. 잘한다. 야고보가 이렇게 어떻게 보면 빈정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귀신들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도 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믿고 몸을 던다. 여기서 던은 털이 곤두 정도로 몸설이 친다라는 뜻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과 그리스도인의 극명한 차이는 무엇일까요? 귀신은 하나님을 알기만 할 뿐, 하나님 앞에서 떨기만 할 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안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울 수도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자 하는 열망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교리를 알고 있고요. 성경의 말씀을 매일마다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식만이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이어진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